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유혈의 사원 >
5.
날 희생양으로 지목한 사제는 예상대로 피라미드 안쪽으로 이동했다.
섬뜩한 수문장을 지나 들어간 피라미드의 입구, 가로세로 5m는 넘을 것 같은 커다란 정사각형 석제 통로는 벽과 천장에 빼곡히 ‘살육을 저지르는 인간의 형상’이 조각되어 있었다. 벽엔 일정 구간마다 음산한 검붉은색 화염이 일렁이는 횃불이 걸려 있었는데, 그 불길의 일렁임 덕분에 조각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분명, 통로의 모습은 불길하고 음산했으나-
-와아아아아아!
-■■! ■■■!
-풀^@^@#@^!!$&!!
야구경기가 벌어지고 있는 경기장 내부처럼 쩌렁쩌렁 울리는 야만인들의 함성, 의미를 알 수 없는 그들의 외침, 그리고 미친 생도들의 울부짖음으로 보이는 울부짖음. 그 공기는 ‘불길함’ 보다는 관중이 꽉 찬 스포츠 경기장에 들어간 것처럼 ‘묘한 열기’가 가득했다.
데자뷰(Deja Vu)라고 하던가?
이 광경은 분명 ‘처음 겪는 것’이지만 굉장히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래, 수없이 많이 본 것처럼 말이다. 아마 미래의 꿈속에서 봤겠지. 지금 당장 위험하진 않다고 느꼈기에 난 굳이 철장에서 탈출하지 않았다.
이 예감에 의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끝이 나올 거야.
그리고, 진짜 얼마 가지 않아 ‘탁 트인 지하 공간’이 앞에 드러난다. 명백히 부자연스러운 등장, 이정도로 가까이 있었으면 접근하는 도중에 알아차렸을 텐데 눈을 가리고 있던 장막이 한 순간에 걷힌 것처럼 갑자기 나타났다.
그리고, 그곳엔-.
“캬하하하악!”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엄마! 나 무서워! 엄마! 나 무서워!”
미쳐버린 미르 생도들이 갇힌 철제 우리가 켜켜이 쌓여있었다.
살육의 광기에 휩싸여 철장 안에서 짐승과도 같이 날뛰는 생도들, 하도 소리를 지른 탓인지 목소리가 하나 같이 잔뜩 갈라지고 쉬었지만 그들은 지치지도 않고 자기가 갇힌 우리를 후려친다. 손가락 피부가 다 까지고 그 뼈가 드러날 정도로.
그런 생도들을 목과 손발에 족쇄를 찬 야만인 노예들이 보살피고 있었다.
짐승에게 먹이를 주는 것처럼 고깃덩이를 우리 안으로 들이 밀거나, 양동이로 물을 뿌려서 묻은 오물들을 씻어내는 노예들. 그렇게 내가 창고를 한 번 둘러보는 사이, 야만인 사제는 지팡이를 들어 한 지점을 가리켰다,
“■■.”
이어서 내가 갇힌 우리를 들고 있는 노예들이 느릿느릿 사제가 가리킨 곳으로 가서 우리를 내려놓는다. 그 후, 사제는 다시 노예들을 이끌고 왔던 통로로 빠져나간다. 그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흡!”
난 곧바로 쇠창살 입구를 발로 강하게 후려쳤다.
-끼릭...
작은 소음과 함께 부서지는 자물쇠, 하지만 근처에 있는 야만인 노예들은 눈치 채질 못했다. 위쪽에서부터 들려오는 괴성과 환호, 그리고 곳곳에 있는 미친 생도들이 내뱉는 울부짖음에 이런 작은 소음 따윈 신경 쓸 겨를이 없겠지.
“쓰읍~!”
이어서 호주머니에 꽂아놨던 전자 담배의 카트리지를 교환한 뒤, 난 한 입 크게 빨면서 <눈>을 분산 배치해 주위를 둘러보며 상황을 파악했다.
대량 150평 남짓한 창고, 돌아다니는 야만인 노예들의 숫자는 15명, <관찰안>으로 파악한 결과 생도들을 관리하는 노예들의 능력치 스펙은 그냥 평범한 비각성인 수준, 도망칠 만한 곳은 내가 들어왔던 통로와 위쪽과 연결된 것으로 보이는 원시적인 승강기...
