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두 번 세례 받은 자 >
1.
강철거인의 창에 후려맞은 오무혁은 그대로 날아갔다.
강철거인에게 있어서 그건 일종의 ‘보복’이었다. 자신에게 굴욕을 안긴 벌레에게 비슷한 굴욕을 안겨주기 위한 행위, 그런 이유 일부러 창날로 베지 않았고 오무혁은 골프채에 맞은 공처럼 날아가 몇 개의 건물을 뚫고 그 잔해에 비스듬히 처박혔다.
“커... 헉!”
그 덕분에 오무혁은 살아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빠르게 죽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특출난 ‘초인’이라고 한들, 그가 입은 피해는 너무나도 컸다. 허리 아래의 하반신은 완전히 으스러졌고, 당연히 뼈와 근육, 내장은 으깨졌다. 그가 품은 마력이 이미 죽은 육신을 움직이게 만드는 수준, 서서히 희미해지는 시야로 저 멀리 살육을 이어가는 강철거인을 보면서 오무혁, 아니 무르굴은 헛웃음을 흘렸다.
...역시, 저건 재앙이었다.
처음 달려들 때부터 그의 감이 경고하긴 했다. 당장 도망치라고, 안 그러면 죽는다고. 하지만, 그 경고를 무시하며 달려들었고 결국 이런 꼴이 되었다. 내심 예상했던 결과지만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커, 흐으.”
피가래와 함께 밭은기침을 내뱉은 후, 오무혁은 검붉게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며 지나간 일들을 숙고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부하들에게 했던 말들 ‘우리가 오늘 죽더라도 다른 지하의 오크들은 번성할 거다.’, ‘한국이 망하면 우리도 끝이다.’라는 말은 반쯤 거짓이었다.
만약, 그것뿐이라면 냉정하게 손절했다.
자신과 부하들을 희생해서 얻는 이득을 다 합쳐도, 그냥 자신이 살아있음으로서 얻는 이득이 더 크니까. 하지만, 그 때는 죽어도 괜찮다고 계산을 잘못했다. 그래,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다. 그 냉정해야할 가치판단의 저울엔 배제했어야 할 ‘무게 추’ 하나 더 올라가 있었다.
자기의 치부, 그리고 아픈 손가락
한 때의 실수였다. 미궁 안에서라면 그냥 신경도 쓰지 않았을 인연. 정식 자식들보다도 이상하게 시선이 갔다. ...어쩌면 지상에 올라와서 인간들이랑 너무 부대껴 살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이런 나약한 감정 때문에 죽다니. 자신답지 않았다.
-끼아아아아악!
그렇게 그가 생을 반추하는 와중에도 듣기 거북한 야만인들의 괴성은 점점 더 다가온다.
강대한 적과 싸우다 죽은 것도 아니고, 저런 저열한 것에 죽게 되다니... 죽음이 덧없다는 것은 알지만 참 씁쓸하다. 그렇게 오무혁이 죽음을 직감하고 천천히 두 눈을 감으려고 할 때-,
-끄아아아악!
-케흑! 캬하하학! 캬학!
야만인들이 불어대는 ‘비명소리 호루라기’와는 약간 다른 소리가 들려온다.
진짜로 내뱉는 비명과 밭은 기침소리, 감겨오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리니 꺼림칙할 정도로 뭉클거리는 흑자색 구름이 그의 30~40m 앞쪽에서 서서히 퍼져나가고 있었다.
“끼이, 끼이이이...”
그리고, 그런 흑자색 구름을 뚫고 야만인 하나가 튀어나온다.
이미 심대한 타격을 입은 듯, 제대로 뛰지도 못하고 비틀거리며 도망치는 야만인. 하지만 그 짙은 안개 속에서 튀어나온 흑자색의 송곳들이 그 몸에 꽂히고, 야만인은 부들거리다가 결국 앞으로 엎어졌다. 그리고-,
그 몸뚱이가 검게 변색되기 시작한다.
동시에 복부가 부자연스럽게 팽창하고, 피부에선 보라색 고름이 들어찬 낭포가 순식간에 올록볼록 솟아오른다. 부자연스러운 현상에 의해 복부에 가득 찬 가스는 안에서 점점 쌓이다가 그 압력에 결국 입과 항문 밖으로 뿜어져 나온다.
