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막간. 태양이 떨어지다. >
1.
-덜커덩! 쿵, 끼릭끼릭끼릭...
레버를 다시 올리자 승강기는 톱니바퀴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느릿느릿 올라가기 시작한다. 위쪽 투기장까지의 높이는 대략 20m가량, 그에 난 정찰 겸해서 <눈>을 다시 위로 올려 보냈다.
-■! ■! ■! ■!
쩌렁쩌렁 몸을 때리는 야만인 관중들의 성난 고함소리, 그와 함께 심해지는 피비린내와 악취... 미르 전체가 도살장처럼 변하면서 피 냄새는 익숙해졌건만, 이상하게 다시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얼마 안가-.
“위에 샛노란 색의 악귀 병사가 있을 겁니다. 싸우셔야 할 거예요.”
투기장을 둘러싼 피의 호수에서 인간의 형체가 기어 나온다. 피라미드 근처에서만 보이던 ‘쿠아치퀘’라는 이름의 전사형 고렙 잡몹, 다행히 일행들은 내 경고를 무시하지 않았다.
“몇 명?”
“음, 제가 위에서 봤었을 땐 두 명이었어요.”
내가 대답하자 서예린과 김가트 선생이 서로를 응시한다.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가볍게 고갤 까닥인 그들은 투기장 위에 닿기 까지 5m 가량 남았을 때-.
-탁!
-타탁!
단숨에 도약해 투기장 위에 서고 악귀 병사들을 향해 돌진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던 노란 악귀 모양의 전사들도 곧바로 반응한다. 두 사람과 거의 비등한 속도로 달라붙는 녀석들, 비록 잡몹들이지만 확인한 그 능력치는 무지막지하다. 게임식으로 따지면 재규어 전사 7~8마리도 혼자서 상대할 괴물인데-.
-콰직!
-스걱!
-챙! 챙! 챙! 챙! 서걱!
순식간에 결판이 났다.
김가트 선생은 그냥 순수 힘과 기량으로 쿠아치퀘의 방패를 찍어 내려 가드를 박살내고 단숨에 한 놈의 허리를 양단했고, 서예린은 순수 힘과 속도에서 좀 밀렸지만 <유령의 무기> 4개를 띄우곤 연계 플레이로 검을 받아내다가 <가속> 마법으로 단숨에 허를 찔러 모가지를 갈랐다.
흠, 저걸 보니 서예린의 진짜 장기는 1:1인 것 같네.
-철커덕! 끼리리리릭!
그렇게 두 사람의 활약을 실시간으로 보며 고갤 주억이고 있을 때, 승강기가 소음을 내뱉으며 완전히 위로 올라왔다. 그와 함께 드러나는 투기장의 전경, 올라오기 전부터 광기어린 야만인들의 함성 소리에 얼굴을 찡그렸던 악덕 경찰은 완전히 얼굴을 구긴다.
“역겹군.”
확실히, 역겨운 광경이긴 하지.
관중석의 야만인들은 라이벌 팀 훌리건끼리 마주친 것처럼 함성을 내지르면서 서로를 죽이고 있고, 우리가 선 경기장은 지금 서 있는 한복판의 지름 10m남짓한 작은 석제 무대를 제외하면 훼손된 시체와 피로 가득 채워져 있었으니까.
그렇게 다들 얼굴을 구기며 주위를 둘러보는 가운데, 김가트 양반이 날 향해 입을 열었다.
“아무리 봐도 통로가 없는데?”
“있어요. 다만, 특정 조건을 만족해야 나타나지만요.”
대꾸하며 난 원형 무대 외곽에 있는 황금징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그 황금징 옆에 서 있는, 비무장 민간인처럼 저항하지도 않고 벌벌 떨고 있는 야만인 노예에게서-
“내놔.”
녀석이 들고 있던 황금 쟁반을 빼앗았다.
그리곤, 그 위에 아직까지도 천천히 뛰고 있는 대환이의 심장을 올려놓았다. 그래, 유혈의 광기에 잠식되었던 심장을. 그러자, 쟁반이 ‘지이이잉~’ 낮게 울리며 그 심장 안에 깃든 붉은 균열이 공명한다.
