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112화 (112/350)

< 23화. 신께선 그런 결말을 원치 않으신다. >

1.

“...진짜 끝났군요.”

태양석이 박살나자 뜻 모를 비명소리와 함께 일그러진 세상이 무너져 내린다. 미르를 외부와 차단하던 핏빛 안개가 서서히 걷혀나가고, 솟구친 이형의 건물들은 느릿하게 지면으로 침잠한다. 전찬휘 경감은 착잡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이 지옥 같은 일이 끝났지만... 남겨진 상처가 너무 컸다.

물론, 객관적으론 한국은 매우 선방한 축에 속했다. 피해가 얼마가 되는 지 집계되진 않았지만 ‘미국의 이능력 아카데미에서 벌어졌던 살육’과 며칠 전 ‘중국에서 벌어진 살육’에 비하면 확실히 적으니까. 게다가 두 초강대국이 죽이지 못했던 닥터 크림슨까지 죽였다.

그러나, 한국에겐 선방해서 입은 상처만으로도 파멸적이었다.

앞으로 미르는 어떻게 될까? 나라의 미래를 책임질 인재들이 거의 몰살당했다. 간신히 살아남은 아이들도 정상은 아닐 거다. 마력 연구 또한 타격이 크겠지. 그렇게 공무원으로서 전찬휘 경감은 나라의 앞일을 걱정...

“하아.”

하다가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곤 한숨을 내뱉었다.

솔직히, 지금 나라를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의 처지 또한 안 좋은 의미로 불확실하니까. 이번 사태의 원흉은 닥터 크림슨이지만, 녀석의 침입을 늦게 파악한 일은 자신과 연관되어 있었다.

닥터 크림슨이 러시아에서 넘어올 때, 그를 포함한 특전대 인원들은 놈을 한국에 들이지 않기 위해 중국 쪽으로 유인작전을 펼쳤다.

중국이 닥터 크림슨이 넘어온 걸 경고 하지 않은 건, 그 ‘괘씸죄’ 때문. 그래도 닥터 크림슨이라는 재앙을 피했다면 책임을 면하겠지만 이렇게 터져버렸다. 분명, 이번 일의 책임-‘중국과의 관계 악화’ 및 ‘초동 대처 부실’등으로 자기를 물고 늘어지는 사람은 있을 거다.

이해한다.

이번 일에 죽은 사람들과 중국의 괘씸함을 넋 풀이할 희생양은 필요하니까. 집단이란 건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아니까. 하지만, 아는 것과는 억울한 건 별개다. 그렇게 사건을 해결했음에도 기쁨보다는 허망한 표정으로 자신의 앞일을 걱정하고 있던 전찬휘 경감은...

“[태양이... 떨어진다! 하하하핳!]”

뒤편에서 들려오는 비정상적으로 활기차고 명랑한 웃음소리에 살짝 얼굴을 구겼다. 고갤 돌려 그 방향을 응시하자 그의 사슬에 묶인 백발 소년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미친 듯이 웃고 있었다.

“...좀 조용히 하셈.”

서예린이 미친 듯이 웃는 소년의 입을 틀어막았지만 소년은 아랑곳 하지 않는다.

“[흐, 흐히히히힣! 하하하핳! 유혈이 화가 났다네~ 화가 났어~ 이야 추하다! 추해!]”

소년이 돌연 감고 있던 두 눈을 부릅뜬다.

유리알 같은 눈에 박힌 자줏빛 홍채에서 불길한 광채가 일렁이는 모습에 전찬휘 경감은 반사적으로 한 발자국 물러서며 흑빛 쇠사슬을 더 강하게 조였다.

-뿌드드득!

“[흐히히힣! 하하하!]”

소년의 팔뼈가 부서지다 못해 조각조각 으스러지고, 갈비뼈 또한 작살나는 소리가 들린다. 일반인이라면 목숨이 위험할 부상이지만 소년의 광기어린 웃음은 계속 이어진다.

“평소 한새벽 군의 목소리가 아니군. 어조가 달라.”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는 서강, 서예린 또한 굳은 얼굴로 고갤 끄덕인다. 실제로 방금 한새벽의 목소리는 어조나 강세가 달라서 전혀 다른 인물이 말하는 것 같았다. 한새벽의 진실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두 부녀가 긴장하자 일행들 사이에서도 묘한 긴장감이 퍼진다.

그리고, 감이 좋던 서예린은-.

“태양! 태양이!”

가장 빨리 이변을 알아차렸다.

