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120화 (120/350)

< 24화. 두 번 세례 받은 자 >

6.

“...”

왼손으로 핸들을 쥔 채, 풀 악셀을 밟으며 미르에서 벗어나던 남궁진아는 자신도 모르게 자동차를 멈추고 멍하니 저 멀리 펼쳐진 금빛 기둥을 바라보았다.

하늘에서 표표히 흩날리는 금빛 가루, 그건 마치 시간을 멈추는 것 같았다.

악다구를 쓰며 달려들던 유혈의 괴물들도, 시끄러운 총성과 포격음도 모두 멈췄다. 그 가운데, 목소리는 아니지만 누구나 들을 수 있는 ‘담담한 의지’가 메아리치고-.

“꺄아아악!”

돌연, 차량 위에 떨어진 황금빛 섬광에 그녀는 기겁했다. 그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자동차 악셀을 밟으려 했으나...

“...”

옆자리, 오혜영의 오른팔과 할버드가 놓여있던 조수석에서 벌어지는 기적을 보곤 넋이 나간 사람처럼 입을 벌렸다.

7.

오무혁의 선언과 함께 하늘에서 떨어지는 빛기둥

그 황금빛이 떨어지는 자리는 주로 ‘강철거인이 날뛰었던 곳’과 ‘유혈의 군대가 진격했던 곳’, 모두 ‘오크가 죽었던 장소’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리고, 황금빛 기둥 안에서 기적이 벌어진다.

외부에서 쏟아진 포격을 맞고 으스러진 시신, 야만인들의 시체 포식에 일부만 남아 있던 시신, 심지어는 강수영의 광범위하게 뿌렸던 산성독에 의해 흔적도 없이 녹아내렸던 시신... 이곳에서 죽었던 ‘오크’라면 모두-.

“...?”

“뭐... 뭐야? 여긴?”

그 부드러운 황금빛 광휘 안에서 되살아난다.

되살아난 오크들 또한 정신이 없는 듯, 두 눈을 뜨더니 어벙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뭔지는 모르겠다만 기억을 잃고 다시 일어나니 황금빛 광휘에 감싸여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야 할 야만인들과 유혈의 괴물들은 그저 멍하니 자신들을 보고만 있었고.

-파앗!

그렇게 황금빛 기둥 안에서 되살아난 오크들은 일순간 반짝임과 함께 사라지고, 오무혁의 근처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렇게 되살아난 그들은 자신들 앞에 서 있는 전쟁 군주를 보는 순간 넋이 나갔다.

“전쟁 군주... 시여?”

부드러운 황금빛 후광에 감싸인 오무혁, 그의 눈과 입에선 별빛과도 같은 섬광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누가 봐도 신성하기 그지없는 성인(聖人)의 모습이었지만-.

그는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빛이 흘러나오는 두 눈의 안구는 공허했고, 피부는 서서히 얼룩지며 타 눌어붙고 있었으며, 얼마 없는 머리카락도 한 줌씩 떨어져나간다. 그 어떤 필멸자도 감당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품었기에 치르는 대가였다.

그럼에도 오크들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영광스러운 빛’, 오크들을 너무나도 포근하게 감싸는 그 광채에 홀렸다. 그 어떤 소리도 귀에 더 이상 들리지 않았고, 그 어떤 다른 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런 부하들의 넋 나간 모습에 오무혁은 별것 아니라는 듯이 부드럽게 웃으며 평소처럼 말을 걸었다.

[세로쉬 님의 천국에서 쉬고 있었을 텐데, 되살려서 안식을 방해해서 미안하군.]

“...”

[그래도 부를 만한 사람들은 자네들 밖에 없었어.]

이어지는 오무혁의 말에 부활한 오크들은 그제서야 자신들이 강철거인에게, 혹은 밀려드는 야만인 군세에게 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죽었다 되살아났다.

