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핏물 속에서 헤엄치는 방법 >
“그나저나 당신이 마시라고 준 음료 효과가 끝내주는 군요. 이거 뭐라고 했죠?”
“아, 저희 싸장님에게 의뢰가 들어온 물품이에요. 의뢰자가 요청한 대로 작용 메커니즘을 설계하니까 일반인은 마시면 소화 계통이 망가지기에 결국 폐기된 에너지 드링크죠. 몇 가지를 더 첨가하면 그 부작용을 없앨 수 있긴 한데, 단가가 너무 쎄져서 결국엔 상품화 되지 못했다나봐요.”
“흐, 그래도 개인적으로 좀 사놔야겠어요. 고작 반 캔 마셨는데 이렇게 활력이 돌다니. 그리고 이게 고작 단가 5만원 밖에 안 하다니...”
빈 알루미늄 캔을 내던진 후, 남궁진아는 두 눈을 감고 잠시 크게 심호흡을 했다.
-하악! 하악! 하악!
-끼아아악! 끼아아악!
-삶! 삶! 삶! 부럽다! 줘! 줘! 줘!
그 사이, 혼란 속에서 산자를 발견하고 질투심에 눈이 돌아간 망자들이 원념어린 괴성을 내지르며 밀려오기 시작한다. 허리 아래가 없거나, 머리통만 남아서 데굴데굴 구르거나, 다 썩어빠진 뼈다귀거나, 시체가 없어서 희끄무레한 망령이거나...
그들 대부분은 지상의 야만인들에 비해 나약했다.
하지만, 그들의 숫자는 훨씬 많았고 내지르는 비탄어린 절규는 더 섬뜩했다. 산자에 대한 질투가 가득한 절망적인 해일의 등장에... 그녀는 두 눈을 부릅뜨고 양손을 앞쪽에 들어 올리며 사방으로 전류줄기를 광범위하게 방출했다.
그리고, 그 번개 줄기에 닿은 자동차들이 응답한다.
-부웅! 부웅! 부우웅!
-부우우우웅!
그녀의 시선이 닿는 자동차들이 스스로 움직여 망자들의 진로를 막는다. 이어서 다른 자동차들이 돌진하여 버둥거리는 망자들을 쳐버린다. 그렇게 자동차들은 살더미의 해일을 막아서는 강철의 방파제가 되었다. 그리고, 그 방파제를 넘어서는 얼마 없는 망령과 살더미는-.
-스걱! 스걱! 스걱!
모두 서예린의 칼날아래에 찢겨졌다.
그렇게 살아있지 않은 것들 간의 힘겨루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가만히 있던 한새벽은 돌연 고갤 돌려 한 쪽을 가리켰다.
“저기, 저쪽 차량들이 좋겠네요! 어때요? 아가씨가 보기에도 괜찮지 않나요?”
“...멀리 있으니 좀 그런데? 내 조종 범위는 50m가 한계야. 저기까지 갔다가 이곳을 뚫려버리면 곤란해.”
한새벽의 손끝이 가리키고 있는 건 200m 가량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세워진 커다란 식자재 냉동 탑차들, 그에 남궁진아가 자동차를 조종하면서도 난색을 표하자 그는 재빨리-.
“자, 다음 조 투입해주세요~!”
천장 구멍을 향해 소릴 내질렀다.
그에 다른 사람들도 내려오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나온 것은 이영과 이경, 두 하프 엘프들. 두 아이들은 지하에 펼쳐진 지옥도에 얼굴을 굳히면서도 각자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했다. 이영은 단검을 쥔 채로 전기 줄기를 흩뿌리는 남궁진아의 앞을 지켰고, 이경은-.
“로세툼이시여, 당신의 권능으로 생명과 죽음의 순환이 충만하길, 척박한 대지에 푸른 녹음이 가득하길, 빛 한 점 없는 곳에서도 생명이 피어나길 기원하옵니다.”
조심스럽게 호주머니에서 꺼낸 씨앗들을 자동차와 망자들 간의 힘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곳에 흩뿌리고 기도한다.
-푸쉬이이이...
