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막간. 움직이는 주역들 >
1.
거대한 도살장으로 변한 미르에서 현재 가장 안전한 장소는 ‘미르 중앙 행정처’였다.
미르의 정중앙에 위치한, 동서남북으로 문이 있는 커다란 정사각형 건물. 건물 자체도 크고 튼튼하지만 무엇보다 그곳엔 지금 생도들을 가르치는 선생들이 몰려있었다. 수업에 들어가기 전, 이능력 전담 수사대에서 온 ‘특별한 전파사항’-문자로 알리기 껄끄러운 그 소식을 알리기 위해 교사들을 소집한 여파였다.
그리고, 그렇게 모인 교사들의 활약은 대단했다.
“끼에에에엑!”
“카아아악!!
한쪽 무릎을 꿇은 고학년부의 화학 담당 교관이 양 손바닥으로 지면을 후려치자, 앞쪽의 불붙은 지면에서 불꽃이 튀어나와 전방으로 날아간다. 그리고, 그 불덩이에 맞은 야만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나뒹군다.
특출난 마법 저항력을 가진 야만인들
하지만, 화학 선생의 공격 앞에선 유별나게 취약했다. 순수한 마법이 아닌 도로 아스팔트를 뜯어내 만든 ‘불붙은 타르 덩어리’였기에 달라붙는 순간부터 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흠!”
-우두두둑!
다른 곳에 있는 선생들의 활약 또한 그에 못지않았다.
날붙이로 능숙하게 야만인들의 멱을 따는 미궁 출신의 중등부 체육 선생, 근처의 폐차를 세워서 즉석에서 방어벽을 만드는 도덕 선생... 아직 미성숙한 청소년들, 하지만 동시에 초인인 미르 생도들이 반항할 시 제압하기 위해 미르의 선생들은 전투에 소양을 가지고 있었고 현 상황에선 어마어마한 이점이 되었다.
그러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어떻습니까?”
부장급 교사들이 간신히 휴식시간에 짬을 내어 모인 회의장, 비치된 생수를 거칠게 들이켜며 교장인 정원용이 입을 열었다. 평상시의 양복 차림이 아닌 군용 전투복에 피와 땀에 범벅이 된 모습, 미르에서 가장 높은 분이긴 했지만 병력이 부족한 현 상황에서 그 또한 귀중한 전력 중 하나이기에 그도 예비대 중 하나로 전선에 투입되고 있었다.
그 질문에 똑같이 피칠갑을 한 전투복 차림의 교사가 허겁지겁 에너지 바를 씹으면서 고갤 저었다.
“더 이상 버티는 것은 무리입니다.”
“미궁 출신들이 무장을 잘 하고 있어서 괜찮지 않습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문제는 쌓이는 피로와 민간인들입니다.”
미르에서 가장 커다란 규모의 건물인 만큼, 사태가 발생하자 중앙 행정처로 도망친 사람들 또한 엄청나게 많았다. 대략적인 숫자만 거의 3천 명에 달하는 수준,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별 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 민간인들이었다.
교장의 얼굴이 찡그려지는 가운데, 교사는 말을 이어나갔다.
“사람들 중에서 발작하는 이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일반인이라면 그래도 생도들이 제압하고 있지만, 문제는 생도들 중에서도 발작하는 이들이 나왔다는 겁니다.”
“...”
“그냥 평범한 생도였습니다만 살육에 눈이 돌아가니 엄청난 괴력을 뿜어냈다고 하더군요. 간신히 선도부들이 달려들어서 기절시켰지만 2명이 당장 전투 불능이 됐습니다. 그 과정에서 민간인 7명이 죽었고요.”
“...”
“눈 돌아가는 민간인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 대꾸에 정원용 교장은 마시던 수통을 내려놓게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 오늘 아침에 들은 ‘닥터 크림슨이 한국에 밀입국한 것 같다.’는 소식. 거기엔 당연히 닥터 크림슨과 관련된 자료도 받았고, 거기엔 ‘점점 미쳐가는 사람들’에 관한 내용이 있었다.
