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125화 (125/350)

< 막간. 핏자국을 태우는 불길 >

1.

유혈이 끝났음에도 송파구는 여전히 혼돈에 휩싸여 있었다.

거의 12,000명가량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최악의 대사태, 게다가 생존자들은 치료 명목으로 뉴 송파구 지역에 가두면서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나마 시신 수습이라도 잘 되면 낫겠지만 시신 수습은 더디고 더뎠다.

‘소환된 야만인들’은 사람을 먹이로 삼는 식인종이었다.

당연히, 남아있는 시신의 상태가 정상일 리 없다. 토막 나고, 구워지고, 으깨지고... 그렇게 박살난 시신이라도 건지면 다행이고 대부분은 시신도 찾을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정확한 사망자의 신원과 집계도 못했고, 일주일이나 지났음에도 송파구는 가족을 찾는 유족들의 울부짖음으로 가득했다.

이것만으로도 정부 측으로선 대처하기 난감했지만, 설상가상으로 수많은 조문행렬 또한 이어졌다.

‘기적’을 일으킨 오무혁, 그런 그를 추모하기 위한 이들이 전 세계에서 몰려왔다. 대부분 미국에서 성공한 자본가 오크와 중산층 오크들의 순례, 그들 외에도 이번 사태를 연구하려고 방문한 연구원들과 순수 조문행렬이 송파구에 이어졌다.

그로 인해 발생되는 대혼란

처음에 한국 정부는 유족과 추모객들의 방문을 싸그리 막아버리려고 했지만, 겉으로나마 ‘민주 정부’라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는 만큼 민심을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정권을 향한 더 큰 반발과 불만이 예상된다는 판단이 떨어지자 정부는 결국 혼란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다른 의도를 가진 이들’ 또한 그러한 혼란 속에 섞여 한국을 방문했다.

“이게 그 시신인가요?”

“예, 지문과 치열, 그리고 피의 혈액형까지 확인됐습니다.”

“으흠...”

송파구에서 멀리 떨어진 인천 외곽의 한 컨테이너 창고, 회색의 공장 작업복을 입은 후덕한 인상의 중년 남성은 요원들이 가져온 시신을 확인했다. 수술대 위에 올려진 6개의 아이스박스, 그 안에 따로 담겨진 머리, 상체, 하체가 각각 세로로 쪼개진 건장한 체격의 시체.

시신의 낯짝을 보며 그는 입을 열었다.

“빼돌리면서 돌발 상황은 없었습니까?”

“없었습니다, 부장님.”

“확실한가요?”

후덕하게 웃으며 물어보는 부장, 마력 각성자도 아닌 평범한 일반인에 불과했지만 그 조그만 눈이 빛나자 요원은 살짝 긴장하며 고갤 끄덕였다.

“예, 시신을 지키는 경계 병력이 있었지만 마력 각성자가 아니었고 그 덕분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잠입할 수 있었습니다. 시신회수 후, 빠져나가면서 마력을 뒤섞은 대량의 혈액을 그 자리에 흘려놨습니다. 아마, 나중에 들켜도 시신이 핏물로 녹아내린 것으로 판단할 겁니다.”

“흠, 그럼 꼬리를 끊을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본토에서 온 요원의 답변에 근무복 차림의 중년 남자는 고갤 주억였다.

이 시신을 빼돌리기 위해서 힘들게 만든 인맥을 사용했다. 대충, 이번 사태에 재수 없게 휘말려서 자식이 죽은 고위 공산당원이 부탁한 걸로 꾸며서 25만 위안(5억원 가량)의 자금을 선물했는데 현장 요원의 말을 들어보니 그 끈을 계속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유혈의 거인’의 파편은 더 구하지 못했습니까?”

“안타깝지만... 그쪽은 너무 경계가 강했습니다. 모이자마자 국정원 쪽에 아예 이송되었다더군요.”

