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네가 왜 거기서 나와? >
5.
스릴러 무비나 액션 영화에선 항상 주인공이 일을 다 끝내 놓고 난 뒤에야 경찰이 와서 뒷북친다.
그래, 흔한 클리셰 중 하나지. 살인마를 가까스로 죽이고 나니까 삐뽀삐뽀 사이렌을 울리며 경찰이 나타나는 거. 보통 현실은 그렇지 않다구? 하지만, 그런 일이 내게도 벌어질 줄은 몰랐다. 아니, 여기가 소설 속 세계니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게 당연한가?
간신히 돌아버린 대환이를 죽이고 이제 그 전리품을 챙기려고 할 때, 뒤에서 갑자기 날아온 쇠사슬.
‘어?’하는 순간에 내 몸을 꽁꽁 묶고, 이어서 뼈를 바스라트릴 것처럼 옥죄자 기겁했다. 그제서야 난 뒤에 누군가 있다는 걸 눈치 챘다. 그렇게 쇠사슬에 당겨져 뒤로 자빠지자 보이는 것은...
입구 쪽에 서 있는 다섯 사람
내 몸을 묶은 검은 쇠사슬을 들고 있는 전찬휘 경감, 서강 부녀와 소름끼치는 핏빛 갑주의 전사, 마지막으로 파란색 정장 차림의 여자였다. 그나저나 정장 여자는 헬멧을 쓰고 있는데 안면부분 전체가 바이저라서 꼭 다프트펑크가 쓰는 것 같은 디자인 같네.
“아, 아하하하... 안녕하세요?”
안면을 익힌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아니었다면 그냥 뒤졌을 지도? 그렇게 뒤늦게 온 손님들을 향해 난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너!?”
“헤헤, 또 만났네요. 예린양.”
날 보자 기겁하는 서예린, 내가 재빨리 아는 척을 하자 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다가와서 양손으로 내 양 볼따구를 붙잡는다. 그리곤 이리저리 얼굴을 뜯어보곤(눈꺼풀까지 들어 올려 자색의 눈동자까지 확인했다)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 살아 있었음?”
“예린양 말대로 제가 명줄이 좀 질겨서요.”
“어떻게 나옴?! 거긴... 아무도 못 나올 곳이었는데?”
그 대꾸에 난 입을 다셨다. 그래, 실질적인 공격을 못하더라도 <고문> 속성의 공격을 가하는 괴물 수백 마리에게 둘러싸이면 생명체는 심장마비로 뒤질 수밖에 없지.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어, 그냥 고통을 참고 움직였어요.”
사실에 근접한 대답, 그에 말이 안 된다는 듯이 얼굴을 구기는 서예린에게 난 어깰 으쓱였다.
“심장마비를 일으킬 정도의 ‘죽을 것 같은 고통’이지만, 진짜 몸이 박살나는 건 아니잖아요? 꾸욱 참고 한 발자국씩 움직였죠. 심장이 멈출 것 같았지만... 르피너스의 선물이 심장을 제멋대로 움직이더라고요.”
“...허.”
“그 뒤로 기어서 나왔다가 사제에게 붙잡혔고, 희생양으로 끌려왔다가 기지를 발휘해서 우리를 부수고 탈출했죠! 덤으로 저기 나쁜 놈도 죽이고요.”
재빨리 턱짓으로 쓰러져서 연기를 흘리고 있는 대환이의 시신 쪽을 한 번 가리켰다. 그 뒤, 난 서예린의 뒤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향해 꾸벅 고갤 숙였다.
“안녕하세요. 서강 어르신. 그리고... 김가트 선생님?”
“얼굴은 안 보일 텐데. 눈썰미가 좋군.”
“하하, 제가 좀 사람 보는 눈썰미가 있죠.”
숨구멍이나 눈구멍이 전혀 없는 매끈한 뿔투구에서 들려오는 그르렁 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 처음엔 몰랐다. 머리 위에 나만 보이는 핏물이 쏟아지고 있어서 알아챘지. 그나저나 진짜 갑옷 디자인 한 번... 데스 메탈 콘서트 무대에 올라가도 위화감이 없을 것 같이 악취미네.
그렇게 친한 사람들에게 아는 척을 한 뒤, 난 내 몸을 휘감은 쇠사슬을 쥔 경찰 양반에게 앓는 소리를 냈다.
