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79화 (79/350)

< 18화. 핏물에 빠져 익사하거라! >

2.

꿈★은 이루어졌다.

어렴풋하게 울려 퍼지는 소름끼치는 웃음소리, 내장이 꿈틀거리는 것 같은 핏빛 하늘, 그 위에 떠오른 검은 태양, 그 맥동하는 검은 태양이 흘리는 피의 탁류, 현실을 일그러트리며 나온 살육의 구조물들... 그래, 내가 봤던 수많은 장면들과 똑같았다. 분명, 끔찍한 일이지만-.

“아하하핳! 아핳! 아하하하핳! 와~! 내가 들은 소식이 진짜였네요?! 아아아~”

어째서인지 웃음이 나온다.

생리적으로 혐오감이 드는 공기와 환경, 기분이 나빠야 정상이겠건만 이상하게도 나쁘지가 않아. 오히려 설레는 놀이동산에 온 아이처럼 가슴이 설렌다. 왜 일까? ...음, 아마 르피너스가 내 심장에 선물해주고 간 것의 농간이겠지. 그래, 그럴 거다.

좋게 생각하도록 하자.

최소한 공포와 절망에 짓눌리는 것 보단 나으니까.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기분을 만끽하며 진정제가 섞인 전자담배를 한 모금 더 빨아들이고 있을 때, 내 옆에서 침묵을 지키던 마빡 아가씨가 굳은 표정으로 날 향해 입을 연다.

“...이렇게 될 걸 어디서 들은 거죠?”

“음, 그것도 제 ‘영업 비밀’이라서 밝히기가 좀 그러네요.”

“...”

“뉴스에 많이 뜨잖아요. 대기업의 중소기업 기술 가로채기. 저도 밥줄은 가지고 있어야죠. 히힛!”

미래를 보는 꿈에서 꿨다고 말하기엔 그렇지. 친절하게 웃으며 답변하자 아가씨는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순순히 포기했다. 그리곤 심상치 않게 변한 미르 교정을 내려다보며 심각한 얼굴로 중얼 거렸다.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여기서 벗어나야겠어요. 외곽으로...”

“도망치는 건, 불가능해요.”

중얼거리는 아가씨를 향해 난 진실을 말했다. 다시 아가씨의 시선이 날 향하는 가운데, 나는 나도 통제할 수 없는 ‘들뜬 어조’로 꿈에서 봤던 것들을 설명했다.

“미르 전역에 깔린 붉은 안개는 밖의 모든 간섭을 차단하는 동시에 인간의 인지력을 교란시켜요. 그래서 나가려고 해도 자기도 모르게 방향을 바꾸게 되죠. ‘들어오는 건 마음대로지만 나가는 건 아니란다.’ 상태가 된 달까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글쎄요? 그건, 저도 몰?루겠네요. 하지만, 찾다보면 방법이 있겠죠! 아하하하핳!”

미치겠네. 자꾸 웃음이 나온다. ‘기분이 좋아지는 약’을 빤 것처럼 기분이 너~무 좋다. 아, 긴장이 안 되더라도 이런 상태는 좀 곤란한데 말이야. 그런 내 모습에 우리 마빡 아가씨는-.

“아니, 이런 걸 알았으면 오지 말라고 해야 할 거 아니야!”

‘빼액!’ 소리를 지르며 폭발한다.

존댓말도 안 할 정도로 빡친 상태...인 것도 같은데, 왠지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억지로 과하게 반응하는 것 같기도? 어찌됐든 난 빨아들인 연기를 내뱉고 최대한 웃음을 억제하며 입을 열었다.

“문자로 말했잖아요? 당분간 미르에 오지 말거나, 아니면 전쟁 나갈 수준으로 준비를 단단히 해오라고. 전 경고했다고요? 아, 물론 근거가 없어서 부실하게 할 수 밖에 없었지만!”

“...”

“그리고 이건 이미 피할 수 없는... 운명에 가까워요. 기왕 이렇게 된 거 피할 수 없으니 즐겨야죠. 물론, 쉽진 않을 거예요. 저 피눈물로 타락한 대지에선 곧 살육에 미친 괴물들이 기어 나올 것이거든요. 그리고 이 공기에 돌아버리는 애들도 좀 나올 테고.”

“...”

