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막간. 핏물을 짓밟는 군화 >
‘소리 대포’라고 해도 좋을 강렬한 충격파, 자주포라도 쏜 것처럼 홀 전체가 들썩이며 먼지가 흩날렸고 30m 앞의 대리석 바닥은 그 물리력을 이기지 못하고 쩍쩍 갈라졌다. 그 충격을 정면으로 맞은 독수리 인간들은 파리채에 강타당한 파리처럼 벽에 날아가 박혔다.
-푸쉬이이익...
벽에 처박힌 독수리 인간들의 상태는 처참했다. 말 그대로 뼈와 살이 분리가 된 채, 그 속의 살점들은 진녹색 증기에 의해 속이 녹아내렸다. 그렇게 선두의 반인반수가 잔혹하게 으스러졌음에도 몇몇 괴물들이 기세 좋게 들어왔지만-.
-캬아아아악! 캬아아아아악!
-캬오오오웅!
남아있는 진녹색 증기에 휩싸이자 비명을 지르며 녹아내린다.
진짜로 녹색용의 숨결에 당한 듯한 처참한 모습에 전쟁 군주가 미간을 찡그리는 가운데, 그 숨결을 뱉어낸 존재는 몸을 돌려 전쟁 군주와 사람들 쪽을 향해 돌아보며 즐겁다는 듯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하, 버릇없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유해 조수들은 이렇게 참교육을 해줘야지. 안 그래?”
고작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로 보이는 자그마한 여자 아이
실험실에서 입을 법한 새하얀 가운 차림에 특이한 푸른색 보안경을 썼고, 입가엔 검은색 마스크를 착용했다. 마지막으로 등에 멘 작은 가죽 배낭까지. 여러모로 구조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녀가 걸치고 있는 장비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았다.
하관을 가리는 검은색 금속 마스크는 그 중앙에 스피커의 우퍼(Woofer) 비슷한 둥그런 장치가 달려 있었고, 푸른 보안경은 마력의 광채가 번들거렸으며, 하얗다 못해 창백한 흰색 가운은 파르스름한 연기 같은 안개를 희미하게 흘려내고 있다.
그런 그녀의 말에 전쟁 군주는 수정 장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나지막이 대꾸했다.
“독이 참 지독하군.”
“그래봤자 독이야.”
그녀는 어깰 으쓱이곤, 히드라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건틀릿을 낀 오른손을 뻗어 자신이 뿜어낸 녹색 증기의 일부분을 만졌다.
“신체의 ‘항상성’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진짜 강자들에겐 잘 안 통해. 생체 매커니즘이 없는 존재들에겐 엄청 약하고. 완전히 양학용이지. 한계가 많아.”
그 말도 안 되는 엄살에 전쟁 군주는 피식 웃었다. 진짜 강자에겐 안 통한다고? 그럴 리가. 저런 지독한 부식독이라면 언데드나 악마에게도 통할 거다. 어찌됐든 간에 그는 앞을 뒤덮은 진녹색 증기를 향해 턱짓했다.
“그나저나 그쪽이 뿌린 독숨결이 병력을 투입하는데 방해되는군. 치워줄 수 있나?”
“아, 죄송.”
대답과 함께 녹빛의 독성 증기가 실타래가 감기는 것처럼 장갑을 낀 손안에 빨려 들어간다. 그렇게 독이 빨려 들어간 가죽 건틀릿이 질척질척한 녹빛으로 물드는 가운데-.
“수영아?”
사람들 사이를 뚫고 한 의사가운 여자가 나온다. 이전부터 사람들이 패닉에 빠지지 않도록 관리하던 정신과 의사, 정한솔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그 등장에 강수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장난스럽게 눈꼬리가 휘며-
“도-모, 정한솔=상. 리버 스위밍 입니다.”
정중하게 합장하며 목례를 건넨다. 미르 다닐 때, 함께 읽었던 액션만화의 흉내. 태연하게 장난하는 친구의 모습에 정한솔은 한심하단 듯이 한숨을 내뱉으며-
“도-모.”
똑같이 합장과 목례를 한다. 어찌됐건 아이사츠는 중요하니까. 그에 강수영은 마스크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활짝 미소를 지으며 정한솔의 등짝을 ‘쫙!’ 후려쳤다.