그와 함께 그녀를 중심으로 바닥을 적신 핏물과 시체 살 쪼가리들이 짙은 갈색으로 변해 썩어 들어가고, 이어서 그 짙은 갈색으로 변한 거름 위에 놓인 씨앗들에서 작은 새싹이 솟아나더니.
-쩌저저저적!
-뿌드득! 뿌득!
신의 축복을 받은 갈색 부엽토의 영양을 쏙쏙 빨아먹으며 순식간에 ‘넝쿨’로 자라난다. 비디오 빨리 감기를 보는 것 같은 상식을 무시하는 기적, 옆에서 그 광경을 보며 한새벽을 탄성을 내지며 박수를 친다.
“와! 건물 안을 보면서 짐작은 했다만 직접 신의 권능을 쓰는 건 처음 봐요! 아, 지금 생각해보니까 이영 양이 쓰던 그 <검은 연막> 같은 것도 신의 권능인 것 같은데요?”
“...”
“아, 죄송해요. 밖에서 코드 108에 대한 언급은 매너가 아니었죠?”
이경의 난처한, 이영의 떨떠름한 표정에 한새벽이 능글맞게 웃으며 입을 다무는 가운데, 넝쿨은 사람키 만큼 수북하게 자라나 장미꽃을 틔워낸다. 이경의 의지대로 그 들장미 덩굴은 매우 억세고 튼튼하며 날카로운 가시가 잔뜩 솟아있었다.
쇳덩이 자동차라면 몰라도 망자들은 뚫기 힘들 정도로.
“자, 여긴 우리 세 사람이 막을 테니 진아씨는 탑차들을 가지고 오세요! 이영씨, 그런 진아씨를 근접 엄호하세요! 차량을 뚫고 오는 망자와 망령을 차단해야 합니다!”
“음!”
“아, 추가로 이쪽으로 올 때 탑차 뒤쪽의 자물쇠들을 다 박살내세요! 오면서 자연스럽게 내용물을 쏟아버릴 수 있도록!”
곧바로 남궁진아와 이영이 탑차 트럭을 픽업하러 가는 가운데, 한새벽은 살짝 지친 듯 숨을 고르고 있는 이경을 향해 속사포처럼 말을 이어나간다.
“그리고 이경씨?
“...아, 네?”
“그 천장의 구멍 아래에 이런 저런 덤불 하나 ‘가시 없이’ 깔아줄 수 있나요? 지금 보니까 일반인이 뛰어내렸다간 다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한새벽의 요구에 살짝 고갤 끄덕이곤 아까 전의 넝쿨을 세우는 과정을 반복하는 이경, 그 동안 한새벽은 마치 방관자마냥 느긋하게 팔짱을 낀 채 한손으로는 턱을 매만지며 서 있었다. 하지만, <관찰자의 눈>은 지금도 민활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거참, 되게 겁을 먹네요.”
“네?”
“아니, 위에 있으신 분들 말이에요. 거참, 이렇게 미적거리는 건 예상 밖인데 말이죠?”
망자가 내뱉는 광기어린 통곡성, 그건 생명체는 본능적으로 꺼리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야만인들이 부르는 호루라기와는 다른 느낌의 공포, 그에 위에 있는 오혜영과 지아라가 괜찮다고 말하고 있어도 내려가려는 걸 망설이고 있었다. 단 한 명도 내려오지 않았다.
그렇게 한새벽이 고갤 미간을 찡그리는 사이-.
-부릉! 부릉!
-부아아앙!
남궁진아와 이영이 위에 있는 두 대의 탑차들이 그들을 향해 다가온다. 그에 한새벽은 곧바로 목소리에 마력을 실어서 위쪽에 소리쳤다.
“자, 민간인 분들 전부 내려와 주세요! 쿠션 깔았습니다! 탑승할 차량도 준비됐어요! 뛰어내리세요!”
천장 구멍까지 합하면 거의 5m에 가까운 높이, 게다가 사람의 심령을 흔들리게 하는 귀곡성이 울려 퍼져 나오기에 사람들은 여전히 내려가기를 거부했다. 그렇게 계속 망설이자 오혜영이 반쯤 억지로 사람들을 붙잡고 구멍에 밀어트리기 시작한다.
