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네가 왜 거기서 나와? >
1.
“후욱...! 후욱...!”
살육이 끝나고, 다시 새로운 살육이 시작되기 전의 짧은 휴식 시간. 무대에서 위에 선 검투사는 살육의 쾌감에 들뜬 숨을 내뱉었다. 여자와의 정사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쾌락, 정신을 적시는 그 충족감에 그는 아랫도리를 빳빳이 세운 채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신께서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 똑똑히 느껴졌다.
마약을 한 것이 이러한 느낌일까? 눈앞이 확 밝아지고 온몸이 깃털처럼 가볍다. 모든 소리가 하나하나 알갱이가 되어 부딪치는 것처럼 들려온다. 이게 몇 번째 살육이지? 모르겠다. 먹지 않아도, 쉬지 않아도 도무지 지치질 않으니 시간 감각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감각도 살육이 그치자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다.
“빨리... 빨리!”
신의 시선이 서서히 떠나가는 듯한 느낌에 그는 왼손으로 목에 걸린 핏빛 황금 메달을 만지며 야만인 노예를 향해 으르렁 거렸다. 그에 야만인 노예가 공포에 질린 모습으로 빠릿빠릿 움직이고 얼마 가지 않아 다시 황금징을 울린다.
-덜커덕! 턱! 드르르르륵!
“■■, ■■■!”
징을 울린 야만인 노예의 알 수 없는 외침과 함께 톱니가 맞물리며 무대 위에 있는 승강기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에 검투사는 악귀 투구 뒤의 충혈된 눈을 번들거리며 침을 질질 흘렸다. 이제 또 다시 쾌락의 시작이다. 희생양이 올라오면 죽이고 그 심장을 뽑아내서...
하지만, 승강기가 다 올라오고 그 모습이 드러났을 때-
“...?”
기대에 찬 검투사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승강기 위에 있는 것은 우리에 갇힌 희생양이 아닌 한 가득 쌓인 야만인 노예들의 시체들, 그 피부는 새카만 고름이 들어찬 수포가 올록볼록 솟아나 있었고 복부는 풍선마냥 부풀었다.
희생양이 없다는 그 사실에 검투사가 광분하기도 전에-
-뻐-ㅇ!
부풀어 오른 시체들이 일제히 터졌다. 눈앞이 새카매지며 비처럼 쏟아지는 살점과 뼛조각의 폭풍, 그 흉악한 독기에 아직 미숙한 검투사는 비틀거리며 뒤로 자빠졌다. 그리고-
“케헥!”
지옥을 그대로 표현한 것 같은 악취, 타르가 뭉클거리는 것 같은 새카만 <부패 구름>이 작은 무대를 완전히 뒤덮었다.
반사적으로 숨을 들이켰다가 검투사는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눈과 코에선 눈물과 콧물이 줄줄 쏟아지고, 위가 경련하며 그 안의 것을 게워내려고 하며, 귀의 평행감각이 흔들리며 세상이 뒤집어진다.
감각기관이 한 번에 받아들일 수 있는 자극, 그 ‘이상’의 자극을 무자비하게 때려 넣는 새카만 연기.
연기에 닿은 것만으로도 살가죽이 벌겋게 달아오르면서 사포에 쓸리는 것 같은 통증과 함께 우둘투둘한 물집이 잡혔다. 염산에 빠진 것처럼 몸이 깎여가는 듯한 감각에 검투사는 이를 악물고 정신을 차렸다. 어서, 이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연기 속에서 벗어나야 한...
“...!”
그 순간, 검투사는 뭔가 섬찟한 감각에 재빨리 옆을 굴렀다.
-후두두둑!
다급하게 피한 그의 빈자리에 새카만 연기를 뚫고 나타난 손가락만한 투사체들이 꽂힌다. 빠른 대처에 날아온 투사체 대부분 피했으나, 완전히 다 피하지는 못하고 왼쪽 팔뚝에 그 투사체 하나를 허락했다.
그 팔뚝에서 올라오는 타오르는 듯한 통증
동시에 그의 몸에 깃든 ‘신의 축복’이 그런 독의 움직임을 억제한다. 그제서야 검투사는 이게 ‘자신을 향한 마법사의 공격’이란 걸 알아차렸다. 그 사실에 검투사는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그가 모시는 ‘유혈의 신’께서는 마법사를 혐오한다.
그렇기에 신도들은 마법을 익히지 못한다. 하지만, 그 대가로 그 무엇보다 강력한 전사의 힘과 마법에 대항할 수 있는 여러 권능을 부여받았다. 말 그대로 마법사의 천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모시는 신께선 ‘마법사를 죽이는 것’을 더 각별하게 여기신다!
