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핏물 속에서 헤엄치는 방법 >
“그래, 확실히 거긴 좀 안전하겠네. 근데, 거기까지 어떻게 괴물들을 뚫고 가려고?”
“지하로 가면 돼요.”
“지하를 통해 간다고? 200명이나 데리고? 솔직히, 내가 보기엔 밖보다 거기가 더 위험해 보이는데?”
곧바로 부정적인 피드백을 보내는 아가씨, 그 답답한 모습에 난 한숨을 내뱉었다.
“하, 마빡... 아니, 진아씨.”
어이쿠, 너무 답답해서 실수로 속마음이 나왔네.
내 말 실수에 탁자에 축 드러누워 있던 오혜영이 마빡 아가씨의 맨들 거리는 이마를 힐끗 보곤 살짝 ‘푸흣!’하며 웃고 지아라도 ‘큼! 큼!’ 필사적으로 웃음참기를 한다. 두 반귀쟁이들도 순간 어깨가 움찔거렸어.
그렇게 다들 즐거운 가운데, 혼자만 화낸 기색을 참는 마빡 아가씨를 향해 난 조용히 말을 이어나갔다.
“크흠! 진아씨의 능력을 봤어요. 맙소사, 자동차를 원격으로 조종하던데요?”
“전자 장비니까요.”
내가 꾼 꿈에선 보지 못한 마빡아가씨의 활약이었다. 아무리 내가 꿈을 자세하게 기억하지 못해도 저렇게 인상 깊은 건 기억할 텐데, 기억에 없는 걸 보면 아가씨는 제대로 실력 발휘를 못하고 죽었던 것 같다.
어쨌든 화제를 돌리기 위한 내 호들갑에 마빡 아가씨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하지만 은근슬쩍 머릴 쓰다듬는 척하며 훤히 드러낸 마빡을 가리면서 싸늘하게 대꾸한다.
“전 전격 마법을 정밀한 컨트롤 위주로 익혔어요. 전자 장비에 써먹을 수 있도록. 뭐, 간단한 조작은 되더군요.”
“하긴, 태블릿PC도 혼자 개조해서 썼었죠. 그런 걸, 좀 설명해줬어야죠! 이런 멋진 능력을 가지고 있다니!”
“...”
“지하 주차장을 생각해보세요! 차량이 많이 있겠죠? 그리고 그건 전부 아가씨의 무기 아니겠어요?”
미르 지하 주차장은 언급했다시피 미르 전 영역을 아우르기에 무지무지 넓다. 멀쩡한 차량도 많이 있을 터! 아주 날뛸 수 있을 거다! 그냥 현실 GTA찍는 거지! 자동차로 괴물들을 뺑소니치는 상상을 하며 난 두 손을 비볐다.
그런 내 제안에 마빡 아가씨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갤 끄덕인다.
“뭐, 가능은 하겠군요. 하지만, 문제가 하나 더 있네요.”
“뭐죠?”
“지하로 향하는 터미널이 여기서 한 200m 정도 될 거예요. 근데, 저 2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어떻게 지하 입구까지 갈 건가요?”
마빡 아가씨의 합당한 의견에 난 잠시 턱을 긁적였다. 지하 터미널까지 가는 건... 확실히 힘들겠네. 괴물이 득실득실한 것만으로도 골치 아픈데, 도주하다가 실패한 자동차들이 장애물처럼 널렸다. 아무리 아가씨가 차량을 조종해 치운다고 해도 시간이 걸릴 테고, 그 사이에 괴물이 난입하면 싹 죽어나갈 거다.
그럼 어쩔 수 없네.
“글쎄요. 각자 알아서?”
2.
“...뭐라고요?”
“현실적으로 다 보호하면서 갈 순 없잖아요? 냉정하게 따져서 무리예요. 그러려고 할수록 피해만 더 커지겠죠. 아니, 솔직히 말하면 지금 우린 우리 목숨 구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요.”
뭔 소리를 하냐는 듯한 마빡 아가씨의 대꾸에 난 어깰 으쓱이며 대답했다. 꿈과 희망이 넘치는 디즈니 만화영화도 아니고 이 상황에서 모든 이들을 구할 수는 없다. 아니, 요즘 디즈니 만화도 그렇게 꽃밭은 아닐걸? 어쩔 수 없다. 살릴 사람만 살릴 수밖에.
