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유혈이 지나간 뒤 >
그 말을 들으니 피라미드를 오를 때 닥터 크림슨이 내게 속삭였던 말이 떠올랐다.
‘배교자도 함께 있구나.’라고 했었지? 생각해보니 일행 중 배교자라고 불릴 만한 사람은... 김가트 선생밖에 없네? 이번 사건이 벌어질 때, 처음 봤던 이상 현상은 저 양반의 머리 위에 나타난 보이지 않는 핏빛 눈알이었고.
“어, 그러고 보니 배교자라고 닥터 크림슨이 구시렁거렸던 게...”
“맞다. 내가 배교자지. 후후, 이젠 완전히 자유의 몸이지만.”
그렇게 김가트 양반은 대답하면서 보란 듯이 양팔을 벌려 가슴을 드러냈다.
“아, 그러고 보니 나도 서강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내 머리 위에서 ‘핏빛 환영’을 보았다지? 아, 다른 사람에겐 안 말했으니까 걱정마라! 서강 녀석도 날 설득하기 위해서 꺼낸 말이었고.”
“...네, 뭐 그러면 상관없죠.”
“그나저나 지금 나는 어떤가? 뭔가 이상함이 느껴지나?”
생기로 반짝이는 김가트 양반의 눈빛, 그 부담스러운 눈빛에 난 그의 아우라를 살펴봤다. 깨끗하다. 그 어떤 신의 흔적도 없다. 한 발 더 나아가서 <무한의 눈>을 사용해봤다. 뇌, 시냅스, 신경, 육체... 극도로 단련되었다는 것을 빼면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음, 이젠 아무것도 느껴지질 않네요.”
“하하, 그렇지? 사실 알고 있었어. 내 영혼을 주시하고 있었던 신의 시선이 이제 용서했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거든.”
신나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음을 흘리는 김가트, 그 대꾸에 난 지금까지 봤었던 ‘칸의 신도’들의 모습이 떠올렸다. 그리고, 이번에 훔쳐봤었던 ‘유혈의 신’의 진정한 모습도. 그것을 의식한 순간, 난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저기, 선생님.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음, 뭐가 궁금한가? 수업에 관한 거?”
“...어떻게 칸을 배교할 수 있었나요?”
칸의 신도들은 하나 같이 정상이 아니었다.
살육에 완전히 돌아버린 모습, 지금 생각해보니 신도의 영혼 또한 살짝 ‘변질’되는 것 같았다. 김가트 선생도 예전엔 그런 괴물이었다는 건데... 지금의 그는 완전하고 그 어떤 흔적도 보이질 않는다.
내 질문에 김가트가 웃음을 멈추고 날 바라보는 가운데, 난 <메모창>을 띄운 후 ‘르피너스의 장난감’ 파일을 열고 ‘칸의 신도’에 관한 묘사를 느릿하게 읽어나갔다.
“칸의 선택을 받은 존재들의 두개골은 여러 개의 가느다란 인공적인 붉은 광채의 신경망들에 의해 찢겨져 있었다. 칸의 섬기면서 얻게 되는 이 ‘에너지 기생체’는 확인 결과 칸의 신도들이 가지는 불안정한 감정의 원인이다. 이 기생체는 매우 특별한 마력을 띠고 있다.”
“...”
“이 ‘붉은 광채의 촉수’는 척추와 연수의 일부기능을 대체해 실험체의 신체 능력을 폭발적으로 상승시켰지만, 대뇌의 변연 피질과 섬피질을 변질시킨 것과 더불어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을 완전히 손상시켜 버렸다.”
...
“...점점 힘에 노출되어 변이할수록 모든 것이 피실험체에게 고통을 불러일으킨다.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 숨 쉬는 것. 그것이 가진 유일한 휴식은 분노와 공격성이 만들어내는 화학물질로부터 얻는 재설계된 신경학적 기쁨일 뿐.
“...”
“말해주세요. 이런 변이들을 겪으셨을 텐데... 그리고 영혼 또한 변질되었을 텐데... 어떻게 지금처럼 멀쩡하죠?”
이렇게 신에 의해 변질되었던 존재가 지금처럼 정상이 되다니... 그럼 똑같이 신에 의해 망가진 나도 언젠간 ‘정상’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내 절박한 시선을 느낀 것인지, 그는 작게 한숨을 내뱉곤 굳게 닫혀있었던 입을 열었다.
“그런 건 어디서 본 거냐? 실험체라니...”
“죄송합니다. 설명하기가 조금... 곤란해요. 말할 수 없다는 게 아니라, 그냥 출처 없이 머릿속에 갑자기 떠오른 거라서.”
“...그래, 미쳐 날뛰는 혼돈께서 네게 장난을 쳤다고 했었지? 그래서 이번에 닥친 일을 예견할 수 있었고. 이해하마. 하지만, 그거 누군가 들었으면 잡혀갈 수도 있었어.”
