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126화 (126/350)

< 26화. 다 봤던 연중작도 다시 한 번! >

1.

뉴 송파구의 격리시설에서의 생활은 평온했다.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릴 법한 끔찍한 경험’을 겪은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평온과는 거리가 멀 것 같았지만, 놀랍게도 사람들은 내가 개인적인 심문을 받고 있던 3일 만에 정신적으로 거의 완치상태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완치가 아니라...

‘그날의 기억’을 아예 잊어버렸다.

처음엔 몰랐는데, 산책하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을 엿들으니 아예 그날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더라고? 그에 내 정기적으로 내 정신 상태를 체크 겸 방문하는 정한솔 선생에게 말했는데, 정한솔 선생은 ‘자기가 며칠간의 기억들을 날려버렸다.’고 했다.

그 답변에 내가 반쯤 넋을 잃자 추가적으로 설명을 해주시더라.

‘기억은 뇌의 시냅스 연결로 이뤄지고 그 연결을 끊으면 기억 또한 사라진다. 그러니 임시 기억이 만들어지는 뇌의 해마 시냅스 연결을 활성 산소와 정밀한 마력 작용으로 끊으면, 어쩌고저쩌고..’하는데 아무튼 신기했지.

아무튼, 이 기술 덕분에 미르도 건물만 좀 복구되면 정상적으로 개교할 거라고 말해주셨다.

물어보니까 대충 여름방학 기간까지 빡세게 건물을 복구하고, 고등학교 2학기 시작 기간에 맞춰서 개학할 것 같다고 하더라고. 젠장, 어른일 때는 아이들이 학교 가는 게 마냥 부러웠는데 또 학생이 되니까 학교 가는 게 이렇게 엿 같을 수 없다.

어쨌든, 생각보다 빠른 개학 소식에 툴툴 거리면서 나도 그 <기억 소거>를 한 번 받아보고 싶다고 졸라봤다.

르피너스에 관한 기억을 지울 수 있으면 한 번 지워보려고 한 거지. 그런 내 요청에 정한솔 선생은 정색하며 ‘장기 기억은 해마가 아닌 대뇌 피질에 저장~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거부했지만 일주일 동안 졸졸 따라다니니까 결국 해줬다. 하지만, 내심 예상대로 안 먹히더라... 쩝.

어찌됐든 나름 잘 지냈다.

정보 유출을 막겠다고 외부와 접촉하는 건 금지됐지만 나머지는 전부 자유였거든. 우리 싸장님에게 가서 퇴직금으로 열심히 마법 좀 몇 개 더 배웠고, 마빡 아가씨랑 서예린이랑 함께 지하의 점포에서 치맥도 먹어봤다.

그렇게 한 달 간 나름 평온한 시간을 보낸 뒤, 난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저기! 저기 나온다!

-지영 엄마! 여기야!

-아빠!

미르의 북쪽 출구, 밖으로 나오자마자 구름처럼 몰려든 사람들이 우리를 반긴다. 이번에 퇴원하는 이들의 가족과 친지들, 기다리던 사람들이 환하게 웃으며 눈물의 가족상봉을 하는 가운데 난 고아답게 혼자 걸었다. 뭐, 그래도 기분은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으음~”

상쾌한 공기를 만끽하며 양팔을 벌리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높디높은 푸른 하늘, 6월 초의 따가운 햇빛이 지상을 비춘다. 음~ 초여름답지 않게 선선한 날씨가 좋네. 이런 날엔 한 번 나들이를 가야하는데 말이야. 어디 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오늘은 그냥 빈둥댈까?

어차피 미르는 당분간 휴학이고 싸장님의 알바도 없는데? 지하 격리 시설 안에서 미르 ID카드(신용카드 겸용)를 새로 발급받았으니 돈 쓰는 것도 자유롭...

“아니, 아니죠.”

양 뺨을 찰싹찰싹 두드리며 나오자마자 나태해지려는 정신을 채찍질했다. 그래도 오늘 하기로 한 건 다 해야지! 결심을 다잡기 위해서 <메모장>을 켜고 미리 세워둔 오늘 일정을 확인했다. 어차피 해야 할 것도 별로 없다! 놀더라도 오늘 할 건 다 하고 놀아야지!