“이야, 이곳에 있었네?! 난 니가 병원에 있을 줄 알았는데?”
“아야야, 이 썅년 손 존나 맵네... 운이 좋았지. 끄으응.”
맞은 등짝의 통증에 몸을 살짝 비틀며 정한솔은 고갤 절래절래 저었다.
“내가 닥터 크림슨이랑 싸웠던 병사들의 정신과 치료를 담당했거든. 덕분에 사전조사를 많이 했고. 덕분에 상황 터지자마자 뭔 일인지 파악하고 얼마 없는 환자들까지 다 끌고 이곳으로 대피했다.”
“오올...”
보통 병원에선 할 수 없는 일, 하지만 미르의 병원은 일종의 연구기관에 가깝기에 환자가 별로 없어서 가능했다. 감탄하는 강수영을 향해 이내 정한솔은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넌 여기 왜 왔냐?”
“아, 추노한 알바생 잡으러 왔지 이년아. 네가 추천한 알바생이 상점 털었거든? 연대책임을 질 각오는 돼있겠지?”
“엥? 뭔데?”
뜬금없는 그 말에 정한솔이 두 눈을 똥그랗게 뜨는 가운데, 강수영은 자신이 발견한 쪽지를 꺼내 건넸다. 그리고, 그 내용을 읽은 정한솔 선생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흐음...”
“표정을 보니 뭔가 아는 듯한데?”
그 반응에 강수영이 의아하다는 듯이 묻자, 그녀는 살짝 목소릴 낮춘 채로 속삭였다.
“야, 걔가 좀 특이하잖아?”
“그렇긴 하지.”
“저번 주에 걔가 교실에서 기절했다가 깨어나더니 이곳이 불길하다고 노래를 불렀거든. 그 묘사가 코드 108 중의 하나인 ‘칸’과 비슷했고. 그 때, 나도 닥터 크림슨과 조우했던 병사들을 치료하고 있었는데 걔가 그러니까 좀 불길했지.”
“오호?”
“덕분에 나도 좀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좀 미진하지만 대응도 어느 정도 준비했었고. 그래서 사태가 터지자마자 빠르게 도망칠 수 있었지.”
“흠, 그 녀석. 확실히, 뭔가 있어.”
그렇게 두 사람이 탈주 알바생에 대해 떠드는 사이, 오크 전쟁 군주는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르커스!”
그가 한 오크의 이름을 부르자 한 오크가 튀어나와 군례를 올린다. 중장비를 착용한 이들과는 좀 다른 무장의 오크, 좀 더 현대적인 특공대와 비슷했고 헬멧이 아닌 코만도 모자를 착용했다. 무엇보다도 총은 목재로 된 부분이 많은 것이 윈체스터 라이플과 외형이 비슷했다.
“이곳 구조는 숙지해 놨겠지?”
“그렇습니다! 전쟁 군주시여!”
“제 1 강습 병단을 이끌고 15분 내로 기지 내의 핵심시설에 있는 모든 괴물들을 처리해라. 군인들을 도와서 방어선을 새로 구축해. 아직 우리 정체를 몰라서 오사가 일어날 수도 있으니 조심하도록 하고.”
고갤 끄덕인 뒤, 오르커스라 불린 오크는 뒤쪽의 오크들을 작게 손짓했다. 그러자 그와 똑같은 복장의 오크들이 속속 안에서 튀어나온다. 그 숫자만 200여명, 무리의 부대장으로 보이는 이들에게 오르커스가 직접 손짓하자 그들은 각자 팀원들을 데리고 흩어진다.
그와 동시에 그들의 몸이 희끄무레해지더니 이내 투명해진다.
<투명화> 마법, 그들의 정체는 현대전을 익힌 마법사 오크들이었다. 들고 있는 구형 라이플처럼 보이던 총은 개조를 마친 마법 지팡이들. 마법을 진지하게 탐구하는 이들이 아닌, 몇 가지 마법만 배운 ‘주문 사용자’에 가까웠으나 전투 면에서는 보통 마법사들보다 나았다.
그렇게 특공대 오크들이 흩어지고 반격이 시작된 가운데, 뒤늦게 안쪽의 지휘통제실에서 군인들이 튀어나온다.
“그...”
압도적인 위압감을 뿜어내는 전쟁 군주의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말을 더듬는 중령, 그에 전쟁 군주-오무혁은 나지막이 중령을 내려다보며 자신을 소개했다.