좋아. 어떻게 움직일지 정했다.
“하아...”
내 몸의 폐포 쪽 혈액 일부분을 <연금술>로 기체로 바꾼 뒤, 이어서 추가로 조작하여 투명한 숨결로 뱉어 냈다. <독숨결 구체>, 보이지 않는 그 죽음은 내 손짓에 따라 교묘하게 입구 쪽으로 날아가 소리 없이 터진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네 번째까지 터졌을 때-,
“허억...!? 허억 허억! 크으으아악!”
“폐! 폐가! 타들어간다!”
“눈 따가워! 코 따가워! 아파! 아파! 아파!”
통로 입구 근처 쇠우리에 갇힌 생도들이 발광한다. 유별나게 지랄하는 그 모습에 근처에 있는 야만인 노예가 짜증스런 표정으로 얼굴을 일그러트리곤, 물이 든 양동이를 들고 느릿하게 다가가 뿌리려고 하지만-.
“...!?”
-텅그렁!
갑자기 코와 폐가 타들어가는 느낌에 물이 든 양동이를 놓치곤 가슴팍을 붙잡는다.
아무리 기초 마법이라고 해도 <독숨결 구체>는 ‘살상 마법’, 그것도 이번에 자각하게 된 내 돌연변이로 강화되기까지 한 <독마법>이다. 마력 각성자인 생도도 휩쓸리면 빈사가 될 정도인데 일반인에 가까운 야만인 노예가 저항하는 것은 힘들지.
“...■■?”
제대로 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한 노예가 쓰러진 뒤에서야 다른 노예들도 이상을 눈치 챘다.
목을 붙잡은 채, 숨을 헐떡이며 경련하는 동료에게 다가간 또 다른 노예도 가슴팍을 붙잡고 쓰러지고 나서야 노예들은 이게 ‘공격’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재빨리 통로 쪽에서 멀어지면서 승강기 쪽으로 달려가는 야만인 노예들의 모습에-
-덜컹!
나도 움직였다.
깔고 앉아 있던 인간 가죽 바구니에서 은빛 꼬리송곳과 방패를 꺼내 쥔 뒤, 우리 문을 박차고 나왔다. 그리곤 경악하며 주춤거리는 야만인 노예들을 향해 달려들어 말뚝 같은 쇠꼬챙이를 휘둘렀다.
“...케흑?!”
“■■! ■■■!!”
“■■! ■■■ ■■!”
한 노예의 갈비뼈 사이를 꿰뚫고 심장에 박히는 말뚝, 옆에 있던 다른 노예가 덩치를 앞세워 붙잡으려 하지만 난 잽싸게 무기를 비틀어 뽑아내고 뒤로 빠졌다. 이어서 달려가면서 준비했던 <독숨결 구체>를 그냥 ‘숨결 형태’로 내뱉었다.
-푸화아아악!
투명했던 이전의 것과는 달리 진뜩진뜩한 타르 덩어리 같은 검은색의 <독숨결>. 그 시각적 효과에 휩쓸린 야만인 노예들이 패닉에 빠진 가운데, 연이어 <독침>마법을 만들었다. 그리곤 연막 사이로 뛰어들면서 운 좋게 숨결의 범위에서 벗어난 야만인 노예를 향해 날렸다.
“...■!”
뭉클거리는 검은 연기 속에서 튀어나온 흑자색의 <독침>, <관찰자의 눈>을 가진 나완 달리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야만인 노예들 입장에선 대처가 거의 불가능하다. 멀리 떨어진 야만인들부터 날아온 <독침>에 맞고 비명을 지르는 가운데, 난 연막을 뚫고 나와-.
“하!”
기합과 함께 가까운 야만인의 목에 칼침을 한 방 찌르고, 물 흐르듯이 다른 야만인들을 향해 움직였다. 내가 그렇게 빠른 건 아니다만 수십 개로 쪼개진 시야는 입체적으로 상황을 파악하게 해주며 최적의 행동이 뭔지 가르쳐 준다. 그냥 평범한 사람으론 절대 날 막지 못하지.
