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신께선 그런 결말을 원치 않으신다. >
4.
집단의 힘은 강하다.
그건 ‘마력’이라는 초월적인 힘이 등장한 지금도 마찬가지다. ‘한 개체’가 가질 수 있는 강함에 한계가 사라졌다곤 해도, 계속 강해지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렇기에 집단의 힘은 여전히 개인의 힘에 비해 우위를 점하며 그런 집단의 힘 끝판왕- 현대 국가의 무력은 ‘초월적’이다.
냉정하게 말해, 민간인 피해를 생각지 않는다면 현대 국가는 그 어떤 존재든 죽일 수 있다.
전술 핵탄두와 비견되는 악마 군주나 고룡? 전차의 활강포에서 쏘아지는 음속의 4~5배가 넘는 40kg짜리 포탄만 해도 <물리 내성>이 없다면 꽤 아프게 들어가고, 전투기에서 날아오는 흉악한 미사일은 치명적이다. 정 뭣하면 진짜 지상에 태양-핵을 떨어트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국가의 힘으로도 제지할 수 없는 존재가 있었다.
한 개체가 가진 파괴력이 전술병기에 준할 정도로 가공하며, 무엇보다 ‘죽여도 부활해’ 파괴를 이어나가는 존재. 그 광경을 본 미르의 생존자들, 미르 외곽의 군인들, 그 광경을 촬영하고 있는 기자와 그걸 통해 본 전 세계의 사람들은 모두 한 이름을 떠올렸다.
룬 수호자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던 미국을 반파시킨 악몽, 5분마다 핵미사일을 날려서 발을 묶어두는 것이 고작이던 미궁의 ‘진정한 악의’. 15년 동안, 미궁의 이종족들과 교류하며 연구했음에도 인류의 집단 지성은 그런 괴물에 대해 어떻게 격퇴해야 할지 뾰족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기껏 나온 대책이 ‘초인으로 이뤄진 공격대를 꾸려서 격퇴해보자.’ 정도.
하지만, 그렇게 격퇴해도 그것이 부활을 할지 안 할지 불확실 했을 뿐더러 그런 ‘룬 수호자 급의 강자’를 상대할 만한 초인은 세상에 거의 없었다.
「하-하-하-하!」
미사일과 전투기를 박살내고 이어서 미르의 중앙 행정처 건물까지 쓸어버린 뒤에 느릿하게 승리의 웃음을 토해내는 강철거인
그 강철거인의 시야엔 눈에 띄지 않는 건물 뒤편에 몸을 숨긴 채, 그 광경을 보던 오크들은 안색은 창백하게 질렸다. 저건, 말 그대로 ‘세상을 짓뭉개기 위한 불합리’였다. 당장이라도 저 악의에게서 더 멀어져야했지만...
“...”
그들을 이끄는 전쟁 군주는 말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반파된 중앙 행정처 건물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광경에 오크들은 전쟁 군주를 재촉하지 않고 침묵한 채로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전쟁 군주로 각성한 오크들만이 은은하게 뿜어내는 ‘페로몬 같은 카리스마’
무의식적으로 다른 오크들을 복종시키고 그의 의도대로 움직이게 하는 그것이 오크들로 하여금 전쟁 군주의 심중(心中) 의도를 좀 더 명확하게 느끼도록 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오크들이 망설이는 가운데-.
“우린, 저놈을 막는다.”
침묵하던 전쟁 군주의 입이 떨어졌다. 그에 망설이던 오크들이 일제히 기함한다. 그리곤 가장 가까운 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예?! 하, 하지만 전쟁 군주시여 저건...”
“이대로 도망치면 지금까지 우리가 흘린 핏값은 완전히 무용지물이 된다. 반이나 죽었는데, 그래선 안 되지.”
“그래도 저건 막을 수 없습니다! 불가항력입니다! 손해를 봤지만 빠져나가야...”
“아니, 우리의 공격은 통할 거다.”
오크 기사의 말을 끊으며 대꾸하는 전쟁 군주, 그는 오토바이 뒤쪽의 잡낭에서 폭발 투창을 꺼냈다.
“룬 수호자의 부활과 비슷한 면이 있는 걸 보면, 저건 자격이 있는 이만 쓰러트릴 수 있는 종류일 거다. 희박하지만 가능성은 있어. 설령, 실패한다고 해도 인간들이 대피할 최소한 시간은 끌 수 있겠지.”