“자, 한 번 같이 발버둥 쳐보자고요! 자, 드가자!”

주먹을 꽉 쥐고 웃으며 파이팅 했다. 이미 이렇게 조조가 된 거 어쩌겠니! 함께 힘내야지! 하지만, 그런 내 진심은 통하지 않았는지 마빡 아가씨는 양손으로 머리띠를 붙잡은 채 좌절한다.

“...좆같아, 시발.”

“아니, 그런 천박한 말을...”

“염병, 그럼 이 상황에서도 고상한 척 하고 있어야겠냐!”

빼액 소리를 내지른 후, 마빡 아가씨는 메고 있던 가방을 거칠게 바닥에 내동댕이친다. 그리곤, 오른손을 가방 안에 넣어 그 안에서 정육면체의 금속 덩어리를 꺼낸다.

한 면이 손바닥보다 커다란 금속 큐브

아주 정교해 보이는 기계식 물품처럼 보이는 그건 표면의 실금에서 푸른 섬광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

+3 마법 공학 전격 조작기(Hextech Lightning Controller)

마법과 DK그룹의 기술력을 결합해 만들어진 마법 도구, 내부엔 푸른용의 심장 조각으로 만든 마력핵이 있으며 그 마력핵을 중심으로 룬 문자를 형상화한 수만 가지 문자조합이 새겨진 금속 전선이 겹겹이 새겨져있다. 제대로 사용할 줄만 안다면 이 마법 도구는 사용자의 <전격 계열 마법>을 ‘더 강력하게’, 그리고 ‘더 통제하기 쉽게’ 만들어준다.

재료로 저주받은 물품이 사용됐기에 착용 시 쉽게 떼어낼 수 없지만 별 다른 피해는 없다.

마법 공학 전격 조작기

대미지 2, 명중 +0

기본 공격속도 1.1, 최소 공격 속도 0.5

저주받음(Curse), 전격 계열 마법에 한해 ‘마법 강화(Archmagi)’와 ‘주문 성공률 강화(Wizardry)’효과 발휘. 최대 MP +5, 지능 +3

====

오른손에 쥔 금속 큐브에 마력을 불어넣는 마빡 아가씨, 그와 함께 금속 큐브가 손바닥 안에서 떠올라 펼쳐지며 안쪽에 기하학적인 금속 장치들이 돌아가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중심의 푸른 보석이 전기를 흩뿌린다.

“으... 으그그그극! 으가가각!”

그 흘러나온 푸른 광채가 아가씨의 오른손을 타고 전신으로 번져나가고, 아가씨는 비명과도 같은 포효를 지른다. 혈관과 신경이 솟으며 푸른 마력광을 흩뿌리는 모습은 꼭 ‘감당할 수 없는 힘’을 받아들이느라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으음, 그 뭐시냐. 손가락을 튕겨서 우주의 반을 정화한 영웅이 완성된 건틀릿을 꼈을 때 같네.

그 히어로 영화 참 재미있었는데 말이지? 여기에선 있으려나? 끝나면 한 번 찾아봐야겠다. 만약 있다면 15년 뒤니까 내가 못 본 시리즈까지 나와 있겠지. 그렇게 내가 딴 생각을 할 사이, 마빡 아가씨는-.

“후우, 이제야 좀 살겠군요.”

전신에서 ‘빠직!’거리는 정전기를 튀기며 평소의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는다. 그런 그녀의 오른손엔 완전히 펼쳐져서 그 내부의 기계장치들이 천구처럼 느릿하게 공전하는 큐브가 둥둥 떠 있었다.

“...아니, 왜 또 갑자기 존댓말을 하십니까요?”

“뭐, 여유를 되찾은 거죠. 도저히 죽을 것 같지가 않달까...?”

“거참, 말투가 씹덕스럽네요. 그냥 아까처럼 쌍욕하는 게 더 어울려요.”

내 소감에 마빡 아가씨의 마빡에서 굵은 핏줄이 하나 치솟지만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순 없잖아? 어깰 으쓱이며 난 말을 이어나갔다.

“어찌됐든 어떻게 하실 건가요? 저는 여길 돌아다닐 건데.”

“...돌아다녀요? 아니, 곧 괴물이 튀어나온다고 하지 않았나요?”

“위험하더라도 어떻게 이곳에서 탈출할지 알아봐야하니까요.”