고갤 끄덕인 후, 난 <메모장>을 닫고 힘차게 미르 밖을 향해 움직였다.

2.

밖으로 나가자마자 난 예정대로 상가를 방문해 스마트폰부터 샀다.

이번 유혈 사태에 스마트폰을 들고 왔다가 박살이 났거든. 대충 구형 스마트폰으로 하나 뽑고 근처 돈까스 집에서 식사까지 해결하고 버스를 탔다. 그리고, 한 시간 가량을 달려 ‘여의도’에 도착했다.

국회 의사당이 있는 대한민국 정치 1번지... 가 이 세상에선 아니다.

‘이 세상의 대한민국’의 여의도는 15년 전에 ‘루세트 레몬 고게르’, 통칭 ‘황금의 악마’라고 불리는 악마 군주와 소설 주인공 간의 싸움에 의해 전역이 한 번 초토화됐다. 그 덕분에 내가 기억하고 있는 모습과는 달랐다.

버스에서 내려 차분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유명한 63빌딩도 아직 있고, 건물도 꽤 많이 남아있지만... 내가 기억하고 있는 여의도에 비해 묘하게 활기가 없다. 건물이 듬성듬성하고 상점가도 한산해. 하긴, 그날 이후로 많은 기관들이 떠나서 이제 여기는 ‘정치 1번지’도, ‘금융가’도, ‘방송가’도, 그 뭣도 아니니까.

그래도 한강변의 경치 하나는 여전히 끝내주네.

“~♬”

따땃한 햇살에 절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느긋하게 한강변 공원을 따라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의 목적지’에 도착했다.

5호선 ‘여의나루역’이 있는 여의중고교 삼거리

역 앞에 서서 그 전체적인 모습을 훑어보았다. 딱 봐도 지어진지 얼마 안 되는 디자인. 15년 전, 여의도 전역이 초토화되면서 이 여의나루역은 한 번 무너졌다. 아마도 이건, 새로 복구된 모습이겠지.

천천히 역 안으로 들어서며 난 ‘르피너스의 장난감’ 항목을 띄우고 찬찬히 밑줄을 쳐뒀던 것들을 확인했다.

***

그렇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지하철이 다니는 5층의 층계로 접어든 순간, 난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생각지도 못한 선객(先客)이 5층 계단 아래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불길해 보이는 검붉은 색의 전신 갑주를 입은 중갑 전사

오른손에는 섬뜩한 붉은 광채가 흘러나오는 한손 장검을, 왼손에는 악귀의 얼굴이 눌러 붙은 듯한 검은 카이트 쉴드를 들고 있는데... 그 모습이 범상치 않았다. 한눈에도 상대하기 힘든 강자라는 것이 느껴진달까?

...(중략)...

그와 함께 전사의 뒤편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고 또 다른 존재들이 나타난다.

3m 남짓한 푸른색 삼지창을 들고 있는 남색의 경갑을 입은 전사, 검붉은 눈이 달린 막대를 들고 기하학적인 황금빛 무늬가 새겨진 검은 로브를 걸친 마법사. 겉보기에도 까다로워 보이는 강적들의 등장에 난 입술을 깨물면서 빠르게 3인을 살폈다.

인간의 형상이지만 인간이라고 봐주기 힘들 정도로 뒤틀린 존재들. 저건... 데몬 스폰의 특징이었다.

-르피너스의 장난감 10권 7화 中

***

15년 전, ‘르피너스의 장난감’ 주인공은 이곳에서 죽을 뻔했다.

하늘 높이 떠 있는 황금의 악마가 쏟아내는 ‘대단위 마법’과 매혹 당한 군부대의 전차 포격과 미사일 세례, 여의도 전체가 불바다가 되면서 주인공은 승산이 없음을 직감하고 여의도를 벗어나기 위해 여의나루역 지하철 통로로 향했다.

