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139화 (139/350)

< 막간. 빡센 여름 방학 숙제를 받았다. >

1.

옷장 뒤에 숨겨진 비밀 통로는 좀 멀리 떨어진 환풍구 철망 쪽이랑 연결되었다.

전자식 문이 가로막고 있었지만 아가씨의 손짓 한 번에 프리패스, 쉽게 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호텔로 돌아온 뒤, 난 거실 소파에 앉은 채 반지를 쓰다듬으며 그 ‘과거’를 들여다보았다. 슬슬 잘 때가 됐지만 레벨 업을 한 이후로 정신력이 강화된 덕분에 대충 버틸 만하더라. 그렇게 과거를 살피며 얻은 정보들을 종합해본 결과...

“진짜 군벌의 수족이군요. 그리고 한새벽은 스파이였고.”

죽인 남자는 진짜로 ‘박범기’라는 개성을 지배하는 북한 군벌의 부하 중 하나였다. 반지에 얽힌 과거의 행적들을 보니까, 개성의 군벌 지도자는 남쪽 정부의 눈치가 보이는 지 더러운 일들을 수족을 통해 대신 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한새벽은 남한에 심어놓은 일종의 스파이였다.

혹시 모를 향후를 위한 포석, 절대로 배신할 수 없는 자료를 목줄로 죄고 남한 측의 공무원으로 들어가 정보를 캐오거나 혹은 유리한 공작을 하는 역할이었다. 한새벽만 그런 것이 아니고 북한 출신 중에서도 이런 애들이 더 있는 것 같았다.

<메모장>을 켠 뒤, 이번 반지의 과거를 통해 얻은 정보들을 나열하며 천천히 숙고했다.

“한새벽에 대한 기록을 없애는 건... 불확실해요.”

내가 봤던 영상 자료의 출처는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라 무려 개성의 군부대 안에 비밀리에 있는 ‘기록 저장소’였다. 마력 각성자라는 고급 인력 스파이였기에 장군이 직접 관리하고 있는 곳, 정확한 위치와 출입 비밀번호 등은 알아냈지만...

없애러 가는 게 가능할 지는 불확실했다.

기록 저장소의 주인은 내가 죽인 쫄따구가 아니라 군벌을 지배하는 ‘장군’이었다. 어찌어찌 모든 방해를 뚫고 기록 저장소를 불태웠다고 한들, 빽업본이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지. 그럼 어떻게 해야 내 약점을 드러나지 않게 할 수 있을까?

“...장군을 협박할 수 있는 정보를 얻는 게 확실하죠.”

똑같이 장군을 날려버릴 수 있는 정보나 약점을 쥐고 협박하는 것,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정답인 것 같다. 내가 정상적으로 남쪽에서 생활하려면 그 방법 밖에 없어. 다행히, 반지의 주인은 장군의 심복이었고 피곤함에 대충 훑었음에도 약점이 될 만한 과거가 몇 개 보였다.

“마약 밀수, 마력 각성자 스파이 육성, 중국 정부의 스파이, 인신매매...”

장군의 치부들을 하나씩 <메모장>에 적고, 옆에 그 사실을 증명할 증거를 어떻게 확보할 지도 같이 적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할 일’을 정리한 뒤, 지끈거리는 두통에 옆에 타놓은 인스턴트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쉽지 않네.

자신의 부하를 죽이고, 더 나아가 자기의 약점의 증거를 수집하는 나를 장군이 살려둘 리가 없다. 어떻게 없애버리려고 하겠지. 솔직히, 나야 별 상관없어. 죽는 것 정돈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지는 걸? 문제는 내게 꽂힐 벼락에 튄 불똥을 맞을 사람들이다.

마빡 아가씨, 그리고 보육원 애들.

가장 먼저 생각할 건, 우리 마빡 아가씨다. 유명인의 치부는 예로부터 좋은 가십거리였으니까. 솔직히, 보육원 애들이 더 위험하지만... 친한 사람을 더 신경 쓰는 게 당연하잖아? 진짜 한새벽은 보육원 애들과 더 친하겠다만 난 30대 아저씨 영혼을 가진 ‘가짜 한새벽’이거든.

양씨? 그 양반은 알아서 하라고 해.

“아가씨는 남한에 가면 신경 쓸 필욘 없겠죠. 그룹에서 어떻게 지켜줄 테니까. 날이 밝자마자 남한으로 가라고 하면 되겠고... 문제는 보육원 애들이네요.”

나름 민병대 수준의 무장을 갖춘 보육원 아이들이지만, 반지를 통해 봤던 북한 마피아들과 비교하면 민망하다. 당장, 내일부터 보복이 들어올 수도 있는데 그 애들을 어떻게 보호해야 할까? 고민이 깊어진다. 역시, 지켜야 할 게 있으니 곤란하네.

그렇게 의자에 파묻혀 곰곰이 생각하다보니...

“좋은 아침입니다.”

철수가 방문을 나오며 인사한다. 살짝 졸린 눈이지만 그래도 잠은 다 깬 듯한 모습. 그 인사에 철수를 향해 고갤 돌리며 창밖을 보니 어느새 파르스름해지고 해가 밝아오고 있었다. 허허, 생각할 게 많다보니 시간이 이렇게 흐른 지도 모르고 있었네.