손을 뻗어 고열량 초콜릿바를 뜯어 거칠게 씹으며 정원용 교장은 입을 열었다.
“정신력이 약한 아이들은 전선에서 빼도록 하죠.”
“하지만, 여기서 애들까지 빼면 밀립니다.”
그 제안에 다른 교사가 반대한다. 중앙행정처는 미르의 정중앙, 당연히 동서남북 다 뚫린 형태. 그렇기에 사방에서 밀려드는 괴물을 막아야 했기에 전선의 소모가 엄청났고, 어느 정도 싸움을 할 수 있는 미르 생도 또한 투입되고 있었다.
그 반대 의견에 정원용 교장은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휴식시간을 늘려봅시다.”
“방법이 있습니까?”
“전선의 범위를 줄여서 예비대를 더 만들고, 로테이션을 짧게 해야죠. 여기, 중앙 행정처의 건물 일정 부분을 아예 넘겨버리면...”
-덜컥!
정원용 교장이 초콜릿 바를 우물거리면서 탁자 위의 지도 한쪽을 가리키며 작전을 말하던 도중, 다급하게 휴게실 문이 열린다. 그와 함께 들어오는 미르 생도, 소년의 얼굴은 절망적인 현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게 환하기 그지없었다.
“구조대가 왔습니다!”
“...구조대?!”
“예, 북쪽의 연구지역 쪽 도로에서요!”
생각지도 못한 희소식에 교장을 포함한 교직원들은 곧바로 생도의 뒤를 따라 북쪽의 건물로 향했다. 원래대로라면 쭉 뻗은 대로가 있는 곳, 하지만 미르의 지형과 건물이 기괴하게 변하면서 대로 곳곳엔 소름끼치는 해골탑과 시체무더기가 쌓여있었다.
몰려오는 야만인들을 막기 위해 교사와 생도들이 분투 중인 가운데-.
-쿠와아아아아앙!
-쿠앙! 쿠앙! 쿠앙!
저 멀리, 대로 곳곳에 솟구친 장애물들을 뚫고 오는 검은 물결이 보였다. 작은 전차를 연상케 하는 거대한 오토바이에 탑승하고 있는 이들, 그들은 몸에서 붉은 아우라를 뭉클뭉클 뿜어내며 앞을 가로막는 모든 방해물을 으스러트리고 있었다.
-끼에에-
-으적!
피에 젖은 대지에서 기어 나온 야만인들이 저항해보려 하지만 오토바이 탑승자가 휘두른 3m에 달하는 도끼창에 상하체가 분리되어 공중에 날아간다. 이어서 뒤쪽의 할버트들이 날아오는 살덩이를 찢어발긴다. 피와 내장을 뒤집어 쓴 채, 그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 살벌한 구조대의 모습을 본 미궁출신들의 안색이 일제히 굳어진다.
“오크들이군요.”
“그것도 전부 기사급입니다.”
평범한 야만인들과는 비교가 불가능한 괴물들, 하지만 어찌되었든 간에 지원군인 것은 확실해보였다. 그러나 그들이 흘려내는 흉맹한 기세는 사람들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오히려 사람들이 야만인들이 몰려올 때보다 더 긴장하는 가운데-
-끼이이이익!
다가온 배틀 바이크들이 차례대로 멈춰 선다.
외곽의 오크 기사들은 바이크에서 내려 진형을 구축해 밀려오는 야만인들을 쳐내는 가운데, 선두의 오크들 중 유별나게 커다란 하나가 바이크에서 내려 이쪽으로 다가온다. 얼굴을 가리는 바이저 너머로 보이는 난폭한 두 눈, 솔직히 야만인보다 더 껄끄러웠지만 정원용 교장은 그 기색을 숨기며 그를 맞이했다.
“반갑습니다. 미르의 교장 정원용입니다.”