“...이런 거였나?”
그리고, 우리 앞에는 계단이 있었다.
원래부터 있던 것, 하지만 인식하기 전에는 보이지 않는 착시현상처럼 인식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여기와 연결된 다른 공간의 축에 있는 계단을 인식하는 거긴 한데... 어쨌든, 이것도 피라미드 위에 떠오른 검은 태양처럼 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는 기적이다.
“예, 아이들에게서 뽑은 심장을 이렇게 바쳤죠.”
김가트의 말에 고갤 끄덕이며 대꾸한 뒤, 난 고갤 돌려 나머지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자, 그럼 가시죠.”
저 끝, 검은 태양의 제단을 향해.
2.
피로 뒤덮인 계단을 한 발자국 내딛는 순간, 나를 포함한 일행은 모두 기겁했다.
“...”
“...”
그럴 수밖에 없었다. 불쾌한 야만인들의 함성은 환청이었다는 것 마냥 사라지고 전혀 새로운 곳에 서있었으니까. 피라미드 안쪽으로 진입할 때와 비슷한 경험이었지만, 여기는 피라미드 안쪽의 통로와는 ‘차원’이 달랐다.
검붉은 색의 우주
반짝이는 별 대신에 검은 별이 떠오른, 반짝이는 성운 대신에 내장이 꿈틀거리는 것 같은 어떤 흐름으로 가득한... 모순적인 검붉은 우주. 그 반짝임 하나 없는 섬뜩한 검붉은 우주의 공허 한복판에 덩그러니 존재하는 ‘끝없는 계단’에 우리는 떨어졌다.
공기가 무겁다.
녹아내린 납을 들이키는 것처럼 숨을 내쉴 때마다 가슴을 묵직하게 짓누른다. 들리는 것이라곤 우리가 내뱉는 숨소리와 ‘삐이이-’ 울리는 이명(耳鳴)뿐, 투기장에서도 불쾌했지만 그것이 그래도 이해 가능한 불쾌함이라면 지금 눈앞에 있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이해하는 순간 미쳐버릴 것 같은 불길함이다.
“...자모란씨, 여긴 어디죠?”
공간이 뿜어내는 위용에 압도되어 있다가 이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여는 악덕 경찰. 그에 다프트펑크를 연상케 하는 헬멧을 쓴 파란 정장 눈나도 정신을 차린 듯,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주위의 공기를 만지작거린다.
“천상의 영역...”
“천상의 영역?”
“신께서 거하시는 드높은 곳, 물리적인 법칙이 통하지 않는 비(非)물질계이며...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이 없고 끊임없이 달라지는 관념적인 곳.”
파란 정장의 누나가 중얼거림. 그 심상치 않은 설명에 다들 얼굴이 굳어지는 가운데, 자모란이라는 딱 봐도 미궁출신인 것 같은 이름의 누나는 걱정할 필요 없다는 듯-아니 스스로를 세뇌하듯이 필사적으로 고갤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여긴 천상의 영역은 아니에요! 굉장히 가깝지만······ 다른 곳입니다. 물질세계의 법칙이 완전히 적용되지 않을 뿐, 일단은 실존하는 ‘공간’이긴 하니까. 심연 지옥, 어비스(Abyss)와 비슷한 공간이라고 보시면 될 겁니다.”
“...그럼 어떻게 여기서 나갑니까?”
“이 계단이 현실과 연결되어 있는 포인트예요. 이 계단만 따라간다면 다시 현실로 튀어나올 겁니다.”
자모란의 대답에 다들 일말의 안도감에 젖어 고갤 끄덕인 후, 일행은 계단 바깥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주위를 기울이며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연히, 나도 심장이 놓인 황금쟁반을 든 채로 움직였지만... 시선만큼은 주위를 둘러보기 여념 없었다.
그리고, 응시할수록 내 영혼이 발광한다.
“흐, 흐히히하하하! 하하하핳! 아하하하!”