“히, 히이이익!”
첫 타자는 미르 생도, 비명을 지르며 떨어지는 아이를 들장미 넝쿨들은 충분히 버텨냈다.
“자자, 이쪽으로 오세요!”
“빠... 빨리! 빨리! 가요! 빨리!”
사방에서 밀려드는 망자의 괴성, 금방이라도 뚫릴 것 같은 자동차와 넝쿨이 얽힌 벽, 그걸 뚫고 오는 망자들을 상대하는 서예린... 공포에 질린 채, 떨어진 아이는 한새벽의 안내에 따라 빈 탑차의 창고로 들어간다. 어서 빨리 출발하자고 비명을 내지르며-.
그걸 시작으로 하나씩 떨어진다.
“흐, 흐이이익! 아아아악! 죽어! 죽어 이 새끼-”
가끔씩 피눈물을 흘리며 광기에 젖어 공격성이 폭발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이영이 나타나 넝쿨 위에서 버둥거리는 사람의 뒤통수에 양말로 만든 간이 블랙잭(Blackjack)을 휘둘러 기절시킨다. 그렇게 제압된 사람을 나중에 실을 수 있도록 주차장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끄아아아악! 끄아아아악!
사람들은 여전히 내려가려고 하지 않았다.
머리로는 안다.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을, 남아봤자 괴물에게 죽거나, 혹은 건물에 붙은 불에 타죽는다는 것을. 하지만, 머리론 이해해도 ‘더 안전한 곳에 안주하려는 본능’은 어쩔 수 없다. 게다가 마력이 뒤섞인 망자들의 원독어린 외침은 그러한 본능을 더더욱 자극했다.
“에휴.”
그에 한새벽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들이 떨어져 내린 지도 벌써 4분가량, 확확 사람들이 떨어져 내렸다면 다 내려왔을 시간인데 고작해야 1/3인 60명밖에 없다. 그 반면에 망자들은 해일처럼 밀려든다. 더 이상 차량으로도 막지 못할 정도로.
이대로 가면 모두가 위험하다.
그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하지만 ‘묘한 즐거움’이 묻어나는 어조로 한새벽은 목에 마력을 담아서 소리쳤다.
“위에 도우미들! 지하로! 빨리 지하로 와주세요!”
“어!? 밖에서 괴물 올지도 몰라서 경계해야 됨다! 그리고 사람들 밀어 넣어야 함다!”
“여기 상황이 안 좋아서 그래요! 알아서 뛰어내리라고 하고 빨리 아래쪽 지원 부탁합니다.”
그런 한새벽의 요구에 망설이다가 두 사람이 떨어져 내린다.
지아라와 오혜영, 둘 다 많이 고생한 듯 얼굴과 팔뚝에 상처가 있다. 억지로 사람들을 구겨 넣다가 생긴 상처들이다. 그 둘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지옥도를 보며 무기를 다잡는 가운데, 한새벽은 그런 두 사람의 등짝을 탑차 쪽으로 밀었다.
“자, 어서 빨리 두 사람은 안에 타세요. 이경씨는 계속 가시 울타리를 보조해주다가 타시고요.”
“어? 새벽 오빠? 뭔 말하는 검까? 저 진짜 괜찮...”
“슬슬 출발해야하니까요! 그리고 위에 사람들! 저흰 1분 내에 출발합니다! 하도 안 떨어져서 시간 오버됐어요! 죽든 말든 저흰 어쩔 수 없답니다! 정~말 안타깝네요!”
명백히 즐거움이 섞은 목소리, 그에 위에 사람들은 물론 아래에 있던 이들도 잠깐이나마 멍해졌다. 하지만 이내 위에서 악다구니 섞인 욕설이 들려온다.
“뭐.. 뭐!? 이 새끼야 너 뭐라는...”
“미안합니다! 상황이 나빠서 어쩔 수 없네요. 그러기에 빨리 떨어졌어야죠!”
