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80화 (80/350)

< 18화. 핏물에 빠져 익사하거라! >

나름 납득이 가는 요구다. 하지만 동시에, 여기까지 오면서 몇 번이나 들었던 요구기도 하지. 난 단호하게 고갤 저었다.

“저희 말고도 건물을 지키고 있는 이들이 있으니 걱정 마시길. 그리고, 잠시 입을 다물고 귀를 기울여보세요.”

내 말에 살짝 악에 받쳐서 대꾸하려던 아저씨가 입을 다물자, 곳곳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가 들린다.

미르에는 그저 생도와 교직원들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훈련 교관, 식당 아주머니, 청소부, 수시로 찾아오는 기업의 연구원과 엔지니어, 정부 관계자,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여 상주하는 군인, 생도들의 상태를 점검하고 연구하는 의사와 연구원들 등등...

수없이 많은 관계자들까지 더하면 약 2~3만 명이 미르에 있다.

그리고, 생도들을 포함한 대부분은 지금 마주친 괴물에게서 스스로를 지킬만한 힘이 없지. 정신없이 악귀들에게서 도망칠 때는 몰랐지만 그제서야 다른 곳에서도 들려오는 그 끔찍한 소음에 사람들의 얼굴이 굳는 가운데 난 담담히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 여러분보다 훨씬 위험한 사람들이 많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가야하니까 이해해주세...”

“아니! 뭔 개소리여! 지금 앞에 있는 사람부터 구해야지!”

그렇게 나름 정중하게 양해를 부탁하고 있는데, 청소부 옷차림의 늙수그레한 영감이 벌게진 두 눈을 부라리며 내 말을 끊는다. 그리곤 시신을 손으로 가리키며 내 옆의 마빡 아가씨를 향해 소리를 내지른다.

“그리고 저 사람! 사실, 그쪽 아가씨가 죽인 거 아냐?! 봐봐! 탄내가 올라오잖여.”

살짝 탄내와 연기가 모락모락 나오고 있는 시신, 전기가 작렬하기 전에 흑요석 창이 등짝을 꿰뚫었지만 어쩌면 마빡 아가씨가 날린 전격이 막타를 때린 것일 수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걸 순순히 인정할 순 없는 노릇이지.

살짝 당혹스러운 듯이 보이는 마빡 아가씨를 대신해 앞에 나서며 난 재빨리 변호에 나섰다.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그게 최선이었어요.”

“최선?! 사람을 죽여 놓고 최선??”

“이미, 창에 꿰뚫렸어요. 몇 초라도 시간을 끌면 죽을게 뻔한 상황이었고, 뚫고 구하러가기엔 악귀들 바로 앞에 도망치는 여러분들이 있었죠. 당장, 사람을 찢어발기려는 것을 막기 위해선 전격을 날리는 게 합리적인 선택이었답니다.”

이성적으로 내 말이 맞다. 그래,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무조건 이런 대응을 했을 거야. 하지만, 이전에 마주쳤던 사람들과 비슷하게 이들에겐 이성은 통하지 않는 것 같다.

“아니! 사람을 죽였으면 책임을 져야지!”

비논리적이고 억지스러운 땡깡, 하지만 생존이 걸린 상황인 만큼 저렇게 나오는 것도 이해한다. 그래, ‘이해’는 해. 들어줄 생각은 없지만. 그렇게 나와 서예린이 눈 하나 깜짝 안하자, 그 늙은이는 타겟을 바꿔 마빡 아가씨를 향해 삿대질을 해댄다.

“너희들! 내가 얼굴 기억해 뒀다! 이번 일 끝나고 보자! 그리고 아가씨, 양심이 있다면···”

바락바락 소리치는 늙은이, 그리고 말은 안하지만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시선들. 바깥이라면 주변 사람 시선 때문이라도 곱게 나갔겠지만... 짜증난다. 여기에서까지 그래야 하나?

“저기, 어르신. 좀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요.”

그 순간, 난 늙은이의 말을 끊으며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룬어를 형성하자 독살스런 기운이 모여 내 검지 위에 손가락 크기의 흑자색 가시 <독침>을 만든다. 그 흉기를 손가락 위에 띄운 채, 난 늙은이를 향해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자꾸 그쪽이 칼자루를 쥔 것처럼 우릴 협박하시는데, 칼자루를 쥔 건 그쪽이 아니라 우리입니다.”

“뭐?! 일반인을 무시하는 발언인거 알제? 그리고 마력 각성자가 사람을···”

“근데, 지금 이 상황에선 사람 몇 죽여도 티가 안 나잖아요?”