진지한 얼굴로 충고하는 김가트. 그래,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어쩌면 그만큼 절박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어요.”
“절박해?”
고갤 끄덕이며 나는 김가트를 향해 내 사정을 고백했다.
“네, 르피너스의 손길에 의해 전... 괴물이 되고 있거든요. 칸의 신도와도 비슷한 괴물이. 그래서 그 위험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묻고 싶었습니다.”
“...”
“믿을 수가 없어요. 어떻게 이렇게 정상이죠? 육체적으로 괴물이 되고, 그리고 영혼은... 장담할 수 있어요. 미궁의 신을 목도하는 순간부터 변질돼요. 그런데, 당신은... 아니, 선생님은 완전히 정상이네요. 부러울 정도로.”
“하긴, 칸의 신도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괴물이나 다름없지. 그 때문에 지상에 올라와도 전향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갤 끄덕이는 김가트, 이내 그는 이전까지의 살짝 경박해 보이던 표정과 언행을 완전히 지우고 진지한 얼굴로 입을 뗐다.
“나도 한 때 그랬다. ‘붉은 사자’, ‘유혈의 짐승 카르트람’. 이게 미궁에서 내가 불리던 별명이다. 그래, 네 말이 전부 맞아. 그 때의 나는... 그저 살육에 미쳐있었다.”
“...”
“솔직히 말하면 기억도 잘 안 나는군. 그 때의 기억들은 안개가 낀 것 마냥 뿌옇고, 뒤죽박죽에, 끔찍한 고통과, Tv의 지직지직 거리는 것 같은 잡음만이 가득해. 그나마 선명한 얼마 안 되는 것들은 전부 살육을 저지를 때뿐이고.”
“어떻게 거기서 빠져나온 거죠? 그리고, 어떻게 회복한 거죠?”
내 질문에 김가트는 짧게 대꾸했다.
“결심했으니까.”
“...결심이요?”
“그래, 솔직히 고백하자면... 난 처음부터 유혈의 신을 섬기고 싶지 않았단다.”
시선을 돌린 그는 인공 공원을 돌아다니는 수많은 사람들을 응시하며 들고 있는 캔 커피를 홀짝이곤 담담히 말을 이어나갔다.
“그분을 섬기기 전의 난 나약하고 겁쟁이였거든. 그저 살기 위해서, 그리고 그분께서 날 받아주셨기에 섬긴 거야.”
“...”
“후후, 아이러니하지. 광전사가 되겠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용감한 놈들은 죄다 먼저 죽고, 나 같은 겁쟁이가 끝까지 살아남아 그분의 총애를 받을 정도로 성장하다니 말이야.”
다시 한 번 씁쓸하게 웃은 후, 김가트는 날 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 희미한 겁쟁이의 마음가짐은 한 켠에 남아있었단다. 그리고, 지상에 올라오면서 선택이 가능해지자... 난 그분의 아늑한 품 안에서 벗어났지.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 때, 그런 대견한 결정을 내렸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단다. 말 그대로 반쯤 미쳐있었으니까.”
“...”
“그리고, 여태까지 살아온 생활방식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혼자서 자립하는 것은 쉽지 않았지. 몸도 마음도 정상이 아니었어. 병신이었다. 의사 양반의 말로는 내 뇌의 일부분이 사라졌다고 하더군. 마력의 힘으로 숨이 붙어있고 움직이긴 했지만 말이다.”
“음...”
“간신히 몸을 움직이긴 했지만 시시각각 ‘마비’, ‘혼란’, ‘착란’, ‘탈진’ 증세가 연이어 날 덮쳤지.”
고통스러웠던 기억인 듯, 살짝 얼굴을 찡그리는 김가트. 그는 이내 고갤 휘휘 젓고는 고갤 들어 하늘, 인공 천장을 바라보았다.
“처음엔 후회했어. 이렇게 발악해봤자 결코 예전으론 돌아가지 못할 거란 생각도 했었지. 그에 울분에 차서 지상 사람들에게 못된 짓도 하려고 했고. 실제로 몇몇 이들은 나처럼 돌아오지 못했다. 절망하고 광분하다가... 죽었지.”
“...”
“하지만, 난 포기하지 않았다.”
다 마신 캔을 가볍게 구긴 뒤, 김가트는 고갤 돌려 날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절망적이었지만,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러한 ‘절망’은 내게 익숙한 것이었거든. 내가 나약했을 때 항상 마주치던 것이었어. 그 절망 속에서 광전사가 되었고 또 칸의 총애를 받을 정도의 전사가 되었다.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한 번 깬 경험’이 있기에 포기하지 않았지.”
“그럼...?”
혹시나 하는 말에 대꾸하자 김가트는 고갤 끄덕였다.
“그래, 비법 같은 건 없단다. 그냥 꾸준히 바깥사람들의 말대로 재활한 게 다야. 언젠간 회복이 될 거라는 믿음을 가진 채로.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나니, 점점 회복이 되긴 하더구나. 신체의 발작도 줄어들고, 영혼 또한 천천히 회복되었지.”