다 식은 인스턴트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난 철수를 향해 빙긋 웃었다.

“네, 좋은 아침이에요. 철수씨.”

“오셨는데 마중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깜빡 잠 들었습니다.”

여전히 내게 상전 대하듯이 공손히 말하는 철수, 그에 난 쓰게 웃었다.

“부담 갖지 마세요. 말했잖아요? 오히려 더 부담스러우니까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라고. 엊그저께도 저희 때문에 잠 다 못자고 운전해줬는데 푹 쉬어야죠.”

“하지만, 똑같이 못자시지 않...”

“마력 각성자의 체력을 우습게보지 마세요. 아가씨나 양우영은 하루 이틀 정도는 안자도 끄떡없답니다.”

그나마 나도 마력 각성자이기에 5일 동안 안 자고 버티는 거지 아니었다면 신경쇠약으로 이미 죽었다. 그런 내 대답에 철수는 잠시 아무런 말을 못하고 있다가... 살짝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방문하신 일은 잘 되셨습니까?”

“그리 좋게 풀리진 않았어요. 약속 장소에 있었던 사람들을 전부 죽여 버렸거든요.”

담담한 내 대답에 두 눈을 끔뻑이는 철수, 잘 못 들었나 하는 모습이기에 난 쇄기를 박듯이 강조했다.

“전부, ‘몰살’시켰어요.”

“...”

“개성의 ‘푸른 형제단’의 두목 박원석과 녀석을 지키던 마력 각성자 보디가드 2명, 그리고 블랙 생츄어리를 지키던 가드 40명 정도? 아침이 됐으니 슬슬 소식이 퍼져나갈 거예요.”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모습, 그에 난 품 안에서 전자 담배를 꺼내려다가... 홀에서 라이터 대용으로 쓴 걸 떠올리곤 얼굴을 구겼다. 그 대신에 마력을 운용해 가볍게 <독숨결 구체>의 룬을 만들어낸 뒤-,

“스읍, 파하아아아...”

보란 듯이 왼손바닥에 숨결을 내뱉었다.

뭉클거리는 흑색 타르 덩어리 같은 연기가 왼손 위에 뭉치고, 이어서 약간의 조작을 통해 해골 모양으로 바뀐다. 그 모습에 철수가 놀라서 살짝 움찔하는 가운데, 난 왼손바닥에 있는 해골 모양의 연기 덩어리를 들어 올리며 웃었다.

“저도 그 동안 놀고만 있던 건 아니랍니다? <연금술>, 그러니까 <독마법>을 배웠죠. 정부 공인 2급 전투 마법사라고요? 그리고, 미르에서 겪었던 유혈의 지옥에 비하면... 그 녀석들은 별것 아니에요.”

“...그렇군요.”

납득했다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철수, 하지만 그 표정은 그리 좋지 않다.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해 좀 걱정하는 눈치.

“흠, 안색이 좋지 않은데, 푸른 형제단에 대해 알고 있나 봐요?

그에 해골 모양 독숨결을 해체하며 물어보자 철수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꾸한다.

“푸른 형제단은 엄청 유명합니다. 이곳의 조폭들 중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성한 조직, 몇몇 떠도는 말로는 이곳 개성 지역을 지배하는 거대 군벌인...”

“박범기 상장의 수족이죠.”

“이미, 아시는... 겁니까?”

그 말에 난 다 식은 커피를 홀짝이며 고갤 끄덕였다.

“네, 죽기 전에 자기 입으로 수족이라고 떠들었거든요. 실제로 남겨진 증거들을 보니 확실하고.”

철수는 이젠 살짝 넋이 나간 것처럼 보인다. 사적보복이 금지된 남쪽에서도 지역유지 같은 사람에게 찍히면 좀 고달픈데, 진짜 총칼을 가진 지배자에게 잘못 보였으니 X됐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아마 속으론 내 목을 붙잡으며 왜 그랬냐고 따지고 싶을 거다.

그에 난 담담히 생각해뒀던 말을 풀어냈다.

“저도 이렇게 크게 일을 벌리고 싶진 않았어요. 그 녀석, 좀 엿 같은 요구를 하더군요. 거부하니까 내 목을 휘감은 목줄을 보여주며 협박했어요.”

“협박을... 말입니까?”

“네. 과거의 저는 보육원을 얻기 위해서, 그리고 여러분들을 지키기 위해서 치명적인 약점을 잡혔더라고요.”

보육원을 위해서 약점을 잡혔다는 내 대꾸에 입을 다무는 철수, 그에 난 빙긋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스너프 비디오예요. 여자애를 강간하고, 죽이고, 그리고 나중엔 식인까지 한 풀 세트.”

“...”

“배신할 수 없도록 목줄을 채운 거죠. 실행은 박원석이 했지만, 자료는 개성 군벌이 보관하고 있어요. 하긴, 그 정도 뒷배는 있어야 중1 짜리가 다른 조폭들을 살해하고 보육원을 접수할 수 있었겠죠.”