“꺼... 꺼어어어어! 부드드드득!”
트름과 방귀를 동시 꿰는 듯한 기묘한 소음, 그렇게 나오는 가스는 불쾌한 흑자색을 띄고 있었다. 그렇게 실시간으로 가스가 배출되고 있었지만,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그 피부는 검게 삭아가고 복부뿐만 아니라 전신 피부 아래가 부풀더니-
-뻥!
삭은 살점과 뼛조각을 사방에 튀기며 자욱한 흑자색 연무를 토해냈다. 그 토악질이 나오는 것 같은 광경에 오무혁은 죽어가면서도 불쾌함에 눈가를 꿈틀거렸다.
<부패 구름>
시체와 음에너지를 사용하는 <강령술> 중 하나, 꽤나 쉽고 강력하지만 그 추잡함과 잔혹함이 남달라서 웬만한 강령술사도 익히기 꺼려해 사장된 마법이다. 마지막까지 그와 함께 싸운 조그만 인간 계집도 주위에 널린 피와 시체를 이용해 강력한 독구름을 만들어냈지만...
‘저것’과는 좀 다르다.
그녀가 만들어낸 구름이 ‘정제되고 순수한 화학 약품의 냄새’가 난다면, 지금 미약하게 코로 느껴지는 저 냄새는... ‘지독한 저주와 부패의 냄새’였다. 저열하고 더러운 독기, 저걸 만들어낸 존재가 누구인지 그리고 왜 야만인들을 적대하는지 모르겠다만 끔찍한 존재라는 건 확실하다.
그렇게 느릿하게 자기에게 밀려오는 <부패 구름>을 보며 오무혁은 ‘차라리 야만인에게 죽는 게 나았군.’이라고 속으로 생각할 때-.
-스으으으...
<부패 구름>은 7~8m 가량 남았을 때, 좌우로 퍼지며 주위를 감싼다.
그 구름 안에 들려오는 야만인들의 비명과 전투의 소음,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부패 구름>을 뚫고 한 사람의 형상이 밖으로 나온다. 슬슬 시야가 심각하게 흐려지기 시작한 오무혁이었지만, 야만인들과는 대비되는 하얀 피부는 또렷이 알아볼 수 있었다.
강철거인을 봤을 때, 경고했던 그의 육감이 말해준다.
다가오는 저것은... 굉장히 꺼림칙하다고. 꼭 정체를 숨긴 ‘고위 악마’를 만났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하, 설마 악마가 자신을 찾아온 건가? 도대체 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좀 아쉽다. 몸만 멀쩡했으면 자신이 직접 찢어발겼을 텐데.
“...크.”
생의 마지막, 숨을 헐떡이면서도 전쟁 군주는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온 불길한 것을 향해 으르렁 거리며 적의를 내비치려고 할 때-
“안녕하세요? 이름 모르시는 오크...분? 보아하니 높으신 분 같은데 이름을 모르겠네요. 하하. 케흑! 아오! <부패 구름> 정말 독하네요! 숨을 안 쉬었는데도 기침이 나오네.”
다가온 소년은 활짝 웃으며 그에게 인사했다.
2.
악마어가 아닌 한국어
그 인사에 오무혁은 잠깐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다. 지성체의 고통과 고뇌만이 유일한 존재 목적인 악마, 그것 중에선 단순히 육체적으로 찢어 죽이는 것이 아니라 흉계를 꾸미는 것들도 있다. 아마, 이것도 그러한 종류겠지.
그 발칙한 기만을 무시하며 전쟁 군주가 노성을 지르려고 할 때-
“아, 이걸 먹으면 좀 나아질 거예요!”
그것이 잽싸게 다가와 그의 벌어진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입 사이로 들어온 무언가, 곧바로 뱉어내려고 했지만 어떻게 혀를 움직이기도 전에 그것은 녹아내려 목구멍을 타고 흐른다. 피를 벌컥벌컥 들이켜는 듯한 감각, 지독한 피비린내에 반사적으로 헛구역질이 나왔지만 그건 이미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크헉!”