강령술을 이용한 조잡한 부활이 아닌, 미궁에서도 볼 수 없었던 진정한 기적. 그리고 그런 기적을 행한 그들의 주군은 ‘전설적인 휘광’에 감겨져 있다. 그 광경에 종교적인 법열 빠진 오크들이 하나 둘씩 무릎을 꿇고 ‘세로쉬여.’를 중얼거리며 기도하는 가운데-,

「그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그런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흉성에 가득 찬 의지가 세상에 울려 퍼진다.

그와 함께 황금빛 기둥이 파고든 검붉은 하늘에서 벼락과 연기가 터져 나오고, 황금빛이 만들어내던 강제적인 평화가 깨어진다. 야만인들과 반인반수들도 정신을 차린 듯, 시끄러운 호루라기를 불고 반인반수 또한 근처의 군인들에게 발톱을 뻗는다.

하지만, 그 의지에 넋이 나가 있었던 군인들 또한 정신을 차리며 반격했다.

[끙, 회포를 나눌 시간도 없구만.]

그에 오무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 의지를 내뱉은 적을 바라보았다.

강철거인, 그건 이전과는 너무 많이 달라졌다. 쩍쩍 갈라진 온몸의 피부에서 시뻘겋다 못해 검게 보이는 불길을 뿜어내고 있었고, 불과 연기를 토해내는 얼굴은 꼭 세상을 끝내버리기 위해 나타난 종말의 거인 같았다. 그런 오무혁의 시선을 의식하듯, 강철거인은 자신의 창을 들어올렸다.

「!」

그 선언과 함께 검붉게 물든 하늘에서 꽈르릉 벼락이 치며 땅이 진동한다. 그 거인의 갈라진 피부에서 흘러나온 피가 꿈틀거리며 수천의 새로운 야만인들이 튀어나온다. 이전의 것들과는 다른 좀 더 정예한 야만인들. 그들은 종말의 거인을 일제히 응시하고.

「!」

그 창을 뻗어 오무혁이 있는 황금빛을 가리키며 살의(殺意)를 터트린다.

-끼아아아아악!

그에 시끄러운 괴성을 내지르며 무질서하게 쏟아지는 야만인들, 오무혁은 쓰게 웃으며 무릎을 꿇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부하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자네들을 죽음으로 이끌었던 졸장으로서 부끄러운 말이지만... 다시 한 번, 나와 함께 싸워주지 않겠나?]

“당연합니다! 전쟁 군주를... 아니, 메시아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저도!”

“저도!”

오크 기사들은 다시 시간을 역전해 벼려진 무기를 들었다. 모두가 하나 되어 대답하는 가운데, 하늘에서 떨어지는 황금빛 가루가 그런 그들의 무기와 장비에 달라붙는다. 그리고, 현실의 논리와 법칙을 초월해 더 강화한다.

그런 부하들의 열성적인 태도에 오무혁은 이쪽을 향해 밀려오고 있는 유혈의 군세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럼, 모조리 죽여 버리자. 오크를 위하여.]

감정이 별로 실리지 않은, 별 것 아니라는 듯한 담담한 음성. 그 메시아의 명령에 황금빛 아우라를 넘실거리는 오크들이 두 눈이 뒤집힌 채 유혈의 군단에 달려들었다.

8.

전쟁 군주가 이끄는 오크 무리는 보통 ‘정밀한 기계’처럼 움직인다.

전쟁 군주들이 뿜어내는 ‘페로몬 같은 카리스마’는 다른 이종족에 비하면 흉포하고 제멋대로인 오크를 가슴 깊이 감화되게 만들고, 더 나아가 전쟁 군주의 심중(心中) 의도를 좀 더 명확하게 느끼도록 해준다. 그 두 가지가 합쳐지면 말도 안 되는 지휘력을 가능하게 만든다.

오무혁 또한 그러한 정교한 지휘를 즐겨 했지만 이번엔 달랐다.

“메시아님이 나와 함께하신다!”

“무르굴! 무르굴님이 나를 보셨어!”

“아니야! 멍청아! 날 보신 거야!”