내 말에 대꾸하지 못하는 마빡 아가씨를 향해 가볍게 헛기침을 한 차례 한 후, 난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일단, 필수적으로 살려야할 사람들부터 꼽아보자고요. 전 솔직히 진아씨와 예린씨, 그리고 우리 동아리 인원들만 구해도 만족해요.”
“...”
“아! 한 사람 더 있구나! 죄송죄송, 진아씨의 중요한 정보원을 빼먹었네요. 그 사람까지 추가하죠. 그러니 표정 풀어요! 진짜로 까먹음!”
생존자 무리들 중에선 월요일 아침 시간에 강의하는 인간-중국 스파이가 껴있다.
아가씨가 편입반인 것을 말하며 아는 척 하는 목소리가 있기에 뭔가 싶었는데, 올라가서보니 저 아지매더라고? 고생을 좀 한 듯, 추레한 몰골로 마빡 아가씨에게 ‘자기가 가르치는 생도다.’면서 필사적으로 아는 척을 하는 게 좀 웃겼지.
그나저나 누가 탐욕스런 재벌가 사람 아니랄까봐, 저 스파이를 빼먹었다고 바로 표정 굳는 거 보소! ...무서워서라도 저 인간은 살려둬야지.
하지만 그 외에는?
“그 외 사람들은 구하면 좋지만, 괜히 구하려고 하다가 우리가 위험해지는 건... 안 좋죠. 그러니까 적당히 포기해야죠. 일단, 제가 독구름을 한 번 더 터트릴게요. 그리고, 혜영양은 부상자니까 아가씨가 적당한 차량에 태워서 가는 것도...”
“그... 그래도 조금 그렇지 않나요?”
“네? 뭐가요? 제가 빼먹은 것이라도?”
내 말을 도중에 끊으며 살짝 당혹스럽다는 듯이 대꾸하는 마빡 아가씨, 나도 좀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니, 도대체 또 내가 뭘 빼먹은 거라고 저렇게 말하시지? 그런 내 모습에 마빡 아가씨는 살짝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아니, 너무 쉽게 사람을 포기하는 것 아닌가 해서. 각자 알아서라니... 조금 듣기가 그렇네.”
“어라? 설마, 사람 죽도록 내버려두는 게 찔려서 그런 건가요?”
아, 표정을 굳힌 게 그런 의미였어?
내가 사람을 너무 쉽게 포기한 것처럼 보였나보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전 땡깡 부리는 늙은이의 억지를 곧바로 거부하지 못했지? 우리 아가씨, 의외로 마음이 여리네. 사람 목숨 걸린 일엔 판단력이 흐려지시는 것 같다. 그래도 충신답게 이런 건 솔직히 말해드려야겠지!
결심을 끝낸 뒤, 난 단호히 고갤 저으며 입을 열었다.
“진아씨, 진아씨는 평소엔 냉철하다가도 ‘중요한 때’엔 감정적이고 무른 경향이 있어요.”
“...”
“아까 전에 구해준 사람들에게도 그랬죠? 그 사람들이 계속 보호해달라고 땡깡부리는 거 단호하게 거절 못해서 결국 제가 나섰죠. 지금 상황도 같답니다. 하기 싫더라도 누군가는 해야 해요. 비난 받기 싫으시면 제가 직접 작전을 짰다고...”
“잠깐! 잠깐잠깐! 기다려봐!”
나지막이 듣고 있던 지아라의 갑작스런 외침, 나를 포함한 아이들의 시선이 쏠리자 그녀는 크게 숨을 내뱉곤 입을 연다.
“지하 주차장으로 간다고 했지?”
“네, 바깥에서 가는 건 너무 위험해요. 말했다시피 시선이 너무 몰렸거든요. 솔직히, 지하도 딱히 안전한 것으로 보이진 않지만... 지금 밖보단 낫죠.”
“여기 건물 바로 아래에도 지하 주차장이 있잖아?”
바로 아래 바닥을 가리키는 지아라, 그에 난 <관찰자의 눈>으로 1층을 지나 지면 바닥을 뚫고 확인해 봤다. 음, 진짜다. 상점가의 3층짜리 작은 건물이라서 그런지 그 하중을 주차장 기둥으로만 떠받치고 있네.
“...그렇긴 하죠? 근데, 통로가 없을 뿐.”
