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113화 (113/350)

< 23화. 신께선 그런 결말을 원치 않으신다. >

3.

기괴한 비명과 함께 미르를 감싼 ‘핏빛 장막’이 사라지자, 가장 많은 생존자들이 모여 있는 미르 중앙 행정처는 잠시 평화를 되찾는 듯 했다.

하지만, 그 평화는 불과 1분도 가지 못했다.

“비켜! 비키라고!”

“안됩니다! 아직 바깥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뭔 소리야! 이 새끼들아! 밖이 보이잖아! 이제 미르 밖으로 나갈 수 있어! 그리고 저거 안 보여?! 도망쳐야 한다고!!”

하늘에서 검은 태양이 떨어지고 가라앉던 피라미드가 굉음과 함께 산산조각으로 터져나간 뒤, 간신히 가라앉았던 혼란은 다시 시작됐다. 경기를 일으키는 몇몇 생존자들이 기어코 미르 밖으로 나가려 했고, 그러한 분위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빠르게 전염되었다.

“...어떡하죠?”

수백 여 명의 생존자들이 밖으로 나가겠다고 밀려드는 상황, 3개의 입구 중 하나를 맡아 막고 있었던 남궁진아와 이종족 교류회 소속 아이들은 당혹스런 표정으로 뒤에 있는 교관을 바라보았다. 그에 교관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갤 저었다.

“그냥 문을 잠가버려라.”

“네? 하지만...”

“여기서 봤겠지만 닥터 크림슨의 마력에 노출된 이들은 공격성이 강해진다. 심지어는 살인마가 될 수도 있지. 마력에 대한 저항력이 약한 일반인들은 더더욱 위험해. 일단, 전문적인 치료를 받아야해.”

닥터 크림슨의 마력에 관한 내용을 미리 받았기에 교관들은 이 민간인들을 함부로 풀어줘선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단호한 말에 남궁진아는 살짝 떨떠름한 얼굴로 오른손에 쥔 큐브에 마력을 집어넣고 번개의 실선을 뻗었다.

-부웅! 부웅! 부릉!

-부우우웅!

“이, 이 개새끼들이...!”

그 번개 줄기를 맞은 자동차들이 뭉치며 다시 바리케이드가 세워진다. 그 광경에 어떻게든 밖으로 나가려고 실랑이를 벌이던 생존자들이 벌게진 눈으로 욕설을 내뱉으려 할 때-.

-아아, 행정처에서 알립니다. 미르 중앙 행정처에서 정원용 교장이 알립니다.

그 동안 작동하지 않았던 교내의 방송 스피커에서 정원용 교장의 목소리가 울린다. 그 목소리에 사람이 잠시 멈칫하는 가운데, 스피커의 안내 방송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현재, 외곽에서 대기 중이었던 군부대가 미르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모든 생존자분들께서는 현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시고 계신 곳에서 대기해 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미르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 마시고 지금 계신 자리에 대기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 개 같은 새끼들이 어디...”

-함부로 미르 밖으로 나가실 경우, 군의 사살 대상이 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죽더라도 정부와 미르에선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다시 반복합니다. 군의 사살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정부에선 책임지지 않습니다.

“...”

-이는 이번 사태를 일으킨 테러리스트 ‘닥터 크림슨’이 타인으로 의태하고 도주할 수도 있기에 부득이하게 취한 조치니 모든 생존자분들께선 부디 방송의 지시에 따라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안내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재, 미르 외곽에서...

미궁이 부상하기 전의 대한민국이었다면 곧바로 스마트폰을 통해 인터넷과 SNS에 박제되고, 그 발언자는 사회적으로 매장될 법한 협박.

하지만, 지금은 ‘혼돈의 시대’였다.

공공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실시간 검열·도청은 물론이고, 사람 몇 명 죽는 건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시대. 그것에 반발할 자유주의자들도 이미 무서운 현실에 쪼그라들었다. 그 실질적이고 강렬한 협박에 폭발하려던 생존자들이 멈칫하고, 방송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지금 하늘에서 떨어진 검은 구체는 현재 군부대 측에서 처리할 것이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부디 대한민국 정부를 믿고 그 자리에 계시길 바랍..

「!!」

머리통을 열어젖히고 그대로 뇌에 고함을 내지르는 듯한 ‘압도하는 의지’가 세상을 울린다. 번창하는 생명에 대한 증오, 생명체의 종말을 알리는 악의(惡意)의 메아리. 그 세상에 건네는 선전포고에 방송을 하던 정원용 교장의 말도 끊겼다.

“...”

미르의 모든 이들은 홀린 듯이 그 의지가 터져 나온 곳을 응시했고, 검은 구체가 있던 곳에 고고히 서있는 ‘야만인 형상의 강철거인’을 볼 수 있었다.

