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두 번 세례 받은 자 >
3.
모든 것이 움직임을 멈췄다.
주위를 둘러싼 채로 뭉클거리던 흑자색의 독무도, 심지어는 근방에서 터진 폭탄에서 흘러나온 빛조차 허공에서 그 궤적이 정지했다. 당연히, 계속해서 울려 퍼지던 폭음과 호루라기 소리 또한 전혀 들리지 않았다.
영원의 한순간 같은 정적
오직 오무혁만이... 그조차도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유로이 주위를 돌아볼 수 있었다. 그렇게 그의 지성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넋이 나가 있을 때-.
오무혁은 누군가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모든 것이 움직임을 멈추었음에도, 우주 전체가 이 찰나의 한 순간에 사로잡혀 있었음에도, 그는 계속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에서 다가오는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점점 그가 다가온다고 느낄수록 주위에 황토빛에 가까운 황금빛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찰나 혹은 영겁과도 같이 느껴지는 시간이 지나고
그는 마침내 오무혁의 앞에 서 있었다.
오무혁은 홀린 듯이 자신 앞에 서 있는 자를 올려다보았다. 그와 같은 오크, 하지만 어떤 오크인지는 모르겠다. 남자? 여자? 젊은이? 노인? 도저히 구분이 불가능했다. 심지어는 살색 피부의 ‘언덕 오크’인지, 녹색 피부의 ‘늪지 오크’인지, 창백한 피부의 ‘동굴 오크’인지도.
그래, ‘모든 오크의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그의 눈 속에서는 시간 그 자체보다도 오래된 황금빛이 타오르고, 입에서는 별의 광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도저히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모습의 오크, 하지만 오무혁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자신은 이 오크를 어디선가 만나보았다.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존재감을 흩뿌리는 저 오크를 잊고 있었다니? 그 순간, 영혼의 깊은 곳에 잠겨있던 기억들이 그의 의식 위로 솟아오르고 오무혁은 언제 저 오크를 만났는지 깨달았다. 그래, 그 때도 이랬었다. 시간이 정지해 있었고 저 존재...
아니, ‘세로쉬’께서 직접 자신을 축복하셨다.
기억난다. 그 축복을 받고 자신은 ‘전쟁 군주’가 되었다! 맙소사! 그래, 세로쉬의 사제들이 떠드는 것들은 모두 진짜였다! 전쟁 군주는 진짜로 세로쉬께서 축복하여 탄생하는 것이 맞았다! 그런데도 자신은 세로쉬를 냉대하며 겉으로만 따르는 척 했다니...
그렇게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송구함에 오무혁이 어찌할 바를 모를 때-.
...
세로쉬께서 분노하신 것이 느껴졌다.
만약, 저분이 자신에게 화를 내셨다면 오무혁은 어떻게 자살도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을 것이다. 다행히도 그에게 화를 내시는 것이 아니었다. 세로쉬께서 화를 내는 것은 다름 아닌 이 상황이었다. 그를 이렇게 만든 것에 대한 분노와 안타까움.
그에 오무혁, 아니 무르굴은 황송하면서도 동시에 의아했다.
왜 저렇게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한 것을 안타까워하실까? 지금 보니 자신은 아주 못된 놈이었다. 받을 건 다 받았으면서도 세로쉬를 진정으로 따르지 않았다. 그런 생각이 들자 의아함은 끝을 모르고 꼬리를 쳤다.
...어째서 세로쉬를 섬기지 않더라도 전쟁 군주가 탄생할까?
전쟁 군주, 그건 분명 세로쉬의 축복이건만... 세로쉬를 섬기지 않는 오크도, 심지어는 다른 신을 섬기는 오크들에게도 그 축복이 내린다. 어째서? 왜 다른 신을 섬기는 오크들도 축복하실까? 그의 표정만으로도 그분께서는 자신의 생각을 안다는 듯-,
별빛으로 속삭이셨다.
진정한 부모는 자식을 버리지 않는다. 설령, 자식이 자신을 돌보지 않더라도. 다른 신을 섬기는 오크더라도 그 직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세로쉬께서 자상한 어버이로서 그리고 그 편이 오크들을 더 구원하는 방향이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 모든 것은 오로지 오크들의 구원을 위해서였다.