아직도 검붉은 하늘, 한새벽이 시선이 향하고 있는 검은 태양이 미세하게나마 점점 커지고 있었다. 서예린이 비명을 지르듯 소리치며 하늘을 가리키자 다른 이들도 그제서야 이변을 눈치 챘다.

“떠... 떨어져요! 천상의 영역에서 태양이! 유혈의 태양이! 이쪽으로!”

“피할 수 있나!”

헬멧에 부착된 증강 장비를 통해 공간 좌표를 분석한 자모란이 새된 비명을 내지르는 가운데, 김가트가 다급하게 질문하자 자모란은 주저 없이 아직도 건물 30~40층 높이는 될 것 같은 피라미드 경사를 향해 무작정 뛰어내리며 소리친다.

“달리면서 무작위 타인 점멸(Random Blink Other)을 걸어줄 테니 일단 도망쳐욧!”

그에 김가트와 서강도 재빠르게 뛰어내렸지만... 전찬휘 경감은 움직이지 못하고 당황했다. 사슬에 묶인 한새벽이 문제였다. 풀어준다고 해도 도저히 도망칠 정신이 아닐뿐더러, 그렇다고 한새벽을 들고 움직이기엔 너무 무거웠다.

“사슬 푸셈.”

아직까지 도망치지 않았던 서예린이 대신 한새벽을 업으며 말하자, 그도 재빨리 사슬을 풀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앞서간 다른 사람들의 뒤를 따라 전력으로 내달렸다.

2.

‘유혈의 장군’이 호위대와 함께 직접 오크들의 본진에 난입한 뒤, 전투는 절망적으로 변했다.

오크들에게 있어 ‘전쟁 군주’는 우두머리 그 이상의 존재, 곧바로 그를 보호하기 위해 쪼개져서 운용되던 기사단들이 본진으로 복귀했고 당연히 유혈의 군단 또한 몰려왔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유린하던 기동전 형태의 싸움은 이제 힘과 힘이 맞부딪치는 백병전이 되었다.

“■■■! ■■-■■■!”

“막아!”

방진을 짠 오크 기사단이 방패와 도끼창을 앞세운 채, 밀려드는 야만인들을 힘으로 분쇄한다. 그렇게 한 부대를 걷어냈지만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처럼 다음 야만인들의 부대가 밀려든다. 게다가-.

-투-쾅!

저 멀리서 머리통 골렘들이 던진 인간의 머리통이 포탄처럼 날아와 오크 기사들이 짠 방진을 무너트렸다.

근처의 야만인들도 그 포격에 휘말렸지만, 유혈의 군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크 마법사들이 교대로 광범위하게 <투사체 방어> 마법을 펼치면서 위력을 줄였음에도 연속해서 쏟아지는 포격은 충분히 살인적이었다.

오크 무리는 금방이라도 그 숫자의 폭력에 익사할 것 같았지만-

“AL-MOE-CHUN!”

한 사람의 존재가 그런 숫자의 폭력을 막아냈다.

오크들의 주위를 뒤덮는 거대한 녹색의 장막, 보이지 않는 벽이라도 있는 것처럼 오크들이 서있는 곳만 퍼지지 않는 그 독무는 진입하는 야만인들을 괴롭혔다. 간간히 떨어지는 머리통 포탄의 명중률 또한 대폭 떨어졌다.

“하아, 시발... 존나 빡세네.”

그렇게 다시 한 번 마법으로 전장을 뒤덮은 강수영은 가쁜 숨을 내뱉으며 코에서 흐르는 피를 닦았다. 급작스런 적의 난입에 버티기로 바뀐 지 10여분 가량, 전선의 소요는 벌써 한계였다. 천천히 물러나면서 전열을 정비하면 좋겠지만...

-꽈-쾅! 꽈-릉! 쾅!

뒤쪽에서 들려오는 굉음에 그녀는 얼굴을 구기며 그 방향을 바라보았다.

오크들이 세운 방진 안쪽, 그 중심에서 두 괴물이 서로 싸우고 있었다. 한 명은 오크 전쟁 군주, 또 다른 한 명은 야만인들을 이끄는 우두머리. 어떻게 보면 적의 우두머리가 오크들에게 포위당한 상황이지만 어처구니없게도 다른 오크들은 손도 대지 못하고 있었다.

그 만큼, 날뛰고 있는 존재는 압도적이었다.

