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유혈의 사원 >
1.
검은 태양이 떠오른 미르의 서쪽 지역
똑같이 지형의 변화가 이뤄졌지만 서쪽 지역의 분위기는 다른 곳과는 사뭇 달랐다. 다른 미르의 지역들이 살육에 미쳐 날뛰는 전사들이 떼거지로 나타난 전쟁터와 같았다면, 서쪽 지역은 꼭 사원(寺院)과도 같았다.
엄숙하고 고요한 사원
일그러졌어도 이곳이 미르인지 확인이 가능한 미르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여기가 미르인지 아니면 남미 아즈텍 제국의 유적 도시 한복판인지 헷갈릴 정도로 생소한 건축물들이 우후죽순처럼 튀어나와 있었으며, 그것들 대부분이 거의 신을 찬양하는 건축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곳엔 사제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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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야만인 제국의 사제
한 때, 존재하지 않는 허상의 신을 섬기며 살았던 이들은 살육의 신의 축복 아래에 다시 되살아났다. 그리고, 살육의 신은 그런 사제들에게 그들이 생전에 섬겼던 허상에 따라 마법은 아니지만 ‘마법과도 같은 권능’을 선물했다.
이제, 사제들은 오직 유혈을 위해 그 권능을 행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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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소리 호루라기를 불어대며 무작정 생명체를 죽이려드는 전사들이 아닌, 되도록 인간을 생포하려고 하는 사제들이. 하지만, 그런 특이함이 생존자에게 있어서 결코 좋은 뜻은 아니었다. 사제들이 사람을 바로 죽이지 않는 것은 그저-
희생양을 원하기 때문이었으니까.
정확히 말하면 ‘새로운 신’-검은 태양에 바칠 산제물을. 게다가 이들은 그 제물을 바치기 전에 ‘피를 흘리게 할수록, 더 고통을 줄수록 좋다.’는 믿음 아래 가열차고 끔찍하게 희생양을 고문하고 치료하기를 반복했다. 차라리 그냥 단칼에 죽는 게 낫다고 생각될 정도로.
안타깝게도 그런 사제들의 마수를 피할 수 있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완전히 낯선 곳으로 변한 미르에서 도망치기도 힘들었고, 대부분 저학년 생도들이라 저항하기에는 너무 나약했다. 그렇게 미르의 서쪽은 겉으론 다른 지역에 비해 고요하지만, 실상은 다른 지역보다 더 처절한 지옥이 펼쳐졌다.
그리고, 그 ‘조용한 지옥’에 새로운 불청객이 하나 자진해서 들어왔다.
“!?”
서쪽 지역에 위치한 한 건물의 내부, 의미 없이 건물 안을 배회하던 한 야만인 사제는 급작스런 통증에 비틀거리며 가슴팍을 쥐어뜯었다. 눈을 포함한 호흡기 전체에서 느껴지는 타들어가는 듯한 통증, 눈물 콧물을 흘리면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적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세엑...! ■■.. 캬아악.. ■■!”
사라진 아즈텍 제국의 언어로 적이 침입했음을 소리치는 야만인 사제,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몸부림에 비해 너무나도 작았다. 그래도 사제답게 ‘신의 권능’을 사용하여 이 위기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
일그러진 건물의 천장, 환풍구에서 튀어나온 검지만한 날카로운 ‘자줏빛 가시’가 기묘한 궤도를 그리며 날아와 시야의 사각에서 그의 한쪽 눈을 관통했다. 눈알을 터트리고 뇌를 관통한 자줏빛 가시는 이내 녹아내리며 품은 독을 뇌에 퍼트렸다.
그걸로 끝이었다.
인간을 고문하고, 그 살가죽을 벗기고, 그 심장을 뽑아내며 울부짖는, 공포스런 광기의 사제는 허무하게 경련하는 고깃덩어리가 되었다. 그렇게 한 사제를 죽이고 난 뒤, 보이지 않는 죽음의 손길은 계속해서 혼자 있는 야만인들을 하나씩 죽였다.
기습적으로 공격해 소리를 못 내게 막아버리고,
이어서 독 가시로 눈알을 꿰뚫어버린다.