과거의 진짜 한새벽이 자기들을 위해 희생한 거라고 하니까 아무런 말도 못한다. 그래도 염치가 있는 친구네! 하긴, 푸른 형제단을 죽였다고 말했을 때 ‘왜 그랬냐?’고 멱살을 안 잡은 것부터 북한 상위 1%겠지.

“해줄 말이 있으니까, 이리 앉으세요.”

그렇게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철수에게 난 살짝 맞은편 소파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그에 조심스럽게 앉은 철수를 향해 난 살짝 허릴 숙이며 속삭였다.

“하지만, 난 자유를 원해요.”

“...”

“누가 날 조종하지 못할 자유를. 그래서, 과거의 내가 스스로 목에 채운 쇠사슬을 뜯어버릴 거예요. 히힣... 안 그래도 르피너스의 꼭두각시가 되어서 지랄하고 있는데, 다른 놈의 꼭두각시까지 되는 건 참을 수 없거든요.”

짜증난다. 너무나도 짜증난다.

감히, 날 조종하려고 들어? 안 그래도 내가 인간 이하의 것이라는 사실에 짜증이 치솟는데, 그딴 땅딸만한 돼지 같은 새끼에게 휘둘리고 있다니 참을 수가 없다. 그 치밀어 오르는 짜증에 살짝 이를 갈며 속삭이자 철수의 얼굴이 이젠 창백하게 변한다.

“당연히, 얼마 안가서 보복이 들어오겠죠. 저 혹은 보육원 애들에게. 알아요. 당연히,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래도 할 거예요.”

“그...”

그런 내 선언에 어떻게 힘겹게 말을 꺼내려는 철수, 벌어지려는 그 입술에 한 발 먼저 검지를 가져다대며 고갤 저었다.

“솔직히 말하면 전 과거의 한새벽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에요. 당연히, 보육원 아이들은 남이나 다름없죠. 그냥 죽든 말든 상관 안하고 냉정하게 내 갈 길을 가도 되지만...”

“...”

“전 되게 상냥한 사람이랍니다? 전혀 모르는 ‘과거의 나’가 소중히 생각했던 이들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요.”

진짜다. 솔직히 나 정도면 여기서 천사지! 미르에 유혈이 흘렀을 때도 지인들을 구하겠다고 뛰어들 사람이 어디 있겠어? 사실, 그것보다 ‘나보다 잘난 놈들이 죽어나가는 꼴’을 보고 싶었을 뿐이지만... 중요한 건 결과지.

그런 내 대답에 살짝 안도하는 철수, 그 입술에 댄 검지를 떼며 난 어깰 으쓱였다.

“그래서 오늘 몇 번 더 소란을 일으킬 거예요. 누가 저질렀는지 파악하기 힘들도록.”

반지를 통해 살펴본 과거의 장면들을 보아하니 놈은 장군에게 이번 일에 대해 알리지 않았다. 그리고, 날 협박한 비디오도 군부대의 ‘기록 저장소’가 아니라 자기가 따로 빼돌린 영상을 잘라낸 것이었다.

아직, 장군은 이런 일이 왜 벌어졌는지 정확히 모른다.

그럼 한 발 더 나아가 장군의 수족 역할들을 먼저 쳐서 혼란을 일으키는 게 낫겠더라고. ‘국력은 방어에 있는 게 아니라 공격에 있다.’는 명언도 있잖아? 더 큰 혼란을 일으켜서 더 헷깔리게 만드는 거지. 이미 어딜 어떻게 털지도 다 생각해 놨다.

일을 좀 크게 키우는 것 같다만... 이 방법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

아니, 어쩌면 마음 속 깊이 이런 걸 바라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살인에 대한 ‘명분’ 말이다. 내 희미한 양심에 걸리지도 않으면서, 저열한 충동을 충동시킬 수 있는 명분. 어쨌든 꼭 필요한 일이지. 그런 내 말에 철수가 창백한 얼굴로 고갤 젓는다.

“하지만, 결국엔 밝혀질 겁니다.”

“네, 여전히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죠.”

하지만, 이것도 결국은 시간벌기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철수의 말대로 결국엔 누가 혼란을 일으켰는지 밝혀질 테니까. 빡친 장군이 작정하고 보육원 애들과 날 조지려고 할지도 모르겠네. 그 전에 장군의 약점을 잡아야 한다. 그리고...

“그러니까 보육원 애들이 최소한 제 짐덩이는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해져야 해요.”

“하지만, 그건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박범기 상장은 남한에서도 인정한 정통...!”

“상식적으론 불가능하죠.”

반박하려는 철수의 말을 도중에 끊었다. 확실히, 지금 애들의 수준으론 북한의 마피아들을 상대하는 건 자살행위에 가깝지. 상식적으로 불가능 해. 하지만, 내 손엔 상식을 능가하는 게 하나가 있다.

감았던 두 눈을 뜨고 난 철수에게 자색의 눈동자를 보여주며 속삭였다.

“철수씨, 당신을 ‘마력 각성자’로 만들어 줄 수 있다면... 가능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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