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97화 (97/350)

< 20화. 고통을 넘어서 >

7.

저 멀리서 들려오는 포효

워낙 멀었기에 살육에 미친 야만인들이 내지르는 괴성에 비해 희미했지만, 그 포효에 담긴 강렬한 존재감은 순간적으로 적과 생존자들 모두 움찔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반사적으로 두 집단 모두 포효가 들려온 곳을 응시하는 가운데-.

-투쾅!

포효가 들려온 쪽에서 쏘아진 물체가 아스팔트를 박살내며 야만인들 사이로 내리꽂혔다. 새카만 장창, 이어서 그 창은-

깨지듯이 터져나가며 폭발, 가공할 화염과 충격파를 뿜어냈다.

‘대전차 미사일’ 수준의 강력한 폭발, 마법에 어느 정도 내성이 있는 야만인들이었지만 투창은 가공된 폭약이 가득 찬 특제품이었기에 버티기 힘들었다.

“저... 저기! 오토바이! 구조대다!”

그 폭발에 휘말린 야만인들이 으스러져 죽거나 쓰러진 사이, 생존자들은 저 멀리서 야만인들을 갈아버리며 맹렬하게 이쪽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 오토바이 부대를 볼 수 있었다.

“...전쟁 군주.”

최선두의 황금빛 오토바이. 다른 검은색 오토바이보다 1.5배는 더 큰 그 위에 타고 있는 존재를 확인한 서예린의 얼굴이 반사적으로 일그러지는 가운데, 선두의 전쟁 군주는 바이크의 사이드 보관함에서 꺼낸 흑색 투창을 하나 더 꺼내 던졌다.

-투쾅!

대충 봐도 1km가 넘는 곳에서 던진 투창, 하지만 두 번째 투창도 이전처럼 정확히 야만인들 사이로 내리꽂혀 폭발한다. 그 투창이 쏟아낸 광범위한 산탄에 야만인 대부분이 무력화되고 생존자들에게 가해지는 압력은 확연히 줄어들었다.

“버텨! 좀만 버티면 살 수 있어! 버텨!”

구조대가 자신들을 구하러 오고 있는 상황, 게다가 무슨 이유인진 몰라도 간간히 떨어지던 포탄 같은 머리통 또한 줄어들었다. 그 희망에 사람들은 이를 악물고 발악했다. 서예린 또한 찡그린 표정을 풀고, 오른손에 쥔 장검으로 위협이 될 만한 소수의 괴물-재규어 인간과 독수리 인간을 요격했다.

그리고, 마침내-.

-쿠와아아아아앙!

-부우우웅!

-부웅! 부웅!

구조대가 도착했다.

사나운 야수의 포효 같은 엔진 소리를 토해내는 황금빛 배틀 바이크가 생존자들을 지나쳐 괴물들 사이를 가른다. 이어서 그 뒤를 따르는 새카만 배틀 바이크 부대가 그 갈라진 틈을 파고든다. 그 과정에서 전쟁 군주와 오크 기사들이 휘두르는 무기는 너무나도 쉽게 야만인들을 으깨버린다.

“분대 회전!”

한 번 완벽하게 밀려드는 야만인들의 본대를 박살낸 뒤, 전쟁 군주의 호령이 울려 퍼지고 배틀 바이크들은 생존자들을 중심으로 커다란 원형을 그리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콰작! 콰작! 콰작!

-으적! 으저적!

믹서기의 칼날처럼 생존자들 주위를 회전, 끊임없이 밀려드는 야만인들을 으스러트리기 시작하는 오크 기사들. 그 광경에 어느 정도 안전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긴장을 풀기엔 아직 이르지만 이미 대부분의 생존자들은 탈진상태였다.

그렇게 생존자들이 가쁜 숨을 몰아쉬는 도중-

-끼이이익.

선두의 황금빛 배틀 바이크가 원형의 회전 톱날에서 벗어나 중심의 생존자들 앞에서 멈춰 서고, 그 위에 탄 전쟁 군주가 천천히 바이크에서 내린다.

“...”

“...”

2m 20cm에 달하는 근육질 거구, 찬란한 황금빛 갑옷과 그 등 뒤에서 펄럭이는 상아빛 망토, 그리고 무엇보다 후광처럼 뻗어 나오는 맹폭한 기세. 그 위용에 생존자들 대부분이 압도당해 주춤거리고 있을 때-,

“어, 음...”