최고의 만찬이 그의 앞에 나타났는데 무엇이 대수랴!
온몸이 타들어가는 통증에도 검투사는 살육에 대한 기대로 투사체가 날아온 방향-승강기를 향해 돌진했다. 그런 그의 앞을 막기 위해 연이어 투사체가 날아오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법을 분쇄하는 신의 축복을 받은 나무칼 대검이 휘둘러지자 투사체들은 허무하게 터진다.
눈물과 콧물을 흩뿌리면서 승강기 위에 선 검투사는 그 바닥을 부수려고 했지만-
“...!!”
기묘한 ‘마법의 메아리’가 아래에서 올라와 그를 강타했다.
이어서, 그 메아리가 닿은 새카만 연기들이 불길로 변한다. 거대한 가스토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 같은 ‘새파란 불길’, 신의 축복을 받아 마법에 대한 저항력이 있었지만, 머리카락은 순식간에 타오르고 피부는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그래도 그 정도라면 버티며 나아갔겠지만-.
그 기묘한 마법적 메아리는 그의 ‘몸 안에 파고든 독기’마저도 불길로 바꿔버린다.
혈관을 타고 흐르던 독기가 불길로 변하고 몸 내부에서부터 익어버린다. 내장이 익어버리는 것 같은 타격, 눈은 거의 시야를 잃어버렸다. 그 틈을 노려서 승강기 아래쪽에서 날아온 <독침>들이 연이어 그의 헐벗은 상체에 박힌다.
그러나, 검투사는 포기하지 않는다.
“-커허어어어엉!!”
가장 기초적이지만, 가장 강력한, ‘근원적인 힘’. 머리에서부터 쇄도하는 힘의 세례에 그가 짐승과도 같은 울부짖음을 내뱉고, 이어서 그의 몸이 부풀어 올랐다. 원래부터 건장했지만 이젠 보디빌더처럼 부풀은 전신 근육, 화염과 고통을 잊고 검투사는 승강기 바닥을 후려쳤다.
-콰직! 콰직! 콰직! 콰직!
연이은 맹공에 갈라지는 승강기의 대리석 바닥, 그런 그를 막기 위해서인지 연이어 <독침> 승강기 바닥의 틈 사이로 솟구치지만 검투사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바닥이 박살나 그가 통과할만한 균열이 생기자-
“-!!”
검투사는 괴성을 내지르며 대리석을 뜯어내고 15m가 넘는 아래를 향해 뛰어내렸다.
2.
검투사를 죽이기로 마음먹은 뒤, 난 선빵을 날렸다.
죽인 야만인들의 시체를 모아 <시체 부패>를 사용하고 위로 올려 보냈다. 그렇게 <부패 구름>을 깐 다음, 검투사가 혼란 상태에 빠져있을 때 구름을 연막 삼아서 <독침>을 연달아 날린 뒤에 마무리로 <독의 연소>를 날렸다.
<눈>의 이점을 사용한 필승 전략
도자기가 구워지는 불가마를 연상케 하는 화염 속, 그 안에서 노릇노릇하게 구워지는 검투사. 단순히 외부의 불길뿐만 아니라 몸 내부에 침투한 독까지 일제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겉도 노릇, 속도 노릇하게 됐다. 당연히,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쿠-ㅇ!
놀랍게도 놈은 걸친 장비빨과 <광폭화> 피뻥으로 버텨냈다.
그것도 모자라 승강기의 대리석 바닥을 박살내 뜯어내고 기어코 여기까지 내려왔다. 그런 광전사의 등장에 우리에 갇혀있는 생도들이 일제히 괴성을 내지르는 가운데, 난 재빨리 뒤로 도주하며 환영인사로 <독침>을 날려댔다.
“!!”
소리 없이 은밀하게 날린 <독침>, 불길에 두 눈이 반쯤 익어버렸음에도 놈은 그 기척을 파악하곤 삐쭉삐죽한 나무 대검을 대충 휘두른다. 그러자 쏘아진 <독침> 3개가 완전히 닿지도 않았음에도 풍선처럼 ‘팍!’ 터지며 사라진다.
그리곤 광전사는 <독침>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황소처럼 돌진한다.
어처구니없는 그 모습에 얼굴을 구기면서도 재빨리 주위의 철제 우리들을 장애물 삼아 날렵하게 뛰어넘었다. 날 따라해 보려 하지만 체격이 꽤 큰지라 결국 생도들이 갇힌 철제 우리를 들이 박는다. 그에 안에 갇힌 생도들이 발광하며 위협하자 광전사는-.
“다아-쳐!”