건물 철거용 철구 같은 무기를 휘두르는 해골 갑주의 야만인. 처음엔 기사들이 어떻게 건드리려고 했지만 철구가 그리는 궤적에 토마토처럼 터지고 난 뒤, 전쟁 군주가 괜히 끼어들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마법 또한 저 철구가 마법 자체를 분쇄해버려서 헛수고였다.

“...저거 아무리 봐도 안 끝날 것 같은데.”

방패를 앞세운 채, 절제되고 신중한 움직임을 보이는 오무혁.

그의 움직임은 제 3자인 그녀가 봐도 답답해서 숨이 막혔다. 방어를 굳건히 한 채, 알면서도 상대의 뜻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는 자잘한 수를 쌓고 쌓아 만들어진 우위를 바탕으로 끝장내려고 한다. 그건, 꼭 서서히 죄어오는 올가미 같았다.

광기에 휩싸인 채, 난잡하게 움직이는 유혈의 장군.

이놈은 오무혁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성향이다. 난폭하고 직관적, 합리 따윈 생각하지 않고 그때그때 마다 ‘폭발적인 힘’으로 내리 찍는다. 공격, 공격, 그리고 또 공격. 치밀함은 부족해도 상대방이 ‘아차!’ 하면 일격에 끝장낼 수 있는 난폭한 폭풍 같았다.

극과 극의 대결, 그 실력 또한 비등해서 도무지 끝날 기색을 보이지 않았-.

-*$^*&@#$)#)[email protected]#&@#!

지만, 영혼을 울리는 소음과 함께 외곽의 야만인들은 물론이고 폭풍처럼 날뛰던 유혈의 장군이 멈칫한다. 그리고, 그 빈틈을 오크 전쟁 군주는 놓치지 않는다.

-촤학!

깔끔한 궤적을 그리며 정확하게 갑옷의 빈틈을 가르는 수정검, 장군의 목이 날아가는 순간 다른 야만인들 또한 일제히 비명을 내지른다. 이어서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지곤 핏물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하, 끝났네.”

그 광경에 강수영은 살짝 허탈하게 웃으며 오른손에 낀 녹색 건틀릿을 까닥였다. 그와 함께 퍼져있던 독무가 휘몰아치며 장갑에 빨려 들어간다. 드러나는 미르의 전경, 피로 물들었던 지면은 서서히 사라지고 일그러진 건축물들 또한 지면에 가라앉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며 전쟁 군주 또한 동의했다.

“그래, 끝났군.”

전쟁 군주의 끝났다는 말에 색색 거리며 증기 같은 숨을 내뱉던 오크 기사들은 그대로 주저앉고 투구를 벗었다. 하나같이 땀에 흠뻑 젖은 얼굴, 아무리 초인이라 불리는 마력 각성자라고 해도 전투에서 소모하는 에너지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특히나, 같은 마력 각성자를 상대론 더더욱.

그렇게 전방에서 싸우던 이들이 주저앉은 사이, 예비대로 교대해서 쉬고 있던 기사들이 전쟁 군주 곁으로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전쟁군주시여?”

“난 괜찮으니까 여력이 있는 이들은 빨리 부상자를 수습해라! 이제 다시 통신도 될 테니 중앙 미르 쪽에 연락해! 부상자들을 당장 미르 병원으로 이송시킬 테니 협력하라고!”

“알겠습니다!”

전쟁 군주의 호령에 바짝 대답한 후, 다급하게 너부러진 동료들을 향해 뛰어가는 오크 기사들.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전쟁 군주는 살짝 우울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진입했을 때는 700명 남짓한 병력

하지만 지금은 300명 정도 밖에 보이지 않았다. 대략 절반 이상이 죽었다는 뜻. 만단위의 적을 상대로, 그것도 잡병이 아닌 살육의 광기에 취한 정예군단을 상대했다는 걸 생각하면 선전한 것이지만...

“후우.”

애써 안타까움을 털어내며 전쟁 군주는 한쪽을 향해 움직였다.

한 오크 마법사가 있는 방향, 하지만 그는 라이플을 든 다른 오크 마법사들과는 달리 소형 방송용 촬영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전쟁 군주가 다가오자 마법사가 화들짝 놀라 기립하고, 전쟁 군주는 손을 들어 괜찮다는 신호를 보내곤 입을 열었다.

“됐다. 그나저나 영상은 어떻게 됐나?”

“예! 잘 찍혔습니다.”

전쟁 군주의 질문에 마법사는 찍은 영상을 돌려보며 고갤 끄덕였다.

