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다 봤던 연중작도 다시 한 번! >
5.
과거의 한 순간, 데몬 스폰 강령술사가 주문을 외운다.
왼손은 마력을 실타래처럼 뿜어내 조율하며 수인(手印)을 맺고, 오른손의 지팡이는 자신을 쥔 강령술사의 피와 생명력을 조금씩 빨아먹으면서 그 댓가로 강령술사가 만들어낸 룬 문자의 미진한 부분을 메꿔주며 보조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7개의 룬 문자가 공명하며 마법이 완성되었다.
강령술사가 수인을 맺던 왼손을 뻗자, 그 주위에 청록색 광채가 번쩍이면서 주위에 수많은 인간의 얼굴들이 뭉쳐져서 꿈틀거리는 듯한 검은 연기가 나타난다.
-캬하하하학!
-퀘에에엑!
-끼아아아아악!
소설에 나온 바에 따르면 <유령 출몰(Haunt)> 주문으로 불러낸 유령 계열 몬스터들. 소환된 유령들은 강력해보였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매우 실망스러웠다. 유령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본 결과, 저것들은 전부 ‘가짜’였다.
증오와 원망, 살의, 배고픔...
각종 부정적인 감정을 상징하는 룬 문자의 단면에 영혼을 흉내 내는 마력을 붙여서 감정의 찌끄러기들을 만들어내고 그걸 방출한 것. 거짓된 감정에 발광하는 마력 덩어리에 가깝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모조품’하고 비교가 안 되는 저질 중의 저질이야.
저런 건, 내 영혼에 복구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실망감이 가슴을 때렸지만 입술을 깨물며 다시 앞을 주시했다. 아직, 포기해선 안 된다. 소설 내용에 따르면 저렇게 유령을 소환한 것 말고도 죽은 동료를 <강령술>로 일으키기도 한다. 혹시 모르니 그것도 봐야지.
그리고 무엇보다, ‘황금 자두’를 보지 못했다.
-캬하하하학!
-퀘에에엑!
-끼아아아아악!
십 수 마리의 유령들이 마왕을 향해 달려든다.
중갑 전사와 창잡이를 지나칠 때, 유령들은 실체가 없는 것처럼 그냥 뚫고 지나가지만 마왕에게 닿을 때는 물리력을 발휘하며 부딪친다. 동료의 움직임을 전혀 방해하지 않고 적만 괴롭히는 훌륭한 지원사격.
그러나 마왕에겐 소용없다.
-끼이이익!
그 포악한 손아귀와 주먹질에 어처구니 없이 터져나간다. 하지만, 그 마력 덩어리는 박살나면서도 그 원한은 그대로 저주가 되어 마왕에게 달라붙어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그에 마왕의 움직임은 약간이나마 느려진다. 그렇게 ‘승리의 추’가 데몬 스폰들 쪽으로 기우는가 싶었지만...
<죽음의 문턱> 주문이 완성되었다.
“!!”
유령들의 방해를 뚫고 두 데몬 스폰의 공격을 건틀릿 낀 주먹만으로 막고 후려치며 나름 대등하게 싸웠던 마왕, 하지만 주문이 완성되자 이젠 공격 자체를 피하지 않는다. 합리와는 매우 동떨어진 ‘자신의 뼈를 주고, 상대의 살을 취하는’ 손해 보는 짓을 저지르며-
-우지지직!
“...!!”
“...!”
두 데몬 스폰을 압도한다.
그에 적이 기겁한다. 반드시 살려두라고 한 루세트의 말. <죽음의 문턱>에 대해 모르는 듯 자신이 마왕에게 입힌 치명상에 창잡이가 발작하는 가운데, 그 사이에 마왕은 품 안의 요술 주머니 안에서 거의 수백kg은 될 듯한 C4폭약을 꺼내고-
-콰앙!
광소를 흘리며 그대로 터트린다.
충격파 주위를 뒤덮고 지하철 기둥이 무너져 박살난다. 데몬 스폰들도 그 충격파에 휘말려 뿔뿔이 흩어졌다. 한 치 앞이 잘 보이지 않는 검은 매연이 가득 찬 공간, 한 구석에 처박힌 마왕이 요술 주머니에서 ‘황금 자두’를 꺼낸다.
거기서 시간의 흐름을 잠깐 멈춘 후, 난 주인공을 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시점을 조절해 ‘황금 자두’만 주시했고...
