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다 봤던 연중작도 다시 한 번! >
3.
-쿠웅! 쿠르르르르!
내가 있었던 여의나루역과는 다른 여의나루역, 바깥에서 쏟아지는 미사일 세례와 포격에 역 전체가 낮게 진동하고 천장에선 돌가루가 떨어진다. 포격에 의해 전선이 끊어진 듯, 희미한 전등 아래 서 있는 존재들이 보인다.
인간과 비슷하지만 악마적 특징의 존재들
한손 검과 방패를 든 붉은 중갑의 전사, 끝이 살짝 갈라진 삼지창을 쥔 푸른 경갑의 여전사, 머리통만 한 보라색 눈알이 끝에 달린 지팡이를 쥔 마법사, 그리고... 골프채 가방 정도 크기의 검은 직육면체 금속 덩어리를 등에 메고 있는 칙칙한 회색 피부의 자그만 소녀?
음, 오류가 아니라 진짜 4명이었구만.
소설 속에선 언급되지도 않았던 한 명이 추가로 있었다. 저 회색 피부의 소녀는 어쩌다가 죽은 거겠지. 어찌됐든 그 4명은 계단 앞에서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위쪽에서 폭음이 아닌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자 각자 시선을 교환하고 자리를 잡는다.
소설 속에서 도대체 어떻게 죽은 건지 묘사되지 않았기에 시선이 자연스럽게 저 ‘회색 피부의 소녀 궁수’에게 쏠렸다.
“스읍...! ᠷᡝᠨᠥᡟ ᡝᡨᠥᡟ ᡨᡥ.”
근처의 벽에 등을 기댄 뒤, 크게 숨을 들이쉰 소녀는 기묘한 악마어를 중얼거린다. <눈>으로 보니 그런 그녀의 몸 주위에 떠오르는 룬 문자들이 보이네. 이어서 그 룬 문자가 일으키는 현상이 그녀의 몸이 작용하고 그 존재가 흐릿해지더니...
그대로 벽을 통과해 그 속에 들어간다.
<벽 통과(Pass wall)>, 돌죽에도 있는 마법이다. 하지만, 고작 2레벨 마법인 돌죽과는 달리 저 마법은... 꽤 위계가 높아 보인다. <과거시> 상태에서 또 다른 기술을 쓰는 건 부담이 심하기에 자세히 보진 않았지만, 느낌상 <대지 마법>이 아니라 <공간 마법>의 일종이고 그녀가 가지고 있는 육신의 특징이 효과를 증폭시키고 있다.
-뚜벅, 뚜벅, 뚜벅.
그 사이, 더 가까워진 발자국 소리와 함께 주위에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는다.
주인공이 착용한 망토 ‘어둠의 축복’의 움브라(Umbra) 효과, 심상치 않은 현상에 데몬 스폰들이 무기를 꽉 쥐며 전의를 다지는 가운데, 마침내 주인공이 등장한다.
“...”
“...”
5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입구, 넘실거리는 부자연스런 어둠속에서 유별나게 또렷하게 보이는 해골 가면
그 안구에는 불타오르는 푸른 광채, 그와 함께 그녀가 쥐고 있는 거대한 양손 도끼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가 주위 공기를 차분하게 식힌다. 그 광경을 보며 난 침을 삼켰다. 현재, 글에 묘사된 주인공의 느낌은 데몬 스폰 애들을 보면서-.
‘ㅅㅂ 이새끼들은 뭐지? 기세나 장비를 보니 존나 쎄 보이는데? 좆됐네.’
에 가까웠는데, 이렇게 제 3자의 입장에서 보니까 전혀 아니다. 오히려 데몬 스폰들이 바짝 두려움에 긴장하고 있었다. 그래, 지금 적의 입장에서 보는 주인공의 모습은...
‘마왕’에 가까웠다.
요즘 라노벨의 용사랑 썸타기 바쁜 여마왕이 아닌 ‘반지의 제왕’, ‘스타워즈’ 같은 고전 판타지에서 나올 법한 마왕(Dark Lord). 그 기세는 실체를 가진 것처럼 주위의 공기를 짓누르고, 행동 자체에서 오만함에 가까운 자존심에 느껴진다.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격투 게임의 악의 여간부 비슷하단 느낌은 전혀 없구만...
“왔다.”
멈춰선 마왕을 보며 긴장한 붉은 중갑주의 전사가 악마어로 작게 속삭이자, 계단 위에 서 있는 마왕이 느릿하게 대답한다.
“아무래도 날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데... 너희들은 도대체 누구지?”