이전의 차분하고 냉정한 태도가 아닌 일종의 종교적인 열광상태에 빠진 오크 기사들은 전쟁 군주가 없는 무리처럼 무질서하게 적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당연히, 그 효율이 떨어져야 정상이겠지만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더 괴력을 발휘한다.

그렇게 ‘유혈의 군단’과 ‘오크 기사단’이 순수한 힘으로 맞부딪치는 가운데-,

[...]

오무혁은 냉정하게 강철거인을 응시했다.

힘으로 유혈의 군단을 일방적으로 으깨버리는 오크들을 보며 격분을 토하는 강철거인, 그에 그 몸이 가늘게 떨리고 두 눈의 빛이 강해진다. <피눈물>의 전조, 이전이라면 그냥 도망치라고 소리를 지르다가 몰살당했겠지만-.

-콰아아아아앙!

「끄어억?!」

검을 쥐지 않은 오무혁의 왼손이 까닥거리자 검붉은 구름을 뚫고 하늘에서 황금빛이 강철거인을 후려친다.

세로쉬의 권능 중 하나인 <신성 강타>, 그러나 그 위력은 사제들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황금빛 섬광은 그 실체를 가진 채, 강철거인이 후려쳤고 거인은 휘청이며 간신히 창을 지팡이 삼아 쓰러지지 않았다.

그런 강철거인을 향해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애들 싸움에 끼어들지 말고 나와 싸우자.]

오른손에 검을 쥔 채, 천천히 한 발자국씩 걷는 모습. 느릿해 보이는 그 모습과는 달리 오무혁은 어느새 유혈의 군단과 오크들이 맞부딪치는 전장 너머에 있었다. 그 과정이 사라지고 결과만 남은 것처럼 그 누구도 오무혁이 전장을 가로지르는 것을 포착하지 못했다.

「우워어어어어!」

그 오만한 모습에 강철거인은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창을 쥐고 돌격한다.

일반인보다 좀 빨리 움직이는 것 같은 형상, 하지만 그 크기를 생각하면 음속을 아득히 뛰어넘는 돌진이었다. 공기가 찢어지며 소닉붐이 일어나는 소음을 들으며-

[스읍...]

오무혁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그대로 땅을 박차 거인을 향해 뛰어올랐다. 분명 인간과 개미 수준으로 크기 차이는 압도적이었다.

「끄-아-아-악!?」

그러나 굉음과 함께 첫 충돌에서 밀려나는 존재는 누가 봐도 거인이었다.

물리법칙을 비웃는 기적, 그에 강철거인이 한층 더 <광폭화>하며 폭발적으로 창을 내리꽂고 오무혁 또한 그의 생애 최고의 기교로 날아오는 창을 쳐내며 거인의 약점을 향해 질주했다.

콰릉! 쾅! 쾅! 쾅! 콰르르릉!

오무혁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거인의 근처를 움직이며 황금빛 칼날을 휘두르고, 그에 유혈의 거인 또한 만만치 않은 움직임으로 유혈의 불꽃으로 이뤄진 창을 휘두른다. 검과 창이 부딪치고 미끄러지며 천둥을 울리고 벼락이 튄다.

[흐.]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고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강철거인과는 다르게 오무혁의 몸은 스스로가 품은 거대한 신성에 서서히 부스러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별개로 그 신화의 한 장면 같은 싸움은-.

오무혁이 점점 압도하고 있었다.

강철거인의 창이 휘둘러질 때마다 아스팔트가 박살나고 대기가 찢어졌지만 그 공격은 오무혁에 통하지 않았다. 반면에 오무혁이 휘두르는 칼날은 거인의 참격에 비하면 얕디얕았지만 착실하게 강철거인의 몸 곳곳에 상처를 입혔다. 그 치욕스런 결과에-.

-쿵! 쿵! 쿵!

거인은 백 스텝을 치며 성큼성큼 뒤로 도망쳤다. 도망을 치는 듯한 모습에 오무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따라가려고 했으나 유혈의 거인은 도망친 게 아니었다.