죽더라도 오크들은 세로쉬의 천국에서 다시 태어나거나 구원받는다. 배교를 한다고 하더라도, 다시 오크로 태어나 살아갈 기회를 주신다. 그 어떤 조건 없이 세로쉬의 사랑받는 종족, 그것이 자신들 ‘오크’였다.
그 사실에 무르굴이 감격의 눈물을 흘릴 때-
...
오크들의 주인께서 천천히 옆을 바라보신다.
다른 것처럼 굳어버린 백발의 인간 소년, 그분께서는 아무런 말이 없었지만 무르굴은 이전처럼 별빛으로 느껴지는 그분의 의지를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같잖은 짓 말고 눈을 뜨라고.’
그러자 감고 있던 그것의 두 눈이 떠지며 자줏빛으로 불타오르는 홍채가 드러난다. 살짝 당혹해하는 자안, 그리곤 어설프게 인사한다. 그 모습에 세로쉬께선 그것을 보며 고민하는 듯 보였지만 이내 시선을 돌린다. 그에 자줏빛 안광이 안도의 한숨 같은 감정을 내뱉는다.
그 광경을 지켜보며 무르굴은 내심 식은땀을 흘렸다.
감히, 신이 역사하는 광경을 엿보다니? 뭔진 모르겠지만 저건... 자신의 예상을 한참 뛰어넘는 위험한 존재였다. 그렇게 무르굴이 경계수위를 높일 때, 모든 오크들의 주인께서는 그에게 잡고 일어서라는 듯이 손을 뻗었다.
그를 위해 준비된 천상이 보인다.
그분께선 비탄에 빠진 자식이 울부짖기에 오신 거였다. 자신이 이 손을 잡으면 천상에 가서 안식을 취할 것이다. 하지만, 무르굴은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자신에게 허락된 저 천상의 힘이라면, 오크를 구원하는 힘이라면...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덩달아, 본능적으로 저 힘을 받는 순간 뭘 할 수 있는 지 알 수 있었다. 오크만을 위한 신성한 분노, 세로쉬의 힘을 받아 불타오르는 봉화가 되리라. 대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영육이 감당할 수 없는 힘, 저 천상으로 갈 기회는 사라지고 다시 한 명의 오크로 환생하겠지.
자신의 구원을 포기하는 행위
하지만, 무르굴은 결심했다. 무한한 사랑을 가진 저 위대한 어버이를 위하여 기꺼이 그 힘을 지상에 풀어버리기로. 어차피 언젠간 다시 구원 받을 것 아닌가? ‘모든 오크들의 주인’께서는 안타까워하시겠지만 그가 그런 선택을 내려도 이해해주실 것이다.
그러나... 무르굴은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동포들을 구원하는 것에 망설인 것은 아니었다. 지금 자신의 뜻이 순수한지 몰라서였다. 자신은 예전의 그릇된 사랑 때문에, 그리고 그 반푼이 자식을 위해서 동포들을 죽게 만들었다. 과연 자신이 세로쉬를 대표해도 될까? 아니, 솔직히 그것보다도...
자신의 반푼이 자식도 저 위대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지를 묻고 싶었다.
불경한 생각, 세로쉬께서 무르굴을 보시고 무르굴은 동시에 그분의 뜻을 이해했다. 한 때 오크가 아닌 자를 사랑했던 자신도, 설령 불순물이 섞인 반쪽이라도, 포용하시는 무한한 사랑을. 그에 무르굴은 눈물을 흘리며 두 눈을 감았다.
이어서 자애로운 손이 그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첫 번째 세례를 받은 그가 또 한 번의 세례를 받는 순간.
무르굴은 현실에서 두 눈을 떴다.
4.
인간 이상의 존재를 인간의 상식으로 제단해선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난 완전히 미친 짓을 저질렀다. 신의 ‘단편적인 행동’ 일부분을 보고 인간의 기준에서 해석했으니까. 예상치 못한 일, 그곳에서 손해를 보는 것이라면 신도 싫어할 것이라고. 어찌되었든 간에 그 어리석은 도박은...
대 성공이었다.
