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유혈이 지나간 뒤 >
싸장님의 인간불신이 괜히 생긴 게 아니었구만? 그나저나 ‘한방치료’에 그러한 사이드 스토리가 있는 줄은 몰랐다. 어쨌든 싸장님의 충고에 고갤 끄덕이고 있는데... 문득, 싸장님에게 진 빚이 생각났다. 해고됐으니까 그럼 그 빚은 그냥 안 갚는 건가?
“에, 근데요 싸장님. 저 해고되면 빚은 어떻게 할까요?”
“아, 그건 달아놓자.”
“냅, 대충 5억 정도로...”
“참고로 돈으론 안 받는다.”
내 대답을 끊으며 말하는 싸장님, 그 말에 내가 눈을 끔뻑이자 싸장님은 사악하게 웃는다.
“지금 네 능력 정도면 현금 5억 정도는 금방 벌지. 거금이긴 한데, 그 정도의 돈은 내겐 푼돈이야! 그러니 니 인생의 4년 어치의 가치를 가진 걸가지고 오렴. 그걸로 퉁치자.”
“끄응, 더 난감한데요...”
“꼽냐? 그래도 어쩔 건데, 임마! 그 대신에 언제 갚으란 말은 안 할 테니까 고민해보렴. 그럼 난 간다. 빨리, 제롬 그 양반에게 전화해서 이번 결정에 대해 조율해봐야지. 한솔아, 가자!”
싸장님의 재촉에 정한솔 선생은 한숨을 내쉬며 내게 눈인사 하곤 싸장님의 휠체어를 밀며 밖으로 나서려고 할 때-.
“잠깐만요!”
난 재빨리 싸장님을 불러 세웠다. 그에 싸장님의 휠체어를 밀고 있는 정한솔 선생이 날 돌아보고 싸장님도 고갤 돌린다. 직장인으로 따지면 퇴사하는 건데, 이렇게 허무하게 헤어지면 그렇지. 그러니까...
“싸장님, 그 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싸장님을 향해 진심을 담아 허릴 굽혔다. 90도 폴더인사, 우리 싸장님 덕분에 마법도 배우고 알바도 하고 깜빵도 안 가고... 정말 여기서 날 가장 많이 도와준 은인이셨다. 물론, 가장 많이 두들겨 팬 사람이기도 하지만 말이지.
그런 내 모습에 싸장님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피식 웃는다.
“하, 그래도 빚은 안 깎아준다~ 그러니까 다음에...”
“근데, 이것도 따지고 보면 퇴사니까 ‘퇴직금’은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
“딴 건 안 바라고 마법 좀 더 가르쳐주시면... 헤헤! 이번에 <독숨결 구체>만으론 너무 힘들더라고요!”
이번 사태 때 느꼈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공격 마법’은 너무 한정되었다는 것을. 개인 공격기가 <독숨결 구체>랑 <독침>이 끝이니 말 다했지. 그것도 위계가 너무 낮아서 약하고. 좀 파워업이 필요해! 우리 싸장님의 마법이라면...
그렇게 노동자의 정당한 요구에 싸장님은 부드러운 웃음을 흘리며... 가운 호주머니에서 권총과 총알을 다시 꺼낸다?
“말리지 마라.”
“그래, 네 말이 맞아. 저건 폭력이 좀 필요하네.”
싸장님의 말과 그에 대꾸하는 정한솔 선생, 그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난 살짝 식은땀을 흘렸다. 아니, 그래도... 정당한 요구를 한 것뿐인데?
“저, 저기요? 싸장님? 아니 그게...”
“넌 ‘한방치료’론 부족하구나.”
“...”
“‘연발치료’가 필요하겠어.”
그와 함께 싸장님은 활짝 웃는 얼굴로 다시 장전한 리볼버를 내게 겨눴다.
5.
6발 총탄이 내 몸을 강타한 뒤, 싸장님은 바닥에 꿈틀거리는 날 향해 ‘내일, 내가 입원한 방에 쳐 오렴!’하고 정한솔 선생과 나가셨다.
아니, 그냥 마법 가르쳐달라고 하기엔 너무 속 보여서 퇴직금이랑 엮어서 요청했는데 왜 저러시지. 심지어 이번엔 포션도 안 주셨어. 어찌됐든 난 침대에 드러누운 채 고민에 빠졌다.
생각지도 않게 알바에서 잘렸다.
