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116화 (116/350)

< 막간. 혼돈의 신은 웃고 있다. >

1.

깨어난 순간, 난 내가 지옥에 있음을 깨달았다.

거리감을 일그러트리는 장대한 넓이, 위아래를 구분할 수 없는 공간감각, 새카만 공간 너머로 찬란하게 펼쳐진 별의 길과 구름... 겉보기엔 장엄한 우주의 한가운데지만 이건 허상일 뿐, 이곳을 인지한 순간부터 난 공포에 질려 비명과 함께 몸을 쥐어뜯었다.

제발, 꿈이라면 깨어나라고.

<무한의 눈>을 사용해서 고통을 가하려고 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용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손톱을 세워 눈알을 뽑아내고 얼굴 가죽을 뜯어냈다, 그 통증 자체는 고스란히 느껴졌지만... 눈알을 뽑았음에도 멀쩡히 보인다.

그래, 이걸 보니 여긴 꿈이구나!

꿈이면 깰 수도 있을 거다. 그렇게 내가 공포에 질려 이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악하고 있을 때-

-후히히힣! 흐헤헤헿!

우주를 뒤흔드는 경박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수천억의 사람이 동시에 비웃는 듯한, 듣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뼈가 덜덜 울리고 심장의 피가 증발하는 것만 같은 감정과 의지의 폭풍. 온 세상을 쩌렁쩌렁 울리는 익숙한 그 메아리에 난 절망했고 이내 그 목소리의 주인이 나타난다.

-아, 오늘의 주인공이 오셨네!

내 머리 위, 그곳엔 어느새 ‘그것’이 오른손으로 머릴 괸 채 느긋하게 누워있었다. 이전에 봤었던 것처럼 자줏빛 머리칼을 가진 거대한 알몸의 소녀의 모습, 겉보기엔 아름답지만 그 실체를 직시했기에 난 감히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굳어 있었고-.

-너무 덜덜 떠는데? 내가 도와줘야겠네! 공포야, 사라져라! 얍!

그런 내 모습에 그것은 가볍게 왼손의 손가락을 튕긴다. 그와 함께... 내 공포감이 서서히 사라진다. 하지만, 그 사실에 난 더 한 공포를 느꼈다. 내가 느껴왔던, 그리고 기억했던 모든 것이 뒤바뀐다.

자극을 받아들이는 방식의 변화

내 가치관과 영혼이 변해가는 것이 똑똑히 느껴졌다. 그건... 나라는 존재가 ‘삭제되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런 공포심 또한 얼마 안가 서서히 사그라졌다. 어찌되었든 그 덕분에 난 앞에서 있는 그것-르피너스를 똑똑히 볼 수 있었고-.

-자, 그럼 오늘 주인공의 개 쩌는 플레이를 보시겠습니다~

르피너스는 유쾌한 의지를 내뱉으며 왼손 검지로 한 쪽을 가리켰다. 그러자 영화관 스크린처럼 우주의 한 쪽이 으스러지며 평면의 영상이 앞에 나타난다. 검붉은 색의 하늘, 충격파에 박살난 미르의 건물,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강철 거인...

그래, 이제 기억이 난다.

“칸의 대지에서 나왔군요.”

-정답~

“그리고, 그 과정에서 유혈의 신이 분노했고.”

분노한 신이 ‘한 방울의 유혈’을 피라미드에 떨어트렸고, 그 떨어지는 태양을 피하는 과정에서 나를 포함한 일행들은 <무작위 공간 이동> 마법으로 각자 뿔뿔이 흩어졌다. 내가 어디로 이동했는지 모르겠다만, 피라미드가 박살나면서 그 석재 잔해와 충격파에...

-걱정마, 죽진 않았어. 그저 기억을 잃었을 뿐이지!

내 생각을 읽었는지 르피너스가 말한다. 그래, 어떻게 기억을 잃었는지 자세하게 기억나진 않는다. 안 그래도 유혈의 신을 목격한 충격과 공포에 심신미약 상태였거든. 어쨌든 내가 고갤 끄덕이자 르피너스는 소리 높여 웃었다.