신도의 부름에 신이 강림했다. 왠지 모르게 전기구이 통닭 좋아할 것 같은 이름의 존재가 자신을 볼 땐, 이미 넝마가 된 영혼이 터져나가는 줄 알았지만 그 존재는 그저 한 번 자신을 힐끗 보곤 사라졌다.
“아, 하하하. 진짜 죽을 뻔 했네요? 어휴, 신을 보는 건 너무 무섭다니까요. 아하핳하하!”
도박 중독자들이 느끼는 게 이런 걸까? 캬! 기분이 째진다. 그렇게 실실 웃으며 난 내가 한 ‘도박의 결과물’을 바라보았다. 고대 로마군의 복장 비슷한 황금 갑주를 입은 죽어가던 오크, 그는 죽어가던 이전과는 달리 멀쩡히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고 있었다.
오래된 황금빛이 그의 눈코입에서 흘러나온다.
<눈>이 아닌 그저 육안으로도 보일 법한 엄청난 신성이 그를 감싸 안고 있다. 저 강철거인에 밀리지 않는... 아니, 압도하는 신성. 하지만, 그 ‘너무나도 강력한 힘’이 그의 육신을 속에서부터 바스라트리고 있다.
[...]
일어서선 말없이 날 내려다보는 황금갑주의 오크, 그 모습에 난 나도 모르게 살짝 식은땀을 흘렸다. 음, 왠지 날 ‘죽일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내 착각이겠지? 아니, 오크의 신도 날 보고 넘어갔는데 말이야! 자기도 봤으면서.
저벅저벅.
역시나, 나 혼자만의 착각인 듯 그는 백색 망토를 펄럭이며 강철거인 쪽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 묵직한 위압감,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던 거지만 ‘X두의 권’에서 나오는 세기말 패왕을 보는 것 같네. 그렇게 걸어가는 대빵 오크를 향해-.
“그...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 수 있나요?”
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에 멈칫하더니 고갤 돌려 날 바라보는 대빵 오크, 그 고요한 황금빛 시선에 난 헤헤 웃으며 손바닥을 비볐다.
“진짜~ 진짜~ 별 것 아니에요. 그... 제가 신분이 미르의 생도인데, 이번 일에 제가 정당하게 습득한 장비들을 빼앗기게 생겼거든요?”
[...]
“그 좀 높으신 분 같은데, 도와주실 수 있나요? 아무리 그래도 헐값에 장비를 송두리째 뺏기는 게 좀 억울해서 말이죠. 잘 되면 지금 걸고 계신 그 메달 드릴 게요.”
[...허.]
그런 내 대답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는 대빵 오크, 하지만 진짜인걸... 그런 내 소박한 요청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는 고갤 끄덕이곤 강철거인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크게 숨을 들이 쉬었다.
그리고, 검붉게 물든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5.
서울 송파구에서 벌어지는 ‘이상 현상’은 전 세계 방송국에 긴급방송으로 송출되고 있었다.
미궁이 부상하면서 ‘정보통제와 검열’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세상이 되었지만, 이건 그렇게 숨기기에는 사안이 너무 컸다. 무려 한 나라의 수도 한복판에서, 그것도 최첨단 마력 연구와 관련된 아카데미에서 일어난 일이다. 숨기려야 숨길 수가 없었다.
그 덕분에 전 세계인들은 미르에서 나타난 악몽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시간을 되돌려 부활하는 유혈의 강철거인, 그리고. 그 주위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야만인 군세. 그건, 전 세계인들에게 한 가지 재앙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미국 절반을 초토화시키고 독보적 초강대국을 무너트린 악몽,-
룬 수호자를.
쏟아지는 야만인 군세를 한국의 군대가 틀어막고 끊임없이 소모전을 시작한 사이, 각국의 지도자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의논에 돌입했다. 룬 수호자와 관한 사전협의 된 대처법은 ‘현대 화기가 아닌 초인을 투입해서 제압’이었지만 어느 나라가 몇 명을 내놓을 지는 미지수였다.
그렇게 한국이 절망적인 싸움을 하려고 할 때-.
“...?”
“...!?”
새로운 이변이 발생했다.