“...”

“마냥 누군가가 해결해 줄 거라고 믿으면서 기다리는 것은 제 성미에 안 맞아서.”

솔직히 말하면 난 이렇게 직접 나대는 사람은 아니다. 적당히 묻어가는 무색무취한 인간이지. 하지만, 이번엔 ‘왠지’ 그러기 싫었어. 아니, 애초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재앙이 일어날 것을 아는 공간에 이렇게 들어간다는 것이 이상한 거야.

어찌됐든 잔뜩 준비해뒀다.

생도복 안주머니에 가득 든 앰플들은 지난 금,토,일 동안에 만든 + 빼돌린 도핑과 회복 물약이고, 이것 외에도 내가 본 꿈에 대해서도 인터넷을 뒤지며 조사했다. 이렇게 열심히 준비했는데, 그냥 짱박혀 있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 위험하더라도 움직여야지. 그런 내 말에-.

-끼이익.

“나도 같이 간다.”

옥상 문이 열며 들어온 서예린이 답한다. 아주 차분한 표정, 남궁진아와 시선이 마주치자 살짝 고갤 까닥인 그녀는 천천히 날 향해 다가온 후 말을 이어나간다.

“올라오다가 들었다. 함께 움직임.”

“흠, 저야 좋긴 한데... 예린씨 입장에선 그냥 한 곳에 짱 박혀서 구조를 기다리는 게 더 생존확률이 높지 않을까요? 완전무장 했으니 밀려드는 괴물도 쉽게 처리가 가능하실 텐데?”

내 솔직한 감상이다. 내 안의 기묘한 열기가 가져다주는 행동감이 아니었다면 당연히 내가 취했을 행동이고. 아니, 애초에 여기 오지 않았겠지. 하지만, 서예린은 그런 내 대답에 미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성적으로 그 말이 맞다. 근데...”

“근데?”

“넌, 죽을 것 같지가 않음.”

“아니, 제가 소설 속 주인공도 아닌데 어떻게 죽음에서 자유롭겠나요?! 저도 죽어요! 그냥 예린양이 제게 칼질 한 번만 해도 시체라구요!”

“흠? 니가?”

뭔 엄살을 부리냐는 듯이 쳐다보는 서예린, 옆의 마빡 아가씨도 동의한다는 듯이 살짝 고갤 주억인다. 허, 거 참~! 억울하거든요? 왜 날 그렇게 보는지 모르겠네.

“저도 함께하죠. 나름 준비가 됐으니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한술 더 떠서 자기도 함께하겠다고 말하는 마빡 아가씨. ...그래, 좋게 생각하자. 둘 다 짐덩이는 아니니까. 아니, 솔직히 이 두 분에 비하면 내가 짐덩이지. 게다가 미르 내 최고 미녀들과 함께하는... 아니, 그건 마음에 둬선 안 돼. 고런 건... 불가능에 가까우니까ㅜ.

어찌됐든 함께 움직이신다고 하니까-.

“좋아요. 그럼 함께 움직이죠. 일단, 저희의 첫 목표는... 저기랍니다.”

난 검은 태양이 떠있는 곳, 하늘에서 피의 격류가 쏟아지는 ‘유별나게 거대한’ 남미식 석제 피미라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3.

검은 태양이 떠있는 방향은 미르의 서쪽이었다.

중학교 나이대인 저학년들이 있는 곳, 가보진 않았더라도 어딘지는 알기에 길을 따라가면 되겠지만 ‘기괴하게 변한 지형’ 때문에 가는 건 쉽지 않았다. 곳곳에 벽이나 석제 피라미드가 있었고, 무엇보다-.

-끼아아아아악!

“사... 살려줘! 학생!”

====

‘유혈의 신’의 축복에 의해 일어난 고대의 하급 전사, 치부만 가리는 가죽 쪼가리를 입은 헐벗은 몸이지만 그 몸에 각인된 전투 능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다시 일어선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직 살육뿐.

처절한 비명소리를 내는 죽음의 호각소리를 불어대며 이들은 당신을 죽이고자 한다!

====

지면을 적시고 있는 질척한 피에서 기어 나온 인간의 형상들

두 눈은 새카맣게 ‘뻥’ 뚫려있었고 피눈물을 질질 흘리고 있는 그것들은 흑요석 창과 나무칼을 쥐고 소름끼치는 비명소리를 내는 호루라기를 불어대며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민간인들의 뒤를 쫒고 있었다. 말 그대로 악귀(惡鬼) 같은 모습이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응시하며-.

