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핏물 속에서 헤엄치는 방법 >
“...그냥. 꼬우냐?”
그런 내 질문에 잠깐 멈칫하다가 두 눈을 부라리며 대꾸하는 지아라, ‘감히 하늘같은 선배에게...!’하면서 꿀밤 한 대를 먹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저 장도리에 대가리가 찍힐 것 같았다. 콘크리트도 꽝꽝 부수는 애니까 겸손해야지. 흑흑, 나 왜 이렇게 처량하냐.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며 난 고갤 끄덕였다.
“네, 솔직히 좀 서운해요! 억대가 넘는 비싼 포션도 혜영양을 살리기 위해 썼는데, 이런 취급이라니...”
“아, 그... 그건...”
그래고 염치란 건 있는 모양인지 내 대꾸에 당황하는 지아라 그에 난 소리 높여 웃었다.
“농담이에요. 하하핳!”
그래, 내가 좀 불쾌하게 느껴지더라도 계속 선행을 베풀면 평가도 달라지겠지! 전자 담배를 입에 문 채, 난 박수를 치면서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진 지아라를 향해 말을 이어나갔다.
“좋아요, 아라양의 제안대로 해보죠!”
“...”
“제가 챙겨놓은 준비물이 좀 되니까 저 <부패 구름>을 계속 만들 수 있을 거예요! 우리 진아씨도 건물 근방에 자동차 방벽을 추가로 세우면 예상보다 더 버틸 수 있을 지도 몰라요!”
그래, 이것도 나쁘지 않다.
아니, 솔직히 모르겠다.
진짜 이성적이었다면 저 반쪽 드웝녀를 어떻게 설득해보려고 하겠지. 애들은 물론이고 나조차도 죽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감정이 마약 한 거처럼 붕 떠서 그냥 다 괜찮게 느껴진다. 어차피 죽기 밖에 더하겠는가? 애초에 이성으로 따지면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지!
내 반응에 멍한 표정의 지아라에게 다가가 그 어깨에 손을 올렸다.
“따라오세요. 아라양이 파야할 부분을 정해줄게요. 제가 철근이 없는 부분을 대충 알고 있거든요! 그리고, 진아씨?”
“어..응?”
내 말에 화들짝 놀라는 마빡 아가씨를 향해 난 손짓했다.
“함께 가죠. 아라양이 땅 다 팔 동안에 어떻게 괴물을 막을지 생각해야하니까요!”
“...”
“그리고, 이경씨는 건물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식물로 빈틈을 막아주세요! 영이는 그냥 칼질 밖에 못하니 당분간 혜영양을 돌봐주시고!”
잠깐 벙 쪄있다가 이내 마빡 아가씨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고, 두 반 귀쟁이들은 내 지시에 고갤 끄덕인다. 그 모습을 확인한 뒤, 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의 지아라를 향해 빙긋 웃었다.
“하지만, 아라씨. 알아두세요. 이거, 실패하면 저흰 그냥 다 죽는 겁니다! 다 살려 보려다가 살릴 수 있는 최소한의 사람도 못 살리는 거죠. 소중한 친구들까지 싹!”
“...시발.”
“그러니 죽기 살기로 파세요. 아라양이 가능하다고 해서 선택된 길이니까. 하하핳!”
표정이 썩어 들어가는 지아라를 뒤로 한 채, 난 앞장서서 땅을 파기 좋은 곳을 향해 움직였다.
3.
제대로 된 국가 기관은 거의 모든 재난에 대비한다.
재난이 터지자마자 주먹구구식으로 대처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별로 없다. 현실과 동떨어지더라도 대처 매뉴얼을 갖추고 있다. 실제로 마법이 나타나기 이전에 미 정부는 좀비 아포칼립스가 벌어질 시의 대처법을 연구해서 정식으로 발표한 적까지 있었다. 그 만큼, 철두철미하다.
당연히, ‘한 번 발생했던 재앙’에 대해선 더 철저하게 준비한다.
닥터 크림슨의 테러,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그 재앙을 미국은 철저하게 분석했다. 그리고 한 번 더 발생하면 어떻게 대처할지에 대해 매뉴얼을 세워 놨다. 15년 전 ‘재앙’에 의해 미국이 주춤한 사이, 미국의 기술을 흡수해 세계의 패권을 쥔 중국에게는 그 자료를 제공하지 않았지만-.