“흐음, 좋습니다. 그건 제가 끄나풀들을 풀어서 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것’부터 조립합시다.”

부장이라 불린 중년남자의 말에 요원은 고무장갑을 끼고 가방에서 조각난 시신을 조심스럽게 꺼내 맞춘다. 반대쪽에 있던 또 다른 요원은 미궁의 재료로 만들어진 것이 분명해 보이는 보랏빛 가죽 장갑을 끼고 옆 트레이에 있는 가방 안에서 챙겨온 물건을 조심스레 들어올렸다.

꺼림칙한 아우라를 흩뿌리는 족쇄

착용자에게 각종 약화 효과와 패널티를 부여하는 ‘저주 받은 장비’. 미궁에선 아무런 쓸모없는 짐덩이지만, 지상에선 오히려 웬만한 능력 증강장비보다 더 비싼 ‘훌륭한 구속구’였다. 부장은 요원이 조립한 시신의 목과 손목, 발목에 그 구속구를 채워 넣었다.

“마취제.”

이어서 ‘마비 물약과 수면제’가 든 주사기를 시신의 안쪽에 꽂고 주입한 요원들은 쇠사슬로 꽁꽁 묶었다. 그 광경을 보면서 부장은 입을 열었다.

“2시간 뒤에 본토로 향하는 컨테이너선이 있으니, 그걸 타고 귀환하도록 하십...”

-콰-앙!

그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창고를 울리는 굉음이 퍼진다. 그와 함께 외곽 쪽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총성과 처절한 중국어 비명소리, 부장의 얼굴을 일그러지는 가운데 요원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부장님, 마력의 파동이 느껴집니다. 아무래도 들킨 것 같습니다만.”

“...이상하군요. 한국 정부가 눈치 챘다면 심어둔 끄나풀들이 먼저 연락을 했을 텐데.”

“심상치 않으니 몇 명만 나가보겠습니다.”

곧바로 옆에 둔 한 쌍의 톤파(Tonfa)를 들며 말하는 요원, 그에 부장은 고갤 끄덕였다. 국안부(MSS, 중국의 정보기관) 소속의 암부(暗部) 요원, 중화의 자랑인 ‘철혈 돌격대’의 대원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는다고 평가받는 이들이 이곳에 무려 10명이나 있었다.

그렇게 공장 안에 배치됐던 5명의 전투 요원 중 3명이 비명이 들려오는 밖으로 향하는 가운데, 부장은 근처의 회사 직원으로 위장한 공무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일단, 시체 주머니에 담아서 배에 옮기도록. 마취제 준비하는 거 잊지 마라, 1시간마다 꽂아 넣어. 시체에 비싼 포션 형태 마취제를 꽂는 게 그렇긴 하지만 일단...”

그가 말하던 도중, 바라보던 부하들의 시선이 돌연 한쪽으로 향하며 ‘흠칫!’한다. 그에 반사적으로 부장의 시선 또한 시신을 향했고-

“...”

다시 두 눈을 뜬 시신이 그를 향해 눈웃음을 짓고 있다는 걸 보았다.

부활한 살인마의 모습에 부장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는 가운데, 밖을 경계하느라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했던 남아있던 두 암부 요원 또한 뒤늦게 그 사실을 눈치 채고 튀어왔지만-.

“■■! ■■ ■■■■■!”

되살아난 시체는 입에 문 재갈을 이빨로 끊어내고 기어코 유혈의 신을 찬양했다.

-끼아아아악!

그 찬양에 ‘피의 전우’가 공간을 찢고 근처에 나타났다.

3m가량의 근육질 체격, 하얀 해골 투구에 인골(人骨)로 만들어진 것이 확실한 창백한 백색 갑주를 걸친 괴물. 사슬로 연결된 짐볼(Gym ball) 만한 크기의 흑요석 철구를 들으며, 투구속의 두 눈은 시뻘건 광채를 흩뿌린다.