“오크 군단의 제 1 전사대, 제 1 분견대장 크락쉬다. 너희들을 돕기 위해 파견됐다.”
살짝 어색한 통성명이 이어진 직후, 오크 무리에서 한 인영이 재빨리 빠져나와 접근한다. 2m에 달하는 오크 기사에 비하면 호리호리한 체격과 평범한 얼굴. 전찬휘 경감이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며 반색하는 정원용 교장을 향해 고갤 숙였다.
“반갑습니다. 이능력 수사대 소속 전찬휘 경감이라고 합니다.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파견 됐습니다. 크락쉬님, 잠시 기지의 방비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어디가 취약한지 자료를 줘봐라.”
전찬휘 경감의 요구에 내키지 않아 하는 표정이지만 순순히 대답하는 크락쉬, 그에 함께 나온 교사 중 하나가 재빨리 약도를 가져와 그에게 내밀고 크락쉬는 다른 분대장급 오크들을 모았다. 그러는 동안, 전찬휘 경감은 빠르게 현 상황에 대해 브리핑했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제물을 바치고 있는 행위를 멈춰야 한다는 거군. 그리고, 그 장소는 검은 태양이 떠오른 서쪽의 저학년 교실로 생각되고.”
“예. 요격할 인원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곳에 저희들이 파견된 것이고요.”
“저들만으로 충분합니까?”
함께 브리핑을 들었던 한 미궁 출신의 부장 교사의 질문, 자기에 시선이 쏠리자 그는 담담히 말을 이어나갔다.
“확실히, 오크 기사들은 강하긴 합니다. 그러나 이런 무지막지한 일을 벌인 자와 격이 맞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예, 맞습니다. 좀 부족함이 있을 겁니다.”
그에 순순히 긍정하며 전찬휘 경감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다른 분들도 모셔왔습니다. 잠시 저희 일행과 떨어졌지만 송파구 시장 오무혁씨도 함께 왔습니다. 그리고, 강수영 연금술사도요.”
“...잠깐 수영이도 왔다고?”
“예.”
강수영이 합류했다는 말에 정원용 교장이 못마땅하단 듯이 침음성을 흘리는 가운데, 전찬휘 경감은 주위의 교사들을 한 번 훑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전쟁 군주와 연금술사, 두 명만으로도 충분히 강력하지만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
“...”
“미르의 교사분들 중에서도 지원자를 뽑고 싶습니다.”
예상된 요청에 교사들은 미간을 찡그렸다. 당장은 오크들의 지원에 숨통이 트였지만, 이래선 버티는 게 더 힘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버티고만 있다가는 죽는 건 거의 확정된 사실이다. 고민이 깊어지는 가운데-.
-막아! 막아!
-죽어라!
-미친...! 지원 요청! 광전사다! 핏빛 사자 가르트람이야!
건물 한쪽에서 쇠끼리 부딪치는 굉음과 함께 다급한 오크들의 고함소리가 울려 퍼진다.
“..가르트람?”
“막아!”
전찬휘 경감의 대꾸에 미궁 출신 교사들이 고함이 들려왔던 방향으로 다급하게 내달렸다. 교장과 전찬휘 경감도 분위기에 휩쓸려 같이 움직였고, 도착한 그곳에서 오크 기사들이 포위하고 있는 한 가운데에 있는 전사 하나를 볼 수 있었다.
얼굴까지 완벽하게 가린 섬뜩한 핏빛 갑옷의 전사
그 갑옷은 가시가 뾰족뾰족하게 튀어나와있어서 꼭 악마의 형상 같았고, 그의 허리춤엔 주렁주렁 달린 두개골은 그런 추측에 확신을 심어주었다. 그 전사의 손에 들린 검면이 넓적한 장검은 흑청색 광택을 흩뿌리며 요요롭게 빛나고 있었다.
“후욱. 후욱. 후욱.”