인간들이 대피할 최소한의 시간을 끌 수 있다는 말에 다른 오크들이 일제히 발끈한다. 아니, 인간들을 도망치게 하기 위해서 저것과 싸운다고? 그것도 전쟁 군주까지? 무례함을 무릅쓰고 말을 꺼냈던 기사가 계속 소리쳤다.
“아니, 인간이 얼마나 죽건 말건 무슨 상관입니까! 백 번 양보해서 저희라면 몰라도 전쟁 군주께서 목숨을 거실 이유는 없습니다! 그건 개죽음입니다!”
“개죽음은 아니다. 내가 죽더라도 나중에 토벌된다면 다른 전쟁 군주들이 핏값을 인간들에게 받아낼 수 있을 테니까.”
“아니, 저걸 토벌할 수 있을지 의문 아닙니까? 토벌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최소 한국은 박살나겠지. 우리 뉴 송파구 오크들의 미래도 함께 박살나고.”
전쟁 군주의 담담한 대꾸에 그 기사 오크의 얼굴이 멈칫한다.
실제로, 저 존재를 토벌하지 못하면 오크들의 미래는 끝이었다. 해외 도피? 이종족을 받아줄 국가가 얼마나 있을까? 설령 받더라도 소수인 엘프나 드워프라면 몰라도 100만에 달하는 오크를 받아줄 이는 없다. 다시 미궁으로 기어들어가는 선택지 밖에 없다.
그렇게 기사 오크의 말이 멈춘 사이, 전쟁 군주는 찬찬히 시선을 돌려 다른 오크들의 면면을 보았다.
“어차피 토벌하지 못하면 우리의 미래는 없다. 그러니 난 토벌된다는 쪽에 베팅할 거야. 내 목숨도 함께. 내 결정으로 인간들에게 어느 정도의 핏값을 지워두면, 남은 오크들은 두둑하게 그 몫을 받을 수 있겠지.”
“전쟁 군주시여. 제발...”
“물론, 99% 죽을 거다. 하지만, 애초에 목숨이 아까워서 사릴 것이었으면 이곳에 안 들어왔지.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도 죽고 사는 건 불확실하지 않았나?”
“...”
“미안하지만. 날 위해, 그리고 우리 동포들을 위해 죽어줄 수 있나?”
오크 전쟁 군주들이 가진 ‘초월적인 매력’,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다른 오크들을 경외에 차게 만드는 카리스마가 오크들을 다시 사로잡는다. 탐욕스런 성정을 지닌 오크들이 그 가슴을 울리는 설득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하나 둘 씩 말없이 수긍하는 가운데-.
“미안하지만 난 그래줄 수 없어.”
한 사람이 반대했다.
좋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그 발언에 오크들의 시선이 쏠린다. 백색 연구 가운차림에 푸른색 보안경을 끼고 있는 인간 여자애, 일행 중에서 유일한 인간-강수영 연금술사는 그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전쟁 군주를 향해 생글생글 웃었다.
“난 오크도 아니고, 오크를 위해 죽어주긴 싫거든.”
“하, 그래. 널 잊고 있었군. 넌 가도 좋...”
“하지만, 너와 같이 싸워주지.”
전쟁 군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어지는 그녀의 말, 그 생각지 못한 대답에 전쟁 군주는 멈칫하더니 이내 의아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넌, 네 친구를 구하기 위해 여기 온다고 하지 않았나?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젠 싸울 이유는 없을 텐데? 인간이니 마음먹으면 다른 나라로도 도망칠 수도 있겠고.”
“뭐, 그렇긴 한데... 저걸 보니까 15년 전 내 인생이 꼬일 때가 생각나서 말이지.”
강철거인을 가리키며 대꾸하는 강수영, 그 형상화된 악의는 잔학한 웃음을 흘리며 인간들이 가장 많이 있는 중앙 지역-피눈물에 의해 반파된 곳을 향해 천천히 육중한 발을 내딛고 있었다.
느릿느릿 지축을 울리는 발걸음
마음먹으면 훨씬 더 빠르게 뛸 수 있음에도, 아니면 피눈물을 한 번 뿜어내는 것으로도 전멸시킬 수 있음에도, 그것은 생명체가 발버둥치는 꼴을 보며 더 잔혹하게 유린하겠다는 의지를 선명하게 내뱉고 있었다.
그 악의를 향해 강수영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 때, 내 인생이 한 번 꼬인 뒤로 난 스스로 어떤 일에 휘말려 좆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왔어. 그렇게 끝없이 강박적으로 발악한 덕분에 사회적으로나 무력적으로 꽤나 힘을 쌓을 수 있었지.”