“흥!”

마빡 아가씨는 코웃음을 치곤 큐브를 들고 있지 않은 왼손으로 목덜미를 덮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다. 여유롭다 못해 오만해 보이는 몸짓. 몇 분 전, 우리끼리 처음 저놈들 봤을 때 ‘꺄아아악!’하며 경기를 일으켰던 것과는 180도 다른 반응이다.

하지만, 그 뒤에 펼쳐진 일은 충분히 오만해도 될 정도였다.

-콰지지지직!

들어 올린 오른손의 큐브에서 튀어나온 주먹만 한 전격 구체가 절묘하게 도망치는 민간인들 사이를 뚫고 뒤편의 바닥에 작렬한다. 그와 함께 반경 6m가량의 지면이 정전기가 튀어 오르고, 그 위에 있던 악귀들이 순간적으로 뻣뻣하게 굳어버리며 달리던 관성으로 쓰러지는 가운데-.

-스칵!

도망치는 민간인들의 머리 위로 도약해서 지나친 서예린이 쓰러진 악귀들을 향해 돌진한다. 악귀들이 일어서기 전에 각 손에 쥔 단검과 장검을 휘두르며 모가지를 따내는 서예린, 그렇게 내가 나설 틈도 없이 순식간에 7마리의 악귀가 시체가 되어 나뒹굴었다.

“허억! 허억! 감사! 감사합니다..!”

그 광경에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멈춰 서서 헐떡이는 민간인들, 그에 마빡 아가씨가 도도하게 고갤 끄덕인다. 그리고, 서예린은 쓰러진 악귀의 시체들 사이에서 그 등짝에 창이 꽂힌 중년 여성의 목덜미를 질질 끌고 나온다.

“혜... 혜정 언니!”

그 모습에 전력으로 도망치던 이들 중 몇몇 이들이 다급하게 나와서 부축하는 가운데, 마빡 아가씨는 그 쓰러진 사람에게 다가가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그 손에서 튀는 전기 스파크, 하지만 제세동에도 심장은 뛰지 않는다. 그에 우리 아가씨가 고갤 저으며 일어선다.

“죽었어요.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요.”

“혜정 언니... 우리 혜정 언니 어떡해! 흐아아앙.”

시신을 감싸며 울부짖는 이들을 향해 난 차분하게 살 방도를 안내했다.

“일단, 시신을 수습하시고 도보 속도로 5분 간 걸어가시면 변화가 별로 없는 ‘진리관’이 나올 거예요. 그쪽으로 들어가서 생존자들이랑 함께 농성하시면 될 거랍니다.”

“...네. 네.”

“그럼 저희는 바빠서 이만... 가시죠. 아가씨.”

살짝 고갤 까닥인 후, 씁쓸한 표정으로 있는 마빡 아가씨의 왼손을 낚아채며 움직이려고 하는데 숨에 차서 헐떡이는 민간인 일행 중 아저씨 하나가 다급하게 소리친다.

“어... 함께! 함께 가주시면 안 됩니까? 거기까지 가는 것도 안전하다고 할 수 없고...”

절박함이 담긴 요구, 한 마디로 본인들만으로는 불안하니 지켜달라는 뜻이었다. 서예린은 시큰둥하지만 마빡 아가씨는 또 미묘하게 갈등하는 것 같기에 난 재빨리 선수 쳐서 입을 열었다.

“일단, 저희가 지나온 길은 한 번 싹 쓸었으니 당분간은 괜찮을 거예요.”

“하... 하지만, 모르는 일 아닙니까? 저것들! 이 질척질척한 바닥에서 기어 나온다고요!”

공포에 질린 얼굴로 바닥을 내려다보는 아저씨, 검은 태양이 핏물을 쏟아내기 시작하면서 건물을 제외한 미르 전역의 지면은 이렇게 질척한 핏물로 도배되어 있었다. 그 발언에 다른 생존자들도 다시 공포에 질리는 가운데, 남자가 절박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간다.

“그리고 어차피 생도분들도 구출이 올 때까지 살아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같이 있는 게 더 안전할 겁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