문득, 르피너스의 장난감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송파구가 지하에 처박히고 주인공이 거기에서 발버둥 칠 때, 주인공은 몸이 바뀌기 전의 원수를 보고 부글부글 끓다가 결국 화염병의 유리병으로 그놈의 대가리를 깨버렸다. 이어서 그대로 불질러버렸고. 그 때, 주인공은 ‘도덕과 법이라는 메마른 사막에 시달리던 여행자가 맞이한 오아시스’라고 생각했었지.

...왠지, 그 말을 이해할 것 같아.

<독침>이 떠오른 검지를 늙은이를 향해 가리켰다. 마법이 흩뿌리는 흉흉한 기색에 주위 사람들이 흠칫하며 노인 곁에서 물러서고, 늙은이는 기겁하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 모습을 보며 난 담담히 사실을 말했다.

“그쪽, 어차피 우리가 안 구해줬으면 죽었을 거잖아요? 안 그래요?”

“···”

“그냥, 짜증나는 거 다 죽여 버릴까요?”

“죽여도 됨. 시간 낭비.”

옆에서 들려오는 무섭도록 냉정한 서예린의 대꾸, 그와 함께 그녀는 양 손에 쥔 칼 두 자루-장검과 단검을 빙글빙글 돌린다. 흔들림 없는 무정(無情)한 눈빛, 이전에 <과거시>로 유령의 반지를 보면서 봤던 서예린의 과거-엘프들을 죽일 때와 비슷한 눈이다.

“...”

그 눈빛에 섞인 진심을 읽은 듯, 생존자들이 흥분이 가라앉은 얼굴로 입을 다무는 가운데 난 늙은이에게 다가갔다. 내가 다가가자 뒤로 주춤 거리다가 토막 난 악귀의 시신을 밟고 피의 진창에 엉덩방아를 찧는 늙은이, 그런 그의 눈앞에 <독침> 마법을 가져다 댔다.

그와 함께 지린내가... 흠.

“살려줬으면 그냥 감사합니다하고 곱게 가는 게 좋을 거예요.”

장유유서를 말아먹은 대답이지만 내가 의도한 바가 아니다. 쿵쾅거리는 심장, 동시에 살의(殺意)가 솟구친다. 아마, 르피너스가 남긴 조각의 농간일 거다. 어차피, 죽여도 죄를 묻기 힘들다는 생각에 더욱 더 날뛰는 것 같네. 그런 파편의 협박에 늙은이는-.

“아. 알겠...”

순순히 굴복한다.

아쉽다. 너무나도 아쉽다. 욕했으면 그냥 죽여 버렸을 텐데... 그냥 죽여 버리면 안 되나? 어차피 여기선 사람 죽여도 모를 테니 리스크도 없잖아? 르피너스의 장난감 주인공을 생각해보면 굉장히 짜릿할 것 같은데? 머릿속에서 천상의 팡파르가 울려 퍼지는 것만 같다고 묘사를...

아니,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거지?

곧바로 마법을 해제한 뒤, 다른 손에 쥔 전자 담배를 물고 크게 빨아들였다. 진정제 성분이 섞인 약물이 폐를 통해 뇌로 들어가자 좀 충동이 가라앉는다.

아, 엿 같네.

르피너스가 남긴 파편의 장난임에 틀림없다. 자꾸 사람을 죽이는 걸 종용하다니...? 문제는 사람을 죽여도 후환이 없다는 사실을 파악한 순간부터 내가 계속 혹한다는 거고.

그 사악한 유혹을 억누르며 난 전자 담배를 뻐끔거렸다.

“네, 그럼 꺼지세요. 아, 참고로 나중에 말 나오면 재미없을 거예요. 저도 태생이 북한 놈이라서 좀 막나가지만···”

살짝 어벙벙한 우리 마빡 아가씨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 든든한 등 뒤에 살짝 숨으며 난 빙긋 웃었다.

“이 고상한 아가씨는 사실 더 무섭거든요. 저는 ‘물리적인 폭력’을 쓰지만 이 아가씨는 ‘사회적인 폭력’을 써요. 무려, 재벌가 직계랍니다? 그래서 당신들은 물론이고 당신들의 가족들까지 사회적으로 뭉개는 건 일도 아니죠.”

“···”

“그냥, 목숨 살려준 걸로 감사하세요. 더 안 도와줬다고 같잖은 앙심 품지 마시고. 다들 얼굴 기억해뒀어요. 알죠? 처신, 잘하라고요?”