“어때요. 훨씬 낫죠?”
그가 몸을 부르르 떨며 신음을 흘리자 말하는 그것, 확실히 그 말 그대로였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육신, 소화를 시킬 힘도 없건만 어쩐 이유에서인지 포만감과 함께 활력이 감돈다. 그 덕분에 오무혁의 시야가 좀 돌아오고 앞에 있는 그것을 볼 수 있었다.
백발의 인간... 소녀?
아니, 벗은 상반신의 가슴팍이 평평한 걸 보면 소년이겠지. 소년은 인간의 얼굴 가죽과 머리카락으로 만들어진 망태기를 뒤에 두르고 있었는데, 지금 이 상황이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이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검붉은 하늘 아래, 비명소리와 폭음이 가득한 전장에서 저렇게 즐겁게 웃는다? 역시, 의태한 악마다. 혹은, 악마 못지않게 뒤틀린 심성을 가진 존재거나.
“뭔 짓을 한 거냐...”
오무혁이 으르렁 거리자 백발의 소년은 난처한 웃음을 흘리며 진정하라는 듯이 양 손을 앞으로 뻗는다.
“아, 도와준 거예요. 선의로 도와준... 것만은 아니고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서 말이죠.”
“...”
“당혹스러우실 거 알아요. 하지만, 근본적으로 전 당신을 도우려는 겁니다. 진짜예요.”
도우려고 한다는 말에 오무혁은 실소를 흘렸다. 도우려고 한다고? 그러고 보니 자기가 만났었던 그 정체를 숨긴 고위 악마도 그런 말을 했었다. 물론, 나중에 그 악마를 직접 토벌하고 난 뒤에 놈이 꾸민 행위들을 보니 전혀 아니었고.
“흐, 개소...”
“맹세... 아니, 신께 맹세하죠! 르피너스에게 맹세코! 전 당신을 도우려고 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 상황을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중이에요.”
신의 이름을 언급하며 맹세하는 그것에 오무혁은 멈칫했다.
설령, 불신자라고 하더라도 신의 이름은 함부로 언급하지 않는다. 악마들도 감히 신의 이름으로 함부로 맹세하지 않는다. 그랬다간 진짜 어떤 꼴을 당할지 모르니까. 비록, 그 맹세의 대상이 그다지 신뢰가 가질 않는 ‘미쳐 날뛰는 혼돈’이긴 했지만 오무혁은 입을 다물었다.
그에 백발의 소년은 한숨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음, 사실 이번 사태는 신들께서도 예상하지 못한 일종의 ‘돌발상황’이랍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제가 약간의 ‘개입’을 하는 바람에 생긴 앙증맞은 해프닝이랄까요?”
“...”
“예정된 피가 흐르지 않아서 유혈이 신이 좀 화가 나셨고 덕분에 이런 일이 벌어진 거죠. 헤헤헤.”
그 말에 오무혁은 상대가 미친 새끼인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신들도 예상 못한 돌발상황’? 그리고, ‘저것의 개입으로 생긴 앙증맞은 해프닝’? 둘 다 말이 안 된다. 진짜라면 더더욱 말이 안 되고. 그렇게 오무혁이 어처구니가 없어하는 동안, 그건 주절주절 신세한탄을 계속해나갔다.
“원래대로라면 신의 분노를 피해 어서 빨리 도망쳐야겠지만... 도망치면서 생각해보니 유혈의 신이 벌인 이 상황을 탐탁치 않아하는 신도 있을 것 같더라고요? 그럼 혹시 ‘다른 신이 나서서 이 사태를 막을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서...”
“...”
“당신을 찾아왔답니다!”
“커헉! 크흐흡! 흐흐흐, 하도 미친 소리라서 웃기지도 않는군.”
신은 전지전능하며, 또한 ‘필멸자의 기준으로 재단할 수 없다.
이건, 신의 존재를 아는 불신자도 인정하는 것들이다. 저것이 말하는 것은 이 가장 기본적인 것도 모르는 발언이다. 신의 이름을 언급한 것도 아마 알지도 못하면서 언급한 걸 거다. 그럼 악마는 아닐 테고... 설마, 멋모르는 바깥의 인간인가?