눈구멍이라곤 보이지 않는 매끈한 투구의 정면, 그 안에서 들려오는 짐승이 그르렁 거리는 듯한 기괴한 숨소리. 그런 광전사의 발밑에는 이미 할버트 혹은 방어구가 박살난 채 오크 기사들이 5명이나 너부러져있었다. 그 모습에 다른 오크 기사들도 섣부르게 접근하지 못했다.
“잠시! 잠시만요! 그 사람은 적이 아닙니다! 적이 아니에요! 우리 편입니다!”
다급하게 뛰어온 교장이 포위한 오크들 앞을 막아서 말하자-.
“적이 아니라고?”
오크 기사들 뒤편에서 커다란 체격의 오크 기사가 나오며 대꾸한다. 교장과 대표로 인사했던 크락쉬라 불린 오크, 그는 벗었던 헬멧 바이저를 다시 착용하곤 신중한 표정으로 핏빛 전사를 경계하며 무기를 들었다.
“뭘 모르는 것 같군. 저자는 유혈의 신을 섬기는 사도다. 그것도 이름이 꽤나 알려진 아주 위험한 괴물이지. ‘붉은 야수’, ‘핏빛 사자 가르트람’.”
“...”
“이 상황이 칸의 신도가 벌인 걸 생각하면 현 상황과 무관하지 않아.”
그 크기를 알 수 없는 광대한 미궁, 그 안에서 이름을 알린 투사.
일신의 무력은 오크 전쟁 군주와도 비견될 만한 자였다. 오크 무리가 수십만 단위로 커진 지금은 상대가 되지 않지만, 변천이란 현상 때문에 100~200단위의 소규모로 다녀야만 하는 미궁 안에서 가르트람과 그 휘하의 광전사들은 전쟁 군주의 무리도 목숨이 위험한 위협이었다.
실제로 그가 모시는 전쟁 군주-오무혁의 얼굴에 난 커다란 상처는 저 가르트람이 지상에 올라오면서 맞서 싸우다 생긴 것이었다.
“...지금은 아니다.”
그런 크락쉬의 말에 핏빛 전사의 투구 아래에서 짐승이 그르렁 거리는 것 같은 섬뜩한 음성이 흘러나온다. 그리곤, 그는 손에 쥔 장검을 바닥에 꽂아 넣곤 천천히 투구를 벗었다. 그와 함께 드러난 얼굴에 전찬휘 경감은 미간을 찡그렸다.
“...김가트 선생님?”
“오랜만이지?”
그런 전찬휘 경감을 향해 평소대로 씨익 웃는 김가트, 그 뒤 그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크락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난 더 이상 칸의 신도가 아니다.”
“...설마?!”
“그래, 신앙을 배신한 배교자지. 냉정하게 지상에서 칸의 신도가 활보할 수 있겠나?”
그 고백에 얼굴에 경악과 놀라움이 감도는 크락쉬. 덩달아 오크 기사들의 경계도 약간이지만 누그러지는 가운데, 정원용 교장은 그런 김가트를 보며 입을 열었다.
“몸은 괜찮아지신 겁니까? 거동할 수 없을 정도로 굉장히 아프셨다고 들었는데요.”
“좀 괜찮아졌으니 이렇게 나왔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해야 할 일이 남아있으니까요.”
“...해야 할 일이요?”
교장이 의아하다는 듯이 대꾸하자 김가트는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고백하듯 입을 열었다.
“현 상황이 터지기 전, 미궁 출신들이 어느 정도 대비한 것은 아시죠?”
“...예, 뭐.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뭔가 불길한 예언을 들어서 약간씩 준비를 해뒀고, 덕분에 좀 쉽게 막을 수 있었죠.”
“그 소문을 처음 안 놈이 제게 말해주더군요. 앞으로 벌어질 건... 일종의 피의 신께서 제게 내리는 징벌의 성격을 띄고 있는 것 같다고.”
“징벌이요?”
“예, 제 머리 위에 ‘피의 신’의 손길이 감돌고 있다고 합니다. 밖으로 나온 덕분에 저는 배교를 했음에도 그다지 시련을 겪지 않았죠. 그러니 그분께서 못마땅하실 법도 하죠.”