“그나저나 전찬휘 경감님. 진짜 이대로 있다간 쥐어짜여 죽을 것 같은데 좀 풀어주실래요? 숨 쉬기가 힘들어요...”
최대한 불쌍한 척을 하며 말했지만, 사냥개 같은 인상의 경찰 아저씨는 무표정하게 사슬을 꽉 붙잡는다. 그러자 사슬이 오히려 내 몸을 조인다. ...근데, 이거 진짜 장난이 아니라 몸이 으스러질 것 같다. 피가 안 통하는 느낌에 머리가 어질어질하네.
그렇게 내가 신음을 흘리고 있을 때-.
“풀어주게.”
“...네?”
서강 아저씨가 꼰대 경찰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려놓으며 말한다. 경찰이 미간을 찡그리며 말이 안 된다는 듯 대꾸하자 서강 아저씬 입가에 검지를 올리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쳐를 보낸다. 그 신호에 경찰이 가슴팍의 바디캠을 만지자-.
“내게 경고한 사람이 저 소년이라네.”
서강 아저씨가 사실을 고백한다. 이미 알고 있는 서예린을 제외한 다른 이들이 살짝 놀란 표정을 하는 가운데, 우리 아저씨는 담담히 말을 이어나갔다.
“경찰에서 닥터 크림슨이 한국에 밀입국했단 걸 파악한 것도 따지고 보면 결국 저 소년 덕분이지.”
“...오히려 더 수상합니다만.”
“그게 중요한가? 우릴 도와줬다는 게 중요해. 자네도 알 텐데? 닥터 크림슨과 한패였다면 이걸 알리지 않았을 거야. 그랬다면 우린 대처도 못했어.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더 커졌을 거고.”
이어지는 서강 아저씨의 설득, 내 뺨따구를 붙잡고 있던 서예린도 고갤 돌려 지원사격을 했다.
“얘, 이번 일과 연관 없음. 일이 벌어졌을 때, 나랑 같이 있었음.”
서강과 서예린 부녀의 변호, 김가트 선생도 어깰 으쓱 하고 이름 모를 파란 정장의 여자도 고갤 끄덕인다. 그렇게 풀어주자는 의견이 절대다수가 되자 더럽게 깐깐한 꼰대 경찰은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쇠사슬을 잡아당겼다.
“끄으응.”
그러자, 신기하게 쇠사슬이 풀렸다. 피가 통하지 않다가 갑자기 도는 쩌릿한 느낌에 내가 부르르 떨고 있을 때, 서예린이-.
“참으셈.”
-꽈득!
“아하하...”
버클러를 풀고 내 왼팔을 붙잡은 뒤, 피부를 뚫고 나온 부러진 뼈를 억지로 맞춘다. 그리곤 품 안에서 작은 포션을 하나 꺼내 그 위에 발라준다. 거참, 날 질색하던 서예린이 이렇게 치료까지 해주다니... 내가 눈물이 없는 사람인데 눈물이 다 날려고 그러네. 결코 아파서 그런 거 아님.
하지만, 그렇게 개과천선한 서예린과는 달리 여전히 ‘못된 경찰’은 날 향해 취조하듯 차가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한새벽 생도, 어떻게 이번 일이 벌어질지 알았습니까?”
“감으로요.”
“...”
“진짜에요. 돌연변이 여파 때문인지 몰라도 전 감이 좋아요. 그래서 미르 근처에서 달라진 공기, 피비린내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죠. 너무 불길해서 한 번 기절도 하고, 그에 관해 상담도 받았답니다. 그걸 경고한 것뿐이에요.”
뭐 때문인지 모르겠다만 날 싫어하는 게 분명한 경찰 아저씨에게 대꾸한 뒤, 난 저 앞에 쓰러진 대환이의 시신을 향해 턱짓했다.
“그리고, 범인은 제가 아니라 저 녀석이에요.”
“...범인?”
“예, 김대환이라고 저와 같은 편입반 생도인데 아저씨도 한 번 본적이 있을 걸요? 저한테 두들겨 맞고 찌그러진 애거든요. 저 녀석, 그냥 돌아버린 게 아니라 칸을 섬기더라고요. <광폭화>도 쓸 줄 알고. 얼마나 죽였냐고 물어보니까, 기숙사에 있는 애만 40명을 넘어간다고...”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정색하며 대환이 쪽을 바라보는 경찰 아저씨, 황급히 다가간 그는 대환이가 쓴 투구를 보곤 얼굴부터 구겼다.