“...”
“이건, 기회야. 과거와 비슷한 위기가 닥쳤을 때, 내가 그걸 극복할 만한 힘을 쌓았는지 증명할 기회.”
“흐. 완전히 미친년이군.”
그런 강수영 연금술사의 말에 한 오크 기사가 피식 웃으며 중얼거리고, 그 반응에 강수영도 비슷하게 웃으며 그 오크 기사를 향해 비아냥거렸다.
“그래, 맞아. 의사인 내 친구는 이런 내 반응이 일종의 강박증 비슷한 정신병이라고 하더라고? 근데, 너희들도 비슷한 것 같거든?”
“...”
“뭐, 아무리 그래도 혼자라면 나도 저 괴물에게서 도망쳤겠지만 내 까다로운 안목에 따르면...”
전쟁 군주를 향해 턱짓하며 그녀는 말을 맺었다.
“이 양반도 만만찮은 괴물이야. 그러니 아예 승산이 없는 건 아니지! 물론, 좀 희박하긴 하지만 그래도 0%가 아니니 도전해볼만 하지 않겠어?”
“그래도 보는 눈이 있군.”
전쟁 군주의 대꾸에 오크들이 낮게 웃는 가운데, 그녀는 전쟁 군주를 향해 도약해 바이크의 뒤쪽 좌석에 두 발로 올라섰다. 평소라면 불경하다고 살기어린 눈으로 봤을 오크들이었지만 이번엔 순순히 받아들였다.
“마음 바뀌기 전에 가보자고.”
그녀가 어서 출발하라는 듯이 전쟁 군주의 어깨를 두드리자, 오무혁도 배틀 바이크의 엑셀을 쥐었다.
“그럼, 가지.”
그 뒤, 전쟁 군주는 오크들과 한 인간이 섞인 무리가 강철거인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5.
강철거인의 피눈물에 강타당한 미르 중앙 행정처
처음부터 직격 당했다면 흔적도 없이 전부 쓸려나갔겠지만, 하늘을 날던 전투기를 격추하고 그 기세가 거의 막바지일 때 덤으로 훑은 것이라 건물은 완전히 부서지지 않았다. 고작해야 피눈물의 궤적-2m 남짓한 굵기로 건물이 갈려나간 정도다.
“도망쳐! 도망치라고!!”
“비켜!”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혼돈을 일으키기엔 충분했다.
수백 명이 그 잔해에 깔리거나 혹은 피눈물의 폭류에 으깨졌고, 운 좋게 박살난 건물 잔해와 핏물의 세례를 피한 이들은 발작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거기엔 민간인들은 물론이고 노련한 전투원인 미궁 출신 교사들 또한 섞여있었다.
-쿠-웅!
느릿하게 지축을 울리는 강철거인의 발걸음, 얼굴에 잔혹한 미소를 띤 악의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남궁진아는 창백한 표정으로 큐브를 조작해 근처의 그나마 멀쩡한 자동차를 움직였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방향으로 도망친...
“혜영아! 일로와! 야! 어디... 혜영아?”
옆에 있어야 할 오혜영이 보이질 않았다. 보이는 것은... 피눈물의 으스러진 궤적 근처에 떨어져 있는 도끼창을 든 건장한 살색 오른팔 한 쪽 뿐. 그 피로 뒤덮인 흔적을 보며 남궁진아는 이를 악물었다. 지금은 슬퍼할 때가 아니다. 빨리 도망쳐야 할 때다.
-오오오옹!
느릿하게 다가오는 강철거인, 그 거대한 몸이 가늘게 몸을 떨리며 낮은 진동음을 뱉었다. 그와 동시에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거인의 두 눈이 ‘더 붉게’ 빛나기 시작한다. 피눈물을 쏟아내기 전의 전조, 그 모습에 그녀가 다급하게 탄 자동차를 움직일 때-.
-콰릉!
어디선가 날아온 흑색 섬광이 강철거인의 왼쪽 눈에 꽂혔다.
하늘이 파랗게 물들이며 내리꽂히던 인간의 무기에 비하면 미약하디 미약한 공격. 냉정히 말해 전차에서 쏘아대는 120mm 활강포 포탄에 비해서도 훨씬 약하다. 하지만, ‘순수한 물리력’만 담긴 포탄과는 달리 그 작은 흑색의 창은 놀랍게도 강철거인의 반응을 이끌어냈다.