6.
“...미친.”
그 실체를 엿본 순간, 또 다시 <과거시>를 종료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르피너스의 장난감’에 지나가듯이 언급된 바에 따르면 황금 자두는 ‘미궁의 신’을 어찌해보려고 한 건방진 하이 엘프들을 르피너스가 손수 종족 단위로 저주해서 만들어낸 물품이라는 설정이 있다. 그 여파로 르피너스의 장난감의 배경인 EG란 게임에선 종족 선택지에서 ‘하이 엘프’란 게 삭제됐고.
그리고, <눈>으로 보건데 그건 ‘사실’이었다.
육안으로 볼 때는 그저 찬란한 황금빛이 나는 아름다운 과실이었지만... 내 <눈>으로 보는 저건 감옥이다. ‘인간은 아니지만 더 강력하고 고등하게 빛나는 영혼’이 저 과실 안에 갇힌 채 발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과실이 한 입 먹히는 순간엔-
“우웁...”
온전해야 할 영혼이 바스라 흩어졌다.
그 소름끼치는 진실에 난 헛구역질을 했다. 난 지금까지 ‘내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삶에 대한 박탈감에 생명체에게 맹렬한 증오심을 가진 언데드들 조차도, 내 신세를 알고 죽이지 않고 비웃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저건 나보다도 더 비참한 말로였다.
어쩐지 남을 보는 것 같지 않은 섬뜩함에 살짝 두려움에 떨었지만...
“흐, 좋아요. 좋아.”
소매로 입가를 닦으며 고갤 주억였다.
어찌됐든 희망이 보였다. 황금 자두를 섭취한 주인공의 영혼을 볼 수 없기에 정확한 효능은 모르겠다만, ‘온전한 영혼’을 부숴서 사용할 정도로 강력하다는 건 알겠으니까. 어쩌면 내 불완전한 영혼을 치유할 수도 있겠지.
아직 더 볼 것이 남아있기에 다시 숨을 고르고 ‘과거’를 응시했다.
7.
폭발로 발생한 자욱한 연기 속에서 데몬 스폰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황금 자두로 회복한 마왕은 연이어 마법 주머니에서 자신의 거대한 망치-‘감옥 분쇄자’를 꺼낸다.
그리고, 데몬 스폰들을 한 명씩 으깨기 시작한다. 첫 타는 검과 방패를 든 붉은 갑주의 전사, C4 폭약이 터지면서 발생한 충격파를 추스르고 있다가 마왕이 다가오자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결국엔 소설의 내용대로 거대한 망치에 대가리가 으깨진다.
이어서 마왕이 후들거리며 일어서는 남색 경갑의 여전사를 향해 돌진하는 사이-,
“᧧᧢ ᧷᧪᧶᧸ ᧣᧤...”
숨어있던 강령술사가 움직였다.
그 광경에 난 미간을 찡그렸다. 폭발에서 몇 미터 떨어져 있었다곤 하지만, 주인공이 꺼낸 폭약의 양은 결코 작은 양이 아니었다. 헬스장에서 사용하는 커다란 짐볼(gym ball) 수준의 크기, 그게 한꺼번에 터졌고 그 여파로 지하철 역사 내부도 무너질 것처럼 흔들렸다.
강력한 아티팩트 갑주를 입었던 전사 또한 반 박살났는데, 아티팩트라지만 천 옷을 입은 강령술사가 살아남았다?
소설에선 그냥 넘어갔지만 직접 보니 이상하다. 곧바로 시점을 멈추고 마법사를 살펴봤다. 보니까 몸 내부가... 이상한데? 죽었다고 밖에 말하지 못할 상태네. 심장이 으깨지고 뇌조직 또한 일부 날아갔다. 그런데도 묘하게 생기가 느껴진다. 도저히 죽은 것 같지가 않아.
곧바로 시간을 되돌려 폭발 전을 응시하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주인공이 광소를 흘리며 복부에 숨겨둔 마법 주머니에서 커다란 짐볼 같은 하얀색의 구체를 꺼낸 순간, 강령술사는 위험을 직감한 듯 빠르게 왼손으로 수인을 짚으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정신력의 부담 때문에 작정하고 보진 않았지만, 대략적으로 보이는 룬 문자의 형상은...