중국을 견제할 비수가 될 수 있는 한국에게는 제공할 의사가 있었다.
“반갑습니다. 세뮤얼 캐네스라고 합니다.”
미르에 발생한 재앙을 해결하기 위해 꾸려진 TF팀, 아직 제대로 된 체계를 갖추지 못해 살짝 중구난방으로 굴러가는 이곳에 이질적인 이가 방문했다. 살짝 특이한 발음이 조금 섞였지만 매끄러운 한국어를 구사하는 정장차림의 건장한 흑인 남성, 미 대사관에서 파견된 인물이었다.
그가 내미는 손을 마주잡으며 전찬휘 경감도 곧바로 고갤 끄덕였다.
“반갑습니다. 현재, TF팀의 작전을 총괄하고 있는 전찬휘 경감입니다.”
“인사는 이 정도로 끝내고 곧바로 안건으로 넘어가도록 하죠.”
악수가 끝나기 무섭게 세뮤얼은 가져온 서류 가방을 테이블 위에 거칠게 올려놓았다.
가방과 탁자가 부딪치는 커다란 소음에 같은 탁자에 앉아서 다른 부서와 협력을 논의 중이던 이능력 수사대의 인원들의 시선이 살짝 쏠리는 가운데, 그는 가방 안에서 자료들을 꺼내며 빠르게 말을 이어나갔다.
“이건, 미 국방부에서 연구했던 대응 보고서입니다. 마력 사태에 대해 빠삭한 이종족 출신들과 민속학자들이 대처 방안에 대해 논의했죠. 먼저, 상황이 매우 안 좋다고 말해야겠군요. 시간이 없습니다. 대응 방법에 대해 논의하는 요원들은 같이 와서 보시죠.”
전찬휘 경감에겐 서류를 건네고, 꺼낸 노트북에서 동영상을 재생시키는 세뮤얼, 그런 그의 말에 몇몇 요원들이 재빨리 다가와서 노트북의 영상을 함께 보기 시작한다. 경청하는 대원들을 향해 그는 빠르게 말을 이어나갔다.
“안에서 발견된 스마트폰 영상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생존자들은 5시간 이후에 거의 절멸한다는 것입니다. 5시간 지난 이후엔 일반인은 제 정신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제 정신을 유지할 수 없다고요?”
“예, 설령 쉘터 같은데 숨어 있더라도 피눈물을 흘리며 점점 미쳐갑니다. 안에 가득한 비정상적인 마력의 영향에 점점 폭력적으로 변하지요. 나중에 가선 저 안에서 날뛰고 있는 살인에 미친 괴물들과 비슷하게 변합니다. 마력 각성자는 좀 더 버티긴 합니다만...”
살짝 뒷부분을 흐리면서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서류를 읽고 있는 전찬휘 경감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제가 넘겨드린 보고서 8p에 미국에서 벌어졌던 사태에서 ‘시간에 따른 생존자의 숫자 추정치’ 그래프가 있을 겁니다. 미국에서 벌어졌던 상황과는 좀 다르지만 얼마 남았는지 예측할 수 있죠. 지금이 1시간가량 지났지요? 대충 50%가 죽었을 겁니다.”
“...”
“사람을 구하려면 지금 당장이라도 구조대를 투입해야 합니다.”
세뮤얼의 설명에 침묵하는 수사대 인원들, 아직 자료를 다 읽지도 못했지만 어서 빨리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은 명백해보였다. 그에 전찬휘 경감은 영어 원서로 된 서류에서 잠시 시선을 떼고 세뮤얼을 보며 입을 열었다.
“조언을 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러기 위해서 파견된 겁니다. 거두절미하고, 저희가 파악한 해결 방법은 하나입니다. 저 영역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검은 태양을 향한 ‘인신공양’을 멈춰야 합니다. 그 위치는 아마도...”
테이블에 놓은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키며 설명하는 세뮤얼, 그에 다른 인원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가운데 외교부와 협력을 논의 중이던 대원이 기쁜 얼굴로 소리친다.
“방금 외교부에서 들어온 소식입니다! 뉴 송파구의 오크들이 지원요청에 응했습니다!”