나지막하게 들려오는 주인공의 유창한 악마어, 데몬 스폰들은 놀라지만 이내 이를 악물고 전의를 다진다. 그 모습에 주인공 또한 코웃음을 흘리곤 어깨에 걸치고 있던 도끼를 잡으며 난폭한 살기를 방사한다.
“크윽...!”
“흐읍...!”
그건, 마치 거대한 야수의 아가리에서 나오는 숨결 같았다.
끈적끈적하면서도 독한 악취가 느껴지는... 그저, 존재감만으로도 주위의 공기는 녹아내린 납을 들이키는 것처럼 무거웠고 단순히 숨을 쉬는 것만으로 신경을 맹렬히 갉아댔다. 그 대상이 아닌, 지나간 과거의 일을 보는 나조차도 왠지 숨을 고르기 힘들 정도다.
그에 숨어있는 회색 소녀를 제외한 데몬 스폰들도 대항해 살기를 피워 올린다.
...‘르피너스의 장난감’, 지금 보니 전혀 믿을 게 못 된다. 하나하나가 주인공과 거의 대등한 실력자들이 다구리 친 걸로 묘사됐는데, 아무리 봐도 데몬 스폰들이 마왕에 도전하는 용사 포지션에 가까워. 이걸로 토토 복권 했다면 소설을 몰랐어도 난 주인공에게 풀 베팅 했을 거다.
그렇게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콰-앙!
데몬 스폰들이 계단 위로 도약하며 전투가 시작되었다.
4.
상상할 수 없는 빠르기로 데몬 스폰들이 계단 위에 서 있는 주인공을 향해 쇄도한다.
내가 지금까지 본 가장 위압적인 검격은 김가트가 닥터 크림슨을 썰어낼 때였다. 서예린도 만만치 않았지만 좀 ‘순수한 전사로서의 기량’은 김가트가 더 높게 느껴졌거든.
오무혁?
막판에 그 양반은... 거의 전사 수준을 벗어났지. 하지만, 지금 주인공과 데몬 스폰 전사들이 보여주는 몸놀림은 내가 봤던 이들 중 가장 훌륭한 몸놀림을 초월했다. 장담한다. 김가트 양반도, 주인공이나 저 두 데몬 스폰 전사에게 걸리면 얼마 안가 뒤질 거다.
‘얼어붙은 꽃망울’이라는 아티팩트 양손 도끼를 휘두르며 달려드는 두 전사를 맹렬히 몰아치는 주인공
그 와중에 회색 소녀는 벽을 타고 다른 데몬 스폰들이 싸우고 있는 4층으로 올라와서 마왕이 있는 시야의 사각-천장까지 스며들어갔다. 그리고 적당히 떨어진 곳의 천장과 벽 모서리 속에 자리를 잡은 뒤, 메고 있던 커다란 직육면체를 내려놓고 분해-조립하기 시작한다.
조립되는 형상을 보니까... 저건 예상대로 ‘활’이다.
거의 사람 크기만한 거대 석궁, 축소된 공성무기의 느낌이 강했다. 그 직육면체 속에서 튀어나온 화살 또한 남달랐는데, 작은 자벨린만 수정 결정체에 ‘신성해 보이는 황금빛 번개’가 그 속에서 요동쳤다.
그 와중에 주인공은 두 전사가 공격을 받아내자 제대로 빡쳤는지-.
-!!
-!!
한 순간, 해골 가면의 푸른 안광이 검붉게 변하고 ‘더 흉악한 기세’가 뿜어져 나온다. 소설 속 내용에 따르면 순간적으로 <광폭화> 한 시점. 대놓고 뿜어지는 그 기세에 전사들이 반사적으로 움찔하며 멈칫한 순간, 마왕은 그 틈에 방어 따윈 포기하고 도끼를 위로 들어올렸다.
그리곤, 전력으로 내리찍는다.
-쿠콰아아아아앙!
-끼아아아악!!!
폭탄이 터진 것 같은 굉음, 이어서 울리는 방패에 새겨진 악귀의 비명소리에 지하철역 전체가 웅웅 울린다. 소설 속에선 저 중갑 전사가 주인공의 일격을 가뿐하게 막아낸 것으로 묘사됐지만... 직접 보니 전혀 아니네.
받아내긴 했다.
하지만, 그 충격에 바닥에 무릎을 꿇고 전신의 뼈가 삐걱 거리는 게 눈에 보였다. 게다가 도끼를 막아낸 악귀 방패는 반쯤 박살나서 마법적인 아우라가 휘청인다. 이거, 보면 볼수록 주인공이 엄살이 개심하다.