효율적이고 기계적인 도살, 혼자 움직이던 사제들이 픽픽 죽어나가기 시작하자 건물 안의 다른 야만인들도 얼마 안가 이상함을 눈치 챘다. 자연스레 경계가 강화되는 가운데, 순찰을 돌던 원숭이를 닮은 작은 반인반수가 아직 피로 녹아내리지 않은 시신을 발견한다.
-끼아악! 끽끽! 끼요요옷!
그 시신을 보자마자 시끄러운 원숭이 울음소리 같은 경보의 소음을 내뱉은 반인반수, 침입자가 있음을 알리는 그 경보에 건물 안에 있는 야만인들은 적이 습격해올 시 대처하기 위해 주위를 경계하며 서로 뭉쳤다.
그러나, 침입자는 적이 뭉친 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
“케흑! 캬하아악! ■-■■!”
“■■■■-■■!
환풍구를 통해 흘러나오는 무색무취의 독숨결, 그걸 들이킨 이들이 순간적으로 혼란에 빠지고 이어서 독가시가 환풍구에서 튀어나와 사제의 눈알을 꿰뚫어 죽였다. 하지만, 혼자 있는 야만인을 죽일 때완 달리 소리 없이 죽이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그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
“■! ■■■!
동료들이 습격당했다는 소란에 근방의 야만인들이 경보의 외침이 들린 장소로 튀어나가는 동안-,
“~♪”
건물의 전혀 다른 층에 있는 침입자는 환풍구 쪽에서 손을 떼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상대적으로 경계가 허술해진 건물 내부의 심처로 움직였다. 그 과정에서 소란이 발생한 지역으로 움직이는 야만인들과 마주칠 수 있는 위험이 많았지만-.
“...”
마치, 적이 어디에 있는 지 다 파악하고 있는 것처럼 잠시 콧노래를 멈추며 숨었다가 그 통로로 야만인들이 지나가면 다시 움직인다. 그런 방식으로 침입자는 되도록 적과 직접적인 접촉을 피했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마주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할 때도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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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의 수발을 들던 소년 복사(Acolyte)들
생전에 이들은 사제들의 손과 발이 되어 많은 역할을 했다. 귀족에게 연락을 보낼 때는 전령으로서, 의식 제사 때는 희생양을 제압하는 도우미로서, 심지어 신전의 말을 듣지 않는 불신자들을 몰래 죽이는 암살자로서의 역할까지 담당했다.
그리고 지금, 이들은 살육의 신의 축복 아래에 좀 더 살육에 적합하게 변해 다시 되살아났다.
이제 반야수가 된 이 작은 악귀들은 당신을 조용히 암살하거나 혹은 당신의 존재를 다른 이들에게 알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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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와 인간이 뒤섞인 것 같은 반인반수
그 파란 털가죽 표면에선 빛이 끊임없이 반짝이며 주위의 색채를 모사했고, 덕분에 그들이 4족 보행으로 소리 없이 날렵하게 뛰어가는 모습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온도차로 인한 굴절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원근(遠近)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든 모습이지만, 침입자는 이번에도 정확히 파악했다.
입에 물고 있던 전자 담배를 한 번 크게 빨아들인 뒤, 그는 상의 안주머니에 전자 담배를 집어넣곤 호주머니에서 기묘한 비늘 주머니를 꺼냈다. 오른손에 쥔 컴뱃 나이프의 끝을 호주머니 안쪽에 살짝 담근 뒤, 다시 주머니를 집어넣곤 악귀들이 지나갈 길의 코너에 숨을 죽이며 섰다.
-콰득!
“...!?”
그리고, 보지도 않고 통로 쪽을 향해 가볍게 찍었다.
정확히, 달려가던 원숭이 악귀의 경추 위에.
코너를 돌다가 목뼈가 끊긴 선두의 원숭이 악귀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바닥을 슬라이딩 하는 가운데, 침입자는 뒤따라오던 원숭이 악귀들을 향해 튀어 오르며 왼손 검지와 중지를 튕겼다.
그와 함께 손가락 위에 떠올라 있던 2개의 자줏빛의 가시-<독침>이 아직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두 원숭이 악귀들을 향해 날아간다.
“끽?!”
“끼이익?!”