“얼마나?”
“기사단 병력 500명과 특수전 부대 200명, 그리고 시장인 ‘오무혁’이 직접 나서기로 했습니다!”
그 대답에 이능력 수사본부 인원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피어난다. 오무혁, 이종족인 오크지만 인간에게도 꽤나 친근한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성공한 노련한 정치인. 하지만, 이능력 수사본부 인원들은 그의 또 다른 실체를 잊지 않았다.
오크 전쟁 군주
개인적인 전투력은 전차와도 비견되며 지능은 인간들 사이에 섞여 정치까지 가능한 ‘철인’ 같은 존재들. 그들이 인간의 적으로 돌변할 시, 그 대처 방법을 생각하느라 얼마나 고심했던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괴물 같은... 아니, 괴물 그 자체나 다름없는 존재가 도우러 오다니.
그에 세뮤얼도 반색한다.
“좋군요. 오크 전쟁 군주와 그를 따르는 최정예 부대 700명이라니! 그 외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얼마나 됩니까?”
“...없을 것 같습니다. 시간 내엔.”
“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대꾸하는 세뮤얼, 그에 전찬휘 경감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서울에서 동원할 수 있는 미궁 출신 각성자들은 대부분의 미르 안에 갇혀 있습니다. 지방에 사는 이들은 지금 불러도 늦을 테고요. 그, 서울에 상주하는 이능력 특전단이 있긴 합니다만... 닥터 크림슨이 소환한 ‘진노의 나방’이 뿌리는 광기의 가루에 당했던 후유증에 회복된 지 얼마 안 됐습니다.”
“...”
“그리고, 설령 지원해줄지 의문입니다. 그들은 군 소속이고 저희 TF팀은 아직 일이 제대로 협력되지 않아서...”
“하지만, 미르의 가치는 대한민국에게 있어서 엄청 크지 않습니까?”
세뮤얼의 말에 전찬휘를 포함한 이능력 수사대 인원들은 작게 고갤 젓거나 한숨을 내뱉었다. 그의 말대로 미르의 가치는 엄청났다. 대한민국의 유일의 마력 각성자 육성연구 기관이자 요람, 한 마디로 마력 산업의 동력원-심장과도 같은 곳이다. 당연히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매우 더러웠다.
기괴한 주술을 이용한 닥터 크림슨의 대단위 테러, 그 위력은 대한민국보다 월등한 이능력자 자원을 가진 초강대국들도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혔을 정도다. 관계자들 사이에선 사실상 지금 대한민국의 힘으론 막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평가 받는 재난이었다.
그리고, 실패할 게 뻔한 일에 참견해서 커리어를 망치려는 이는 별로 없다.
덕분에 이능력 수사대의 반장이 엉겁결에 TF팀을 맡게 되었고, 그가 위에서 불려간 사이 팀의 에이스로 평가 받는 전찬휘 경감이 거의 모든 걸 결정하게 됐다. 애초에 사람들이 기피하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일, 게다가 전권을 부여받았다고 해도 그의 지위가 낮아서 부처 간의 협력에 잡음이 발생하고 있었다.
“워낙 급작스런 상황인지라 TF팀의 정확한 위계구분이 이뤄지지 않아서...”
“야!”
전찬휘 경감의 설명 도중에 난데없이 들려오는 커다란 목소리, 변성기가 지나지 않은 아이의 목소리였기에 더더욱 기괴했고 자연스럽게 TF팀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쏠렸다. 창문 밖, 한 여자아이가 태연하게 창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쬐끄만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보이는 여자아이, 하지만 전찬휘는 물론이고 다른 이능력 수사대 인원들, 심지어는-.
“오우, 바바야가...”
“...엥? 넌 뭐냐? 미궁출신은 아닌 것 같은데?”
세뮤얼까지 식겁한다. 그 대답에 창문을 통해 들어온 불청객-강수영이 착지하며 대꾸하자 그는 이내 표정을 싹 고치곤 고갤 꾸벅 숙였다.
“한국말로 하셔도 됩니다. 반갑습니다. 강수영씨.”
“음? 날 아냐?”
“연금술사 강수영은 유명하니까요. 미 외교부에서 파견된 세뮤얼 캐네스라고 합니다.”