전쟁 군주는 말없이 시선을 돌려 아직까지 서 있는 생존자들을 응시했다. 정확히 말하면 방금 전에 어색한 신음 소리를 내던 하프 오크-오혜영을. 자신에게로 향하는 전쟁 군주의 시선에 그녀가 잔뜩 긴장하자 전쟁 군주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괜찮느냐?”

“넵! 괜찮슴다! 전쟁 군주님!”

“...그래, 그거면 됐다.”

오혜영이 군기가 바짝 든 표정으로 소리치고 전쟁 군주는 천천히 고갤 끄덕였다. 그 뒤, 그는 다른 생존자들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곳은 안전하지 못하니 미르 중앙 행정처로 이동해야 합니다. 바이크를 뒤에 타고 움직일 테니 모두 준비해주시길. 그리고 그쪽은... 미궁 출신이군. 실력도 꽤 괜찮아 보이고.”

전쟁 군주의 시선이 서예린에게 향한다.

팔다리가 작살나 주저앉은 소녀 옆에서 경계하고 있는 인간 여전사, 일상복 차림인 다른 이들과는 달리 그녀는 미궁 안에서나 볼 법한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칼을 쥐고 그를 경계하는 자세만 봐도 꽤 실력자라는 것이 느껴졌는데, 왼팔의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였다.

그에 전쟁 군주는-.

“받아라.”

자신의 배틀 바이크에 다가가서 보관함에 있는 향수병 같은 유리병을 하나 꺼내 던졌다. 서예린이 솜씨 좋게 오른손에 쥔 장검으로 던진 병을 받아내자, 그는 그대로 바이크 위에 올라타며 말을 이었다.

“골절, 관절용 급속 치료 포션이다. 그냥 상처 부위에 뿌리면 되지.”

“...”

“난 외곽에 남은 위험한 놈을 처리할 테니, 혹여 이 안쪽으로 들어올 만한 놈은 네가 처리해라.”

그 말을 끝으로 전쟁 군주는 거칠게 바이크를 몰아 외곽의 오크 기사들을 뚫고 또 다시 나타난 심상치 않은 외형의 한 괴물을 요격하러 나선다. 그렇게 전쟁 군주가 사라지고 난 뒤, 서예린은 장검을 땅에 박아 넣고 포션을 낚아채 따서 왼팔에 뿌렸다.

“끄응.”

뼈가 부러지는 ‘우두둑!’ 소리가 흘러나오는 상처 부위. 꽤 고통스러운 듯, 서예린의 얼굴이 찡그려졌지만 관절이 박살나 덜렁거리던 왼팔이 다시 제자리를 잡는다. 얼마 가지 않아 손가락 또한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걸 확인하자 그녀는 쌍검을 집어 들면서 오혜영 쪽을 바라보았다.

“뭐임?”

“...예? 저요?”

“저 괴물이랑, 아는 사이?”

접근하던 괴물을 수정검으로 손수 토막 내는 전쟁 군주 쪽을 향해 눈짓하는 서예린. 그에 오혜영이 난처한 미소를 짓는 가운데, 부지런히 부상자들을 옮기던 지아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혜영이 아빠예요.”

“...아빠!?”

그 대답에 서예린의 표정이 기괴하게 변한다.

미궁 밖으로 나오고 상황이 바뀌었다고 한들, 미궁에서 형상된 시각은 그리 달라지지 않는다. 인간을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는 이종족들, 그들에게 인간과 관계를 가져 아이를 가진다는 건 꽤 부끄러운 일로 취급된다. 그게 아무리 ‘종족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씨뿌리기가 힘든 장생종도 이럴 진데, 인간보다 성장 속도가 빠른 오크는?

미궁 안에서, 오크에게 인간은 ‘고깃덩이’ 그 이상의 가치는 없다. 근데, 하프 오크? 오크는 자신들에 대한 조롱이라고 여길 거다. 그런데, 오크들의 정점인 ‘전쟁 군주’에게 인간 혼혈의 자식이 있다니? 믿기 힘들다는 서예린의 반응에 재빨리 지아라가 대꾸한다.

“에... 진짜 아버지는 아니고 양아버지긴 하지만요. 바깥 인간들에 대한 일종의 정치적 제스쳐로 된 거라서.”

“음, 민감한 주제. 미안함.”