<죽음의 문턱>
주인공이 좀 전에 사용했던 마법과 똑같았다. 전문적인 강령술사인 만큼, 주인공보다 더 능숙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오른손에 쥔 마법 지팡이가 피와 마력을 ‘쫙쫙!’ 빨아먹으며 마법의 완성을 보조한다. 그 덕분에 폭약이 터지기 직전에 9개의 룬 문자로 구성된 주문을 완성한다.
정신력의 소모를 각오하고 강령술사의 영혼을 ‘응시’했다.
육신을 뒤덮은 마력의 파장이 그 영혼을 ‘강제로’ 붙잡는 게 보인다. 육신에 억지로 속박한다는 점에서 황금 자두에 갇힌 영혼의 상태와 비슷하다. 그래, 저게 진짜 <강령술>이지! 영혼과는 1도 상관없는 마력 덩어리를 만드는 게 아니라!
...그나저나, 이렇게 영혼을 응시하니 저 지팡이도 특이하다.
강령술사가 쥐고 있는 커다란 눈깔 달린 지팡이. 나중에 주인공이 전리품으로 저 지팡이를 습득할 때, 말을 거는 걸 무시하고 마법 주머니에 쑤셔 넣었는데 저기에 온전한 영혼이 하나 달라붙어 있었다. 3차원을 뛰어넘는 영혼의 형상을 묘사하는 건 힘들지만... 어쩐지 악마 같았다.
어찌됐든 간에 난 그 마법을 이루는 룬문자의 형상에 대해 기억하려 노력했다.
단순한 보고 외우는 것이 불가능한 ‘시각적 기억을 넘어선 형상’인지라 형용하기 어렵지만 여러 번 보면 그래도 기억할 수 있을 거다. 자주 여기에 와서 곱씹어야겠구만. 그렇게 어느 정도 룬 문자의 대략적인 형상을 머릿속에 익힌 후, 다시 시간을 진행시켰다.
“᧢ ᧸᧶ ᧷ ᧣᧤...”
간신히 죽지 않은 강령술사는 숨어서 주문을 외우며 <강령술>로 죽은 동료의 시신을 몰래 되살린다.
그 되살아나는 과정을 주시했다. ‘르피너스의 장난감’에선 <죽음의 영매술(Death Channel)>로 영혼은 망령으로 만들고, 살점은 <얼음의 환영(Simulacrum)>으로 얼음 괴물로 만들고, 마지막 남은 뼈는 <해골 일으키기(Animate Skeleton)>로 일으킨다고 했다.
그 과정을 <눈>으로 분석한 결과... 꽤나 흥미로웠다.
죽었어도 영혼은 곧바로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잠시 남아있다. 정확히 말하면 시시각각 휘발되고 있다고 해야 하나? 강령술사는 그 휘발되는 영혼의 증기들을 사용했다.
<죽음의 영매술>은 마력의 덩어리에 휘발되는 영혼의 증기들을 넣고 가공해서 유령으로 만든다.
<얼음의 환영>은 육체에 남아있는 본능을 담당하는 신경 신호와 영혼의 조각 덩어리에 마력의 덩어리로 조합하여 움직이는 얼음 덩어리를 창조한다.
<해골 일으키기>도 얼음의 환영처럼 뼈에 남아있는 영혼의 조각을 사용하여 일으킨다.
죽은 사람의 영혼을 소프트웨어라고 하면, 즉석에서 <강령술>로 대충 하드웨어를 만들고 이어서 영혼을 조각조각내서 이식하는 것에 가깝다. 그나저나, 저 <강령술>에 사용되는 영혼을 보니까... 영혼은 단순한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었다.
크게 두 가지로 이뤄져 있다.
비슷한 개념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니, 영혼의 구성을 2가지로 분류하던 동양의 영혼 개념인 혼백(魂魄)이 생각난다. 혼만 영혼과 비슷한 뜻이고, 백은 육체에 가까운 개념이라고 하던데...
어쨌든 저 기술들은 영혼의 ‘자투리’를 이용한 것에 가깝다.
진짜 핵심은 건드리지 않네. 나중에 한 번 더 조사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한 뒤, 그 강령술사가 만들어낸 언데드들이 움직이는 것을 관찰했다.
-!
-!!
“뭔...?!”
마왕에게 접근해 무기를 휘두르는 언데드들
그 하나하나가 뛰어난 실력을 가졌지만 그래도 생전의 전사에 비하면 좀 손색이 있었다. 신체도 원본보다 약하고 움직이는 소프트웨어도 불완전해서 그런지 하나하나가 어색해. 근데, 그것들도 좀 ‘특이한 점’이 있었다.