“뉴 송파구의 시장, 오무혁이다. 대한민국 정부의 요청에 따라 구출대로 이곳에 왔다. 협력해줬으면 좋겠군.”
“오... 오오!”
그 소개와 함께 사람들 사이에서 감탄이 흘러나온다. 오무혁, 지하 뉴 송파구의 지배자. 인간들의 Tv정치 토크쑈에서도 나와 기성 정치인들을 토론으로 논리정연하게 압살해서 ‘논리갑 오크’라고 불리는, 대한민국에선 가장 인지도 높은 오크였다.
“사... 살았다! 살았어!”
그리고, 유명한 그가 직접 왔다는 것은 자신들이 죽지 않을 확률이 높다는 뜻이기도 했다.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안도의 감정이 퍼져나가는 가운데-,
“민간인 여러분! 뒤쪽에서 장비 차량이 올라오고 있으니 비켜주시기 바랍니다!”
전쟁 군주의 뒤를 따라왔던 두 사람 중 하나, 새카만 경찰 정복 차림의 전찬휘 경감이 소리친다. 그 외침에 사람들이 흩어지고 통로 쪽에서 강렬한 엔진음과 함께 커다란 자동차들이 올라온다. 대공포가 설치되어 있는 트럭 5대와, 탄약 보급용 장갑차들, 마지막으로...
“우.. 우와...”
컨테이너를 옮기는 용도의 대형 트럭과 그 뒤에 달린 선박용 대형 컨테이너들. 무려 6칸이나 연결되어 있었는데, 어느 정도 밖으로 나오자 오크들은 재빨리 사이드에 있는 컨테이너 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것들은...
“...저게 뭐야?”
“오토바이 아냐?”
“근데, 저런 오토바이는 처음 보는데? 작은 전차 같은 걸?”
밖에선 볼 수 없는 기묘한 형태의 오토바이였다. 거대한 몸체에 오토바이 답치 않게 철갑으로 둘러져 있는 형태, 날렵함보다는 육중하다는 느낌이 강했으며 그 바퀴는 대형 트럭에서나 쓸법한 거대한 고무 타이어다.
그 디자인만 봐도 단순히 타는 것 이상, 힘과 힘이 맞부딪치는 전쟁을 위한 것이란 느낌이 물씬 풍겨 나왔다.
지하 토굴에서 오크들이 운용하는 ‘배틀 바이크’의 생소한 모습에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보는 사이, 전찬휘 경감은 재빨리 중령에게 다가가 경례했다.
“경찰청 이능력 전담반 소속의 전찬휘 경감입니다. 상황이 급박하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가져온 대공포를 배치하십쇼. 지금 온 병력은 곧 전부 떠나야 합니다.”
“..뭐요? 떠난다고!?”
“현 상황은 닥터 크림슨이 벌인 ‘대살육 의식’ 때문입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듣지 못하도록 살짝 목소리를 낮추며 전찬휘 경감은 놀라는 중령을 향해 말을 이어나갔다.
“앞으로 3~4시간 이내에 이걸 끝내지 않으면 모두 죽습니다. 지금은 괜찮지만 사람들은 점점 폭력적으로 변하다가 나중에는 이성을 잃고 피눈물을 흘리며 밖의 괴물처럼 변하죠.”
“...”
“시간을 끌수록 사람은 더 죽어나가고, 더 강력한 괴물들이 나올 겁니다. 안타깝지만 민간인 보호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습니다. 최대한 빨리 이 사태를 끝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곳에서 나갈 수 있습니다.”
진중한 표정으로 설명하는 그의 모습에 중령은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고갤 끄덕였다.
“알겠소. 그럼, 추가적인 병력 지원은...”
“없을 겁니다.”
고갤 저으며 짧게 대답하는 전찬휘 경감, 절망적이었지만 중령은 순순히 상황을 받아들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곧바로 질문하는 오무혁에게 붙잡혀서 답변하느라 절망할 틈이 없었다. 그렇게 오무혁이 현 기지의 상태에 대해 일방적으로 질문하고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하자-.
“기지 보강에 들어간다. 모두 진입하기 전에 계획한 대로 움직여라! 각 부대장은 세부 변경 사항을 전파할 테니 이쪽으로! 그리고 전찬휘 경감, 여기 설계도 좀 주게.”