그리 나쁜 이야기는 아니다. 싸장님이 내게 베푼 여러 가지 것들 때문에 ‘의리’로 박봉 받고 일했지만, 지금 난 최하 억 단위 연봉을 받을 능력자니까. 만들어진 물질이 독성을 띄게 된다는 ‘약간 사소한 부작용’이 있지만, <연금술> 소요는 먹는 포션 쪽만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흐음, 함부로 실력을 내보이기는 그런데 말이죠.”
오늘 들려준 싸장님의 사연, 그건 내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이 <눈>에 관한 능력이 들키면 이용하려는 놈들에게 험한 꼴을 볼 게 뻔하다. 이번 일로 많이 성장했지만 그래도 난 아직 개인에 무력 또한 좀 약하니까 조심해야...
아니, 이미 늦었나?
생각해보니 이번 사태 때, 좀 많은 어그로를 끈 게 생각나서 마음에 걸린다. 피라미드에 잠입하고, 또 칸의 신도를 죽이다니? 게다가 그 과정에서 ‘악덕 경찰’에게 내가 서강 아저씨에게 경고한 걸 들켰지. 심문할 때, 그것에 관해서도 물어보더라.
“끄응...”
뭐, 그냥 그런 느낌을 받아서 말한 것뿐이라고 해서 넘어가긴 했다만... 이미 내가 봐도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 경찰 쪽에선 내게 뭔가 있다는 것을 파악했을 게 뻔하다. 설마 나도 납치당해서 뭐가 있나 검사 당하려나?
“...에휴, 어떻게든 되겠죠! 설마 정부가 납치하진 않겠지!”
이내 고갤 흔들며 걱정을 털어냈다. 대한민국 정부쪽에서나 나에 대해 좀 인지했지 다른 이들은 모르니까 괜찮을 거야! 무엇보다 이미 저질렀는걸? 이런 쓸데없는 불안은 그만하고 현실적인 기숙사비하고 식비를 어떻게 벌지를 생각...
아니, 잠깐만? 생각해보니 미르도 휴학이겠네?
강철거인이 날뛰면서 생긴 피해, 그리고 후유증에 돌아버린 생도들... 그걸 복구하는 건 하루 이틀로는 불가능하다. 꽤 오래 걸릴 걸? 이거, 지금 보니 알바가 문제가 아니었다. 최소 반 년 간의 일정공백, 그 동안 뭐하냐?
“흐음...”
상체를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게임 시스템의 <메모장>을 켜곤 진지하게 생각해봤다. 흐음, 앞으로 뭘 해야 할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영혼의 수복’
이번 사태를 통해 알게 된 내 영혼의 비밀, 난 ‘불완전한 영혼’을 가졌고 그로 인한 심각한 ‘결여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걸 극복하고 이전의 ‘완전한 영혼’으로 거듭나는 것, 이건 내 ‘궁극적인 목표’였다. ‘어떻게 벌어먹고 살 것인가?’보다 이게 훨씬 더 중요하다.
나로선 다행히도, 이 세상에는 영혼에 관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었다.
마력이 등장하면서 ‘유령 계열’의 괴물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런 영혼과 시체를 다루는 마법 <강령술> 또한 등장했으니까. 그 자료에 접근하는 것은 굉장히 힘들다만 어찌되었든 간에 있다는 게 중요하다. 내가 가진 <눈>의 힘이라면 연구 또한 다른 이들보다 수월할 테지.
“좋아요.”
<메모장>에 영혼의 수복이라 쓰고 그 아래에 ‘1. 영혼 관련 마법 연구하기’라고 적었다. 그렇게 쓰고 다음으로 넘어가려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목차에 2.를 쓰곤 ‘황금 자두’를 써넣었다.
황금 자두
르피너스의 장난감에 나오는 설명대로라면 르피너스가 ‘건방진 하이 엘프’들의 영육으로 만들어낸 과실, 소설에서 나온 그 효과에 대한 묘사는 초월적이었다. 질량 보존 법칙과 엔트로피를 초월해 모든 신체적 피해와 돌연변이 피해를 회복시켜준다고.
...어쩌면 ‘부서진 영혼’도 치료해줄지 몰라.
일단, 복용한 사람을 <눈>으로 관찰하고 황금 자두가 정확히 어떤 효과를 가지는지 확인을 해봐야겠다. 그리고, 진짜 영혼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해야지.
