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막간. 빡센 여름 방학 숙제를 받았다. >
2.
마력 각성
전 세계의 손꼽히는 의료 거대 기업들이 16년 전부터 연구하고는 있지만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 각성하는 것 같다.’는 두루뭉술한 결론만 내놨을 뿐 여전히 감을 못 잡은 현상.
하지만, 나는 그 ‘현상’을 보았다.
‘황금 자두’를 섭취했을 때 일어나던 영혼의 변화를, 그리고 이번에 있었던 미르 유혈 사태 속 극한 상황에서 각성한 이들의 변화를. 이 <눈>을 통해서. 똑똑히.
마력 각성이란 것은 다른 공간 위상에 존재하는 마력과 공명시켜야 하는 ‘영혼의 확장’이다.
그리고, 이번에 했던 <강령술> 연습을 통해 영혼의 2가지 성질을 파악했다. 본질적인 혼(魂)은 다루지 못하지만 백(魄)은 <강령술>로 충분히 다룰 수 있다. <연금술>을 응용해서 그 <강령술>의 마법적인 효과를 실체화해서 약물에 부여한다면?
개개인에 맞춰서 약간의 조정한다면... 일종의 마력 각성을 촉진하는 약물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생명력을 불태워 마력을 얻는 마법 <피의 승화> 비슷한 약물이겠지. 자투리라지만 영혼의 일부를 불태워 마력을 촉진시킬 거니까.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선 많은 연구가 필요할 거다. 먼 훗날의 이야기겠지만, 지금 내가 철수에게 이런 제안을 하는 이유는...
이 <눈>으로 본 바, 철수의 영혼은 이미 마력 각성을 한 영혼과 많은 부분에서 닮아있다.
넘치기 직전의 물 컵 같은 상태, 조그만 10원짜리 동전 하나만 넣어줘도 쏟아지듯이 ‘아주 약간 자극’만 살짝 밀어준다면... 마력 각성을 일으킬 것 같았다. 안 되면 어쩌냐고? 안 되는 거지 뭐! 사실상, 사기지! 하지만, 이미 갈 때까지 간 거! 사기 좀 못 칠 게 뭐람?
전혀 예상 못한 제안인 듯, 넋 나간 얼굴로 날 보는 철수를 향해 나는 사기꾼답게 조근조근 속삭였다.
“벌써, 한 달하고도 보름 정도 됐나요? 미르가 유혈에 잠겼을 때, 전 어쩌다보니 닥터 크림슨을 죽였던 이들과 함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어요. 거기서 ‘아주 신기한 먹거리’를 얻었죠. 괴물들이 희생양에게 먹였던 건데... 좀 고통스럽긴 해도 일반인이 마력 각성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더군요.”
“지... 진짜 입니까?”
“네.”
마력 각성을 내 능력으로 포장해선 안 된다. 그랬다간 납치당하겠지. 이번에 유혈사태 때 몰래 얻은 걸로 포장해야지. 슬슬 넘어오려는 호구를 향해 난 어깰 으쓱였다.
“물론, 그 먹거리는 압수당했어요. 좀... 혐오스럽게 생겨서! 하지만, 친분이 있는 오크가 있기에 ‘조금’ 빼돌릴 수 있었어요! 이번에 오크들이 북쪽에 진출하면 받을 수 있을 거랍니다. 그리고, 전 그걸 당신에게 줄 수 있어요.”
“...”
“쉽게 믿지 못하는 것 알아요. 마력 각성, 부자들이 몇 백억 원을 쏟아 부어도 얻지 못하는 축복이니까. 하지만, 난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이곳에서 인터넷이 될 런지는 모르겠다만... 이번에 피라미드 안쪽에 관한 바디캠 영상이 나오면 한 번 보세요. 아마, 저도 있을 걸요?”
내 제안에 계속 멍한 상태로 있는 철수, 반응을 보아하니 아주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만큼 신뢰를 얻고 있다는 뜻일까? 어쨌든 난 다시 두 눈을 감고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럼, 전 뭘 하면 되겠습니까?”
철수는 결정을 내렸다.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하지만 그 속에는 욕망이 이글거리는 게 보이는 얼굴로. 어이쿠, 이렇게 순진하니 나중에 사기를 잘 당하겠구만! 하긴, 아무리 건장하고 어른스럽다곤 해도 아직 고1짜리 어린애인데 뭐! 속이긴 쉽지.
“방파제요.”
“방파제... 말입니까?”
“내게 걸린 목줄을 끊기 위해 날뛸 동안, 당신은 보육원을 지켜줄 방파제가 되어주세요. 아, 추가로 돈도 한 30억 정도 드릴게요.”
“...”
“오크들에게 받는 마력 각성 약물은 도착하는데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30억 정도는 며칠 내에 가능하답니다. 그걸로 병사를 구하던 무기를 구하든 알아서 해도 되요.”
반지를 통해 얻은 기억들 중에선 박원석이 숨겨놓은 비자금도 있었다. 빨리 빼돌리지 않으면 딴놈이 가져갈 금괴와 돈이니 보육원 애들을 동원해서 빼돌려야지. 그렇게 또 넋이 나간 철수를 향해 난 웃었다.