<메모장>에 이 장면을 사진 찍듯이 저장해뒀다. 진짜 언플하면 마빡 아가씨에게 보내야지. 내가 이만 가보라는 손짓을 하자 민간인들은 슬금슬금 도망친다. 그 늙수그레한 청소부도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도망치는 이들을 뒤따르고. 그래, 좋다. 근데, 말이지...

“흠, 그렇게 사람 죽였다고 비난했으면서 시체는... 아니, 시신은 버리고 가네요? 참나.”

그렇게 시신을 붙잡고 비난하던 사람들이 이젠 짐짝 버리듯 내던지고 도망쳤다. 거참, 속보이는구만. 그렇게 내가 방치된 시신을 보며 혀를 쯧쯧 차는 동안, 살짝 굳어있었던 마빡 아가씨는 나와 서예린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다들 되게 냉정하네요.”

“북한에서 살다보면 이렇게 된답니다~”

“미궁에선 과단함 필요.”

내 대답, 그리고 바로 이어진 서예린의 대답. 난 돌연변이의 부작용 때문이지만 북한이라고 변명해야지. 실제로 꽤나 막장이 맞기도 하고. 그런 우리 둘의 대답에 마빡 아가씨는 한숨을 푹 내뱉고는 날 바라보며 입을 연다.

“그나저나 이거 맞는 판단인지 모르겠어요.”

“네? 맞는 판단이요?”

“왜 이쪽으로 가는 건가요? 그냥, 저쪽에 검은 태양이 떠서?”

마빡 아가씨의 질문, 그에 서예린도 고갤 끄덕인다. 그러고 보니 왜 내가 그쪽으로 방향을 정했는지에 대해 설명을 하지 않았네? 호주머니에서 컴뱃 나이프를 꺼낸 뒤, 난 쓰러진 악귀들의 시체 옆에 다가가 그 앞에 쪼그리고 앉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 것도 있지만 좀 더 구체적인 이유가 있어요. 다들 ‘세계 분화설’에 대해 알고 있죠?”

“알죠. 같이 교양으로 들었던 건데.”

“?”

마빡 아가씨와는 달리 전혀 모르겠다는 눈치인 서예린, 그에 마빡 아가씨는 가볍게 어깰 으쓱이며 설명한다.

“원래, 이 세상은 마법과 이종족이 존재했지만 어느 순간 미궁으로 분리되었고 그 흔적이 설화로 남아있다는 가설이랍니다. 미궁에서 거주하는 인간의 DNA가 밖의 현생 인류와 똑같은 것도, 밖에 있는 문명의 흔적이 미궁 안에도 100% 똑같은 게 있다는 것도, 밖의 설화 속 존재와 비슷한 미궁의 생명체가 있다는 것도 이것으로 설명되죠.”

“맞아요. 그리고 지금 이곳의 모습은 어디와 닳았을까요?”

“음, 남미?”

“딩동댕~”

정답을 맞춘 마빡 아가씨를 향해 작게 박수를 쳐준 뒤, 난 쓰러진 악귀의 시체에 있는 값져 보이는 장신구-금 귀걸이와 코걸이등을 칼로 뜯어냈다. 그리곤, 그 반짝이는 황금을 들어 올리며 씨익 웃었다.

“제가 찾아본 바에 따르면 지금 이곳에 나타난 모든 것들이 ‘아즈텍 제국’의 것과 너무나도 비슷해요. 저것들도 아즈텍 제국의 전사들 외형이고. 이런 금 장신구도 아즈텍의 양식과 비슷하죠.”

금요일 밤부터 월요일 새벽까지, 그냥 물품 준비만 끝난 게 아니다. 내가 꿈속에서 봤던 이미지들의 유사성에 대해서도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조사했고, 그 결과 아즈텍 제국과 굉장히 흡사하단 것도 알게 됐다. 그런 내 모습에-.

“힘줘서 뜯지 마셈! 모양 뭉개짐! 섬세한 모양이 살아있어야 더 비싸게 팜!”

“알았어요. 알겠으니까 그만해요.”

미간을 찌푸리며 뾰족하게 소리치는 서예린, 이전의 무심한 눈빛은 어딜 갔는지 보이질 않고 탐심이 그득하다.

...나온 악귀들 중 일부가 순금 장신구를 착용하고 있단 걸 파악하곤 돈독이 올라서 저런다. 악귀를 죽일 때도 장신구 상하지 않게 하려는 것 보면 말 다했지. 참고로 내가 가방을 메고 있어서 수집하게 됐는데, 서예린-아가씨-나 이렇게 5:3:2 비율로 나누기로 했다. 거참, 욕심하곤.