아니, 근데 남아 있는 게 있나?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황금 자두와 관련된 내용을 본 적이 있는데, 황금 자두는 르피너스의 장난감 주인공이 뿌린 이후로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귀물(貴物)이다. 아직까지도 조 단위의 현상금까지 걸고 계속 찾고 있는 엘프들이 있었다.
...아니, 잠시만.
문든, 떠오른 생각에 메모장 중 <르피너스의 장난감>을 켜고 황금 자두에 관한 내용을 검색해봤다.
주인공이 자기를 엿 먹인 인간들을 찾는다고 황금 자두를 보상으로 걸고, 그 효능을 보여준다고 방송국에서 70대 노인 노숙자 ‘신명진’에게 먹였다고 나온다. 추가로 현상금이 걸린 인간을 데려와서 한국의 사이비 종교 단체 하나가 획득했다고 나오고.
여기까지는 이곳의 사람들도 아는 내용이지만...
“루스&루칼 남매에게 4개의 황금 자두를 선물함.”
소설엔 못 미더운 의동생 ‘데몬 스폰(하프 데몬)’들에게 주인공이 4개의 황금 자두를 상비약으로 줬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건,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내용이다. 흠, 어떻게 이 두 사람을 찾아서 딜을 걸면 가능할지도? 황금 자두 아래에 ‘루스&루칼 4개’를 적었다.
...그나저나 얘네들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으려나?
‘루스&루칼’이란 이름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트라진이란 악마 대장장이에서 도망친 데몬 스폰들, 소설 속 묘사론 대단한 장비 제작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실제로 주인공에게 강력한 아티팩트 무구도 만들어줬고. 지금까진 별 생각 없었다만 궁금하네.
뭐, 영종도에 비밀 은거지를 마련했다고 했으니까... 추적해보면 찾을 수 있겠지.
그 뒤, 또 뭐가 있나 생각했다. 영혼 수복에 관한 건, 더 이상 떠오르지 않네. 그럼 남은 건 먹고 살기 위한 돈을 버는 것이랑, 추가로...
-덜컥!
“야!!!”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병실문이 벌컥 요란하게 열리며 누군가 소리를 지른다. 그 익숙한 목소리에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돌아보니-.
“엥? 아가씨?”
하얀색의 미르 생도복을 입은 마빡 아가씨가 있었다.
그 뒤에는 아까 전에 봤던 서예린이 특유의 뚱한 표정으로 서 있었고. 내가 대꾸하자 환하게 웃은 아가씨는 반가움이 가득 담긴 눈으로 내게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너 이 새끼! 살아 있었구나!! 진짜 너 죽은 줄 알았다고!”
“케, 케흑! 아, 하하하...”
내가 반응하기도 전에 달려들어 내 머리를 휘어잡고 거침없이 헤드록을 건다.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과격한 스킨쉽, 그 과정에서 아가씨의 가슴이 고스란히 내 뺨에 닿지만 업계 포상이란 생각은 안 들고 그냥 괴로워...
내가 항복 표시로 손을 들어 올리자 아가씨는 헤드락을 풀곤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는다.
“야, 너 거기서 어떻게 살아남았냐! 나, 너 죽은 줄 알았어! 예린이한테서 너 만났다고 말 들었을 땐 믿기지 않았다니까?!”
“음, 뭐. 꽤나 힘든 여정이었죠.”
“말해봐!”
탁자의 의자를 가져와 앉고 두 눈을 반짝이는 마빡 아가씨,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난 쓰게 웃으며 도중에 낙오된 뒤에 겪었던 썰을 풀었다. 물론, 심문에 끌려가서 했던 그 내용대로.
“...그러니까, 그 지옥 같은 고통을 견뎌내고 움직였다고? 그러다가 사제에게 잡혔고?”
“네.”
“아니, 그게 말이 돼!? 그건 버틸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심장마비로 죽을 텐데.”
정색하며 말하는 아가씨, 그에 난 순순히 고갤 끄덕였다.
“확실히, 지옥 같은 고통이었죠. 하지만, 신기하게 버틸 수 있더라고요. 여기로 자리를 옮기기 전에 조사를 좀 받았는데, 심문하던 사람은 ‘마력 돌연변이’로 인한 거라고 생각하더라고요.”
“흐음, 확실히. 마력 돌연변이는 알려지지 않은 게 많지.”
