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네가 왜 거기서 나와? >
악귀 모양의 투구, 그 안면 부분이 살아있는 것처럼 일그러지고 오른손으로 가슴팍을 쥐어뜯는다. 드러난 대환이의 상반신은 심장 쪽 가슴팍을 중심으로 검은 핏줄이 올록볼록 솟아올랐다.
대환이가 아무 생각 없이 방금 먹은 시체
거기엔 내 ‘마력 독사 주머니’가 끼워져 있었다. 왼손의 버클러로 대검을 막는 순간, 오른손은 미리 쥐고 있던 그 주머니를 발광하는 생도의 가슴팍 옷 사이에 억지로 쑤셔넣었지. 당연히, 대환이는 그 안에 든 독까지 그대로 삼켰고.
-푸화아아아아악!
그런 대환이를 향해 돌진하면 준비했뒀던 <독숨결 구체>를 내뱉었다.
새카만 연막에 가까운, 구체의 형상도 띄지 않은 스프레이 형식의 <독숨결>. 지금까지 대환이에겐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카드다. 회복됐다지만 그래도 흐릿하게 보일 ‘시각’은 이제 완전히 안 보이겠지.
-콰직!
그래도, 나머지 감각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
퍼져나가는 독기운에 얼굴을 일그러트리면서도 내가 있던 곳을 향해 아주 정확하게 나무 대검을 수직으로 내리 꽂는 대환이, 옆에 있는 우리 위로 뛰어올라 피하며 동시에 쇠꼬챙이를 쥔 오른손으로 등 쪽에 매단 가죽 바구니 안에 넣었다.
그리고, 손가락에 양피지 하나가 닿자-,
“■■-■!”
난 그 ‘발동어’를 외웠다.
-크아아아아아아악! 끼아아아아아악!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양피지가 불타오르면서 끔찍한 마력의 파동을 토해낸다. 미쳐버린 생도들이 내뱉는 짐승 같은 울부짖음으로 가득했던 대기실, 하지만 두루마리에서 튀어나온 비명은 차원이 달랐다. 귀를 통해 뇌로 자극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마력 자체가 뇌를 뒤흔들어버린다.
귀를 통해 전달될 수 있는 자극의 한계를 넘어선 소음
그 끔찍한 비명에 노출된 희생양들은 날뛰던 것이 거짓말이라는 것 마냥 공포에 질려 벌벌 떤다. 하지만, 중증으로 맛이 간 상태인 대환이는 아랑곳 않는다. 하지만, 괜찮다.
애초부터 두루마리를 사용한 목표는 대환이의 반향정위-청각을 차단하는 것이었으니까.
예상대로 녀석의 뇌에선 청각의 신호가 사라졌다. 남은 건 후각, 체온, 그리고 마력의 감각 정도? 그것만으로도 내가 어디에 있는지는 대략적으로 파악하는 건 가능하다. 대환이는 내가 올라간 우리를 향해 대검을 가로로 휘두르지만-.
-텅! 콰직!
“?!”
우리에 칼이 걸린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나.
내가 괜히 내 도주 경로를 제한하면서까지 놈을 이쪽으로 끌고 온 게 아니야. 지금 이곳은 생도가 갇힌 우리 사이 ‘틈’이 유별나게 작은 장소다. 당연히 생각 없이 대검을 휘둘렀다간 우리에 닿지. 그렇게 대환이가 당황한 사이, 난 기척을 숨기고 옆의 우리를 타고 올라-.
오른손에 쥔 은빛 꼬리 송곳을 찔러나갔다.
“...!”
묘한 공기의 떨림을 포착, 이를 악물고 들어 올린 대검을 내리찍는 대환이. 이전에 휘둘렀던 것만큼은 못하지만 역시 신체 스펙이 무지막지하게 좋아서 위협적이다. 하지만, 감각이 막혀서인지 궤도는 정밀하지 못하다!
-콰직!