하지만, 어쨌든 반격은 반격.
부서지기 직전까지 갔지만 방패는 제 역할을 해냈다. 그 무지막한 충격을 반탄(反彈) 시켜 마왕의 몸이 위로 솟구친다. 동시에 방패에서 뿜어져 나온 생리적으로 버틸 수 없는 <악귀의 괴성>이 마왕의 감각을 흩뜨린다.
그 찰나의 빈틈을 전사들은 놓치지 않는다.
-스칵!
기다렸다는 듯이 마왕의 옆구리를 찔러오는 섬뜩한 푸른창, 동시에 중갑 전사 또한 이를 악물고 불길한 붉은 광채의 한손검을 휘두르자 그 한손검의 날은 채찍처럼 늘어나며 마왕의 무릎을 베어 넘기려고 한다.
이게 마왕이 방패를 후려친 반발력으로 천장으로 날아가는 도중에 벌어지는 일이다.
이거, 진짜 공방 수준이 미쳤다. 움직임 하나하나가 공기가 찢어지는 소음이 울린다. <과거시>로 천천히 분석하듯 볼 수 있기에 망정이지 직접 보게 된다면 제대로 판단을 내리지 못할 거다. 어찌됐든 그 위기상황을 마왕은 간단히 대처했다.
양손으로 쥐고 있는 도끼를 그대로 놓아버리고 기어코 그 손을 뻗어 두 무기를 막아낸다.
-쿠콰아앙!
그에 커다란 양손 도끼가 먼저 천장과 벽 모서리에 박힌다. 그리고, 도끼가 깊숙이 박힌 그 장소를 보니... 난 왜 지금까지 저 ‘회색 피부의 소녀’가 소설에 등장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저 도끼가 박힌 곳, 회색 소녀가 숨어있던 곳이다.
자기 몸 보다 큰 조립된 발리스타를 천천히 벽 밖으로 빼려고 준비 중이었는데, 날아온 도끼가 그대로 두개골이 처박혔다. 지금까지 준비가 허무하게도 머리가 반쯤 쪼개졌다. 이어서-.
-쿠웅!
방패를 후려친 반발력에 뒤로 날아가던 마왕이 몸을 뒤틀며 천장에 발로 착지한다. 천장이 쩌적쩌적 금이 가는 가운데, 벽 속에서 있던 소녀에게 충격이 밀려온다. 그에 소녀는 결국 마법이 풀어지며 벽 속에서 생명이 끈이 완전히 끊어졌다. 저렇게 허무하게 리타이어 했네.
그걸 모르는지 나머지 데몬 스폰들은 가열차게 맹공을 이어나간다.
촉수처럼 검날이 늘어난 악마의 장검은 마왕의 오른손을 봉쇄하며 생기를 쪽쪽 빨아먹었고, 마왕의 왼손에 잡혔던 악마의 삼지창은 어느새 사라지더니 투척자세를 취하고 있는 그 주인의 손에 들어왔다.
그리고, 적절한 때를 노리고 있던 강령술사의 <고문> 마법도 작렬한다.
-터엉!!!
하지만 마왕은 쓰러지질 않는다. 청록색 섬광 같은 <고문> 마법을 터프하게 몸으로 받아내고, 날아오는 가공할 삼지창 투창은 빈 왼손 건틀릿으로 후려친다. 창과 주먹이 부딪친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커다란 무쇠종이 터져나가는 듯한 굉음이 울리고-,
쿠웅! 쿵! 쿵!
거대한 덤프트럭에 치인 희생양처럼 마왕은 볼썽사납게 튕겨져 나갔다.
데몬 스폰들로선 안타깝게도 공격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중갑 전사는 검을 통해 빨아먹은 생기로 몸을 추슬렀지만 뼈와 근육이 여전히 후들거리고 있었고, 남색 경갑 전사는 삼지창을 또 빼앗겼다. 마법사는 <강령술>을 주로 익힌지라 직접적인 타격 마법이 없었다.
“뭐야, 저건! 어떻게 저 녀석이 손을 움직여서 막아? 너 마법 실수했냐?”
기력을 추스를 겸해서 전사 데몬 스폰들이 왜 제대로 마법을 쓰지 않냐고 강령술사에게 따지며 외치고, 그에 강령술사가 대답하는 사이... 오만함에 가까운 자존심이 철철 흐르는 마왕은 그 모습이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한 듯 격분한다.
“Yanırra Ölüm rpabə...”
이어서 장송곡을 연상케 하는 느릿하면서도 고요한 어조의 주문을 외운다.