“그럼 뚫고 가자!”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나는 물론이고 다른 애들까지 의아함이 떠오르는 가운데, 지아라는 옆 구석 소파에 올려놨던 장도리를 다시 들고 위로 치켜들었다.
“난 하프긴 하지만 드워프야. 그리고...”
두 눈을 감고 마법의 주문을 외우는 지아라, 동시에 내 눈은 망치를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룬어의 형상을 포착했다. 이어서 빈 텍스트 창이 떠오르고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며 <게임 시스템>이 마법을 파악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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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스웰의 은빛 곡괭이 (Maxwell's Silver Pickaxe)
레벨 1 부여술/대지
시전 소음 : 0
주문 소음 : 2
대미지 공식 : 1d(1+sp/10)
마법 지속 시간 : 10 + (1dsp)/2 + (1dsp)/2 sec. 최대 60초 제한.
최대 SP : 50
최소 소모 마력 : 1
효과 : 드워프들의 대지 마법은 암석을 매개체로 하는 것이 많았다. 그렇기에 수준이 낮은 대지 술사들은 마법을 쓰기 위해 적당한 크기의 돌멩이가 필수적으로 필요했다. 하지만, 항상 바닥에서 마법에 쓸 만한 적당한 크기의 돌멩이를 찾는 것은 꽤 힘든 일이었다.
종족의 어린 대지 술사들과 광부들을 위해 맥스웰은 암석을 쉽게 채취할 수 있는 마법을 고안해냈다.
이 마법에 걸린 둔기는 암석류를 매우 효과적으로 부술 수 있다. 가볍게 후려쳐도 웬만한 암석은 부서지며 익숙해진다면 한 번의 휘두름으로 주먹만 한 돌을 떼어낼 수 있다. 암석 혹은 석화(石化)가 이뤄지는 적을 이 마법이 걸린 무기로 공격한다면 통상의 3배 피해를 입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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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로운 은빛으로 빛나는 장도리
감았던 두 눈을 뜬 지아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 빛나는 망치를 들고 우리가 있는 구석 테이블 밖으로 향한다. 좀 흉흉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근처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엿들으려고 알짱대던 사람들이 움찔하며 피하는 가운데-
“으아아아아!”
-꽈릉! 꽈릉! 꽈릉!
그녀는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괴성을 내지르며 힘껏 양손으로 쥔 장도리로 바닥을 연이어 후려쳤다.
공구로 발파작업이라도 한 것처럼 작은 가게가 그 충격에 쩌렁쩌렁 울린다. 자욱하게 올라오는 콘크리트 먼지들, 연이은 굉음에 몇몇 사람들이 깜짝 놀라 작게 비명을 지르거나 혹은 귀를 막고 움츠러드는 가운데, 지아라는 크게 숨을 내뱉으며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보란 듯이 움푹 들어가서 결국 구멍이 뚫린 바닥을 망치로 가리킨다.
“드워프들의 <대지 마법>까지 어느 정도 익혔지! 석재는 존나 잘 부숴! 물론, 마력을 쓰는 거라서 많이 지치긴 하겠다만! 하, 시발. 존나 힘드네. 내 마법 망치를 가져왔으면 더 쉬웠는데 젠장...”
많이 힘든 듯, 도중에 헥헥거리며 왼손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는 지아라. 하지만, 그녀는 다시 당당하게 서서 날 뚫어져라 응시하며 말을 이어나간다.
“알고 있겠지만 여기 아래 지면은 죄다 콘크리트야. 내가 다 박살낼 수 있어.”
“흠...”
그 말에 다시 <관찰자의 눈>을 움직여 지하를 살펴봤다. 건물을 받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튼튼하게 지어진 지반, 기둥이 아닌 가장 얇은 곳을 판다고 가정했을 때 그 두께는...
“대충 2.5m정도 될 거예요. 가능하겠어요?”
“해야지.”
“그럼 뚫는데 얼마나 걸릴까요?”
“내 몸 정도가 빠져나갈 구멍을 뚫는다고 가정하면... 40.. 아니, 30분이면 돼.”
저 작은 장도리로 2.5m가량 되는 콘크리트 지반을 뚫고 30분 만에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통로를 뚫는다니... 대단하긴 하네. 하지만, 그것뿐이다. 냉정하게 따져서 안 좋다.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그 이유들을 난 하나씩 입 밖으로 내뱉었다.