왼손의 버클러로 다시 한 번 빗겨냈다.
부러진 왼팔뼈가 피부를 뚫고 나왔지만 상관없다. 게다가 방패로 공격을 빗겨낸 순간, 방패에서 푸른 마력의 파동이 뿜어져 나와 대환이를 얽매인다. 방패의 특수 효과인 <마비>인 것 같은데... 딱히 필요 없는 이런 때만 터지는구만.
어쨌든 덕분에 손쉽게-.
-푹!
명치에 송곳을 찔러 넣었다.
<무한의 눈>을 활용해서 속까지 살뜰하게 본 덕분에 말뚝 같은 송곳은 명치에서 흉골 아래로 파고들어 정확히 심장을 꿰뚫었다. 심장이 꿰뚫리고 그 끝에 발라둔 강렬한 맹독에 또 한 번 중독됐다. 즉사가 당연하지만-
“크아아아악!”
대환이는 움직인다.
<마비>에 풀리는 걸 확인하자 재빨리 뒤로 빠졌다. 그렇게 발작적으로 휘두른 대검의 궤적을 피하며 난 대환이를 응시했다. 뇌에 박힌 균열이 시뻘건 힘의 폭류를 쏟아낸다. 시냅스 사이에서 붉은 스파크가 미친 듯이 번쩍거리고, 그 힘은 척추 신경을 따라 전신에 쇄도한다.
불쾌한 검붉은 빛에 휩싸여 번들거리는 대환이의 두 눈을 보며 난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이건 진짜 말이 안 돼요.”
놈이 입은 상처는 확실히 치명적. 당장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언젠가 죽을 거다. 하지만, ‘지금 당장’ 죽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독마법으로 만든 맹독까지 바른 말뚝을 심장에 처박았는데도 터프하게 움직인다!
...저걸 보니 미궁 출신들이 괜히 독마법을 안 좋게 쳐줬는지 절실히 이해가 되네.
그렇게 속으로 투덜대는 동안, 놈은 명치에 박힌 말뚝 같은 송곳을 뽑아내고 날 향해 돌진한다. 마법을 계속 사용해서 부족한 마력을 <피의 승화>로 쥐어짜냈다. 몸속에서부터 벌레떼에 파 먹히는 듯한 느낌이 심히 불쾌하지만, 앞으로 펼쳐질 쥐불놀이를 생각하면 마냥 즐겁다.
“하하하하핳!”
그 유쾌한 기분에 웃으며 빈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와 함께 손바닥에서부터 기묘한 마력의 울림이 퍼져나가고 이어서 독숨결로 내뱉은 연막에 그 울림이 닿자-.
-화르르륵!
‘불길’로 타오르기 시작한다. 파동에 닿은 부분부터 불길에 휩싸이는 가운데, 그 안에 있던 대환이 또한 타격을 받았다.
먹어치운 시체에 섞인 맹독
심장에 박힌 말뚝에 묻은 맹독
독이 퍼져나간 대환이의 몸 내부부터 불길에 휩싸인다. 달려오다가 비틀거리며 옆의 우리에 몸을 기대는 대환이, 그런 대환이는 곧 입을 쩌억 벌리며-
-캬아아아아악!
눈과 아가리에서 가스 토치 같은 맹렬한 불길을 뿜어내며 숨이 끊어졌다.
“흐아...”
완전히 숨이 끊어진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무한의 눈>과 각종 고양 상태를 해제했다.
정말 너무너무 쎄다.
심장을 반쯤 터트리고 맹독에 중독 시켜도 움직이다니? <무한의 눈>으로 상대방의 움직임을 모조리 사전에 간파해서 움직이지 못했다면 뒤지는 건 나였을 거야.
“끄응.”
<무한의 눈>의 부작용인 끔찍한 피로감과 두통에 신음하며 부러진 왼손의 뼈를 대충 끼워 맞췄다. 그 뒤에 허리춤에 맨 바구니에서 생명의 빵이라는 역겨운 음식을 꺼내먹었다. 좀 더 쉬고 싶긴 하다만 갈 길이 멀다. 빨리빨리 움직여야지.