-물론, 네가 죽었어도 내가 살려줬을 거야! 이런 개 쩌는 업적을 달성했는데 살려드려야지! 그래야 더 재미있는 꼴을 볼 수 있을 테니까!! 자, 그럼 여기서 네가 벌인 업적을 감상하라고!

화면 쪽을 턱짓하는 르피너스, 그에 나도 멍하니 그 화면을 응시했다.

천천히 일어선 뒤, 세상을 향해 ‘모든 생명체를 죽이겠다.’는 의지를 내뱉는 강철거인. 유혈의 힘에 의해 만들어진 재앙의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을 때, 르피너스가 다시 손가락을 튕긴다. 그러자 어느새 그녀의 손에 커다란 팝콘 통과 음료수 컵이 나타난다.

-자고로 이런 건 팝콘을 먹으면서 봐야지!

“...”

-너도 줄 테니 먹으렴! 경배하라! 혼돈의 신이 너를 위해 친히 ‘버터 카라멜 팝콘’과 ‘코카콜라’를 하사하노니!

내 손에도 크기는 작지만 똑같은 게 나타난다. 내가 그걸 멍하니 바라보자 ‘싫으면 고등어로 바꿔줄까? 참치도 가능한데?’라고 묻는 르피너스, 그에 난 곱게 르피너스처럼 허공에 앉은 채로 팝콘을 먹으며 앞에 떠오른 영상을 시청했다.

“...”

미르 밖에서 대기 중이던 전차들의 포격, 끄떡없는 강철거인이 피눈물을 뿜어내며 전차를 전멸시키자 하늘에 떠 있던 전투기에서 투하된 미사일이 번개의 형상으로 변해 날아와 강철거인에 꽂히고 폭발한다. 하지만...

“저건, 막을 수 있는 겁니까?”

-음, 글쎄?

번개의 형태로 내리꽂힌 미사일은 강철거인을 완전히 박살냈다. 하지만, 강철거인은 기묘한 광채에 휩싸이더니 시간을 되돌려 부활한다. 그것은 ‘불합리한 존재의 개입’이었다. 그런 내 질문에 팝콘을 씹으며 고갤 갸웃하더니 이내 고갤 끄덕인다.

-‘죽일 순’ 있어. 다만, 거의 룬 수호자급의 강함에다가 ‘자격이 있는 존재’만 죽일 수 있게 되어있네. 저걸 정면에서 막을 만한 존재는... 어디보자. 복마전을 지배하는 5명의 대군주하고, 4대 지옥의 지배자들, 천상의 아르미르, 그리고 내 장난감까지 총 11명... 아니, 아니구나. 7명은 죽었지?

“...죽었어요?”

-응, 복마전의 대군주들하고 대천사 아르미르, 그리고 초열 지옥의 대악마 브레칼까지. 전부 룬 수호자여서 성재영이 대가리를 깨버렸거든.

태연하게 팝콘을 씹으며 대꾸하는 르피너스,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난 두 눈을 깜빡였다. 성재영, 르피너스의 장난감에 나오는 주인공의 이름이다. 그래, 여기는 ‘르피너스의 장난감’ 소설속이고 진짜 주인공은 따로 있었지.

그렇게 내가 생각지도 못한 주인공의 소식에 내가 생각에 잠긴 사이, 르피너스는 다른 쪽을 응시하며 미간을 찡그리더니 이내 투덜거렸다.

-시잇팔~ 아직도 심연의 틈에 봉인되어 있네.

“봉인?”

-그래, 생각난 김에 확인하니 여전하네. 내 장난감이 심연의 룬을 찾으러 들어갔거든? 근데, ‘네쉬라’ 그 개 같은 새끼가 꼬장을 부려서 말이야. 아니, 아무리 내 장난감이 자기 제단을 좀 부시고, 챔피언까지 조졌다고 해도 룬 수호자 한 명에 악마 군주 5마리까지 심연으로 불러들여서 동시에 붙이는 건 선 넘었지!

“...”