“식인귀의 투구... 닥터 크림슨이 사용하는 장비군.”
“그런가요? 어쩐지 템빨이 너무 좋더라니... 어쨌든 지가 말하길 죽인 마력 각성자만 100명 넘었다고 했습니다.”
“...100명?!”
“네, 이 위에 콜로세움 같은 작은 투기장이 있거든요? 지금 들려오는 분노한 함성도 위쪽의 관중들이 내지르는 거랍니다. 여기에 갇혀있는 애들은 희생양이고, 대환이는 하나씩 올라오는 애들을 처 죽였죠.”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위쪽에서 들려오는 분노한 관중들의 함성, 내가 터트린 ‘공포의 두루마리’ 효과로 우리에 갇힌 생도들은 전부 벌벌 떨며 머리를 박고 있는 반면에 위쪽 관람석에 있던 야만인 관중들은 지금 쑈가 이어지지 않자 분노에 날뛰고 있었다.
“거기서 쑈를 하면서 광기에 잠식된 생도들을 가지고 놀면서 죽인 거죠. 그 심장은 뽑아서 위에다가 바치고.”
“흠...”
“그래서 제가 좀 혼내줬죠. 하핫!”
내 대답에 심각한 표정으로 대환이가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는 경감, 이어서 그는 가면은 물론이고 대환이가 착용하고 있는 마법 장비들을 싹 다 벗겨서 옆에 내려놓는다. 근처에 떨어져 있는 내가 썼던 원숭이 닳은 괴물의 꼬리 송곳도 주워서 가져다놓는다.
“어, 그거 제 꺼인...”
“이 마법 물품들은 정부에 귀속될 겁니다.”
내 말을 도중에 끊는 전찬휘 경감. ...뭔 개소리지? 그 선언에 내가 멍하니 바라보자 우리 민중의 몽둥이는 단호하게 말을 이어나간다.
“‘불법마법장비 회수 및 조사에 관한 법률’, 제 17조와 21조. 그리고 ‘유실물법’, 제 13조는 ‘무허가로 습득한 마법 장비들을 습득한 이는 7일 이내에 신고해야 하며, 국가는 그 발견자와 신고자, 토지 및 건물소유자에게 보상금을 균등하게 지급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
“마법 장비라고 전부 다 좋은 건 아닙니다. 실제로 사람을 광기에 빠트리는 저주 받은 장비들도 있으니 검사가 필요합니다.”
“...어, 그러니까. 검사 끝나고 나중에 받을 수 있는 거죠?”
“저주가 없단 것이 확인되면 곧바로 국가에서 적정 가격을 보상할 겁니다.”
적정 가격 보상? 이거, 레파토리가 꼭 문화재청의 국보급 문화재를 사들인 개인에게 후려쳐서 억지로 빼앗아가는 레파토린데? 그런 내 예상이 맞다는 걸 보여주기라도 하듯, 저 민중의 몽둥이를 제외한 4명은 모두 심히 언짢은 기색을 보였다.
아니, 시발?!
소설이라지만 여기가 대한민국이란 걸 잊고 있었다. 이런 짓거리까지 현실과 똑같이 벌이다니... 아니, 내가 죽을 고생해서 얻은 장비들을 그냥 이렇게 가져가겠다고? 어이없음에 내가 눈앞에 하얗게 변하는 느낌, 항의라도 하고 싶지만 난 정부가 하는 갑질에 항의할 수 있는 권력자가 아닌 그냥 장래가 좀 창창한 북한 고아 1이다.
그렇게 내가 항의도 못하고 부들부들 떨고 있을 때, 서강 아저씨가 한 발자국 내딛으며 입을 열었다.
“일단, 어떤 물품인지 모르는 만큼 착용은 하지 말고 회수만 하고 있도록 하지.”
“예, 그러고 보니 저 소년 옆에 있는 방패도 마법 물품인 것 같은데 회수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하지.”
고갤 끄덕이며 내게 다가오는 서강 아저씨, 이 혐오스런 판때기 같은 방패도 가져간다고? 이야, 독하다 독해! 하도 억울한 마음에 반항이라도 해볼까 했는데, 아저씨는 내 허리춤에 있는 망태기를 빼내면서 작게 속삭인다.
“가만히 있게.”
그리곤, 왼팔에서 벗겨낸 버클러를 그 망태기 안에 넣고 전찬휘 경감에게 다가가 대검을 제외한 마법 장비들을 모두 다 집어넣는다. 그리곤 다시 내게 다가와서-.