정중하게 악수를 건네는 세뮤얼, 그에 강수영도 대충 악수를 받았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을 보고 있는 이능력 수사대 인원들을 향해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누군지 말 안 해도 알지? 여기 사람들에게 난 찍혔을 테니 말이야.”
“...”
“원래는 제대로 정문을 거쳐서 방문하려고 했는데, 앞에 기자들이랑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더라고? 게다가 일반인은 출입금지라고 해서 창문으로 좀 들어왔지.”
“...”
“바쁜 것 같으니 딱 한 가지만 물어보자. 저거, 해결할 방안 있어? 우릴 믿고 기다려 달라니... 그런 말은 하지마라. 니들 믿다가 좆되는 건 많이 경험해봤거든.”
창문 밖을 가리키는 강수영, 그 손끝 방향에는 핏빛 구름에 휘감긴 미르와 그 위에 떠오른 검은 태양이 있었다. 평범한 민간인이라면 그냥 기계적으로 우리를 믿고 기다려 달라고 말하겠지만 상대는 얼마 없는 ‘특급 위험인물’ 중 하나다. 그것도 공권력에 ‘강한 불신’을 가진.
그 질문에 TF팀에 묘한 분위기가 감도는 가운데, 세뮤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현 사태에 대응방법에 대해 조언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이미 한 번 겪어봤으니까요.”
“오? 잘 됐네. 저거 어떻게 해결할 거야?”
“최대한 빨리 구출해야 합니다. 5시간 이후엔 극소수 빼곤 전멸하지요. 저희가 측정한 생존률 그래프가 있는데, 1시간 가량 지난 지금은 50%가 죽었을 겁니다.”
“흠...”
그 대답에 팔짱을 낀 채로 미간을 찡그리는 강수영, 그런 그녀를 보고 세뮤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저기에 관심을 가지시는 겁니까? 물론, 당연히 재난인 만큼 관심을 가지는 게 정상이겠지만 남의 일이라고 보지 않으시는 것 같아서요.”
“내 얼마 없는 친구와 은인이 저기에 있지. 그리고 내 알바생 놈도 덤으로 있어. 근데, 그 새끼가 사람 꼴 받게 하는 거 잘하거든?”
흰색 가운 주머니 안에서 조그만 종이쪽지 하나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는 강수영, 거기엔 ‘근래에 쓸 일이 있을 것 같아서 잠시 빌려갑니다. 혹여 쪽지 발견하시면 대금 청구는 DK그룹의 남궁진아에게 문의하십쇼.’라고 휘갈겨있고 그 아래엔 가져간 물품 목록들이 빼곡히 적혀있다.
“이 쪽지를 써 붙이고 포션과 몇몇 재료들을 들고 날랐어. 그리고, 지금 저기에 있지. 난 그 새끼의 주리를 틀어버리고 싶다고.”
“하하하!”
재미있다는 듯 웃는 세뮤얼, 하지만 전찬휘 경감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놈. 그리고 지금 일은 강수영과 그 놈 둘 다 징역감이었다. 마력 물품을 함부로 반출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걸 지적할 수 있는 이는 없다. 평상시에서도 힘들고.
그냥 최대한 빨리 떼어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며 전찬휘 경감은 입을 열었다.
“솔직히, 상황은 안 좋습니다. 세뮤얼씨의 말대로라면 지금 들어가야 하는데 아직 오크 전쟁 군주와 그의 휘하 병력 밖에 모으지 못했습니다. 지금 딱히 들어갈 만한 병력이 없어서...”
말끝을 흐리는 전찬휘 경감, 그에 흰 가운 주머니에 양손을 꽂은 강수영이 세뮤얼을 바라보았다.
“세뮤얼 씨, 오크 전쟁 군주하고 그 휘하 병력만으로 해결이 가능할까?”
“음, 지금 빠르게 간다면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봅니다. 상황은 시간이 지날수록 악화 되니까요. 대충 50%정도?”
“좋아, 그럼 나도 간다.”
50% 정도 된다는 말에 고갤 끄덕이며 대답하는 강수영, 그에 전찬휘 경감을 포함한 테이블에 있는 인원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수영씨도... 말입니까?”
“그래, 나쁘지 않을 텐데? 나도 꽤 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