짐승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흑요석 박힌 나무 대검을 휘두른다. 그러자 놀랍게도 ‘희생양의 우리’라는 이름 붙은 마법 장비가 찌그러지며 박살난다. 그 안에 갇혀있던 돌아버린 생도가 두 눈을 까뒤집고 광전사에게 달려들지만 나무 대검에 이내 몸이 찢겨진다.
저 칼
자세히 보니, 마력이 다른 차원으로 뻗어나가려는 시도를 차단하고 완성된 마법의 구성 자체를 해체하려 한다. 그래, 현상을 보건데 ‘반마법’ 브랜드가 붙은 무기가 틀림없다. 게다가 마법 장비를 박살내버릴 위력이라니 너무 사긴데?
...아니, 잠깐만. 그것보다도.
“한국어?”
저 칼이 하도 사기적이어서 잠시 인식을 못했는데, 방금 전에 광전사가 내뱉은 말은 잔뜩 쉬었지만 분명 한국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 광전사의 피부색은 다른 야만인들처럼 갈색이 아니라 동양인의 것과 비슷하다.
설마, 저 새끼? 생도인 건가?
그런 내 말을 들었는지 획 고갤 돌리는 광전사, 가면 뒤의 반쯤 익어버린 두 눈이 나를 향한다. <독침>으로 견제해봤자 괜히 마력만 소모할 것 같기에 난 거리를 벌린 채, 전자 담배를 꺼내 물고 <독숨결 구체>를 준비하면서 놈을 응시했다.
“너어?! 흐, 흐히히히하하하!”
날 보며 미친 듯이 웃는 녀석, 뭔진 모르겠지만 <광폭화> 동안 저렇게 시간을 허비하니 나로선 나쁘지 않다. 조용히 무색무취의 <독숨결 구체>를 손바닥에 뱉어냈다. 그 사이, 놈은 쓰고 있던 투구를 벗는다. 투구의 효과 덕분인지, 다른 곳보다 손상이 덜한 얼굴이...?
“...대환이네요?”
투구 뒤의 얼굴은 대환이었다. 그래, 내게 오지게 쳐맞고 우리 편입반 내 카스트 최하위가 된 전(前) 일찐. 그런 내 대답에 대환이는 화상에 물집이 뒤덮이고 <광폭화> 효과에 핏줄이 솟아오른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활짝 웃는다.
“카, 커하하하. 그래, 나야. 나!”
“흠, 어쩐지 좆같더라니...”
잠깐 ‘오염된 공기에 돌아버려서 저런 짓을 하는 건가?’ 했지만 생각해보니 아닐 것 같다. 녀석이 위에서 보여준 것은 분명 ‘신의 권능’이다. 이렇게 고문에 미쳐버린 생도가 아니라 작정하고 저질렀다는 거지.
그런 내 대꾸에 대환이는 환히 웃으며 다시 투구를 쓰고 괴성을 내지르며 돌진하고 난 <독숨결 구체>를 왼손에 쥔 채 도망치면서 입을 열었다.
“살인을 얼마나 저질렀죠?”
“얼마나?”
내 질문에 대꾸하며 커다란 나무 대검을 휘두르는 대환이, 쪼개서 배치해놓은 <관찰자의 눈>으로 그 궤적을 파악한 뒤 난 재빨리 앞으로 굴렀다.
-콰앙!
아슬아슬하게 내 허리를 스쳐지나가 옆의 생도 우리에 박히는 대검, 구르는 과정에서 왼손에 쥔 <독숨결 구체> 놈의 면상에 날렸다. 말을 하느라 입을 벌린 놈의 머리통을 향해. 그렇게 정통으로 <독숨결 구체>를 들이켰지만 놈은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 내게 달려들며 횡설수설한다.
“어, 그래 얼마나 죽였더라?! 아! 기숙사에 있는 애만 하더라도 40명을 넘어가네? 모르겠어! 아마 지금까지 100명은 넘게 죽였을 걸? 마력 각성자만!”
“...허.”
“하지만, 내가 제일 죽이고 싶었던 건 너야. 너. 너너너너!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독숨결 구체>를 분명 들이켰지만 미친 듯이 웃으며 쫓아오는 그 모습에 어처구니가 없어서 실소가 나온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별개로 ‘놈이 지껄인 말’은 마음에 든다. 사람을 죽였다고? 그것도 마력 각성자만 100명 넘게?
이거 완전 인간 말종이구만!
저번에 북한 보육원에서 봤었던 근돼 새끼, 이젠 이름도 생각 안 나는 그놈을 죽이지 않으려고 참고 참았는데 우리 대환이는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아! 그래! 저 꼬라지를 보니 ‘저건 죽여도 된다.’는 면죄부를 받은 느낌이야! 야만인들을 죽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진짜 인간’을 죽이는 것만은 못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