“근데, 우리 중에서 지금 그나마 짐꾼이 될 만한 사람은 이 소년 밖에 없겠어. 그러니 이 아이도 함께 움직이도록 하지.”
“...”
“우리 편이지 않나? 그것도 완전 무장한 ‘유혈의 사제’를 상대로 승리한 마법사일세. 마냥 생도라고 무시할 수 없지.”
그 망태기와 나무 대검을 건넨다. 그에 우리 민중의 몽둥이는 작게 한숨을 내뱉지만, 나머지 다른 이들은 고갤 주억이며 수긍하는 분위기. 경찰도 결국 포기하고 시선을 돌려 주위에 갇힌 생도들을 살펴보는 가운데, 서강 아저씨가 작게 속삭였다.
“기회를 봐서 적당히 빼돌리게.”
“네?”
“너무 티가 나는 커다란 물품, 대검과 투구 같은 건 어쩔 수 없지만 반지나 목걸이 같은 작은 장비는 빼돌리라고.”
갑작스런 아저씨의 제안에 난 침을 꿀꺽 삼켰다.
“...괜찮나요?”
“나중에 추궁할 테지만 쫄지 말고 잡아떼게. 전리품은 자네의 권리지 않나? 가다가 잃어버렸다고 떼써. 솔직히, 저 법 자체가 반 억지 횡포라서 잃어버렸다고 잡아떼면 그리 깐깐하게 안 나와.”
그렇게 대답한 아저씨는 곧 자신을 부르는 경찰의 목소리에 서예린과 함께 그 뒤를 따라간다.
그래, 이게 공정하지! 목숨 걸고 다 잡아놨더니 ‘위험하니 가져감!’ 하고 회수해? 완전 개새끼들 아니냐? 보상? 현실의 시궁창인 면만 크게 부각되는 이 세계를 생각하면 안 봐도 비디오지. 그래, 딱 반지랑 목걸이만 가져가자. 그럼 어디 한 번 감정을...
“아, 안 돼요!”
하려는데, 우리 경찰 아저씨가 우리 안에 갇힌 생도들을 풀어주려고 한다. 공포의 두루마리 효과 때문에 지금은 가만히 있는 거지 죄다 미친 애들이라고! 다급하게 달려가서 제지하면서 사정을 설명하자 다행히 다들 수긍했다.
그렇게 나도 엉겁결에 일행에 껴서 창고를 한 바퀴 돌았다.
함께 걸으면서 견찰놈이 내게 연이어 질문도 했는데, 다행히 그리 껄끄러운 건 아니고 ‘어떻게 대환이를 죽였냐?’, ‘할 수 있는 마법이 뭐냐?’ 같은 자질구레한 것이었다. 그렇게 한 바퀴를 돌고 난 뒤에 김가트 선생님이 투기장으로 향하는 승강기 통로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다른 통로가 없군. 위로 올라가야 할 것 같은데?”
“아, 제가 길을 압니다. 잠시만요.”
난 재빨리 대답하면 옆에 멘 망태기에서 송곳을 꺼냈다. 그리고 재빨리 대환이의 시체 쪽에 다가가 그 뱃가죽을 찢었다. 그런 내 행동에 까탈스런 견찰 아저씨가 검은 쇠사슬을 꽉 쥐지만, 마저 내가 해야 할 일을 했다.
가른 배 속에 송곳을 쥔 손을 넣고 심장과 연결된 대동맥과 근육을 찢은 다음 심장을 잡고-.
“끄으응-차!”
뽑아냈다.
송곳 같은 쇠꼬챙이에 꿰뚫리고, 맹독에 중독되며, 나중엔 불타올랐음에도, 펄떡펄떡 뛰고 있는 심장. 그 심장 속에 있는 ‘붉은 균열’을 난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아직도 움직이는 심장을 뽑아내고 내가 다가가자 경감 아저씨가 다가오지 말라는 듯이 사슬을 살짝 휘두른다.
“뭔 짓이지?”
“이게, 열쇠거든요.”
“...열쇠?”
“전 한 번 봐 가지고 아는데... 올라가 보시면 알 거예요.”
대답하면서 난 승강기 옆 나무 막대를 당겼다. 천천히 내려오는 승강기, 그렇게 승강기에 다들 올라 탄 뒤에 우린 위쪽 투기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