“...”
“자랑은 아니지만 전 세계의 ‘미궁 귀화자’ 중에서 내가 제일 첫 번째로 재활에 성공한 칸의 신도란다. 내가 한 번 벗어나는데 성공하니 그 전까지 포기하던 이들도 서서히 날 보며 바꿔나갔지. 바깥사람들 말로는 마력이 의지에 감응한 것이라고 하는데... 하하, 표정을 보아하니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것 같구나.”
내 얼굴에 실망이 드러난 것인 지 미안하다는 듯이 웃는 김가트, 그에 난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네. 기대했는데 별 다른 비법이 없다니 좀 실망이네요.”
“그렇긴 하지. 어쨌든,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포기하지 마라.’ 이게 전부란다. 물론, 네가 찾는 해답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확실해. 없다고 포기하면 일말의 가능성조차도 사라진다는 거야.”
“...”
“힘내라.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 말뿐이구나.”
어깨를 툭툭 두드린 그는 이내 ‘마저 조사 받으러 이만 가봐야겠다.’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렇게 그가 건물 한 쪽으로 사라진 뒤, 난 멍하니 앉아 손을 타고 줄줄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을 핥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내 망가진 영혼을 수복하는 건... 김가트의 회복보다 더 힘든 일일 거다.
그래, 난이도가 틀리겠지. 영혼의 회복은 ‘기적’과도 같은 확률일 거야. 하지만, 김가트의 말에도 나름 들을 만한 것이 있었다. 포기하지 말라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이 세상에는 ‘기적’이 널려있었다.
사흘 전에 보지 않았던가? 시간을 되돌려 부활하는 ‘강철의 거인’과 이미 죽은 수백 명의 오크들을 되살려낸 ‘오무혁’을. 그럼, 영혼을 치료할 방법도 어딘가에 있을 거다. 그래. 사람이 죽은 것도 돌아오는 세상인데 영혼을 수복하는 것도 있을 만하지!
“후, 후흐흐흐. 그래, 힘내야죠!”
“[그래봤자 행복회로지만. 흐흐흫!]”
씩씩하게 고갤 끄덕이며 다짐하자, 내 입을 빌려 대꾸하는 심장의 파편, 그에 난 지랄하지 말라는 뜻에서 억지로 민트초코를 입에 우겨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 병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3.
서예린에게 받은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난 뒤, 난 다시 병실로 향했다.
배정받은 병실 앞, 혼자 쓰는 병실인데 문 앞에서 서니 약간 실랑이 소리가 들렸다. <눈>을 움직여 보니 안에 손님이 있었다. 휠체어에 앉아있는 우리의 싸장님과 그 뒤에서 휠체어 손잡이를 잡고 있는 정한솔 선생이 보인다. 이야! 우리 싸장님 살아있었구나!
반가움에 난 곧바로 활짝 웃으며 문을 열었다.
“싸장님! 살아계셨네요!”
“오! 도비야! 살아있었구나!”
내가 누워있던 병원 침대를 보며 인상을 찌푸리던 싸장님은 내가 들어오자 나처럼 활짝 웃으며 반색한다. 그 모습에 곧바로 양 팔을 벌리며 싸장님에게 달려들어 안아주려고 했지만...
“하, 하하하. 싸장님, 그... 그건?”
싸장님이 기다렸다는 듯이 가운 주머니에서 오른손을 넣어 꺼내는 ‘검은색 물체’를 보곤 난 엉거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에 싸장님은 생글생글 웃으며 그 꺼낸 물체를 쓰다듬는다.
“콜트 파이슨(Colt Python), 콜트사에서 나온 명품 리볼버지. 게다가 건 스미스에게서 개조도 받았단다!”
내 질문에 친절히 대답해주는 싸장님. 아니, 권총의 종류 같은 걸 물어본 게 아닌데... 순간, 미르 에데 사이트에서 봤던 ‘한방 치료’에 대한 썰이 떠오른다.
...하도 일 못한다고 알바생을 권총으로 쐈다고 했지?
그에 내가 식은땀을 흘리며 뒷걸음질 치는 가운데, 싸장님은 약실을 열고 왼쪽 주머니에서 꺼낸 총알을 장전하며 자상한 말투로 속삭인다.
“무서워 말렴. 이건 ‘치료제’란다. 내 경험상 사실이더라고! 이걸 맞으면 ‘나쁜 애’가 치료가 되더라니까?!”
“노...농담이죠? 여기 공공 기관이라고요? 사람들도 있고!”
“걱정마렴. 이 권총, 이래보여도 마법 장비거든! 별 다른 기능은 없고, 그냥 총성을 대폭 줄여주지.”
약실에 총알을 다 채워 넣고 ‘찰칵!’ 소리와 함께 닫는 싸장님, 이어서 내 가슴팍에 권총을 겨누며 생긋 웃으신다.
“그럼, 치료받을 준비됐지? 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