“그나저나 진아씨는 찢어지고 나서 뭐했어요?”
“뭐, 난 평범해. 중앙 행정처에서 방어했어.”
이어서 내가 질문하자 마빡 아가씨는 어깰 으쓱이며 자신의 썰을 풀었다. 대충, 미르 중앙 행정처에서 이종족 아이들과 함께 밀려드는 괴물의 방어를 도왔다고 했다. 자동차를 움직여서 바리케이트를 만들고 밀려오는 괴물들을 막았다고. 그리고...
“에, 혜영씨가 부활했다고요?”
“그래! 강철거인의 피눈물에 직격당해서 팔만 남았어! 그래서 그 시신이라도 수습하고 차에 탔는데... 와! 하늘이 황금빛으로 뒤덮이며 빛기둥이 떨어지더라니까! 내가 탄 자동차 옆좌석이 빛나서 식겁했는데, 그 빛무리 속에서 혜영이가 온전한 부활했어.”
“허...”
오혜영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흠, 하프 오크도 부활하는 구나. 어쨌거나 그 덕분에 우리 ‘이종족 문화 교류부’ 아이들은 전부 무사하다고 한다. 좋네, 좋아. 그렇게 아이들이 무사하단 소식을 듣고 고갤 끄덕였는데... 문득, 아가씨의 복장에 눈이 갔다.
“근데, 진아씨는 왜 생도복을 입고 있어요? 벌써 나가나요?”
“아냐, 사진을 찍으려고 해서 입은 거야.”
“사진?”
“일종의 프로파간다라고 해야 하나? 국정원 쪽에서 영웅 만들기에 들어선 거지. 워낙 피해가 많으니까 분위기 띄우겠다고.”
팔짱을 긴 채, 씁쓸한 표정으로 웃는 마빡 아가씨. 허, 프로파간다라... 하긴, 원래 위기 상황이나 비극에는 영웅을 만드는 게 국룰이긴 하지. 그래야 안 그래도 가라앉은 분위기가 조금이나마 나아지니까. 어쨌든 고갤 주억이던 아가씨는 활짝 웃는다.
“뭐, 나와 기업으로서도 나쁘지 않아서 동의했지. 생도복 입고 사진 찍고 인터뷰 중이었는데, 예린이가 너 만났다고 해서 도중에 온 거야! 아, 수다 떠느라 깜빡했다! 아저씨! 들어오세요!”
아가씨가 말하자 병실문 앞에서 커다란 필름 카메라와 카메라용 플래시를 들고 있는 남자가 들어온다. 그 사진사를 향해 아가씨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제가 말한 놈이 이 녀석이에요.’라고 하곤, 병실 테이블에 다가가 의자를 가져오더니 억지로 날 거기에 앉힌다.
“자, 자리에 니가 가장 작으니까 의자에 앉고, 오른쪽엔 나, 그리고 왼쪽엔 예린이가 서.”
“...어? 저도 찍는 거예요?”
“당연히 찍지! 너도 기사에 나올 거니까.”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내가 감고 있던 두 눈을 휘둥그레 뜨자, 아가씨는 뭘 그렇게 놀라냐는 듯이 옆구리를 팔꿈치로 찌르며 씨익 웃는다.
“우리가 사람들 구할 때, 스마트폰으로 그걸 촬영한 사람이 있었어. 그걸 인터넷에 올렸더라. 덕분에 쫙 퍼졌고. 그런 김에 너도 인터뷰해야지.”
“에엑?”
“게다가 너도 피라미드에서 활약했다면서?! 그런데 널 빼고 영웅 기사를 내? 말이 안 되지!”
아니, 이미 정부에 알려졌다고는 해도 이렇게 주목 받는 건 싫은데... 안 그래도 좀 조용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난 식은땀을 흘리며 사양하겠다는 의미로 손사래 쳤다.
“아, 아니! 전 괜찮아요. 두 분에 비하면 진짜 별것 아니라서! 두 분만 하는 게...”
“새끼! 엄살은! 너 아니면 누가 찍어? 아저씨 찍어요!”
“아, 아니... 저 진짜 찍기 싫어요! 멈춰!”
일어서려는 내 모습에 강하게 팔꿈치로 어깰 누르며 소리치는 아가씨, 그와 함께 내가 어떻게 하기도 전에 플래시에서 섬광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