오무혁이 그렇게 생각할 동안, 백발의 소년은 메고 있는 망태기에 한 손을 넣곤 어깰 으쓱였다.
“예, 미친 소리처럼 들린다는 거 알아요. 르피너스처럼 유별나게 인간 흉내를 잘 내는 것이 있긴 하지만... 사실, 그것들의 진짜 사고방식은 결코 필멸자들은 이해할 수 없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주의 것이 아니니까.”
“그래, 그러...”
“하지만, 인간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오무혁의 말을 도중에 끊으며 소년은 망태기에서 꺼낸 것을 그의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또 뭔가를 먹이려는 건가 싶어서 오무혁은 입을 앙 다물었지만, 소년이 그의 입가에 가져다 댄 것은 황금빛의 메달이었다. 그리고, 입가에 흘러내린 피를 메달에 묻히고 있었다.
“...뭐하는 거냐?”
대답 대신에 보란 듯이 손에 쥔 메달을 오무혁의 눈앞에 내미는 소년, 정교한 매달의 중심에 있는 인간의 얼굴이 오크의 얼굴로 서서히 바뀐다. 마법 장비인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소년은 그의 목에 오크의 얼굴로 바뀐 목걸이를 걸었다.
“자신의 충실한 신도가,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 휘말려 죽는 걸 싫어할 것 같아요.”
“...?”
“그 목걸이는 당신이 믿는 신의 주목을 끄는 장비예요.”
“...”
“그러니 기도하세요.”
“기도.. 하라고?”
“예, 드높은 천상에 있는... 당신을 가호하는 신에게. 당신을 봐달라고 기도하세요.”
기도를 하라는 요구, 그에 오무혁은 실소했다.
“하... 하하. 쿨럭! 나는 그 어떤 신의 신도도 아니다. 크흐! 그 누구도 믿지 않아.”
“...아닌데요? 당신에겐 신의 가호가 깃들어 있어요. 그런데 신도가 아니라고 하시면... 아마, ‘세로쉬’ 아닐까요? 오크들만의 신. 그나저나 듣자마자 생각했던 거지만 전기통닭을 되게 좋아하실 것 같은 이름예요.”
“...”
“한 번 해보세요. 최소한 밑지는 장사는 아니잖아요?”
생글생글 웃으며 재촉하는 소년을 오무혁은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세로쉬, 자비로운 오크의 신, 오크들만 믿을 수 있으며 오직 ‘오크만을’ 위한 신. 당연히, 대부분의 오크들은 세로쉬를 믿었고 오무혁은 무리의 통치자로서 세로쉬의 이름을 자주 써먹었다.
하지만, 냉정히 말해 진심으로 믿는 것은 아니었다.
몇몇 완숙한 경지에 이른 오크들만이 겪는 ‘후천적인 진화’, 그렇게 초 오크로 거듭난 이들을 부르는 칭호인 ‘전쟁 군주’. 오크들은 그런 전쟁 군주가 된 그를 세로쉬의 축복을 받은 존재라며 떠받들었지만 오무혁은 내심 실소를 흘렸다.
세로쉬의 축복을 받았다고?
웃기는 이야기였다.
그럼 왜 다른 신을 섬기는 오크도 전쟁 군주가 되는 경우가 있을까? 세로쉬가 자비로워서? 아니. 그건 ‘신의 축복’이 아닌 그냥 몇몇 뛰어난 오크들이 겪는 ‘생리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같은 전쟁 군주들끼리 대화해보면 그런 견해가 더 강했다.
존중은 하지만 단지 그것뿐인 신
그게 오무혁이 세로쉬를 대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저 꺼림칙한 존재는 자기에게 세로쉬의 축복이 깃들었다며 기도하라고 하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하지만, 저 말대로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다.
그에 피식 웃으며 오무혁은 두 눈을 감고-
“세로쉬시여.”
짧게 중얼거렸다. 그 순간, 오무혁은 기묘한 감각을 느끼며 두 눈을 떴고...
세상이 멈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