“■■!”
“■-■■!”
야만인 노예들은 어떻게든 소릴 지르며 적의 침입을 알려보려고도 하지만 생도들이 날 보며 내지르는 성난 고함소리와 건물을 울리는 환성에 묻혀 사라진다. 그렇게 난 모든 변수를 차단한 채, 야만인 노예들을 하나씩 처리했다.
“아, 힘들어요.”
20명 남짓한 야만인 노예를 모두 살해한 뒤, 난 근처에 있는 물이 든 목제 양동이를 뒤집어써서 몸에 묻은 피를 대충 닦아냈다. 그리곤 날 향해 풀어달라고 괴성을 내지르는 생도들을 무시하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역시, 이 위에는 투기장이 있군요.”
<관찰자의 눈> 시점을 옮겨 벽을 뚫고 이곳의 위를 보자 내가 ‘생각했던 것들’이 보인다. 돔 경기장을 방불케 하는 광대한 동공, 그곳에 로마의 콜로세움의 형상과 비슷한 투기장이 들어서 있었다. 관중석을 빼곡하게 들어앉은 수만 명의 야만인들은-
“■■! ■■! ■■!”
“■■! ■■! ■■!”
아래의 투기장, 지금 내가 있는 지하실의 바로 위를 내려다보며 광기어린 환호를 보내고 있었다.
잘려나간 시체가 둥둥 떠다니는 피의 호수, 그 중심에 빼곡한 조각이 새겨져 있는 지름 5m남짓한 원형의 석제 무대가 섬처럼 덩그러니 존재했다. 그 작은 무대 안에서 두 사람이 피의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죽어! 쥬우거!”
한 쪽은 미르의 생도, 욕설을 내뱉으며 손에 쥔 무기를 휘두른다. 자세는 좀 어설펐지만 마력 각성자에 반 <광폭화> 상태에 돌입해서 그런지 기세 자체는 꽤 흉흉했다.
그러나, 그런 흉흉한 기세와는 별개로 그녀가 휘두르는 무기와 무장은 그리 좋지 않았다.
나무칼과 찢어진 생도복, 그 나무칼의 날 부분에 박혀 있어야 할 흑요석 칼날은 없었고 생도의 목과 발에는 움직임을 방해하는 밧줄까지 묶여있었다.
그에 반해 상대방의 무장은 정반대다.
똑같은 나무칼이지만 범상치 않은 아우라를 내뿜는 1.5m에 달하는 거대한 대검, 바지만 입은 채 근육질 상반신을 드러난 상태지만 몸에 걸린 황금 장신구, 머리에 쓴 오토바이 헬멧 같은 형상의 둥그런 악귀의 투구... 모두 범상치 않은 ‘마법 장비’로 보이는 것들이다.
게다가 실력 또한 훨씬 뛰어났다.
“킥!”
비웃음을 흘리며 생도가 휘두르는 나무칼을 대검으로 튕겨내는 악귀 투구의 검투사, 그는 곧바로 생도를 쳐 죽이지 않고 ‘부드럽게’ 대검을 생도의 상반신에 가져다 대었다. 톱날 같이 뾰족뾰족한 흑요석 칼날이 자연스럽게 생도의 옷과 피부를 파고들자-.
-찌지지직!
악귀 투구의 검투사는 상반신을 튕기며 손잡이를 잡아당긴다. 그러자 생도의 상반신의 옷과 피부가 ‘갉아내는 것처럼’ 뜯겨져 날아간다. 가슴이 드러나고 그 상처에 피가 철철 흐르지만-.
“흐아아아악!”
여생도는 아랑곳 하지 않는다. 실성한 채, 미친 듯이 나무칼을 휘두른다. 그런 그녀의 칼질을 악귀 투구의 검투사는 대검으로 튕기고 유린한다. 그렇게 생도의 옷이 완전히 다 찢겨져 알몸이 되고, 휘두르는 엉성한 나무칼도 완전히 망가졌을 때가 되어서야-
-콰직!
악귀 투구의 검투사는 생도를 끝장을 내었다.