-투쾅! 투쾅! 투쾅! 투쾅!

이어서 천둥이 치는 것 같은 굉음과 함께 곳곳에서 포탄의 주황빛 궤적이 그 강철거인에게 내리꽂힌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배치됐던 중·경전차들의 포격, 그렇게 내리꽂힌 궤적만 해도 거의 20개는 되었지만-.

-터엉! 터엉! 텅! 텅!

강철거인의 내구도는 상식을 초월했다.

음속의 몇 배로 날아드는 포탄을 맞은 순간, 커다란 종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포탄이 허무하게 도탄 된다. 귀찮은 파리를 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린 강철거인은 고갤 두리번거리며 궤적이 날아온 방향을 한 번 훑어보곤-

-오오오옹!

가늘게 몸을 떨며 낮은 진동음을 뿜어냈다.

그와 함께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강철거인의 두 눈, 금속질의 광택이 흐르는 거인의 육신에서 유일하게 다른 색의 그것이 ‘더 붉게’ 빛나기 시작한다. 뭔가 심상치 않은 광경에 전차들은 회피 기동을 하려 했지만-.

-즈아아아아앙!

기괴한 소음과 함께 그 두 눈에서 ‘붉은 선’이 뻗어나간다. 거의 2km 밖까지 직선으로 날아간 피눈물은 그대로 포격을 가한 전차에 꽂힌다. 그에 장갑 두께만 2m달하는 전차의 전면이 짓밟힌 알루미늄 깡통처럼 찌그러져 갈라진다.

-즈아아아아앙!

강철거인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피눈물을 뿜어내면서 고갤 돌려 다른 전차들을 응시한다. 이미 전차들은 무한궤도를 움직이며 나름 회피기동을 시작했지만 피눈물로 이뤄진 붉은 궤적은 그대로 그런 전차들을 집요하게 따라가 박살낸다.

-콰과과과과콰-ㄱ!

마치, ‘거대한 존재가 톱을 들고 우악스럽게 그은 것’처럼 갈라지는 대지.

그 궤적에 있는 모든 것들이 굉음과 함께 핏물에 뒤덮여 갈라졌다. 위협적이었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모두 넋이 나간 가운데, 그 한 번의 응시로 20여대의 중·경전차들과 건물 수십 채를 박살낸 강철거인은 두 눈을 천천히 감는다.

“...”

마력 각성을 거친 초인이 흔한 현 시대에도 전율할만한 ‘규격 외의 괴물’,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대부분은 제대로 상황파악도 하지 못하고 넋이 나갔지만 방송을 하고 있던 교장은 넋이 나가지 않은 듯 곧바로 스피커에서 커다란 음성이 흘러나왔다.

-생존자 여러분은 당황하지 마십시오! 포격이 통하지 않은 건, 극소수의 미궁 생명체가 가진 성질 중 하나인 <물리 내성> 때문입니다! 국군은 저 방어를 뚫을 무기를 가지고 있으며, 현재 이곳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다만, 충격파가 발생할 수 있으니 괴물의 근처에 계신 분은 건물 안으로 숨어서 충격에 대비해주시길 바랍니다!

지상의 인간은 지난 16년 동안 논 게 아니다.

미궁이 부상한 뒤, 인류는 저런 ‘불합리한 존재’를 죽이기 위해 고심했다. 룬 수호자 같은 경우 ‘자격이 없는 존재에겐 죽지 않는다.’라는 미궁 원주민들의 정보와 실제로 겪어봤기에 대처를 반쯤 포기했지만 그 외의 존재들-‘악마 군주’나 ‘고룡’은 그런 까다로운 조건이 없었다.

그 결과, 인류는 기어코 그런 ‘불합리한 존재’를 죽일 만한 병기를 만들어냈다.

-콰-릉!

그리고, 한국도 그런 재앙을 죽일 ‘결전 병기’를 가지고 있었다. 방송이 끝나기 무섭게 검붉게 물든 하늘이 천둥소리와 함께 잠깐이지만 푸르게 빛난다. 이어서 천벌처럼 ‘푸른 번개’가 강철거인에게 내리꽂힌다.

한국형 순항 미사일-‘현무 III’를 골조로 만들어진 ‘청룡 III’

생명체에 흐르는 마력이 타격을 분산시킨다는 연구 결과를 토대로 그러한 ‘타격 분산 능력’을 무력화시키는 온갖 저주물품과 마법을 연구해 적용한 한국군의 걸작. 다만, 온갖 마법적 힘과 미궁 재료가 들어가면서 그 단가는 단가 42억에서 6300억으로 150배가 뛰었다.

하지만, 그 돈값은 확실했다.

-쿠-ㅇ! 콰-아-앙!