유혈의 장군

미르에서 오크 전쟁 군주와 대등한 사투를 벌였던 괴물이 등장했다. 가공할 기세를 흩뿌리는 적이 등장했지만, 암부 요원들이 주눅 들지 않고 거침없이 움직였다. 그런 그들의 흑색 톤파는 어느새 흑색의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a͔͍͔͚ R҈͖́́h͕͇͉͇̖́͌͑a͓͈͍͔̜͋́͗̓͌ C҉͎͎̮͊͌͒͛͌a͇͕͗͗͛..”

“a͔͍͔͚ R҈͖́́h͕͇͉͇̖́͌͑a͓͈͍͔̜͋́͗̓͌ C҉͎͎̮͊͌͒͛͌a͇͕͗͗͛ ”

요원들이 입에서 그르렁 대는 듯한 기묘한 언어를 내뱉으며 톤파를 휘두르고, 그와 함께 지독한 유황 냄새가 풍기는 흑색 연기가 뿜어져 나와 밀려든다. 광범위하게 밀려든 그 불길한 연기에 살짝이라도 휘말린 이들은 순식간에 말라비틀어졌지만...

칸의 축복을 받은 ‘유혈의 장군’은 마법을 먹어치우는 광전사였다.

-부우웅!!

가공할 속도로 휘둘러진 거대한 철구. 형용키 힘든 소음과 함께 근처의 인원들이 암부 요원들이 뿜어낸 흑색 연기에 말라비틀어지기도 전에 잘 익은 토마토처럼 철구에 뭉개져 터져나갔다.

암부 요원들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흑색 안개 속에 파고들면서 자신들의 모습을 숨기고 민활하게 움직였지만, 유혈의 장군은 날카로운 감각으로 그들의 위치를 모두 꿰고 있었다. 주위의 인간들을 뭉개며 날아오는 거대한 철구에 요원들은 다급하게 톤파로 막았지만 그래봤자 결과는 똑같았다.

-퍼억!

“■■■!”

반마법을 띈 흑요석 철구에 불길한 흑색 운무는 허무하게 흩어졌고, 이어서 유혈의 장군은 소름끼치는 웃음과 함께 쇠사슬을 길게 늘려 잡으며 몸을 회전시키며 한 번 더 피 묻은 철구를 휘둘렀다. 그때까지도 흑색 운무에 뭐가 벌어졌는지 몰랐던 공장 안의 열 댓 명의 인간들은-

-퍽!

-퍼걱!

-콰앙!

철구의 궤적에 걸려 잘 익은 토마토처럼 터지거나, 철구에 맞고 튕겨져 나간 기계의 잔해에 맞고 몸 한곳이 으스러진 채 나뒹굴었다. 그렇게 단 두 번의 휘두름 만에 모든 내부의 인원을 제압한 유혈의 장군은 철구를 회수한 뒤 이를 부득부득 갈며 공장 밖의 문을 응시했다.

비명과 총성이 울리는 바깥

해골 투구 안쪽의 핏발 선 두 눈은 금방이라도 밖에 튀어나갈 것처럼 살기로 번들거렸지만 유혈의 장군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늙은 살인마의 곁을 충실하게 지켰다. 그 사이, 살인마는 머리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곤 한 시신을 보며 눈을 빛냈다.

애벌레처럼 바닥을 기면서 다가간 살인마는 입으로 박살난 시신의 상체 윗도리를 뒤져서 한 장갑을 꺼냈다. 보랏빛의 심상치 않은 빛이 나오는 장갑, 처음 시신에 구속구를 채우던 요원이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힘겹게 몸을 꿈틀거려 구속구가 있는 손목 쪽에 그 보랏빛 장갑을 가져다대자-

-찰칵!

살인마를 속하고 있던 족쇄가 풀린다. 이어서 발목과 목덜미의 족쇄까지 다 풀어낸 후, 늙은 살인마는 괴력을 발휘해 자신의 몸에 칭칭 감긴 쇠사슬과 족쇄를 뜯어내 내던졌다.