배교자에게 내리는 신의 징벌, 미궁에선 신의 징벌은 하나하나가 목숨을 위협하는 시련이었다. 하지만, 지상에 나온 지금은 대부분의 징벌은 의미가 사라졌다. 그 해명에 오크 기사들은 서로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더니 이내 천천히 무기를 내렸다.
이어서 크락쉬가 고갤 저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신의 징벌에 다른 사람이 이렇게 많이 휘말리다니.”
“나도 이럴 줄은 몰랐어.”
“그 말이 사실이라면 네 말대로 결자해지가 필요할-.”
-와아아아아!
갑작스럽게 건물 안쪽에서 들려오는 오크들의 거친 환호소리, 난데없는 부하들의 소음에 크락쉬는 말을 끊고 얼굴을 찡그렸지만 이내 ‘전쟁 군주! 전쟁 군주! 전쟁 군주!’를 외치는 환호성에 재빨리 동료들과 함께 부동자세를 취했다.
“흠.”
이윽고, 전쟁 군주가 안으로 들어섰다. 야만인들이 내지르는 비명과 전투의 소음으로 가득한 실내였지만 순간적으로 전쟁 군주의 존재감이 주위에 들어차며 정적에 빠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 위압감에 교사들이 입술을 떼지 못하는 가운데-
“오, 아저씨! 아저씨도 잘 있네?”
“야, 너 여기에 왜 왔...”
“에이, 아저씨가 위험에 빠졌는데 내가 밖에서 마냥 두고 볼 순 없잖아? 서로 의리가 있지!”
전쟁 군주의 뒤편에 함께 움직이던 작은 인간 여자가 먼저 튀어나와 정원용 교장과 인사한다. 귀빈을 앞두고 나온 무례에 정원용 교장은 살짝 당황했지만, 전쟁 군주는 그런 교장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살짝 지나쳐 뒤쪽에 있는 김가트의 앞에 섰다.
“흐, 오랜만이군. 가르트람.”
위협에 가까운 인사와 함께 얼굴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크지만 희미한 상처를 손으로 스윽 훑는 오무혁, 그에 김가트도 투구를 옆구리에 낀 채 땅에 꽂은 칼을 뽑고 반사적으로 경계한다. 그런 김가트의 모습을 보던 전쟁 군주는 이내 김이 빠졌다는 듯이 가볍게 혀를 찼다.
“약해졌군.”
“...내가 약해졌다고?”
“당연하지 않나? 유혈의 신을 믿지 않는 광전사라니? 웃기지도 않아.”
김가트의 스산한 음성, 하지만 전쟁 군주는 코웃음 친다. 그 명확한 판단에 김가트가 침묵하는 가운데, 전쟁 군주는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 전투엔 변수가 많지. 하지만, 냉정하게 너와 싸우면 8~9할은 내가 별 다른 부상 없이 널 죽일 거다. 서로 박빙이던 이전과는 다르게.”
“...”
“뭐, 됐다. 지금 너와 싸워봤자 이득이 없지. 이젠 적도 아니니까. 그래도 내 등 뒤를 맡기기엔 충분할 것 같군.”
더 이상 할 말은 없다는 듯이 몸을 돌린 전쟁 군주는 정원용 교장 앞에 섰다. 그 사이, 강수영에게 한 번 잔소리를 쏟아낸 정원용 교장은 예의를 갖춰 전쟁 군주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오무혁 시장님.”
“구면이군요. 정원용 교장.”
“예.”
“그나저나 현 상황에 대해 전찬휘 경감에게 이야기는 들으셨겠죠?”
차분한 전쟁 군주의 말에 정원용 교장이 고갤 끄덕이자, 전쟁 군주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럼 어떻게 할지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죠.”
그렇게, 지상에서 움직일 사람들이 정해진 사이-.
“흐.”
지하, 가장 비천한 자들이 모이는 곳에서 한 사람이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