보고 싶지 않지만, 저절로 시선이 쏠린다. 어떤 걸 보고 생각하지 않아야지 할수록 점점 머릿속에서 그것이 떠오르는 것처럼. 그 여파에 물들어 내가 병적인 웃음을 흘리자 신경이 곤두선 일행들이 발걸음을 멈춘 채로 경계한다.
그에 난 웃음을 참으며 고갤 숙여 사과했다.
“흐, 흐흐흐! 푸! 죄송해요. 갑자기, 웃음이 나오는... 흐! 병이 있어서!”
“...”
“여기, 흐흐! 공기가 불길해서 웃음이 터졌네요. 하하핳!”
내가 시선을 떼지 못하는 이유, 그건 이곳이 아무리 봐도 ‘르피너스’를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한 공간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었기에 더더욱 공포에 질렸다.
이 검붉은 우주를 감싸는 흐름
그건 희미한 촛불에 흔들리는 그림자처럼 일렁거리면서 시시각각 다른 형태로 변화한다. 육안(肉眼)은 그저 뭔가 흔들리는 것만을 포착할 뿐이지만... 내 <관찰자의 눈>은 육안으론 인식 못하는 실체를 뇌에 밀어 넣는다.
그건, 살육이란 개념에 가까웠다.
인간이라는 ‘털 없는 원숭이의 뇌’가 가진 빈약한 상상력으로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을 넘어선... 살육을 위한 모든 감정들과 물리적 실체가 그 흐름 안에 있었다. 그래, 미르에서 펼쳐졌던 그 모든 것들도 저 안에 있다. 인간, 영혼, 무기를 포함한 모든 것들이.
보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산산조각 나는 것 같은 끔찍함, 하지만 내 영혼은 그걸 좋다고 계속 바라본다.
-침입자구나. 불신자도 있군.
“흐흐흐, 흫?”
그렇게 흘러나오기 시작한 웃음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경계어린 시선을 받으며 한걸음 씩 계단을 오르고 있을 때, 난데없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다시 멈춰 섰다. 선두에 섰던 내가 멈춰 서자 뒤따라오던 일행 모두 멈춘다.
“...무슨 이상이라도 있나?”
양 손에 쇠사슬을 꽉 쥐면 질문하는 전찬휘 경감, 그에 난 웃음을 흘리며 두 눈을 끔뻑였다. 르피너스 같이 초월적인 존재의 음성은 아니다. 그냥 사람이 말하는 같은 음성. 아니, 그나저나 이 목소리를 듣고도 그런 말을 한다고?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목소리가 또 들려온다.
-내 목소리는 너에게만 들린단다. 아이야.
“흐, 흐히힣! 누군가 제게 말을 걸고 있어요! 저만 들을 수 있다고 하면서! 그러고, 불신자도 있다고 하던데요?!”
-거침이 없구나. 개인적으로 그건 안 밝혔으면 했는데 말이야.
자세히 들어보니 공기를 울리는 소리가 아니다. 그냥 단숨에 머릿속에 박히는 것... 뭔가 싶어서 내 몸을 살펴보니 황금 쟁반에 있는 심장, 그곳의 균열에서 흘러나오는 격류가 어느새 내 손을 타고 안쪽에서 파고들고 있었다.
그런 내 설명에 다른 일행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 가운데, 내게 말을 거는 늙은 음성이 계속 울린다.
-나는 자격이 있는 이에게만 말을 걸지. 소년, 이름이 무엇이냐? 아니, 듣지 않아도 알겠구나. 백발에 작은 체구... 네가 한새벽이겠구나.
“한국어고, 친근한 할아버지 같은 목소리에요. 그리고, 제 신체 특징을 보곤 제 이름을 파악했고.”
“아마, 닥터 크림슨일 거다.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을, 이번 일을 벌인 범죄자지. 어떤 이유로 네게 말을 거는지는 모르겠다만 곧 죽일 수 있을 테니 무시해라.”
그러고 보니 지금 대환이가 낀 장비 중 하나를 보며 닥터 크림슨의 것이라고 언급했었지? 나름 타당한 추측이네. 목소리가 들려도 무시하기로 마음먹고 다시 실실 웃으며 계단을 밟으며 올라가자 그 늙은 목소리가 또 들려온다.