오크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전쟁 군주의 지시에 따라 주위 오크들은 순식간에 트럭에 달려 있던 운반용 컨테이너를 해체하고, 각 부대장들은 전쟁 군주에게 모여 세부사항을 듣는다. 그 뒤에 부대장들은 해체한 부품들을 들고 있는 부하들과 함께 기지 내부 곳곳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난입한 괴물들과 전투가 있었지만-.
-타당! 타다다당!
-으직! 콰직! 콰직!
오크 기사들의 할버트와 마법사의 마법과 총탄 아래에 찢겨졌다.
이어서, 전원 마력 각성자인 기사 계급 오크들이 거의 건설 기계에 가까운 피지컬로 철골을 조립해 쌓아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불과 15분도 되지 않아서 컨테이너 철골과 장갑차로 막힌 거대한 철벽이 완성되었고 끌고 온 대공포 차량이 배치되어 불을 뿜기 시작했다.
“...말이 됩니까? 저게?”
그리고, 그 모든 광경을 중령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름 군대에 20년 동안 있었고 공병대와도 작업을 해본 일이 있었기에 저게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지 더더욱 잘 알았다. 그런 그의 넋 나간 모습에 전찬휘 경감은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들 하나하나가 오크 기사입니다. 마력 각성자 중에서도 손꼽히는 무지막지한 피지컬을 지녔죠. 그들을 총 지휘하는 전쟁 군주는... 말할 필요도 없고요.”
“허... 허어.”
“괜히 인류가 오크를 경계하는 게 아닙니다. 저런 압도적인 저력을 지녔으니 경계하는 거죠. 어쨌든 기지의 방비는 맡기겠습니다. 저희는 이만 가봐야 할 것 같군요.”
전찬휘 경감이 고갤 꾸벅 숙이곤 오크들이 가져온 배틀 바이크 쪽으로 움직이는 가운데, 전쟁 군주는 이어서 정찰 나갔던 특공대 오크의 보고를 듣곤 지시를 내렸다.
“제 3분견대, 밖으로 향하는 길을 뚫어라. 나머지는 그 뒤를 따라 오토바이를 끌고 움직인다!”
전쟁 군주의 명령에 따라 50여명의 오크들이 입구 쪽으로 향하고, 나머지 오크들은 일제히 각자 배틀 바이크를 끌고 기지 밖으로 향한다.
평균 신장 2m에 달하는 기사 계급 오크들, 그 무기와 방패 장구류까지 합하면 개개인의 중량은 각 200kg가량 된다. 게다가 몇몇은 2인 1조로 뒤에 마법사 오크들까지 타고 있는 걸 생각하면 그 하중은 350kg가 넘는다. 평범한 오토바이는 버티기 힘든 무게지만-.
-쿠와아아앙! 콰앙! 콰앙!
상식을 무시하는 괴물 같은 엔진과 특별 첨가제가 포함된 석유 연료를 먹은 오토바이는 괴물과도 같은 배기음을 뿜어내며 거뜬하게 움직였다.
“전쟁 군주시여! 차량이 준비됐습니다!”
“음.”
부관의 외침에 오무혁은 자신 전용으로 마련된 더 크고 화려한 황금빛 배틀 바이크에 탑승했다. 그리곤 기사단과 함께 3분견대가 닦아놓은 입구를 향해 대열을 맞춰 움직였다.
미친 듯이 밀려오는 야만인들을 틀어막고 있는 3분견대
금방이라도 야만인들의 물량 공세에 잠식될 것 같았지만, 야만인들은 뒤이어서 나오는 흉악한 배틀 바이크 군단을 보곤 주춤거린다. 그 사이, 막고 있던 3분견대 오크 기사들은 일사불란하게 갖추고 있던 방진 대열을 바이크들이 지나가기 쉽도록 바꾼다.
“...”
500여명의 오크 기사들이 뿜어내는 위압감. 그리고, 그 선두에 선 황금빛 배틀 바이크를 탄 오무혁. 그 위용에 살육에 미친 야만인들과 반인반수들까지 함부로 돌진하지 못하고 주시하는 가운데-.
“돌격.”
나지막한 전쟁 군주의 목소리, 그와 함께 오크들이 탄 거대한 바이크들이 굉음과 함께 야만인들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