“할 수 있겠어요?”
“네, 할 수 있습니다. 보스.”
“하하, 보스라고 부르지 마요. 다른 사람이 들으면 오해하니까.”
그래, 철수를 보육원... 그러니까 이 ‘보육원 패밀리’의 실질적인 수장으로 키워야지. 그리고 난, 명목상의 우두머리로 영혼에 관한 연구를 계속해야지. 영혼을 연구하는데 자금도 필요할 테니까, 패밀리의 돈을 좀 적절히 가져다 쓰고. 딱, 좋구만. 후후.
“좋아요. 이걸로 보육원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됐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스트레칭했다. 토요일 아침, 슬슬 자야할 시간이지만... 지금 자선 안 되지. 오늘은 개성 내의 조직들을 순회하면서 ‘유혈 사태’를 일으켜야 한다. 그래도 ‘잘난 놈들을 죽이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그런가? 갑자기 덜 피곤한 느낌이야.
“그럼, 전 이만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먼저 움직일게요. 오늘이나 내일쯤에 보육원에 제가 갈 텐데, 그 뒤로 이틀간은 잠에 빠질 겁니다. 준비해 놓으세요.”
“예.”
“아가씨가 깨어나면 곧바로 남쪽으로 돌아가라고 하세요. 양우영씨는... 알아서 하라고 하고.”
공손히 고갤 끄덕이는 철수, 그에 살짝 웃어준 뒤에 난 일을 하기 위해 호텔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3.
호텔 밖으로 나온 뒤, 곧바로 유품을 통해 얻은 <과거>의 정보를 토대로 움직였다.
개성을 지배하는 군벌인 박범기 상장의 수족들, 그들은 서로 경쟁하는 사이였지만 동시에 어느 정도 안면이 있었고 각자 어디에서 일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게 그 정도면 충분했다. 난 가장 가까운 개성 시내의 대형 폭력 조직 2곳을 차례로 방문했다.
그리고, 깔끔하게 쓸어버렸다.
첫 번째 조직은 개성 시내의 10층 건물에 거주하고 있었다. 방문하자마자 15분 정도 <눈>으로 탐색하며 건물 구조를 파악한 뒤, 근처의 조직원 한 명을 죽이고 건물 환풍구 쪽에 <독숨결 구체>와 <시체 부패>로 내부에 독가스를 살포했다.
이어서 <연금 물질 해체> 마법을 걸고 건물 안쪽으로 진입했다.
놀랍게도 조직에 마력 각성자가 간간히 섞여있어서 독가스론 다 정리할 수가 없더라고? 창문을 열고 환기 시키며 필사적으로 버티기에 직접 들어가서 칼찌를 놓아야 했다. 다행히 <부패 구름>의 연막 효과 덕분에 일방적으로 습격할 수 있었다. 그 뒤, 적당히 전리품을 회수하고 나왔다.
두 번째로 습격했던 조직 역시 비슷했다.
습격 소식을 들은 듯, 말단까지 AK소총까지 들고 경계를 하고 있었지만 경계가 약해지는 새벽 시간에 터진 <시체 부패> 콤보 한 방에 무력화됐다. 그 뒤론 지들끼리 총 쏘며 허무하게 자멸했다. 똑같이 버티는 두목과 간부들은 직접 들어가서 처리했고.
...솔직히, 모두 싸움이라기 보단 ‘일방적인 테러’에 가까웠다.
미르에 유혈의 손길이 덮쳤을 때도 느꼈던 거지만 <독마법>과 <눈>의 조합은 시가지 안에서 사기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방비를 철저하게 한들, 건물 안엔 환풍구가 있었고 그 안으로 독가스를 흘려놓으면 90%는 끝나. 나도 내가 한 짓을 보면서 정부에서 마법 사용자에 대해 경기를 일으키며 경계하는 게 이해됐을 정도니 말 다했지.
어쨌든 그렇게 2개의 대형 조직들을 박살낸 뒤, 난 보육원로 돌아와 그대로 수면을 취했다.
남쪽이었다면 순식간에 누가 이런 짓을 벌였는지 파악하고 체포하러 특공대가 돌입했겠지만 이곳 북쪽은 남쪽처럼 도심 곳곳에 CCTV가 깔려있질 않았다. 설령, 내가 한 짓이라고 들켜도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보안원의 힘이 무력했다. 파악했다고 한들, 쉽게 보육원에 들어올 수는 없을 거란 계산이었지.
들키지 않은 건지 혹은 알아도 조지지 못한 건지 모르겠다만, 보육원을 방문하지 않았고 난 상쾌하게 수요일 아침에 일어났다. 그리고 식사를 하러 아래로 내려갔는데...
“오~ 우리 새벽이 일어났어?”
태연하게 보육원 애들 사이에 섞여서 아침밥 먹고 있는 양우영을 볼 수 있었다. 단정하지만 왠지 모르게 특유의 양아치스런 썩소를 지으며 반겨주는 그 모습에 난 얼굴을 찡그렸다.