언데드들이 휘두르는 무기
해골로 만들어진 언데드만 진짜 장비를 착용하고 있고, ‘망령’이나 ‘얼음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언데드들이 들고 있는 무기는 가짜였다. 근데, 그 무기들의 특성은...
원본의 것과 ‘비슷’했다.
성능은 좀 떨어져도 그 특성은 판박이다. 가짜 검은 채찍처럼 늘어나고 닿는 순간 생기를 흡수하고, 방패는 공격을 막는 순간 찢어지는 비명을 내지르며 공격자의 신경을 교란한다. 진짜가 아닌 가짜인데도 말이다!
이것도 한 번 분석을 해봤다.
그러자 그 비밀이 내 눈에 드러났다.
‘마력은 술자의 의지에 감응하여 현실을 일그러트린다.’, 미르에 입학한 첫날 배운 것이다. 미르 생도의 외모가 아름답게 변하는 것은 더 나은 자신의 외모를 꿈꾸는 욕망과 의지에 마력이 반응해서 현실을 일그러트리는 것이라고 했지. 이 현상도 비슷했다.
영혼들이 가지고 있는 의지가 마력에 ‘성질’을 부여하고 있다.
흩어져가는 영혼이 가진 착각 ‘당연히 이래야 한다.’는 강한 확신이 무기의 성질을 약간이나마 흉내를 내게 만든다. 이것 또한 흥미로운 현상이다. 흠, 이것도 한 번 연구해볼만한 주제야.
...어찌됐든 더 이상 내가 볼만한 건 없기에 대충 흘렸다.
소설 속 내용대로 데몬 스폰들은 주인공에게 모조리 박살나고 결국 최후에 마법사까지 죽는다. 밖에서 쏟아지는 포격과 연이어 안에서 폭약을 터트리면서 날뛴 덕분에 지하철역 천장이 불안하게 흔들리고, 결국 주인공은 단념하고 위로 향하고 역이 무너져 내린다.
그리고,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몇 년 가량을 방치되어 있다가 다시 지하철 통로를 통해 사람들은 잔해를 조심스럽게 치운다. 그 과정에서 당연히 수습하지 못한 데몬 스폰들의 시신들이 발견된다. 그에 난리가 나고 검은 양복들의 아저씨들이 나타나서 중갑 전사와 경갑 전사의 시신과 무구를 수습한다.
그러나, 벽 속에서 쓸쓸히 방치된 한 시신은 끝까지 눈치 채지 못했다.
8.
“오.”
마지막에 걸린 월척에 현실로 돌아와 고갤 들어 천장을 보았다.
도끼가 박혔던 벽 모서리 쪽은 운 좋게 무너지지 않았고, 나중에 있던 공사에서 그냥 도끼만 회수하고 벽을 보강했다. 그 덕분에 한 명의 시신은 수습되지 않았다. 그리고 <눈>으로 벽 속을 파고들어보니... 그 시신과 장비는 아주 온전했다! 심지어 영혼까지도 온전하네!?
생각지도 못한 개이득!
문제는 ‘한국 정부에게 들키지 않고 저걸 어떻게 빼내느냐?’인데... 그건 일단 나중에 고민해보도록 하자. 싱글싱글 웃으며 벽 속에 박힌 시체의 장비들을 감정해 보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그 순간-.
“끄응...”
관자놀이에 얼음송곳이 박히는 듯한 감각과 함께 코피가 ‘주르륵’ 흘렀다. 심각하게 지끈거리는 머리통, 아무래도 오늘 <눈>으로 너무 혹사한 탓인지 더 이상 능력을 쓰기 힘들었다. 거의 금요일까지 버틴 수준의 피곤함, 그에 난 소매로 코피를 닦았다.
“어쩔 수 없죠.”
아쉽지만 오늘 자고 다음에 해야지. 곧 자야한다는 현실에 발작적인 공포가 내 안에서 솟구치지만... 어쩔 수 없는 대가였다. 아무런 성과 없이 자야한다면 짜증났겠지만 그래도 ‘영혼을 원래대로 되돌릴 희망’이 조금이라도 보이니...
감당할 수 있다.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지만. 작게 한숨을 내뱉은 후, 난 오늘 산 스마트폰으로 여의도 인근 호텔을 검색하고 비척대며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