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유혈이 지나간 뒤 >
1.
유혈의 거인이 오무혁에 의해 쓰러진 뒤, 사태는 완전히 종료되었다.
얼마 안가 군인들이 사태수습을 위해 미르로 진입했고, 이어서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모았다. 그렇게 사람들이 어느 정도 모였을 때, 군인들은 미르 북쪽의 지하 통로-뉴 송파구로 사람들을 반 강제로 밀어 넣었다.
당연히, 항의가 터져 나왔다.
별로 다치지 않은 이들은 그대로 집으로 도망치려했지만, ‘정신 오염을 치료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무자비하게 찍어 누르더라고? 아니, 도망치는 이들의 등판을 향해 그냥 총으로 쏠 정도면 말 다했지.
그 강권과 실제로 돌아버린 이들이 많았기에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불안하면서도 따랐다.
그리고, 난 얼마 안가 모종의 장소로 끌려가 ‘특별 격리’ 되어 몇 차례 심문을 받았다. 대충, ‘어떻게 피라미드 안쪽에 있었냐?’, ‘대환이가 진짜로 유혈의 신도였냐?’, ‘어떻게 그런 대환이를 이겼냐?.’, ‘회수해서 가지고 있던 위험 마법 장비들은 어디에 갔냐?’, ‘이번 일이 벌어질 지 어떻게 사전에 알고 있었냐?’였지.
딱 봐도 같이 피라미드에 올라갔던 이들이 복귀해서 나에 대해 말한 것 같았다.
뭐, 내 분위기가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는지 집요하게 추궁했지만 전부 성실히 대답했다. 난 찔리는 게 없었거든! 들키지 않으면 범죄가 아니니까! 은근한 으름장과 협박? 잠 안 재우기? 그런 건, 내겐 위협도 아니지!
그렇게 3일째 되던 날, 나는 다른 사람들이 있는 ‘지하 병원’에 입원할 수 있었다.
-뉴 송파구의 시장, 오무혁씨의 장례식은 국가장으로 치러지기로 결정되었으며 아직 안치도 하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대한민국의 각계각층은 물론이고 세계 각국에서 조문 행렬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추모 열기와는 달리 ‘오크들을 지상에 진출하게 해주겠다.’고 정부와 이면 협약을 맺은 것이 파문이 되고 있는데요. 뉴스 추적에서 집중 취재...
내 몫으로 배정받은 1인 병실 안, 원래대로라면 그냥 누워서 Tv나 보며 쉬려고 했지만...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그에 TV를 끄고 난 밖의 지하 공원으로 향했다. 심문을 받을 때부터 서서히 느끼고 있었지만-.
“엿 같아요.”
한숨을 내뱉으며 공원 잘 꾸며진 빈 벤치에 앉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환영 마법>과 조명 기술이 조합된 ‘인공 하늘’, 살짝 시선을 돌리니 나랑 똑같이 병원복을 입은 수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와 함께 내 안에서 끓어오르는 ‘희미한 충동’
그에 난 두 눈과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그 ‘실체’가 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완전한 존재에 대한 살인적인 열등감’, ‘나보다 잘난 놈들에 대한 저열한 질투’. 그걸 파악하니 이번에 이전엔 설명할 수 없었던 ‘내가 이번 사태에 뛰어든 이유’도 덩달아 알 수 있었다.
...난, 그저 나보다 잘난 놈들이 죽는 걸 보고 싶었다.
그리고 잘하면 ‘내가 직접 그 잘난 놈들을 끌어내릴 수 있다.’는 저열한 기대 때문이었다. 유혈이 가득한 미르에 있었을 때는 반쯤 쾌감에 빠져서, 그리고 시시각각 조여 오는 목숨의 위협에 넘겼지만 심문을 받으면서 그때 일을 떠올리니...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대환이를 죽였을 때, 난 너무 기뻤다.