“알고 있겠지만 건물은 철근이 들어가요. 여기 기반을 다질 때 철근도 들어갔겠죠. 철근 나오면 부술 수 있어요?”
“...”
“대충 보건데, 2.5m 정도를 파면 완전히 지칠 것 같네요. 아라양까지 탈진상태가 되겠네요? 근데, 지금 혜영양도 환자라서 전력이 안 되는 상황이거든요? 얼마 없는 전투원이 1명 더 무력화 되는 거네요?”
“...”
“뚫는 데까지 30분이라... 우리가 30분 동안 버틸 수 있을까요? 제가 펼쳐놓은 부패 구름과, 진아씨가 쌓아 놓은 불타는 차벽밖엔 괴물들이 득실득실하는데? 연기가 뭉클뭉클 나면서 다른 괴물들도 모여들고 있어요. 평범한 야만인이 아니라 진짜 괴물들이.”
“...”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그럼 사람들을 그냥 죽게 냅두냐!”
내 말을 도중에 끊으며 빼액 소릴 내지르는 지아라, 나는 물론이고 은연중에 이쪽을 주시하고 있던 사람들까지 그 박력에 잠깐이지만 아무런 반응을 하질 못했다. 아, 근데 이러면 사람들이 내가 죽게 내버려두려고 했단 걸 이젠 다 알겠네?
곤란한 상황이지만 왠지 즐거움에 웃음을 흘러나왔다.
“흠, 되게 감정적이시네요? 릴렉스! 저처럼 이성적으로 생각해야죠. 다 구하려고 발악하다가 다 같이 죽는 것보단, 냉정하게 희생이 따르더라도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해요.”
“그래, 인정할게! 내가 지금 좀 감정적이긴 해! 근데, 내가 보기엔... 너도 이성적이 아냐. 왜 그렇게 신나서 웃고 있어? 솔직히, 좀 불쾌하거든!?”
흥분한 듯, 다시 내 말을 따따따! 끊으면서 인신 공격성 비난을 날리는 지아라. 평소에도 말이 좀 막나간다고 느꼈는데 이번에도 그렇네... 뭐, 나쁘지 않다! 음흉하게 앞에선 ‘하하’ 거리다가 나중에 뒤통수치는 놈보단 솔직한 게 더 좋지!
그 지적에 난 더 활짝 웃었다.
“하하핳, 예전에 설명했잖아요? <마력 돌연변이>로 인한 부작용이라고. 그리고, 힘들 때일수록 웃어야죠! 그래야 힘든 상황에서 더 버틸 수 있으니까요! 게다가 제가 냉정하다고요? 그럼요! 냉정해야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으니까요!”
“전혀 냉정해 보이지 않아. 그냥 놀이동산에 온 것처럼 존나 신나 보이는데.”
“흐, 흐하하핳! 전혀 아니랍니다아? 흐, 흐히히힣!”
난 도덕적인 사람이라구! 사람 죽어 나가는데 즐겁겠냐?
...근데, 솔직히 말하면 즐겁긴 하다. 그래, 내 심장에 박혀 있는 르피너스의 선물 때문이겠지. 꼭 마약을 주입해주는 것처럼 그냥 기분이 좋아!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즐거움! 그리고, 그 사실을 지적 받으니 더 즐거워서 웃음을 참을 수 없고!
고갤 숙인 채, 발작하듯 웃는 내 모습에 사람들의 두려움과 혐오의 시선이 꽂힌다.
거, 사람들 구하려고 도망치지 않고 여기에 왔건만... 서운하네! 웃옷 윗주머니에 끼워둔 전자 담배를 꺼내곤 진정제가 든 카트리지로 바꿨다. 그리곤 방실방실 웃고 있는 내 입에 물리곤 그 수증기를 크게 빨아들였다. 폐를 통해 약을 흡입해서 그런지 약효가 빠르다.
“그나저나 갑자기 든 생각인데...”
약빨로 발작적으로 튀어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지아라를 향해 다가갔다. 내가 다가가자 움찔하며 경계하듯 손에 쥔 망치를 꽉 쥐는 지아라, 그런 그녈 앞에 서서 난 손에 쥔 전자 담배를 한 모금 빨고 말을 이어나갔다.
“왜 진아씨에겐 존댓말 하고 왜 난 반말 하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