그러다가 여기서 황금의 악마가 부리는 전투 노예-총 3인의 데몬 스폰(하프 데몬)들을 만난다.

전부 굉장한 실력자들, 궁극의 소모품-‘황금 자두’를 쓰면서 버티고 마법 주머니에 쑤셔 넣은 톤 단위의 폭약을 미친 듯이 터트리며 간신히 죽이긴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내외부의 충격에 지하철역은 무너져 내리고 주인공은 결국 역 밖으로 다시 나와야 했다.

“후우.”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난 씨익 웃었다.

3인의 전투 노예들 중 하나인 마법사, 주인공은 모르지만 소설의 내용에 따르면 그는 무려 ‘네크로노미콘’을 가지고 있던 강령술사였다. 도중에 동료인 중갑 전사가 죽자 그를 <강령술>로 되살리기까지 했고. 그래, 이곳에서 <과거시>로 그 당시의 장면을 보면...

황금 자두와 <강령술>, 2개를 모두 볼 수 있다.

내 궁극적인 목표인 ‘부서진 영혼의 수복’, 그걸 위한 2가지 해결책 <강령술>과 ‘황금 자두’. 많이 피곤하겠지만 내 눈으로 그 과정을 보고 분석한다면... ‘황금 자두의 정확한 원리’와 ‘강령술의 영혼 치료 가능성’ 모두를 확인할 수 있을 거다.

“음, 그리고... 더 체크해야 하는 게 있죠?”

다시 한 번 <메모장>을 켜고 ‘르피너스의 장난감’을 확인했다.여기에 오기로 결정하면서 소설을 한 번 더 정독했는데, 소설의 묘사에서 몇 가지 ‘이상한 점’이 발견되었다. 그것도 체크해야 한다.

***

...(중략)...

지팡이가 뭐라 더 말하기 전에 주머니에 재빨리 쑤셔 넣었다. 한시가 급한데 지팡이가 떠드는 말에 신경 쓸 겨를 없다. 추가로 딱 보기에도 굉장히 불길해 보이는 마법서까지 회수한 뒤, 난 자리에서 다급하게 일어섰다.

급속도로 상태가 안 좋아지는 지하철역 내부

아쉽지만 전리품 회수는 이걸로 마쳐야겠다. 전리품 회수한다고 폭발에 휘말려 어디론가 날아간 시신을 찾으며 시간 끌다간 진짜 무너지는 지하철역에 깔릴지도 모르겠다.

‘도끼는 5층 계단 아래에 깔렸으니 회수 못하겠네. 아쉽다. 그동안 잘 써먹었는데.’

입을 다시며 폭발에도 별로 날아가지 않고 제자리에 있는 감옥 분쇄자에게 다가가 회수한 뒤, 난 재빨리 지상으로 향하는 지하철 계단을 향해 달렸다.

-르피너스의 장난감 10권 10화 中

***

첫째는 지하철이 매몰되면서 회수되지 못한 무구들이다.

경갑 전사와 중갑 전사, 이 두 사람의 장비 묘사는 ‘최후반부에서 쓸법한 강력한 악마의 무구’다. 폭약을 쓰는 과정에서 그 시신들은 어딘가로 튕겨져 나갔다고 하는데, 지하철역이 실시간으로 무너져 내리는 상황이었기에 주인공은 포기하고 강령술사의 시신만 루팅하고 나온다.

지하철역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회수했을 것 같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확인해야지. 만약에 남아있다면 대박이잖아? 회수하는 게 좀 빡세겠지만.

확인해야할 건 이것뿐만이 아니다.

***

...(중략)...

“씨발씨이~발씨빨씩바아알! 으아아아악! 아아아앍!!! 성재영, 이 개 같은년아앍!!”

인근 건물의 유리창이 성했다면 완전히 박살냈을 듯한 괴성을 내지르며 엎드린 채 주먹으로 땅을 후려쳤다. 그녀의 오른 주먹이 땅에 부딪칠 때마다 무쇠종이 터져나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지면이 쩌적쩌적 갈라지며 아직까지 아슬아슬하게 무너지지 않았던 건물들이 무너져 내린다.