위쪽에서 항의와 비명이 들리지만 한새벽은 웃음을 터트리며 언 듯 생각하면 조롱조로 들리는 말을 내뱉는다. 아니, 얼굴도 생글거리는 것이 진짜로 즐거워보였다. 그에 남궁진아와 이종족 아이들이 반쯤 경악한 얼굴로 한새벽을 바라보자 그는 고갤 저었다.
“이건 양보할 수 없어요. 이 지랄 맞은 곳, 우린 최선을 다했습니다, 더 이상 시간 끌면 죽어요. 안 그런가요? 예린양?”
대답은 없지만 동의한다는 듯이 근처에 있는 한 <유령의 무기>가 동그라미를 그린다. 처음엔 무려 6개가 떠 있던 유령의 무기, 하지만 이젠 오직 한 쌍-2개 밖에 없었다. 쉴 새 없이 움직이던 서예린 또한 지쳐가고 있었다. 그러한 한새벽의 선언에-.
“비켜! 비켜 이 새끼들아!”
“꺼져! 난 미르 생도라고!”
천장에서 들려오는 다툼소리, 오히려 이젠 떨어지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그 살벌한 다툼 때문에 오히려 순서대로 떨어질 때보다 느려졌지만 그래도 이전보다 빨라졌다. 그 생존경쟁을 뚫고 떨어진 사람들 중 몇몇이 생글생글 웃는 한새벽을 보자 발작했지만, 이내 이영에게 뒤통수를 맞고 기절-오혜영이 끌어다가 차량에 실어버린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자, 이제 갑시다! 진짜 진짜 가야해요! 더 이상 시간 끌면 답이 없어요!”
한새벽이 외친다. 다른 이들은 망설였지만 한새벽은 ‘진짜’라는 것을 증명하듯 사람이 들어찬 탑차의 창고문을 닫았다. 그리고-.
“음.”
열심히 밀려오는 망자들을 죽이던 서예린이 전장에서 이탈하며 다른 탑차의 창고문을 닫는다. 그에 아직까지 긴가민가하던 이종족 아이들과 남궁진아가 두 사람이 확고하게 결심했단 것을 깨닫는 가운데, 서예린은 어서 타라는 듯 운전석 쪽을 향해 턱짓한다.
“자.. 잠깐! 같이가!”
굳은 표정으로 탑차의 운전석에 타는 아이들, 뒤늦게 떨어진 이들 또한 따라 달려든다.
“에고, 제 자리는 없겠네요. 예린씨, 저 좀 올려주세요.”
그렇게 추가적으로 인원들이 운전석에 탑승한 탓에 자리가 꽉 차게 되자, 한새벽은 한숨을 내뱉으며 서예린의 도움을 받아 남궁진아가 올라가 있는 탑차 창고 위로 올라갔다. 그리곤-.
“자, 가도록 하죠!”
주위 자동차를 조종하면서 아직도 망설이는 남궁진아를 향해 재촉했다. 그런 한새벽의 옆에 있는 서예린의 담담한 황금빛 눈동자에 망설이던 남궁진아도 결국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곤, 두 탑차를 움직였다.
“가... 가지마! 가지 말라고!”
그런 탑차들을 향해 필사적으로 달려오는 뒤늦게 떨어진 이들, 그들이 내는 필사적인 목소리에 남궁진아가 움찔하자 서예린이 그런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에 반해 한새벽은 그들을 향해 미안하다는 듯이 웃으며 손을 흔든다.
“아, 정말 미안해요! 더 시간 끌면 저희도 위험해서 어쩔 수 없네요!”
“가지마! 가지마! 가지마! 제발 가지마! 이 개새끼야! 죽어! 나 죽..”
달리는 탑차를 뒤늦게 떨어진 이들이 필사적으로 따라가지만 뒤쪽부터 생명의 따뜻함을 탐하는 망자들의 물결에 휘말린다. 그대로 산채로 뜯겨지는 이들, 망자들의 괴성이 가득 찬 와중에도 그들의 비명은 또렷이 들렸다.
그렇게 남겨진 자들의 절규를 뒤로한 채, 생존자들은 생존을 위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