“...흐흐흐.”
그나저나 대환이의 시신을 보며 난 살짝 웃음을 흘렸다.
보통 괴물이 착용하고 있는 장비들은 죽으면 천천히 피로 녹아내리지만 간혹 가다가 드랍템으로 남는다. 하지만, 우리 대환이는 하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죽이는 맛도 있으면서 템까지 주는 황금 고블린이었구나...!
그렇게 대환이가 남긴 드랍템을 회수하기 위해 움직이려는 순간-,
-촤르르르르!
소름끼치는 차가움이 날 덮쳤다.
4.
미르엔 대한민국이 가진 ‘최정예 전투원’들이 상주해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미궁 귀화자’ 때문이다. 무한한 생존 서바이벌이 벌어지는 미궁에서 최소 십 수 년에서 많게는 수십여 년 가량의 생존 경쟁을 해온 사람들. 당연히, 그 전투력은 웬만한 지상 출신 마력 각성자들은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범상치 않다.
대한민국은 미궁 출신의 인간 귀화자들 중에서 ‘선별된 이들’을 미르 교관으로 배치했다.
그렇게 고르고 고른 미궁 귀화자들 중에서 또 가려 뽑힌 이들이 전찬휘 경감을 제외한 4인의 ‘특공대’였다. 그들의 힘은 수많은 미궁 귀화자들 중에서도 뛰어났고, 악몽이라 불릴 만한 존재에게도 충분히 닿을 정도였다.
-쿠웅...!
황금창과 황금 방패를 쥔 거대한 여성 나가, <광폭화>하여 6m 남짓한 황금창을 폭풍처럼 휘두르던 수문장은 서예린과 김가트 2명의 합공과 전찬휘 경위의 보조에 불과 5분도 되지 않아 그 목이 날아갔다.
목을 잃은 수문장이 육중한 진동과 함께 바닥에 엎어지는 가운데-.
“입구로!”
연이어서 터지는 폭약의 굉음을 뚫고 울리는 김가트의 쩌렁쩌렁한 외침, 수문장에게 파고들어 목을 날린 김가트는 재빨리 핏빛 건틀릿을 뻗어 시체의 목에 걸린 메달을 뜯어낸다. 그에 마법과 폭약으로 나머지 괴물들이 오지 못하도록 막던 자모란과 서강이 내달렸다.
“■!”
“■■■-■!”
그런 김가트 일행을 막아보기 위해 악귀 전사들이 질척하게 달라붙지만, 특공대는 기어코 그런 방해를 떼어내고 피라미드 입구로 들어섰다. 입구 통로에서 고작 한 발자국을 내딛었지만-
“...”
어느새 그들은 입구와 출구가 보이지 않는 커다란 일자 통로 한복판에 서 있었다.
음산한 검붉은 횃불이 걸려있고 벽면에는 살인을 저지르는 조각이 빼곡한... 섬뜩한 통로. 게다가 통로는 경기가 펼쳐지는 운동장처럼 ‘웅웅!’ 거리는 함성이 낮게 울리고 있었다. 특공대 인원들이 긴장을 유지하며 경계하는 가운데, 주위를 둘러보던 자모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상대로 여긴 공간이 일그러진 곳이군요.”
“...이 환호 소리 같은 소음은 뭐지?”
멀리서 들려오는 불쾌한 환호 소리에 김가트가 질문하자 자모란은 쓰고 있는 헬멧 벗으며 대꾸했다.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건 말해드릴 수 있어요. 김가트 씨가 손에 쥔 메달이 탈출의 열쇠입니다. 그냥 그 메달을 가진 채 쭉 앞을 따라가면 목적지에 도달할 겁니다.”
“...좋아, 그럼 잠시 쉬면서 정비하지.”