지면을 내리치는 루세트의 오른손에 끼워진 보석이 박살난 4개의 반지들

그건 그녀가 보낸 데몬 스폰들을 통제하는 ‘지배의 반지’였다. 그리고 보석이 깨어져나간 건, 그녀가 보낸 데몬 스폰들이 전부 사망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르피너스의 장난감 10권 11화 中

***

둘째는 루세트가 노예의 생사를 확인하는 묘사 장면에서 나온 ‘지배의 반지’라는 장비다.

거기에 박힌 보석이 깨지면서 루세트는 자신의 노예들이 죽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광분한다. 하지만, 반지의 숫자가 이상했다. 주인공이 상대한 데몬 스폰의 숫자는 3명이지만 반지는 4개다. 그냥 단순한 ‘오타’라고 생각했지만...

노예들에게 무기를 주고 보낸 장면이 이상했다.

***

...(중략)...

“그래, 사실이야. 원래대로라면 앞으로 전투 72회를 해야 풀어주겠지만 특별히 봐주도록 하지. 그만큼 내가 너희들에게 지시한 것은 힘든 것이니까. 난 저걸 반드시 생포하고 싶어.”

검은색 두건을 쓰고 있는 인영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어조로 질문하고, 루세트는 그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한다. 그와 함께 3인의 사이에서 흐르는 놀람과 기쁨의 기류. 그런 3인방의 분위기를 확인한 후, 루세트는 허공을 향해 가볍게 손가락을 튀겼다. 그와 함께 허공에서 사악한 아우라를 뿜어내는 무시무시한 악마의 무구들이 튀어나온다.

활과 지팡이, 장창, 그리고 한손 검과 방패.

이 상황이 익숙한 듯, 3인방은 허공에서 무기가 튀어나오자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각자의 병기를 낚아채고, 루세트는 그런 3인방을 향해 검지로 여의나루역을 가리키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중략)...

나름 감정을 숨긴다고 노력해본 듯하지만, 그래봤자 사회경험 따윈 없는 애송이들.

무수한 시간 동안 노예들을 다뤄온 그녀에게 그런 애송이들의 감정 변화는 너무나도 쉽게 읽혔다. 품안에서 수첩을 꺼낸 후, 루세트는 수첩과 같이 꺼낸 만연필로 머리카락을 긁적이며 지금까지 전투 노예들을 키우는데 들어간 비용을 빠르게 계산했다.

“어디보자 종속의 목걸이 4개, 괜찮은 돌연변이 작업을 위해 들어간 돌연변이 물약 328개, 돌연변이 치료물약 53개. 전쟁의 신 오르칸의 가호가 깃든 무기 사용설명서 24개. 식비 지금까지 들어간 것만 2000골드. 뭐, 장비는 중고취급 받겠지만 충분히 회수할 수 있겠고. ‘네크로노미콘’도 회수할 수 있겠지. 흠, 이정도면 저 녀석들을 장난감 노예로 팔아버려도 살짝 손해인데... 그냥 조금 더 데리고 다니며 사용할까? 아니, 아니지. 괜한 리스크를 감내할 수는 없지.”

-르피너스의 장난감 10권 6화 中

***

이 뒤의 묘사에 따르면 ‘지팡이’는 강령술사가, ‘장창’은 경갑전사가, ‘검과 방패’는 중갑전사가 착용한 걸 볼 수 있다. 하지만, ‘활’은 끝까지 누가 가져갔는지 나오질 않는다. 게다가 ‘종속의 목걸이 4개’라는 언급도 있지.

싸움에선 보이지 않았던 존재가... 묘사되진 않았지만 도중에 허무하게 죽은 존재가 있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오타거나. 어찌됐든 이제 내 눈앞에서 밝혀질 거다. 표를 한 장 산 뒤, 개찰구 너머 지하 5층까지 내려가서 빈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전철과 사람들의 소음을 무시한 채,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 <과거시>를 사용했다.

그와 함께 내 의식은 ‘과거’로 떨어져 내렸다.

< 26화. 다 봤던 연중작도 다시 한 번! > 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