머리통을 세로로 쪼개는 일격, 목까지 쪼개진 알몸의 여생도는 휘청거리더니 결국 대검에 박힌 채로 축 늘어지며 경련한다. 그리고, 악귀 투구의 검투사는 낚은 물고기를 자랑하는 낚시꾼처럼 관중석 쪽을 향해 대검을 들어올린다.
-와아아아악!
-■■! ■■! ■■!
그에 관중석에서 깔린 야만인들이 환호의 비명을 내지른다. 너무 흥분해서 서로 찢고 죽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진짜 살아있는 것이 아닌 ‘NPC’ 답게 바닥에 깔린 핏물에서 다시 기어 나오기에 숫자는 줄지 않네.
-쿵! 부우욱!
그렇게 한 번 퍼포먼스를 벌인 악귀 투구의 검투사는 오른손을 뻗어 찢어진 생도의 배 피부를 가르고 심장을 뽑아낸다. 멈추진 않았지만 곧 멈출 것처럼 천천히 뛰는 심장, 악귀 투구의 검투사가 그 심장을 응시하며 음산한 죽음의 진언을 내뱉자-.
-쿵! 쿵! 쿵!
뽑힌 심장이 붉은 기운에 휩싸이며 다시 펄떡펄떡 뛰어오른다.
그 광경에 뒤쪽에서 대기 중이던 황금 쟁반을 든 야만인 노예가 다가온다. 검투사가 그 생기를 얻은 심장을 황금 쟁반에 내려놓자, 원형의 석제 무대의 한쪽에서 돔형 공간 밖-핏빛 하늘까지 이어지는 석제 계단이 나타난다.
음, 저것도 이 피라미드 위에 떠오른 검은 태양이 쏟아내는 피눈물처럼 물리적으로 말이 안 되네.
어찌됐든 실존한다. 그게 중요하지. 노예가 조심스럽게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을 향해 올라가는 가운데, 검투사는 대검에 박힌 시체를 쓰레기 버리듯 피의 호수에 내던진다. 그리고, 난 광경을 보며 턱을 매만졌다.
“흐음.”
저걸 보니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검색했던 내용이 하나 생각난다. ‘죽음의 검투’, 아즈텍 제국 사회에서 했었다는 제사 의례 중 하나로 차례대로 희생양이 죽을 때까지 1대1 결투를 벌이는 제사다. 물론, 저건 진짜 아즈텍 제국에서 행한 것과는 다르지만 말이지.
그나저나...
“되게 꼴 받는데요?”
저 ‘검투사’를 보는 순간, ‘죽이고 싶어’졌다. 미르 생도가 잔혹하게 유린당하다 죽어서? 물론, 도의상으로 분노하는 게 맞다만... 지금의 내 상태는 내가 잘 안다. 사람이 죽어도 동정심을 못 느끼게 된 상황이니 그런 거에 분노하는 게 아니야.
그냥... 저 검투사가 매우 꼴 받는다.
기억하지 못하는 미래의 환상 속에서 저 검투사에게 죽었나? 강렬한 기시감이 느껴지는 것을 보면 몇 번은 그랬던 것 같은데? 그래, 내가 이곳에 오고 싶어 했던 것도 저 놈을 죽이고 싶어서였던 것 같다!
그럼 고민할 필요가 있나? 죽여야지!
“흐, 흐히히힣!”
가볍게 웃으며 손을 쥐었다 펴면서 몸을 풀었다. 고성능 포션으로 상처들을 치료했지만 베스트 컨디션은 아니다. 지금, 냉정하게 저 검투사와 정면대결하는 건 위험해. 그러니 좀 선빵을 쳐줘야겠다. 뭐, 비겁해도 상관없지. 어차피 장비 꼬라지 보니 지들도 비겁하게 노는데 뭐!
-데~엥!
검투사가 악귀 투구 밖으로 하얀 연기 같은 숨을 ‘쉭! 쉭!’ 내뱉는 가운데, 천상까지 연결된 뒤쪽의 계단 옆에 있는 노예가 황금 종을 울린다. 그러자 위쪽 투기장의 바닥 한 부분이 ‘덜컹!’하며 이쪽으로 내려온다. 어떤 원리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헤헤.”
아직까지 녹아 사라지지 않은 옆의 야만인 노예들의 시체를 보며 난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