-게다가 더 추한 건, 그렇게 다구리를 쳐도 밀리니까 자기 추종자들을 사용해 시간을 얼려버렸다는 거야! 진짜, 그 새낀 상도덕이 없어요. 상도덕이! 아오, 나도 그냥 상도덕 무시하고 개입해봐!?

많이 화가 난 듯, 르피너스는 도자기처럼 하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콧김을 씩씩 내뱉으며 팝콘을 가득 쥔 손을 붕붕 휘두른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일단, 이것부터 보고.’라며 다시 화면을 집중한다. 그 날백수 같은 모습에 나도 다시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았다.

세상을 유린하기 위해 움직이는 그 유혈의 재앙을 오크들이 막아섰다.

비범한 황금 갑주를 입은 오크가 절묘하게 강철거인의 어그로를 끌고, 그 사이에 준비된 강렬한 독마법이 거인의 등짝에 작렬한다. ...저거 우리 싸장님이네. 이어서 강철거인의 눈에 띄지 않게 삥~돌아서 접근한 오크들이 사슬과 자신의 목숨을 던져 거인의 왼팔을 봉쇄한다.

그리고 마침내, 강철거인이 쓰러진다.

“생각보다 쉽게 잡히네요.”

그 광경에 난 빨대를 빨아 콜라를 마시곤 담담하게 소감을 말했다. 세상을 무너트릴 것 같았던 강철거인, 하지만 그런 의지를 토해낸 것이 무색하게도 고작 오크들과 우리 싸장님의 합공에 무력화 됐다. 사실상, 죽이는 건 시간문제처럼 보인다. 자격이 있다면 말이지.

그런 내 소감에 르피너스는 씹고 있던 팝콘 입에서 흘리며 ‘파하하!’ 웃는다.

-하하핳! 너무 저걸 얕보는 거 아니야?

“얕본다고요? 저렇게 무력화 됐는데요?”

-저건, 칸의 피조물이야.

통에서 팝콘을 다시 한 움큼 집는 르피너스, 그녀는 날 향해 생글생글 웃으며 입에 팝콘을 우겨넣었다.

-그럼 당연히 ‘광전사’지,

“...”

-아직 ‘유혈의 권능’은 쓰지도 않았단다?

르피너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강철거인이 유혈의 신을 찬양하는 ‘의지’를 내뱉었다.

2.

소리가 아니더라도 세상을 울리는 메아리

유혈의 신을 찬양하는 의지가 강철거인에게서 나온 순간, 오무혁은 곧바로 거인의 안면을 향해 도약했다. 그의 성향과는 어울리지 않는 도박에 가까운 수였지만, 미궁 속에서 갈고 닦은 그의 감이 ‘여기서 머뭇거리면 끝장이다.’라고 속삭였다. 하지만...

-콰-작!

강철거인은 벌레를 털듯이 날아드는 전쟁 군주를 손으로 후려쳤다. 그에 허무하게 뒤로 날아가 건물에 부딪치는 오무혁, 거인에겐 그저 가볍게 털어낸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오무혁에겐 치명상이었다. 갑옷은 박살났고 그 입에선 피를 토해냈다.

“...뭐! 뭐야!”

그 심상치 않은 광경에 달려와서 마법을 갈기려던 강수영이 기겁하는 가운데, 강철거인의 피부 곳곳이 ‘쩍! 쩍!’ 갈라진다. 그리고 용광로의 쇳물을 방불케 하는 이글거리는 주황색의 영액(靈液)이 흘러나오면서-

「그-오-오-오-오!」

지금까지 일어서지 못했다는 것이 장난인 것 마냥 발을 움직인다. 그 가벼운 발길질에 발목의 상처를 공략하던 오크 기사들 수십 명이 으깨져 날아가고 강철거인은 팔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 일련의 동작은...

“...빨라?”

이전보다 명백히 빨랐다.

게다가 지면에 일어나면서 드러난 등짝의 상태 또한 심상치 않았다. 이전의 붉은 피가 아닌 주황빛의 영액이 흘러나오는 등판, 연기가 솟구치며 실시간으로 강철의 피부가 폭발적으로 재생하고 있었다.