“하, 하하하!”

그리곤, 늙은 살인마는 자유로운 몸으로 다시 땅 위에 선 채 웃으며 그 ‘자유’를 만끽했다. 그런 그를 축하라도 하듯 주위에 시신들에서 흘러내린 핏물이 웃는 그를 향해 서서히 다가와 발치를 적시는 가운데-

“과... 광염자(狂炎者)! 광염자가 왔다! 미친!”

바깥에 나갔던 요원들 중 하나가 다시 돌아왔다.

아주 다급하게 소리치며 창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요원, 하지만 그는 엉망이 된 내부를 보곤 말을 잇지 못했다. 늙은 살인마가 빙긋 웃고, 그 옆을 지키는 유혈의 장군이 곧바로 철퇴를 휘두르려 했지만-

“끄, 끄어어어... 꺼.. 꺼어어어어억!”

그 전에 그는 비틀대더니 돌연 고갤 위로 젓히며 트림소리를 수십 키운 듯한 소음과 함께 얼굴의 모든 구멍에서 불길을 내뿜기 시작했다. 마치, 몸속에서 가스토치가 있는 것처럼 강렬한 주황색 불길. 불과 몇 초 지나지 않아 그는 ‘서 있는 사람 모양의 잿더미’가 되었다.

“...■■.”

그 강렬한 최후에 유혈의 장군이 살기를 흩뿌리며 쇠사슬과 철구를 고쳐 잡고, 늙은 살인마는 죽은 요원들의 옷가지와 장비들을 주워 입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창구의 문 너머로 한 사람의 형체가 나타난다.

“중국에서 고생을 한 보람이 있군.”

앞을 막는 잿더미를 가볍게 부수고 안쪽으로 들어서는 한 남성, 늙은 살인마는 빠르게 감각을 끌어올리며 그를 분석했다.

평범한 체격의 남성,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판초 스타일 가죽 외투에 후드를 걸쳤다. 그 코트가 비정상적으로 새하얀 색이여서 객관적으로 대단히 눈에 띄는 차림이여야 하지만... 기괴하게도 눈에 띄지 않는다. 게다가 후드 속의 얼굴 또한 묘하게 흐릿해서 구분할 수가 없다.

“목소리만 따지만 20~30대 남성. 영어지만 발음에 섞인 강세는... 한국어와 악마어 비슷하군? 마법사의 냄새, 그리고 악마 같은 냄새도 나는구나. 하지만, 그 무엇보다 증오가 인상적이야. 맹목적인 것이 아닌 또렷한 목적이 있는, 그러면서도 모든 것을 불태울 것 같은 증오가.”

“...”

“도대체 어떤 것에 대한 증오일까?”

그렇게 혼자 속삭이는 늙은 살인마를 향해 정체불명의 남자는 닫혀있던 입술을 뗐다.

“닥터 크림슨, 네게 제안을 하나 하지.”

“제안? 하, 좋아. 어떤 것이지?”

“네 능력의 비밀을 가르쳐줬으면 한다. 정확히 말하면, 그 ‘대량살상’을 일으키는 테러 방법을 말이야.”

그의 밑천이나 다름없는 비법을 가르쳐달라고 하는 괴인, 그 발칙한 요구에 늙은 살인마는 느릿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뭘 위해서 그걸 가르쳐 달라고 하는 건가?”

“개인적인 복수라고 해두지.”

담담히 대꾸하는 괴인, 인식 저하를 일으키는 옷 덕분에 묘하게 얼굴이 인상에 남지 않았지만 늙은 살인마는 왠지 그의 두 눈을 마주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말 그대로 지옥불처럼 타오르는 주황빛의 강렬한 눈을. 하지만, 살인마는 겁먹지 않았다.

오히려,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침을 흘렸다.