“뭐, 괜찮슴다.”

오혜영을 향해 고갤 꾸벅 숙이는 서예린, 그에 오혜영은 별것 아니라는 듯이 고갤 젓곤 다시 거동이 힘든 부상자들을 옮긴다. 무안함을 느꼈는지 서예린이 좀 과하게 주위를 경계하는 가운데, 이 영과 이 경은 옆의 멀쩡한 탑차를 열었다.

“흐, 히에에에엑! 끄아아악!”

피눈물을 흘리며 돌격하는 한 민간인, 하지만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이 영이 튀어나가 절묘하게 뒤통수를 후려친다. 두 사람이 맞고 기절한 남자를 끌어내고, 겁에 질린 채로 탑차 창고 안에서 벌벌 떠는 다른 이들을 향해 나오라고 손짓한다.

그렇게 하나 둘씩 정리하고 있을 때-.

“...모두 정지!”

돌연 떨어진 전쟁 군주의 명령에 생존자들 주변을 돌던 배틀 바이크들이 일제히 정지한다. 그리고, 주위를 경계하면서 전쟁 군주가 바라보는 방향을 응시했다.

전장 한 쪽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난 녹색 안개

대충 300m 밖에서 돌연 솟구친 그것은 순식간에 주위의 야만인들을 집어삼킨다. 그리고, 그 안에서 야만인들의 비명이-호루라기로 나오는 소리보다 ‘좀 더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온다.

-캬하악! 캬하하하악!

-캬학! 컥!

그 속에 휘말렸다가 간신히 도망쳐 뛰쳐나오는 야만인들은 마치 산성 용액에 푹 담겨졌던 것처럼 연기를 뿜어내고 전신의 피부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숨을 제대로 못 쉬는지, 야만인들은 얼마 뛰어가다가 털썩 쓰러지고 이내 밀려오는 녹색 안개에 다시 삼켜진다.

“씨입! 뭘 멍하니 있어! 빨리 일어나! 어서 빨리...”

그 파도처럼 밀려오는 녹색 안개에 사색이 된 지아라가 소리치고 생존자들이 다급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나야, 나! 무기 휘두르지 마라!

확성기로 소리 지르는 것 같은, 주위의 소음을 가볍게 압도하는 커다란 소리가 녹색 안개 속에서 나온다. 그에 사색이 되어 움직이던 사람들이 멈칫하고, 밀려오던 녹색 안개는 그대로 부드럽게 Y자로 갈라지며 일행들만 피해 주위를 잠식한다.

“음, 다시 만나니 반갑구만!”

그리고, 그 녹색 안개 사이에서 한 사람이 느긋하게 걸어 나온다. 하얀 가운 차림에 눈에는 파란 보안경, 그리고 녹청색으로 물든 오른손의 비늘 장갑까지. 약간 변화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랩실에서 나온 듯한 복장의 여자... 아이였다.

그 모습에 전쟁 군주는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는다.

“...대단하군.”

“뭐, 내가 좀 대단하긴 하지! 어! 그래! 반갑다! 애들아!”

전쟁 군주의 곁에서 잔뜩 경계하는 오크들을 뒤로 한 채, 독안개 속에서 나온 강수영은 태연하게 생존자 무리 쪽으로 다가와서 서예린-정확히 말하면 다시 정신 차린 남궁진아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에 남궁진아가 진땀을 흘리면서도 고갤 꾸벅 숙이자 서예린도 긴장한 채 인사한다.

“남궁진아였지? 넌 서예린이고. 근데, 혹시 우리 알바생 새끼 못 봤냐?”

단도직입적인 질문, 그에 남궁진아는 물론이고 이종족 아이들까지 표정이 어둡게 변한다. 대답을 안 들어도 내용을 알 수 있는 그 모습에 강수영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하, 됐다. 표정만 봐도 알겠네. 씹새끼, 결국 돈 못 받겠네. 내게 돈 뜯어가고 도망쳤어.”

“...끝나면 제가 보상 하겠습니다. 새벽이 덕분에 저희 모두 살았거든요.”

“됐다. 내가 원했던 건, 놈의 배때지를 후려치는 ‘타격감’이었지 그런 푼돈이 아니거든.”

“아, 잠시만요! 새벽이의 가방이 있거든요?”

“가방?”