정확하게 두 원숭이 악귀의 눈을 향해 날아가는 <독침>.
그 찰나의 순간, 원숭이 악귀들은 날렵하게 반응한다. 각각 한 손을 들어 대신 막고, 필사적으로 얼굴을 움직여 눈이 아닌 뺨에 <독침>을 맞는다. 그러나, 그 사이에 접근한 침입자의 컴뱃 나이프는-
“카, 카학..!”
“키이이이...!”
시야가 가려진 원숭이 악귀들의 목젖을 깊게 훑었다.
곧바로 소리 높여 경보의 울음소리를 토해내려고 하는 원숭이 악귀들, 하지만 바람 빠지는 것 같은 소리만 나올 뿐 소리는 울려 퍼지지 않는다. 상처도 상처거니와 침입자의 나이프에 발린 강력한 맹독은 근육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악귀들은 완전히 무력화 되지는 않았다.
-파앙! 파앙! 파앙!
-휘잉!
상처 부위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타오르는 듯한 감각’에 시간을 끌면 불리하단 것을 직감한 악귀들이 공격을 쏟아낸다. 빠르게 이리저리 움직이며 4m 남짓한 긴 꼬리를 휘두르는 원숭이 악귀들, 톱날 달린 채찍이 쏟아지는 것 같은 그 맹공을-
“흡!”
침입자는 놀라운 동체시력으로 피하고, 동시에 왼손을 뻗어 두 개의 꼬리 채찍 중 하나를 정확히 낚아챘다. 왼손에 낚인 은빛 꼬리가 살아있는 뱀처럼 날뛰면서 그 위에 돋아있는 철조망 가시 같은 톱날들이 침입자의 손바닥과 몸을 긁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는다.
-땡그랑!
오른손에 쥔 컴뱃 나이프를 옆에 버리곤 양 손으로 꼬리를 쥔 뒤에 있는 힘껏 끌어당기는 침입자, 그 행동에 꼬리가 잡힌 원숭이 악귀는 비웃으며 도약해 섬뜩한 갈고리 같은 강철 손톱을 뻗었다. 동시에 꼬리가 잡히지 않은 원숭이 악귀는 침입자의 사각에 서서 꼬리를 찌른다.
즉흥적으로 이뤄진 악귀들의 절묘한 합공이지만-.
“...!?”
꼬리를 붙잡힌 원숭이 악귀가 달려드는 순간, 침입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꼬리를 놓고 똑같이 양손을 뻗는다. 그런 침입자의 양 손바닥은 붉은 증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위험함을 감지했지만, 이미 승부수를 띄워 도약했기에 원숭이 악귀는 뒤로 피할 수 없었다.
-촤학!
순식간에 돋아난 침입자의 손의 수포가 터지고 피와 고름이 섞인 액체가 원숭이 악귀의 전신에 흩뿌려진다. 결정타를 먹여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반인반수는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고 당연히 전신은 물론이고 그 두 눈에까지 피고름이 고스란히 튀었다.
“햐-하학!”
숨이 넘어갈 듯한 고통스런 숨소리를 내뱉는 원숭이 악귀, 두 눈을 감고 미친 듯이 강철 손톱이 돋아난 손아귀를 휘둘렀지만 침입자는 날렵하게 옆으로 꺾어 그대로 악귀와 부딪치지 않고 피한다. 그렇게 달려들던 원숭이 악귀는 결국 바닥에 꼴사납게 착지했지만-
-푸욱!
“흐!”
그 사이, 뒤쪽에서 날아오던 또 다른 공격-말뚝 같은 꼬리 채찍의 끝부분이 그대로 침입자의 몸을 꿰뚫었다. 등을 뚫고 배 쪽으로 튀어나온 말뚝, 정상적이라면 무릎을 꿇고 무력화가 될만한 부상이다.
“하하핳!”
하지만, 침입자는 한번 웃는 소리를 내곤 아랑곳 하지 않고 몸을 돌려 바닥을 기는 무방비의 원숭이 악귀를 덮쳤다.
“햐-하하학! 햐하학!!”