“흐, 그 제안을 수락하면 뭘 받을 수 있...”

대꾸를 하는 도중, 늙은 살인마의 옆에 있던 유혈의 장군이 기습적으로 괴인을 향해 철구를 던진다. 흉악할 정도로 빠르게 내리꽂히는 철구, 게다가 철구를 내리는 척하면서 던졌기에 웬만한 마력 각성자는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교묘했다.

그러나, 괴인은 반응한다.

-콰릉!

허깨비처럼 사라지는 괴인, 그 빈 자리에 철구가 꽂힌다. 그에 괴인을 향해 달려가던 살인마와 유혈의 장군 모두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느껴지지 않는 존재감

마력 파동을 보니 분명 <공간 이동> 같은 마법적인 탈출기를 쓴 게 아니다. 이곳에 있을 게 뻔하건만... 어디에 있는지 포착하기 힘들다.

그러나, 노련한 살인마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

유혈의 장군은 곧바로 철구를 폭풍처럼 휘두르며 적이 있을 만한 모든 궤적을 휩쓸었고, 살인마는 그 과정에서 드러난 숨어있는 마법사의 기척을 포착하기 위해 감각을 곤두세웠다.

철구로 인한 공기의 떨림, 지면의 진동, 미묘한 후각...

그 반사되는 감각을 통해 살인마는 ‘묘한 위화감’이 느껴지는 곳을 포착했다.  그리고, 심령(心靈)이 연결된 유혈의 장군 또한 그 정보를 받아들였다.

-콰드드득!

쇠사슬을 급격하게 좁게 잡는 유혈의 장군, 원심력(遠心力)을 따라 회전하던 철구는 궤도가 짧아지자 속도가 급격하게 올라간다. 그리고 유혈의 장군은 적이 있는 방향을 향해 돌진했다. 그에 들켰다는 판단을 내린 것인지, 괴인은 투명화를 풀고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판초 소매 안쪽 오른손을 꺼낸 괴인

묵빛의 건틀릿을 착용했는데 특이하게도 손가락 끝부분이 드러난 반손가락 장갑 형태였다. 드러난 손가락 부분은 매끄러운 붉은 비늘로 뒤덮여 있었고, 건틀릿의 다섯 손가락 마디에는 5개의 ‘불타는 고리’-반지를 끼고 있었다.

그 묵빛의 장갑에 껴진 5개의 반지가 빛나고-.

-콰르르르르!

손아귀 형태의 주황빛 불꽃이 유혈의 장군을 향해 날아갔다.

점점 거대해지는 불길의 손아귀, 그 마법에 유혈의 장군은 아랑곳 하지 않고 흑요석 철구를 휘둘렀다. 그의 무기는 평범한 것이 아닌 유혈의 축복이 담긴 ‘반마법 무기’, 모든 마법을 분해하는 강력한 장비였다. 당연한 판단이었지만-.

“?!”

불꽃 손아귀는 흩어지지 않았다.

타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치밀한 마법은 반마법 무기로도 단번에 흩어낼 수 없었다. 유혈의 장군은 그대로 돌진하던 자세로 불길에 손아귀에 강타당해 잡혔다. 그래도 광전사 특유의 가공할 항마력을 가진 유혈의 장군이었으나-

“캬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산 채로 탄화(炭化)되기 시작한다.

유혈의 장군이 발버둥치지만 그의 전신을 쥐고 있는 주황빛의 손아귀는 펴질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그대로 불태워버리겠다는 듯이 괴인은 묵빛의 건틀릿을 꽈악 쥐지만, 그가 상대해야 하는 이는 유혈의 장군만 있는 게 아니었다.

-부웅!

-붕!

그 사이, 민첩하게 움직여 마법사의 등 뒤를 선점한 늙은 살인마가 주워둔 한 쌍의 톤파를 휘두른다. 암살자를 연상케 하는 몸놀림으로 뒤로 이동하며 그 공격을 피하는 괴인, 그러나 한 손으로는 마법을 계속 유지중이기에 제대로 대처를 할 수 없었다.