남궁진아가 시선을 보내자 이영이 재빨리 트럭에 있던 가방을 회수해서 강수영에게 내민다. 그에 강수영이 묘하게 변한 가운데, 남궁진아는 한새벽이 했던 일에 대해 말한다. 미리 준비하고 애들을 규합한 것, 독마법으로 활약한 것, 마지막에 일행과 떨어졌다가 도망치라고 하면서 남겨진 것까지.

그 남은 가방을 보면서 강수영은 작게 혀를 찼다.

“참나, 마지막엔 그 녀석답지 않게 죽었네.”

“...”

“그나저나 너 상태가 안 좋네. 상처 치료부터 하자.”

“아, 네.”

“급속 치료라서 좀 아플 거야.”

의사 가운 안쪽에서 주사기와 유리병을 꺼낸 강수영, 그녀는 주사기로 유리병의 액체를 쪼옥 빨아들이곤 남궁진아 앞에 쪼그리고 앉아 부러진 무릎에 푹 박아 넣었다. 이어서 살짝 약물을 주입했다.

“...!!”

뼈가 으스러지고 불타는 감각. 이전에 당했던 ‘고문 마법’ 만큼은 아니었지만 심각한 통증에 남궁진아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숨넘어가듯 입을 벌리는 가운데, 꺾인 무릎이 ‘뚜둑! 뚝!’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되돌아간다. 그 모습을 보며 강수영은 빙긋 웃었다.

“어때, 성능 좋지? 엄청 잘 움직일 거야. 급속 치료 포션은 대부분 신경 연결 디테일이 부족한데, 이건 신경 연결마저 95%가량 복원한다고? 게다가 농축까지 해서 적은 양으로도 이렇게 치료가 되지.”

“...”

“자, 그럼 나머지 팔 다리도 하자! 아, 발목도 있네? 걱정마, 포션은 많아요.”

“자, 잠깐만...”

“안 돼. 안 돼. 빨리빨리 일어나야지.”

자비 없이 푹푹 찌르는 주사기. 연이은 고통에 쇠약하진 남궁진아가 거품 물고 기절하고, 서예린은 미친년을 보는 표정으로 은근슬쩍 자신의 상처를 숨기며 거리를 두는 가운데, 강수영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생존자들을 한 번 훑어보곤 전쟁 군주를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으니 그냥 천천히 가는 게 어때?”

“흠, 뾰족한 수가 있나?”

확실히, 분견대 정도면 충분할 줄 알았건만 생존자가 50명이 넘게 있는 상황, 부상당한 민간인을 뒤에 하나씩 달고 싸우는 건 무리가 있었다. 전쟁 군주가 되묻자 그녀는 씨익 웃었다.

“뭐긴.”

가볍게 발을 구르는 강수영, 그런 그녀의 발밑을 중심으로 진녹색 광채가 거미줄처럼 지표면을 뻗어나간다. 심상치 않은 광경에 오크 기사들이 반사적으로 강수영을 향해 무기를 겨누는 가운데, 바닥에 가득한 피와 시체가 맑은 연두색으로 물들며 질척하게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어!? 시체가...”

“아, 미안. 사람 시체도 있었지? 그래도 이미 녹아서 어쩔 수 없네.”

피와 시체로 질척질척하던 지면은 이젠 맑은 연두색 액체로 찰랑였다. 그 광경에 주저앉아있던 사람들이 뭐가 일어날지 모르는 불길함에 허겁지겁 일어서는 가운데-.

“MAR-TA-NIA!”

강수영이 주문을 외우자 거목(巨木)이 땅에서 물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그녀의 발밑에서부터 하늘 향해 뻗은 장갑을 낀 손 위쪽으로 그 맑은 연두빛 액체가 빨려들어 간다.

손바닥 위에 뜬 직경 1m 남짓한 커다란 연두색 구체

소용돌이치는 그 구체는 이내 녹색 증기가 되어 호스처럼 주위의 안개에 꽂힌다. 이어서 옅어지던 녹색 안개가 진해진다.

“이 구름과 함께 가는 거지. 보다시피 옅게 하면 수백m를 덮을 정도로 광범위하고, 연막효과도 있으며, 자유롭게 통제도 가능해. 단점이라면 좀 이동이 느리고, 밖에서 날아오는 무기는 막기 힘들다는 거?”

“좋아.”

강수영의 말에 전쟁 군주는 고갤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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