-후후, 대답하고 싶다면 그냥 마음속으로만 생각하거라. 그렇게 말 안 해도 지금의 나는 들을 수 있으니까.
‘이렇게요?’
-그래, 그렇게. 자, 그럼 우리 한 번 대화를 나누어보자꾸나.
대화? 퍽이나! 날 회유해보려고 하는 개지랄이겠지. 안 그래도 터져 나오는 웃음 때문에 날 경계하고 있는데, 누군가 말을 건다는 것을 순순히 실토한 덕분에 일행들은 더 날 경계하고 있었다. 특히, 내 등 뒤의 전찬휘 경감은 혹여 내가 뭔 짓을 벌이면 쇠사슬을 던지려고 준비하고 있다.
이래선 배신하려고 해도 배신할 수 없다.
애초에 배신할 생각도 없지만 말이지.
‘죄송하지만 그만 말 걸어주시겠어요? 뭔 말을 하건 간에 전 당신의 편을 들지 않을 거니까. 곧 망할 게 뻔한 패에 배팅하는 취미는 없어서.’
-하하, 망할 게 뻔한 패라고?
‘예, 지금 당신이 있는 피라미드 꼭대기로 가고 있거든요. 설령, 아니더라도 상관없답니다. 이미, 당신이랑 대화하는 걸 실토해서 다들 절 경계하고 있죠. 특히, 경찰 아저씨가. 당신 편을 든다고 해도 뭔 짓을 꾸미면 전 죽을 거랍니다.’
나지막한 웃음소리, 이어서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걱정마려무나! 너가 있는 곳은 자비로운 ‘칸의 영역’이지. 그리고, 나는 그곳에 간섭할 수 있지. 너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곳에서 널 상처 없이 빼돌릴 수 있단다!
‘흠, 끈질기시네.’
-그럼! 난 네가 저들과는 어울리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거든!
악마의 속삭임처럼 늙은 남자의 목소리는 자상한 말투로 속삭였다.
-신께 축복을 받은 이후, 나는 증오와 살의를 읽어낼 수 있지. 그걸로 ‘진정한 신’을 섬길 재능이 있는 이들에게 기회를 주고 있단다.
‘...’
-네가 죽인 대환이도 그런 부류였지. 너에 대한, 그리고 자신을 무시한 이들에 대한 증오와 분노가 흘러넘쳤어! 그리고, 너도 비슷하구나! 아니, 대환이의 것과는 비교가 불가능해!
흥분한 듯, 노인은 숨을 헐떡인 후 상기된 음성으로 속사포처럼 말을 이어나간다.
-너의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끓어오르는 살인적인 증오가 보인다. 모든 존재에 대한 저열한 열등감과 질투... 믿어지질 않는구나! 그래, 나를 훨씬 능가해! 대환이가 너를 보고 질투할 만도 하겠어. 넌, 그 누구보다 유혈의 축복을 받기에 적합하다!
‘...쩝, 들켰네.’
-당연하지. 내가 괜히 널 포섭하려는 줄 아느냐? 말했다시피 난 애초부터 자격이 있는 아이에게만 말을 걸지. 넌, 이미 칸을 섬기는 우리와 똑같단다! 다른 점이라면... 그저, 그분의 따뜻한 은총이 없다는 것뿐!
선언하듯 소리친 후, 그는 은근한 목소리로 내게 권유한다.
-아이야, 너 칸의 신도가 되지 않겠느냐?
‘죄송하지만 거절하죠. 안 그래도 살기 힘든데, 살육에 미친 광신도가 되서 사회생활 조질 이유는 없어서...’
-사회생활? 하하하!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웃는 머릿속의 목소리, 이어서 그는 나를 꾸짖듯이 노호성을 내지른다.
-어리석구나...! 어리석어! 너희는 이 세상의 진실을 못 보고 있구나!
‘진실? 그게 뭔데요?’
-이 세상이 그저 하나의 ‘장난감’일 뿐이란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