전차의 주포에 직격 당했음에도 약간의 미동조차 없었던 강철거인, 하지만 푸른 번개에 강타당하는 순간 ‘기우뚱!’하며 육중한 소음과 함께 뒤로 쓰러지고 이어서 내부에서부터 강화 폭약이 터지며 핏물을 흩뿌리며 산산조각 나서 터져나간다.

-쿠우우우-웅!

잘게 쪼개진 거인의 금속 파편이 사방을 휩쓸고 근처 미르의 건물들은 휘말려 박살났다. 하지만, 이것 또한 현시대에선 충분히 ‘감내할만한 희생’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강철거인이 지상에 떨어지면서 발생한 돌파편에 이미 한 번 주변이 박살나있었기에 거리낌도 없었다.

그 광경에 이종족 교류회 아이들은 입을 떡 벌린 채 멍하니 응시했다.

“지... 진짜 무지막지함다.”

오혜영의 중얼거림, 세상을 찢어발길 것만 같았던 의지를 내뱉었던 무시무시한 괴물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죽었다. 그에 곁에 있던 남궁진아는 피식 웃었다.

“저게 인간들이 지닌 ‘집단의 힘’이죠.”

“...”

“국군은 저런 무기를 수십 발을 가지고 있어요. 원한다면 더 만들 수 있고요. 무엇보다, 저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핵폭탄’도 가지고 있답니다.”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남궁진아, 강철거인 소리 없는 포효를 들었던 순간, 그녀도 다른 애들처럼 안색이 창백해졌지만 어느새 다시 혈색이 돌아와 있었다. 그 설명에 혼혈 아이들이 강철거인의 잔해를 보며 끄덕였지만-.

“...뭐!? 뭠까?”

그곳에서 나타나는 이상 현상을 발견하곤 기함했다. 남궁진아도 그런 아이들의 표정에 자랑을 멈추곤 멈칫하며 다시 강철거인 쪽을 응시했다.

기묘한 색채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인간의 눈이 인지할 수 있는 색을 넘어선 기묘한 광채가 강철거인이 있던 자리에서 번뜩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광채를 그녀는 한 번 본적이 있었다. 복사는 불가능하고 오직 15년 전에 촬영된 필름에서만 볼 수 있는... 인지를 넘어선 ‘외계의 광채’.

“...저.. 저건!”

그 순간, 그 기괴한 광채가 거품처럼 부풀어 오르면서 ‘일순간’에 반경 100m 가량을 뒤덮는다. 그리고, 그 거품 안에서 ‘악의어린 기적’이 일어난다.

엔트로피를 초월해 역행하는 시간

강철거인의 파편에 부서졌던 건물이 제 형상을 되찾고, 날아왔던 강철 조각들은 하나씩 맞춰지며 거인의 형상을 만들어낸다. 그 흔적도 남지 않았던 순항 미사일은 화염과 충격파를 빨아들이고 멀쩡한 모습이 되어 기묘한 광채의 거품 밖까지 거꾸로 날아간다.

-콰-릉!

그 광경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듯, 한 번 더 하늘이 푸르게 번쩍이며 허공에 번개가 내리꽂혔지만, 초음속으로 내리꽂히는 순항 미사일은 너무나도 얇은 기묘한 빛의 거품방울을 뚫지 못한 채 튕겨나가 엉뚱한 곳에 박혀 폭발했다.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노력이 부정되고 있었다.

룬수호자의 재앙 때와 똑같이.

“루... 룬수호자?!”

“페로우스의 권능? 아니, 아니야! 저건 불가능해!”

불합리한 힘, 룬수호자의 부활 장면 같은 광경에 남궁진아는 비명을 질렀고 다른 혼혈 아이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비슷한 현상을 떠올리며 부정했다. 그 소름끼치는 기적이 끝나자 한 번 더 하늘이 푸른빛으로 번쩍이고 인간들은 또 번개를 내리꽂으려 했지만-.

-즈아아아아앙!

이번엔 강철거인이 반응한다.

하늘을 향해 피눈물을 뿜어내는 강철거인, 그 피눈물은 날아오는 순항 미사일을 가뿐히 파괴하고 그 위에서 초음속으로 날아다니던 전투기까지 박살낸다.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가가가각!

그대로 시선을 지상으로 옮긴다. 한 번 쏟아낸 덕분에 그 피눈물의 기세는 처음에 비해 비약하기 그지없었지만 남아있는 힘만으로도 지면을 갈라버리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 증오에 가득 찬 야만인의 눈이 지금 향하는 방향은...

“피...피해욧!! 구석으로!!!!”

창백한 얼굴로 비명을 지르며 남궁진아는 혼혈 아이들과 함께 전력으로 바깥으로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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