동시에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젠 더 이상 돌이키기 힘들 거란 것을. 이렇게 때때로 감정을 발산하지 않으면... 이 추악한 감정은 계속 내 마음속에서 메아리쳐 기하급수적으로 커져 내 머릿속의 이성을 싸그리 날려버릴 것이란...
“머함?”
“...에엑!?”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난 다시 <눈>을 사용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환자복이 아닌 평소에 있는 힙한 사복 차림의 여성, 어느새 내 앞에 선 서예린이 벤치에 앉은 날 내려다보며 태연하게 커다란 아이스크림이 올라간 콘을 날름거리고 있었다.
“아, 하하! 반가워요. 예린씨. 오랜만이네요.”
“음.”
내 인사에 고갤 주억이며 받는 서예린, 그리곤 그녀는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에 살짝 당황했다. 아니, 날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거 아니었나? 그렇게 내가 친한 척 하는 인싸를 보며 당혹감을 느낄 사이, 그녀는 운동하거나 배드민턴을 치고 있는 이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어디에 있었음?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데.”
“음, 따로 갇혀서 심문 좀 받았죠. 하하, 제가 좀 수상하게 보였나 봐요.”
“하긴.”
내 대답에 살짝 고갤 주억이는 서예린, 이어서 그녀는 살짝 허릴 숙이며 내 귓가에 입을 대고 작게 속삭였다.
“그나저나 그 장비들은 어떻게 됨? 대검은 던져버렸지만.”
“음, 안타깝게도 텔레포트 당한 뒤에 잃어버렸답니다.”
사실은 나중에 방문한 오크 기사들에게 바구니를 넘겨줬다. 전쟁 군주의 명이라면서 왔는데, 그 아저씨가 그 유명한 오무혁이더라고? 전혀 몰랐는데 말이야. 어쨌든 오크들에게 나중에 받기로 했다.
그런 내 대꾸에 서예린은 딱하다는 듯이 혀를 찬다.
“마음에 두지 마셈. 어차피 정부에게 뜯겼을 것.”
“하, 하하하... 뭐, 그렇죠.”
허허, 나름 위로를 하려고 했던 건가? 진짜 의외구만. 그렇게 헛웃음을 짓고 있는데, 그녀는 불쑥 예상치도 못한 부분을 찔러왔다.
“그나저나 왜 그렇게 사람들을 살벌하게 봄?”
“...”
“음, 딱히 특이한 것도 없어 보이는데.”
명치를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질문에 난 침묵했고, 그런 내 반응에 서예린은 ‘자기가 뭐 잘못했나?’는 것 같은 살짝 찔끔한 표정으로 딴청을 부린다. 흐흐, 역시 티가 났나? 그렇게 잠시 어색한 침묵이 이어진 뒤-,
“...제가 꺼림칙한 존재라고 했죠?”
하도 답답한 마음에 난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런 내 질문에 서예린은 아이스크림을 핥던 걸 중지하곤 대꾸한다.
“음, 그랬음. 지금은 아님.”
“아뇨, 그게 맞는 것 같아요. 전 스스로 몰랐는데 말이에요. 이번 일을 겪으면서 확실히 알았어요.”
시선을 돌려 오른손을 응시했다. 겉보기엔 정상적인 몸뚱이, 하지만 알맹이인 정신과 영혼은 박살나고 썩어문드러졌다. 그 속알맹이를 응시하면서 난 내 실체를 고백했다.
“난 불완전한 인간입니다. 아니, 인간이 맞는 지도 모르겠어요.”
“...?”
“정확히 말하면 영혼. 그래, 영혼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 망가졌어요. 그 일부가 르피너스에 의해 부서지고, 그 부서진 빈자리를 르피너스의 선물이 메꾸고 있죠.”
이번 사태 때에서 정신을 잃었을 때 봤었던 ‘레벨업’의 실체가 떠올랐다.