“여기에 추가로 기사들이 착용한 바디캠들을 회수하면 선전 영상을 만들기 충분할 겁니다.”

“음.”

그 대답에 전쟁 군주는 고갤 끄덕였다.

방송 촬영이 취미한 마법사, 이번 일을 좀 더 생생하게 알리기 위해 특별히 뽑아온 대원이었다. 아무리 노력했다고, 희생했다고 한들, 잘 알리지 않으면 인간들은 그냥 입을 쓰윽 닦기 일쑤였으니까.

처음 밖에서 그런 일을 당하고 얼마나 당황했던가?

하지만, 이젠 자신도 바깥의 정치에 익숙해졌다.

인간 정치인들이 후려치려고 해봐도 소용없다. 이 동포들의 핏값은 단단히 받아낼 것이다. 어떻게 완성된 영상을 퍼트릴지, 그리고 어떤 정치인들과 만나서 인간들의 여론을 조성해야 할지 생각하며 전쟁 군주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저.. 전쟁 군주시여! 저기! 저길 보십시요!”

다급한 마법사의 외침에 오무혁은 생각에서 벗어났다.

마법사가 가리키는 방향, 피라미드가 있던 곳에 떨어지고 있는 검은 태양이 보였다. 원근감이나 실질 크기를 생각하면 말이 안 되지만, 미궁에서 있던 오무혁은 상대적으로 쉽게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을 받아들였다.

“기사들! 분대장을 중심으로 방패를 들어 잔해에 대비해라! 마법사들은 <투사체 방어>를 사용해!”

전쟁 군주의 외침에 쓰러져 있던 오크기사들이 허겁지겁 뭉쳐서 방패를 들어 올리고 마법사들은 일제히 <투사체 방어> 마법을 사용한다. 그렇게 어느 정도 대비가 되었을 때-

검은 태양이 떨어졌다.

-쿠콰아아앙!

가청 영역을 넘어선 굉음, 떨어진 구체의 크기에 비하면 충격은 그리 크지 않았다. 고작해야 ‘파묻혀가던 이제 100m 남짓 남은 석제 피라미드가 박살나 흩어진’ 정도. 오크들이 있는 곳까지 몸통만한 석재 잔해가 날아왔지만-.

-쿠웅!

-쿵!

자잘한 파편들은 마법사들이 펼친 <투사체 방어> 마법에 의해 물에 빠진 것처럼 느려져 방패에 막혔고, 커다란 잔해는 날아오는 돌의 궤도를 정확히 읽은 분대장의 수신호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피했다.

그렇게 한 차례 폭풍을 넘기고 난 뒤, 오크들은 피라미드가 있던 곳에 있는 거대한 것을 볼 수 있었다.

30m 남짓한 강철 덩어리, 분노에 찬 인간들이 그 안에서 발광하고 있는 것처럼, 그 표면 위로 분노로 빚어진 얼굴들을 올록볼록 솟구쳤다가 사라진다. 그냥 보기만 해도 ‘저것은 살아 있었고, 동시에 굶주려 있다.’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얼마 안가, 그 강철의 덩어린 하나의 형상으로 빚어진다.

“...저건?”

“인간이군.”

긴 머리칼에 정리되지 않은 텁수룩한 수염, 헐벗은 근육질의 몸 곳곳엔 흉터와 뼈를 깎아 만든 것 같은 장신구를 걸쳤고 그 손에는 깬 석기를 묶은 창을 쥐고 있다. 꼭 석기 시대의 야만인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알았다.

저건 외형만 인간으로 모사했을 뿐 그 진정한 정체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그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30m가 넘는 강철 거인은 일어서며-

「!!」

감고 있던 두 눈을 뜨고, 피눈물을 흘리며 포효를 내질렀다.

세상이 은은하게 떨리고 그와 함께 퍼져나가는 ‘의미’에 모든 생명체가 숨을 죽인다. 그것은... 번창하는 생명에 대한 증오와 살의, 생명체의 종말을 알리는 악의(惡意)의 메아리였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포효를 강수영은 들어본 적이 있었다.

“악마 군주?”

“최소 그 급인 건 확실하군.”

강수영의 중얼거림에 대꾸하며 전쟁 군주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핏빛 안개는 완전히 사라졌고, 미르 주변을 빙 둘러싼 채 대기하고 있는 탱크들도 잘 보였다. 보아하니 자신들이 나서야 할 것 같진 않았다.

“외부의 화력이 쏟아질 거다! 모두 시신과 부상자들을 수습하고 뒤로 한 발자국 빠진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