<칸의 손길>

유혈의 신을 모시는 광전사들이 사용하는 회복의 권능, 그 광경에 마법사들이 다급하게 등판에 마법과 대전차 무기를 쏴댔지만, 안 그래도 강철거인의 강력한 마법 저항력은 <칸의 손길>에 의해 더 강화되어 그 회복력을 따라가질 못했다. 그렇게 창을 다시 쥐고 일어선 거인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전쟁 군주가 입힌 오른쪽 눈은 여전히 감겨 있었지만, 부릅뜬 왼쪽 눈은... 이전의 핏빛이 아닌 타오르는 듯한 주황빛으로 변해있었다. 그렇게 오른쪽 눈을 감은 채, 일어선 거인은 곧바로 자기 주위에 있는 오크기사들을 향해-

-콰-아-아-앙!

창을 휘둘렀다.

빗자루 쓸 듯이 휘두르는 창, 그 흉험함은 이전의 것과는 비교가 되질 않는다. 한 번에 40여명의 기사들이 으깨져서 허공에 떠오르고, 이어지는 2파에 30명이 날아갔으며, 마지막으로 한 바퀴를 삥 돌아서 휘두르는 3파엔 50여명의 오크 기사들과 인근 건물들이 터져나갔다.

살아남은 이들은 외곽에서 미친 듯이 도망치던 10명 정도.

그 말도 안 되는 광경에 강수영이 기겁하며 뒤로 도망치며 인근의 건물에 숨어들지만, 격분에 휩싸인 강철거인의 이글거리는 외눈은 자신에게 굴욕을 안긴 마법사를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었다.

-오오오옹!

벌레처럼 흩어지는 나머지 오크 생존자들을 창으로 짓이기면서, 거인은 가늘게 몸을 떨며 낮은 진동음을 내뱉었다. 그와 함께 왼쪽의 독안이 더 밝게 빛나기 시작하고, 마침내 밝기가 절정에 달했을 때-.

-즈아아아아앙!

강수영이 도망친 방향의 건물을 향해 고갤 돌리며 피눈물을 쏟아냈다. 타오르는 열선 같은 주황색의 피눈물, 그건 마치 광선처럼 보였다. 광범위하게 뻗어나간 그 피눈물을 강수영이 숨은 건물을 박살내고 그것도 모자라 근방 200~300m에 있는 것들을 모조리 불태웠다.

-콰앙! 콰앙! 콰앙!

그 폭거를 볼 수 없다는 듯, 곳곳에서 전차의 포격이 날아온다.

오크들이 싸울 동안에 외곽에서 충원된 전차들, 이전까지는 오크들이 가까이 붙어있었기에 쏘지 않았지만 전멸한 지금은 다르다. 게다가 이번엔 평범한 포탄이 아닌 ‘특별한 포탄’을 장전하고 있었다.

푸른 궤적을 그리며 날아오는 포탄

전투기에서 발사한 ‘청룡 III’ 정도는 아니었지만, <물리 내성> 속성의 효과를 무력화시키는 반마법 포탄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미동도 하지 않았던 이전과는 달리 강철 거인은 살짝 휘청거린다. 그에 안광을 쏘아내던 강철거인은 이를 부드득 갈며-.

「피의 전우들이 이곳에 오리라!」

또 다시, 의지를 내뱉었다.

권능 <피의 전우>, 그에 피의 대지에서 투쟁하고 있을 전우들이 현실에 투영되기 시작한다. 그 전우들의 모습은 이전 미르에서 벌어졌었던 야만인들, 수백 명 게다가 장군급으로 보이는 괴물들도 존재했다. 살육의 미친 괴물들이 풀려나 돌격하는 가운데-

“크허어어억! 허억!”

인근 건물에서 박힌 전쟁 군주가 나와 다시 달려든다.

그에 강철거인의 시선이 향한다. 만신창이가 됐음에도 여전히 수정검을 양손에 쥔 채 적대하고 있는, 자신에게 굴욕을 안긴 건방진 벌레. 강철거인은 잔혹하게 웃으며 창을 왼쪽으로 높이 들어올렸다. 그리곤 달려드는 전쟁 군주를 향해.

-부-웅!

골프채를 휘두르는 것처럼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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