결여되고 썩어문드러진 내 영혼과 그 결여된 그것을 채우는 ‘저주받은 자줏빛’, 그리고... 영혼도 아닌, 그저 영혼을 흉내 내는 그걸 받아들이면서 결여된 부분을 채우는 쾌감에 몸을 떨었던 비참한 자신을. 어느새 난 오른손을 꽈악 쥐고 있었다.
“그렇게 영혼이 불구가 된 대가로 난 겉만 번지르르한 지성과 힘을 얻었어요. 그래, 고작 그런 잡동사니와 내 영혼을 강제로 맞바꿔버렸죠.”
“...”
“솔직히, 이번에 그걸 깨닫고 미궁의 신을 떠올렸어요. 르피너스가 날 이 꼴로 만들었으니, 그들의 힘이라면... 그들을 숭배하면 어쩌면 내 영혼을 완전하게 만들어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
“솔직히 위로 올라갈 때, 닥터 크림슨이 유혹할 때 많이 혹했답니다? 아니, 한 번 넘어갔어요. 그 만큼, 난 절박했으니까요. 그렇게 배신해봤자 죽겠지만... 최소한 영혼이라고 불릴만한 그것을 온전하게 만들 수 있다면 그 어떤 댓가도 괜찮다고 생각했거든요. 흐, 흐히히히!”
그 비참한 때를 떠올리자 반사적으로 경쾌한 웃음이 나온다. 이런 것 고백해봤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텐데... 그냥 너무 울적해서 주절주절 거리고 싶다. 딱딱하게 굳은 서예린의 얼굴을 보며 난 빙긋 웃었다.
“근데, 전 신조차도 믿을 수 없더라고요.”
“...”
“그냥 정해진 대로 움직이는 기계가 기도해봤자 진짜 신을 섬기는 건 아닌 것처럼... 섬김 받을 가치도 없는 존재? 생명과 무생물의 사이? 관심도 안 가지시더라고. 닥터 크림슨도 당황하고. 그 더러운 기분에 바로 올라갔죠.”
“...”
“이젠 도대체 내가 뭔지도 모르겠어요. 그냥 인격을 흉내 내는 기계에 가까울까요? 로봇?”
쿵쾅거리는 가슴팍을 움켜쥐면서 난 시선을 돌려 공원을 산책하거나 다른 이들과 이야기 하고 있는 완전한 이들을 응시했다. 그리고, 고백했다.
“하지만, 마음은 아직 있어요. 그래서 저 사람들이 너무 질투가 납니다. 저 온전한 사람들이, 그냥 모든 사람들이 말이에요. 그 차이를 느낄 때마다 내 마음은 그 질투에 시시각각 썩어문드러지고 있죠.”
“...”
“물론, 아직까진 내 이성과 실낱같은 양심이 통제하고 있지만... 늦든 빠르든, 난 언젠가 내 광기에 떨어..우읍!”
갑작스럽게 입에 넣어진 차가움에 기겁하며 보니 서예린이 자기가 먹던 아이스크림콘을 내 입에 쑤셔넣었다. 그 화한 차가움에 정신이 좀 들었다.
...내가 갬성이 폭발했구나.
다른 사람 앞에서 이런 말을 하다니? 아니, 그녀가 설령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더라도 어디에서 날 도청하고 있을지 모르는데 이런 걸 중얼거리다니?! 더 이상 말하지 말라고 입에 물려준 건가. 콘을 잡고 입에서 떼어내자 그녀는 날 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네? 그래서라뇨?”
“나나 진아 죽일 거임?”
“미쳤어요?! 내가 왜요!”
가능하지도 않고, 그러지도 않을 거다. 만약, 진짜 광기에 잠식돼서 사람을 닥치는 대로 죽인다면... 지인을 죽이는 게 아니라 얼굴 모르는 타인을 죽이겠지. 최소한 그렇게 믿고 싶다. 그 정도까진 아니라고. 그렇게 내가 기겁하자-
“그럼 됐음.”