발광하는 원숭이 악귀를 왼손과 몸으로 짓누른 뒤, 그 오른손을 악귀의 얼굴에 가져다 대는 침입자. 그 손에서 흘러내리는 피고름은 악귀의 얼굴은 물론이고 안쪽 뼈까지 녹여버린다. 그 과정에서 악귀의 이빨에 깨물리고 날뛰는 꼬리에 난자당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힉!!”
고통에 발광하는 동료의 모습에 꼬리로 침입자의 몸을 꿰뚫은 원숭이 악귀가 거칠게 꼬리를 흔들지만 침입자는 끄떡없이 버틴다. 오히려 꼬리로 꿰뚫은 것이 악수, 그에 악귀는 결단을 내렸다.
“햐-아아아악!”
날아온 <독침>을 맞은 왼팔은 그래도 괜찮았다만, 처음 목을 베인 상처에서 머리로 올라오는 독기(毒氣)는 심상치 않았다. 얼마 안 가 죽게 될 것이 뻔한 상황, 불리하더라도 지금 승부수를 띄우는 것이 맞았다.
죽음을 각오하고 달려드는 원숭이 악귀의 모습에 등을 보인 채로 있던 침입자 또한 반응했다.
“흡!”
순식간에 빈사가 된 원숭이 악귀에게서 손을 떼고, 몸을 돌려 맺힌 고름을 휘두른다. 똑같이 고기 타는 소리와 함께 피어오르는 연기, 그러나 각오를 마친 악귀는 감겨지는 두 눈을 억지로 부릅뜨며 그대로 돌진하지만-.
-푸화아아악!
연이어 침입자의 입에서 뿜어지는 타르 덩어리 같은 질척한 연기에 직격 당했다.
코와 폐에서 느껴지는 타오르는 듯한 통증을 참고 손톱을 휘둘렀지만 이미 침입자는 다른 곳으로 피했다. 몸을 꿰뚫은 꼬리를 통해 그 위치를 파악해 다시 손톱을 휘둘렀지만, 거리를 벌리면서 쏟아지는 피고름과 폐와 코의 통증은 악귀의 몸을 빠르게 악화시킨다.
“끼... 끼이이이익.”
그렇게 정신없이 검은 연기 속에서 팔을 휘젓다가 힘이 빠진 원숭이 악귀는 결국 무릎을 꿇고 엎어졌다. 그 뒤, 침입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마냥 등을 꿰뚫고 배에 나온 송곳을 그대로 잡아 뽑곤 자신이 뿌린 연막 밖으로 나온다.
“53, 54, 55.”
죽어 나자빠진 원숭이 악귀를 보며 숫자를 센 침입자는 거의 뼈가 보일 정도로 망가진 왼손으로 더 이상 입기 힘든 넝마가 된 자신의 상의를 뜯어냈다. 그리곤, 오른손으로 그 상의를 뒤져 작은 포션 하나를 꺼내 만신창이가 된 왼손과 복부의 상처에 뿌리던 도중-.
“...어?”
흥미로운 얼굴로 배에 꼳혀있던 반인반수 시신의 꼬리를 응시했다.
그 끝이 송곳처럼 날카로운 금속질의 꼬리, 다른 원숭이 전사들은 숨이 끊어지는 것과 함께 그 꼬리가 힘을 잃고 녹이 슬어버렸지만 이번에 죽은 반인반수의 꼬리는 멀쩡히 그 광택을 유지하고 있었다.
“흠...”
복부와 등의 상처에 포션을 쓰면서 바닥에 떨어진 무뎌진 컴뱃 나이프랑 원숭이 전사의 꼬리를 번갈아보며 고민하던 침입자는 움직였다. 허릴 숙여 컴뱃 나이프를 쥔 뒤, 길쭉한 꼬리의 관절을 향해 칼을 몇 번 내리찍어-
-뿌드득!
그 끝부분을 잡아 뜯어냈다. 그 과정에서 이미 이가 나가있던 컴뱃 나이프가 부러졌지만 대신 그는 반짝이는 꼬리 끝부분 꼬챙이를 몇 번 휘둘러보곤 고갤 끄덕였다.
그 뒤, 침입자는 그 꼬챙이를 쥐고 더 깊은 심처의 통로로 움직였다.
그리고, 같은 시각.
황금빛 배틀 바이크를 탄 전쟁 또한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