미르 한구석에서 솟구친 ‘찬란한 황금빛 광채’가 생명체의 내장을 보는 것 같은 구불구불한 검붉은 구름을 꿰뚫고 솟구친다. 그리곤, 커다란 나무가 가지를 뻗는 것처럼 줄기줄기 뻗어가며 검붉은 하늘이 잠식한 영역을 감싸 앉는다.
이어서 미약한 황금빛 가루가 미르 전역에 떨어져 흩날린다.
그것 광경은 투명한 황금빛 천이 미르 전역을 뒤덮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몽환적인 풍광에 모든 이들이 행동을 멈췄다. 총을 쏘던 병사들도, 하늘을 날아다니며 전투 헬기 조종사도, 심지어는 살육을 이어나가던 야만인들과 반인반수들도.
세상에 멸망을 고할 것 같았던 분노한 강철거인까지도.
모두 그 압도적인 존재감에 하던 행동을 멈추고 황금빛 기둥을 바라본다. 당연히, 방송국 드론의 카메라들 또한 그 황금빛 기둥을 주시했고 얼마 안가 그 아래쪽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의 형체-황금빛 갑주를 입은 커다란 덩치의 오크를 포착할 수 있었다.
“오, 오무혁씨입니다! 오무혁씨가 저 빛기둥에서 걸어 나오고 있습니다!”
뉴 송파구의 영구 시장, 오크 전쟁 군주 오무혁. 그가 빛기둥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에 원거리에서 촬영을 하던 기자가 침을 튀기며 소리친다.
송파구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송출되고 있었기에 전 세계의 사람들은 ‘오크들의 분전’을 고스란히 보았다.
용감하게 재앙을 향해 도발하던 오무혁, 그가 시선을 끌 동안 등 뒤에서 완성된 마법에 타격을 입는 강철거인, 이어서 우회해서 접근한 오크들의 희생, 강철거인을 한 번 죽일 때까지 몰아붙였던 그들의 모습, 그리고 한 번에 상황이 역전되는 절망까지 모두.
각성한 강철거인의 창에 맞아서 날아간 그 오무혁은 다시 전장을 걷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황금빛 불길에 휩싸인 채, 포격에 으스러진 야만인들의 핏물이 가득한 진창을 걸으면서, 그 묵직한 발걸음에도 지상엔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그에 전 세계의 방송채널들이 호들갑을 떠는 중이었지만... 오무혁은 그런 걸 하나도 몰랐다.
그저, 자신 앞에 있는 시련에 집중했다.
[스읍... 하아.]
느릿하게 숨을 내뱉으며 그는 조용히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리곤 마음속으로 이 폐허 어딘가에 묻혀있을 자신의 애검을 불렀다. 그의 몸 안에서 불타오르는 신성이 움직이고 어느새 검은 공간을 뛰어넘어 그 부름에 답했다.
[쯧.]
그렇게 나타난 칼자루를 쥐었지만 오무혁은 작게 혀를 찼다.
수십 년 동안 써왔음에도 흠집하나 없었던 그의 애검, 하지만 지금은 칼날 부분이 거의 다 사라져 있었다. 버려야하는 검이지만... 그의 안에서 불타오르는 신성을 사용한다면 다시 쓸 수 있다.
그 손잡이만 남다시피 수정검을, 오무혁은 두 손으로 잡아 명치 어림에 세웠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자신 내부에 요동치는 신의 은혜를 떠올리며 작게 신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러자 자비로운 오크신의 신성이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불길로 화해 그 부러진 단면에서 뭉클뭉클 뻗어나온다.
그리고, 수정검은 신의 은총으로 벼려진 ‘황금빛 불꽃의 칼’이 되었다.
평소 쓰던 리치보다 조금 더 긴 불타는 칼날을 흡족히 바라본 오무혁은 그 황금빛으로 불타오르는 검을 강철거인에게 겨누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내가 돌아왔다.]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음성. 아니, 음성이라기 보단 의지에 가까운 어떤 것이 근방에 있는 모든 이들의 머릿속에 울리는 가운데.-
[그리고, 내 동포들도 함께.]
이어지는 선언과 함께 황금빛 휘광이 내려앉았던 하늘에서 수백 개의 빛기둥이 지상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