그녀는 한결 풀린 얼굴로 가볍게 고갤 끄덕이곤 내 어깨를 툭툭 쳤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서서 처음처럼 날 내려다보았다.
“꺼림칙해도, 괴물이여도, 내 괴물임. 그럼 됐음. 음, 친구... 좀 꺼림칙한 친구? 그 정도?”
“...허.”
“난, 말을 잘 못함. 위로, 별로. 근데, 내 경험에 꿀꿀할 땐 그냥 달콤한 먹는 게 최고임.”
“...”
“그거나 드셈.”
그리곤, 앞으로 걸어가면서 뒤돌아보지도 않고 쿨하게 손을 까닥여 작별 인사를 하는 서예린. 그렇게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난 멍하니 바라보다가-.
“하, 하하핳...”
웃었다. 일그러진 웃음이 아닌 진짜 웃음을.
친구라? 하하, 생각지도 못한 말이네? 물론, 쉽게 친구라면서 접근하는 사람도 많지만 저 깐깐한 예린이 말한 ‘친구’라는 의미는 좀 다를 거다. 드디어... 나도 친구가 생긴 건가? 그래, 이건 좀 기쁘네. 그렇게 살짝 가벼워진 마음으로 그녀가 건넨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었는데...
“...거 취향하곤.”
이거, 민트초코네.
날 멕이는 건... 아니겠지? 우리 친구 맞는 거지? 그치? 그렇게 기괴한 치약맛 아이스크림을 보며 내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뒤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서예린? 아니다. 2m가량 되는 커다란 체격에 근육질의 남성, 사자 갈기 같은 머리칼과 얼굴에 나 있는 상처는...
내가 고갤 돌려 바라보자 그는 환하게 웃었다.
“하, 한새벽 생도 아닌가?”
2.
“김가트 선생님.”
우리의 김가트 양반이다. 그나저나 소름끼치는 핏빛 갑주를 입고 있었을 때는 진중한 분위기에 말도 걸기 힘들었데, 캔 커피를 한 손에 쥔 지금 묘하게 허당 같네. 똑같은 사람인데 말이야. 그런 내 대꾸에 김가트 선생은 내 등짝을 ‘팡! 팡!’ 두드린다.
“하하, 그래 잘 지냈나?”
“에게게겍... 살살 좀.”
이번 사태 때 레벨 업을 많이 해서 신체 능력이 이전과는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많이 올랐는데, 어찌나 세게 두드리는 지 몸이 휘청거린다. 윽, 서예린에게 받은 아이스크림을 엎을 뻔했으면 말 다했지. 그런 내 말에 김가트 양반은 살짝 미안하단 표정을 지으며 옆에 앉는다.
“하하, 미안하네! 워낙 반가워서 그만... 그나저나 이곳에서 안 보여서 많이 걱정했는데 이렇게 만나네? 좀 조사가 길어졌나봐?”
“어, 선생님도 조사 받으셨나요?”
“그럼! 당연히 받았지. 사실, 아직도 다 끝나지 않았단다! 거참, 물어보는 게 얼마나 많은지!”
고갤 끄덕이는 김가트 양반, 그는 자기가 받았던 조사들에 대해서 미주알고주알 떠드는데 너무 신나하는 기색이기에 난 허릴 숙이며 속삭였다.
“어. 근데, 너무 신나하시는 거 아닌가요. 사람들 눈도 있는데...”
“아,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지 못했군. 미안하네. 너무 기뻐서 말이야.”
내 지적에 실례했다는 듯이 ‘큼! 큼!’ 거리며 헛기침을 하는 김가트. 이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 아무렇지도 않은 척들 하고 있지만, 그 미친 유혈의 도살장에서 간신히 살아남았는데 정상일 리가 없다. 그런 이들 사이에서 김가트 양반의 반응은 너무 눈에 띄지.
하지만, 그는 활짝 웃으며 내게 대꾸한다.
“그래도 기쁘지 않을 수가 없다네. 칸께서 나를 용서해주셨으니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