“크크크크! 캬캬캬캬!”

그에 본격적으로 <광폭화>를 사용하면서 늙은 살인마는 폭발적으로 움직였다.

폭풍처럼 쏟아지는 맹공, 그에 괴인은 타격을 허용했다. 톤파를 막은 괴인의 왼손, 톤파를 통해 느껴지는 팔뚝 뼈가 부러지는 감각에 늙은 살인마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반마법 무기였다면 이걸로 끝이었을 텐데...

그렇게 아쉬움을 뒤로한 채, 늙은 살인마는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패를 꺼내들었다.

“■■! ■■ ■■■■■!”

다시 한 번 힘을 쥐어짜 ‘피의 전우’를 불러냈다. 열 댓 명의 아즈텍의 전사들, 맨 처음 불러냈던 ‘장군’과는 비교가 안 되는 약한 괴물이었다. 하지만, 이미 유혈의 장군을 불러냈기에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그렇게 사방에서 몰려드는 괴물에 괴인은 결심을 내렸다.

“젠장, 죽지마라.”

그 대답과 함께 일순간 괴인의 몸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주황빛의 ‘열기의 물결’, 공기가 팽창하면서 생긴 충격파 자체는 상대적으로 미약했지만 거기에 섞인 초월적인 열기는 달려들던 야만인 전사들의 몸속의 피를 ‘단숨에’ 끓어오르게 하기 충분했다.

-뻥!

-뻥!

-뻥!

비정상적인 열전도율을 통해 몸이 풍선처럼 터져나가는 야만인들, 늙은 살인마 또한 무사하지 못했다. 주황빛을 보자마자 위험한 느낌에 재빨리 얼굴을 가렸지만 그는 피부가 새카맣게 타버린 채, 폐가 익어 숨도 쉬지 못하고 근육은 전부 오그라들어 기괴한 자세로 쓰러졌다.

“■■■■■!”

거대한 불길의 손아귀 안에서 발버둥 치던 유혈의 장군도 소환자가 쓰러지자 결국 역소환 되어 사라진다. 그렇게 적이 모두 사라진 뒤, 괴인은 불타는 공장 안에서 마법을 해제하곤 부러진 왼손을 맞추며 늙은 살인마를 내려다보았다.

“흠, 화력 조절에 실패했는데... 다행이네.”

바짝 구운 오징어처럼 된 늙은이, 하지만 그의 화염 속에서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실력자였다. 어찌됐든 괴인은 무력화된 살인마를 포획하기 위해 다가갔다가-

묘한 낌새에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부-웅!

살인마의 마지막 발악, 머리통을 터트릴 기세로 휘둘러진 톤파는 그대로 빈 허공을 가른다. 그렇게 발악은 실패했지만 괴인의 후드의 끝자락을 넘기는 데는 성공했다. 그 후드속의 모습이 드러나고, 덩달아 기묘하게 드러나지 않았던 존재감 또한 정상적으로 드러난다.

타오르는 듯한 주황색 눈, 그리고 주황빛 머리카락의 꽃미남

분명 인간의 모습이었지만 ‘묘하게’ 인간 같지가 않았다. 게다가 얼굴에는 하나도 없지만 그 목덜미까지 드문드문 손톱만한 매끈한 붉은 비늘로 덮여있었다. 아직까지 남아있는 한쪽 눈알로 그 맨 얼굴을 확인한 늙은 살인마는 타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데몬 스폰...”

“쯧.”

마법으로 만들어진 불길의 칼날로 쓸데없는 말을 하는 살인마의 팔다리를 잘라버린 뒤, 괴인은 다시 후드를 뒤집어쓰고 한손으론 팔다리가 잘린 살인마를 멱살을 쥔 채 불길에 휩싸인 공장 밖으로 나섰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