그렇게 속으로 구시렁대고 있는데, 이어서 마빡 아가씨도 미간을 찌푸린다.

“...찾아본 바에 따르면? 이렇게 변하면서 스마트폰 인터넷도 끊겼으니 지금 찾은 것도 아닐 테고. 이 일이 벌어지기 전에 이 괴물들이 나올 것과 이런 환경이 될 거란 걸 당신은 알았다는 뜻이네요?”

“아, 거 대충 넘어가자고요. 아가씨.”

거,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것이지 이렇게 말의 맹점을 짚고 들어오다니... 일행 두 명이 쌍으로 더럽게 까다롭네. 살짝 투덜거리며 메고 있는 가방 주머니에 황금 조각을 집어넣은 후, 난 자리에서 일어서며 휴일 동안 조사했던 내용을 풀어놓았다.

“아즈텍, 그 실체가 밝혀질수록 백인 침략자들이 역으로 찬양 받는 ‘세계에서 가장 잔학했던 제국’. 사람을 그저 먹기 위해 가두고 길렀으며 매년 태어나는 남미 대륙의 신생아의 1/5을 죽여 댔던 미친 곳이랍니다. 그런 행위들 모두 종교적인 의례와 관계가 있긴 했지만 말이죠.”

그리고, 하늘에 걸린 검은 태양을 가리켰다.

“아즈텍 인은 태양이 움직이기 위해서는 매일매일 신선한 심장을 바쳐야한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진짜 태양은 그런 것 없이도 움직이지만 저건 어떨까요?”

“심장을 바쳐야 움직인다?”

“분위기를 보면 90%는 그렇겠죠?”

꿈속에서 보았던, 지금은 단편적으로 밖에 기억나지 않는 이미지들. 그것들 중에선 심장을 뽑아 바치는 것이 있었다. 그 행위가 저 태양에 힘을 주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중요한 건 아즈텍의 인간들이 생각했던 것과 비슷하단 거다.

그런 내 대답에 마빡 아가씨는 납득했다는 듯이 고갤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심장을 바치는... 이런 일을 벌인 놈을 조져야 한다는 거네요?”

“네, 그리고 그놈은 심장이 떠오른 곳 주위에 있을 확률이 높죠.”

“근데, 우리가 가능한 건가요?”

“글쎄요? 솔직히, 좀 힘들 듯? 예린양이라면 몰라도 우린 좀 그렇죠.”

냉정하게 말해서 이런 짓을 벌이는 인간을 학생인 우리들이 막는 건... 라노벨 망상이지. 물론, 서예린은 탈 생도급이니 가능성이 있겠지만 나나 마빡 아가씨 같은 좀 급 떨어지는 쩌리들이 합류하기엔 쵸큼 ㅎㅎ; 이 악귀들, 마법 저항력이 쎄서 더 힘들다.

“그래도, 알아낸다면 그 사실을 다른 이들에게 알릴 수 있겠죠. 우리 말고 강한 이들이 많으니까요! 교관들도 많이 있고... 아, 그러고 보니 오늘 등교하면서 본 미궁 출신들이 다들 만만치 않게 무장했던데요?”

“음. 아빠가 지인들에겐 다 말함. 그래서 그런 거. 좀 힘들었음. 무장하고 밖으로 나오는 거.”

내 말에 살짝 우쭐하며 대답하는 서예린, 어쩐지 등교하며 마주치는 미궁 출신 강사들이 죄다 특이한 복장에 표정이 굳어있더라니... 확실히, 서 강 아저씨에게 도움을 요청한 건 정말 잘한 일인 것 같다.

“오호, 그래서 무장이 좀 튼실한 거구나. 근데, 생각보다 쉽게 믿었네요? 별 다른 증거도 없었는데.”

그런 내 대꾸에 서예린은 오히려 피식 웃는다.

“신을 걸고 하는 말은, 그만한 무게가 있다. 설령, 그 신을 믿건 안 믿건. 지상의 신들과는 다르다.”

“아앗, 그런 말 밖에서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요.”

“걱정마셈. 나도 암.”

태연하게 대꾸하는 서예린, 그에 마빡 아가씨는 뭔지 모르겠지만 생각에 잠긴 표정이다.

“자, 그럼 다시 움직이죠.”

어찌됐든 우리는 다시 검은 태양을 향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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