「그르으으으...」
돌끼리 부딪치는 것 같은 소음과 함께 흑색 투창이 꽂힌 부위를 손으로 감싸 쥐며 얼굴을 찡그리는 강철거인, 자연스럽게 강철거인은 물론이고 남궁진아의 시선까지 번개가 날아온 곳으로 향한다. 그리고-
“나를 봐라!”
검은색 양산형 배틀 바이크에 탄 채, 강철 거인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 오무혁을 볼 수 있었다.
남궁진아로선 알 수 없는 말을 쩌렁쩌렁 외친 그는 바란 듯이 오른손에 쥔 특이한 투창을 던지는 전쟁 군주, 그러자 이전에 꽂혔던 흑색 섬광과 똑같은 것이 또 다시 강철거인의 눈 쪽을 향해 날아간다. 그에 흑색 섬광을 손을 들어 가볍게 막은 거인은-
-즈아아아아아앙!
전쟁 군주를 향해 준비하던 피눈물을 쏟아냈다.
광포하게 내리꽂히는 피의 폭류에 기다렸다는 듯이 배틀 바이크를 꺾으며 근처의 커다란 건물 뒤쪽에 숨는 오무혁. 당연히, 건물 ‘따위’가 포격과도 같은 힘에 버틸 수 없었다. 저학년 교정 건물 하나가 폭발하듯 터지면서 피로 뒤덮였다.
-그가가가가가가각!
이미 건물이 박살났음에도 집요하게 헤집는 피눈물 세례, 강철거인이 시선을 고정한 채로 계속해서 오무혁이 숨었던 건물을 박살내고 있을 때-
-콰릉!
200m 가량 떨어진 다른 건물에서 흑색 투창이 날아와 또 다시 거인의 왼쪽 눈에 꽂힌다. 그 불의의 일격에 피눈물을 쏟아내는 것을 멈추곤 눈을 붙잡고 비틀거리는 강철거인, 투창이 날아온 장소엔 오무혁이 배틀 바이크를 탄 채 서 있었다.
“고작 그거냐?”
수km가 떨어진 남궁진아도 똑똑히 들릴 만한 목소리와 부풀린 존재감, 그런 연이은 전쟁 군주의 도발에-
「그우오오오오!」
강철거인이 분노의 노성을 내지르며 창을 들고 돌진한다. 느릿하게 이쪽을 향해 걸어오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속도, 그 모습을 보면서-.
-끼익!
“...시발.”
남궁진아는 욕설과 함께 움직이던 차를 멈췄다. 오무혁이 시선을 끌어주는 지금, 안전하게 도망칠 수 있었지만 이렇게 여유가 좀 생기니 자신이 부끄럽고 염치가 없게 느껴졌다.
그래, 좀 양심이 찔렸다.
인간도 아닌 오크가 저렇게 자신들을 구하겠다고 움직이고 있는데, 자신은 도망치기 바쁘다니... 아무리 자신의 능력으론 흠집도 안 나는 괴물이라고 해도 이렇게 자기만 살겠다고 움직이는 건 염치가 없게 느껴진다.
저 사람, 혜영이의 아버지라고 했었지?
그래봤자 입양 딸이겠지만 저렇게 도망치지 않고 싸우는데, 자신은 혜영이가 죽었는데도 남아있는 시신도 수습하지 않고 도망치다니... 이건 혜영이한 테나 저 오크한테나 예의가 아니었다. 그래, 저런 괴물과는 싸우지 못하더라도 시신 정도는 수습할 수는 있잖은가?
“후우, 후우, 후우... 가자!”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진 후, 그녀는 차량 문을 열고 아까 있던 장소로 달렸다. 다행히, 강철거인이 다가오는 정면 입구엔 사람이 없었기에 오혜영이 쥐고 있던 도끼창과 그걸 쥐고 있는 오른손 또한 멀쩡했다.
「그-아-아-앗!」
-쿠웅! 쿠웅! 쿠웅!
등 뒤로 들려오는 강철거인의 고함과 지진 같은 땅의 진동, 공포에 떨리는 다리를 필사적으로 움직이고 있는데 문득 피에 뒤덮인 건물 잔해 위에 서 있는 하얀색을 볼 수 있었다. 자세히 보니 강수영 연금술사가 한 쪽 무릎을 꿇고 피가 흥건한 잔해 위에 손을 대고 있었다.
...뭔 짓을 하려는 걸까?
아니, 어찌됐든 중요한 건 아니다.
“좋아!”
부서진 도끼창과 그걸 쥐고 있는 오른손을 낚아챈 뒤, 남궁진아는 다시 이를 악물고 자동차를 향해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