「칸이시여. 제발 유혈을 허락하소서!」

고함을 지르며 창을 높이 들어 올리는 거인. 그러자 검붉은 하늘에 뻗어 나온 불길한 광채와 거인의 몸에서 이글거리는 유혈이 모두 그 창의 날로 모이기 시작한다. 그 광경을 보며 오무혁은 두 눈을 좁혔다.

느낄 수 있었다.

모든 시간 선에서, 모든 공간 선에서, 싸우다 죽은 인간, 오크, 엘프... 어떤 목적도 없이 이젠 증오와 분노만 남은 영혼들이 저 이글거리는 창날에 모여 하나의 거대한 비명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유혈의 신성을 연료로 맹렬히 타올랐다.

반면에 강철거인은 서서히 근육이 쪼그라들었다.

[흐.]

자신의 모든 것을 갈아 넣어 승부수를 띄우려는 모습, 그 광경에 오무혁 또한 웃으며 응했다. 그의 몸을 휘감으며 불타오르던 황금빛 신성이 모조리 검의 칼날로 뭉치기 시작했다. 그것도 모자라 붉은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거목(巨木) 같은 빛의 기둥 또한 무너져가며 검 날 위로 모여들었다.

양손으로 붙잡은 오무혁의 검이 황금빛 태양처럼 이글거렸다.

그 싸움을 저 멀리서 관측하고 있는 이들조차 눈을 찌푸릴 정도로. 그 강렬한 광채에 외부에서 관찰하는 이들은 오무혁의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유혈의 축복을 받은 거인은 그 적수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별빛 같은 가루를 흩날리며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하는 적의 육신을-.

「크흐흐.」

그에 강철거인은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더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러한 강철거인의 육신은 어느 순간부터 마르지 않았다. 스스로 오무혁이 무너지게 하겠다는 의도, 그러나 오무혁은 그런 강철거인의 비웃음에 흔들리지 않았다. 시시각각 부스러져가는 몸을 지탱하며 그는 검을 왼쪽 허리 옆으로 붙였다.

그리고 ‘한 걸음’을 내딛었다.

「!?」

그 한 걸음에 수km나 떨어졌던 거리가 좁혀진다. 그 광경에 경악한 강철거인이 다급하게 창을 내리꽂았지만-.

[멍청한 놈.]

그런 멍청한 거인의 행동을 비웃으며 오무혁은 검을 올려 베었다.

그 태양과도 같은 검은 그 궤적이 올라갈수록 거대하게 길어지며 창날과 부딪쳤다. 막강한 물리량, 증오와 분노, 그리고 유혈의 힘을 담은 거인의 창날, 그건 분명 세상을 꿰뚫을 만큼 강력했지만-.

-콰드드드득!

여력을 남겨놓은 그 창은 모든 것을 불태운 오무혁의 검보다는 약했다.

유혈의 거인의 얼굴에 경악이 어리는 가운데, 황금의 칼날은 그대로 창날을 박살내며 강철거인을 반으로 갈랐다. 이어서 그 갈라진 부위를 중심으로 거미줄 같은 황금빛이 뒤덮고.

「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

비명을 지르며 강철거인이 산산조각 나 터져나가고 유혈의 군단이 일제히 핏물로 화해 무너져 내렸다.

그와 함께 하늘을 뒤덮던 검붉은 구름들이 빠르게 사그라진다. 이어서 본래의 하늘색을 되찾고 쨍쨍하고 따듯한 햇볕을 도시를 내리쬐었다. 조금 전의 번쩍임에 눈을 가렸던 사람들은 이제 그 햇살에 눈이 부시다는 듯 바라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우와아아아아!

-보이십니까? 여러분? 재... 재앙이 사라졌습니다.

누구 가릴 것 없이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전 세계 곳곳에서 지금 이 순간만은 멸망의 공포에서 벗어난 순수한 기쁨에 소리 지르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 가운데-,

-털썩.

모든 것을 불태우고 고목처럼 말라비틀어진 오무혁은 부드럽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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