자모란처럼 똑같이 투구를 벗으면 대답하는 김가트, 그에 다른 이들도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들 챙겨온 고열량 에너지바와 기력 회복제를 먹거나 포션으로 상처를 치료하는 가운데, 전찬휘 경감은 건틀릿을 벗고 부러지고 꺾인 손가락에 포션을 뿌리면서 입을 열었다.
“건물 구조와 내부 부조등을 보아하니 아즈텍 제국의 양식인 것은 맞습니다만... 앞으로 뭐가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더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우린 항상 조심했다네.”
그런 전찬휘 경감의 말에 기력 회복제를 마시며 대꾸하는 김가트, 그렇게 몇 분간의 짧은 재정비 시간을 가진 뒤, 일행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두는 김가트, 후방은 서예린이 경계하며 천천히 나아가던 도중-.
-크아아아아아아악! 끼아아아아아악!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소름끼치는 비명이 갑작스레 일행을 덮쳤다.
통로를 울리던 환호와 울부짖음이 아닌, 귀에 바로 입을 대고 소리를 지르는 것 같은 끔찍한 비명. 생리적인 역치를 넘어선, 뇌에 다이렉트로 박히는 자극에 김가트와 서예린은 잠시 덜컥 굳었지만 베테랑답게 곧바로 균형을 되찾았다.
“괜찮나?”
앞을 경계하면서도 뒤를 돌아보며 묻는 김가트, 그와 서강부녀는 괜찮았지만 자모란과 전찬휘 경감은 정상이 아니었다. 패닉에 질려 날뛰거나하진 않았지만 공황장애가 발작한 것처럼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 이건...?”
“<공포> 마법이야. 공포를 느끼는 뇌의 영역을 무자비하게 자극하는, 악마들이 즐겨 사용하는 마법이지. 경험해 보지 않으면 저항하기 힘들어.”
나지막이 부들부들 떠는 전찬휘 경감의 질문에 대답하며 서강은 품 안에서 작은 힙 플라스크를 꺼냈다. 그리곤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은 둘에게 그 안의 상태이상 회복 포션을 먹였다.
“괜찮나?”
“...못 볼꼴을 보여드렸군요.”
포션을 먹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떨림이 가시고 두 사람은 다시 일어섰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듯, 전찬휘 경감이 헛기침하며 고갤 숙이자 김가트는 작게 고갤 끄덕였다.
“다시 움직이지.”
한 층 더 경계심을 끌어올리며 일행은 신중히 움직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끝이 보이지 않는 통로의 한복판, 갑자기 통로가 사라지고 감옥과 창고가 뒤섞인 것 같은 공간이 앞에 나타난다.
“흡!”
급작스런 변화에 모두 경계심이 최고조에 달한 가운데, 한 번 무력화 된 뒤로 그 누구보다 곤두서 있던 전찬휘 경감이 먼저 움직였다. 게다가 그의 무기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제압에 특화됐기에 더 거리낌이 없었다.
목표는 저 앞에 등을 보인 채 서 있는 작은 체구의 사람
피를 하도 뒤집어써서 몸 전체가 딱딱하게 굳은 적갈색 범벅이었고, 상의는 없고 바지에 그 허리춤에는 인간의 얼굴 가죽과 머리카락으로 만든 것이 분명한 망태기를 메고 있었다. 싸움을 한 번 겪은 듯, 괴상한 나무 방패를 멘 왼팔은 뼈가 피부를 뚫고 나와 있다.
-촤르르르르륵!
소음과 함께 등판을 향해 쏘아지듯 날아가는 검은 쇠사슬, 희생양을 순식간에 휘감은 사슬이 으스러트릴 것처럼 조이고 이어서 전찬휘 경감은 낚싯줄을 당기듯 힘껏 잡아끌었다. 그리고-.
“아, 아하하하... 안녕하세요?”
뒤로 엎어진 소년은 어색하게 웃으며 그들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