소설을 읽었기에 저게 뭔지 안다. <강령술> 계열 9위계 마법 <죽음의 문턱>, 룬 수호자를 다 죽이고 난 뒤에 주인공이 꿈속에서 깨우친-르피너스에게 받은 마법이다. 다른 <강령술> 마법은 쓰지 못하지만 저것만 쓸 수 있다고 소설에 나온다.
“죽음의 문턱!? 광전사가, 게다가 광폭화 상태에서 강령술 궁극 주문을 쓴다고?!”
주위에서 완성돼가는 마력의 파동에 주문의 정체를 눈치 챈 강령술사가 비명을 지르고, 전사들은 이를 악물며 다시 맹공을 이어나가려는 순간-.
난 과거의 영상을 잠깐 멈췄다.
소설에서 나온 <죽음의 문턱>의 효과는 ‘일정 시간 동안 죽지 않는 무적 마법’, 그에 대한 묘사는 ‘육신에 영혼을 강제로 고정시키는 느낌’이라고 나온다.
그래, 영혼에 영향을 끼치는 마법이다.
그러니 이 때, 영혼이 어떤 상태인지 봐야지. 심호흡을 하며 난 ‘영혼을 보고 싶다.’고 염원했다. 다행히, 이번에 레벨업 한 보람이 있는지 <과거시>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눈이 원활하게 작동했고...
5.
“...!!”
그 순간, 내 정신은 현실로 튕겨져 나와 있었다.
반사적으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주인공의 ‘영혼의 실루엣’을 본 순간, 다급하게 시선을 돌린 덕분에 완전히 발작하는 것은 막았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흐, 히히힣ㅎ!”
올라가는 입 꼬리, 흘러내는 병적으로 쾌활한 웃음.
이어서 코와 눈에선 피가 흐르기 시작한다. 간신히 정신줄을 놓지 않은 채, 난 수전증 환자처럼 덜덜 떨리는 손으로 떨리는 손으로 상의 안주머니에서 전자 담배를 꺼내 카트리지를 힘겹게 교환하고 힘껏 빨았다.
“하악, 하아아악!”
고농도로 정제된 마약 성분의 진정제가 뇌를 적시고 억지로 호르몬을 조절하며 육체의 반응을 없앤다. 거의 마취 수준의 약성분, 덕분에 몸은 게게 늘어졌다. 이어서 머리가 띵해지는 감각에 벽에 등에 기댄 채 완전히 정신을 놓았다.
그렇게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새 오후 9시에 가까워져 있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으며 미간을 구겼다. 코와 눈에서 피가 닦여져 있는 걸 보면 누가 도와준 것 같긴 한데... 기억이 안 난다. 그냥 정줄을 놓은 상태로 흐릿한 육안으로 본 것을 뜨문뜨문 기억하는 수준이니까 말이야.
“스읍, 하아.”
다시 <눈>을 뜨고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내가 왜 이렇게 발광했는지는 떠올렸다. 영혼을 보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 내 눈은 주인공의 영혼을 응시하기 시작했고...
“으으으...”
그 기억을 다시 더듬는 순간, 내 영혼이 그걸 거부하듯이 섬뜩한 공포가 밀려온다. 그에 가슴을 움켜쥐며 숨을 헐떡였다. 설정상, 주인공은 반신(半神)족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르피너스에 의해 만들어진 반신족, 그 여파 때문일까? 주인공의 영혼은...
‘르피너스’를 닮아있었다.
그 미쳐 날뛰는 혼돈을 말이다. 물론, 진짜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고 초라했지만 ‘너무나도 흡사’했다. 그 때문에 내 영혼이 발광했다. 얼마 없는 내 이성 또한 반쯤 으스러졌고.
터질 것 같은 머리를 붙잡았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하기에 오히려 의식하게 된다. 의식의 가장자리를 쓰다듬는 그 ‘광기의 손길’에 머리가 너무나도 뜨겁다. 세로쉬를 봤을 때는 그냥 평범한 육안으로 필터를 쳤기에 괜찮았는데...
“...주인공 말고 다른 놈으로 보죠.”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런 결과도 없이 끝내기엔 그렇지.
르피너스를 연상시키는 주인공의 영혼을 보는 건 너무 무섭지만... 다른 놈은 괜찮을 거다. 그 데몬 스폰 강령술사, 소설의 내용에 따르면 그 녀석도 곧 영혼과 관련된 주문을 사용할 거야. 심호흡으로 떨리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난 다시 눈을 감고 과거의 한순간으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