“엥? 왜 안 돌아가고 여기 남았나요? 설마, 아가씨도...”
“아니, 아가씨는 돌아갔지! 나만 남은 거야! 우리 소중한 부원이 북한에 남겠다는 게 너무 걱정돼서 돌아갈 수가 없더라고!”
“...”
“하하! 농담이야! 농담!”
그 말도 안 되는 대답에 절로 얼굴이 찡그려지자 양씨는 농담이라고 말하곤 반찬인 알타리 김치를 으적으적 씹어 먹으며 어깰 으쓱였다.
“너무 짜증내지 마라! 이래보여도 너 도와주려고 여기 남은 거거든?”
“...믿기 힘든데요.”
“야, 생각해봐! 남쪽 출신인 내가 남으면 여길 건드리게 쉽겠어? 아가씨야 워낙 책임져야할 게 많아서 그러지 못한다고 해도 난 아니지! 안 그래?”
양씨의 대답에 살짝 고갤 끄덕였다. 확실히, 양우영의 존재만으로도 군벌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억제기다. 어찌되었든 간에 남쪽 사람이니까. 혹여 잘못되면 빡세게 조사 들어가겠지. 하지만, 문제는 저 양씨가 착한 사마리아인이 아니란 거지.
“야, 뭐하고 있어? 와서 밥 먹어. 아가씨가 떠나기 전에 식재료를 왕창 사놓고 가서 아주 푸짐해. 계란말이도 있다구?”
“...네.”
어서 빨리 와서 먹으라고 손짓하는 양우영, 그에 나도 순순히 배식대로 향했다.
비빔밥처럼 커다란 쇠그릇 하나에 밥을 담고 여러 가지 반찬을 담는 방식인데, 확실히 오늘 반찬은 좀 호화로운 것 같았다. 그렇게 밥을 떠서 양우영 쪽으로 가자 근처에 앉아있던 애들이 알아서 비켜준다.
양씨의 맞은편에 앉아서 ‘순순히 남은 목적을 털어놓아라.’는 시선을 보내자 그는 실실 웃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 내가 남은 진짜 목적은... 커리어 쌓기야.”
“커리어 쌓기요?”
“그래, 커리어. 솔직히 말하면 난 지금 되게 급해.”
밥그릇을 싹싹 비운 후, 양우영은 작게 트림하곤 날 향해 입을 열었다.
“이종족들의 지상진출이 결정됐어. 물론, 용병업은 제대로 되긴 할 거야. ‘오크가 우르르 몰려가서 사람을 죽였다.’는 것보다는 ‘용병들이 날뛰면서 사람을 죽였다.’가 좀 더 듣기 이쁘니까. 문제는 지금 내 상황이야. 난 지금 고작 미르 5학년생이야. 아무런 경험도 없는.”
“아...”
미르 5학년생이라는 말에 ‘커리어를 쌓겠다.’는 게 좀 이해됐다.
양우영이 확실히 범상치 않은 인물인 건 확실하지만 아직 외부에 증명되진 않았다. 그 어떤 커리어도 없는 상태, 마력 각성자에 마법까지 쓰는 인재라고 해도 그를 용병 사업 파트너로 받아들이겠다는 사람은 없을 거다. 용병으론 쓰겠지만. 그런 내 탄식에 양우영은 쓰게 웃는다.
“그래. 용병을, 그것도 ‘용병 사업자’가 될 만한 나이가 아니지. 아직 아무런 경험도 쌓지 못했어. 물론, 이종족들과의 연계를 하고 있지만, 진출이 확정된 이상 지금 그들이 굳이 날 선택할 이유가 없다는 거지. 그러니 다른 이들보다 내가 확실히 더 도움이 된다는 걸 증명해야해.”
“그럼 어떻게 커리어를 쌓으려고요?”
“널 도와서 여기 폭력 조직들을 쓸어버릴 거야. 그 과정을 녹화할 거고.”
직접적으로 도와주겠다는 양우영의 대답에 난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양씨는 탁자 위의 물병을 기울여 빈 쇠그릇에 따르곤 꿀꺽꿀꺽 삼키곤 날 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공식 커리어에 등재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이종족들에겐 아니거든. 이곳에 대해 잘 알고, 또 경험이 많다는 건 굉장한 이점이야. 어때, 너로서도 나쁘진 않지?”
“...나쁘지 않다가 아니라 엄청 좋죠. 남쪽 출신이 있는 것만으로도 북쪽에서 함부로 움직일 수 없으니까. 근데, 괜찮겠어요? 여긴, 진짜 장난이 아니에요. 게다가 잘못하면 범죄자가 되는 거 아시죠? 죽을 수도 있어요?”
“그런 거 다 생각하고 하겠다고 한 거야.”
나지막이 대꾸하는 양우영, 그에 난 웃으며 노골적으로 웃었다.
“그리고 사람 죽일 결심은?”
“흐, 그런 마음가짐도 없이 용병하겠다고 떠든 줄 알아?”
보란 듯이 마력을 일으키며 룬 문자를 만드는 양우영, 그와 함께 그의 손가락 위해 섬뜩한 냉기의 바늘이 생겨난다. 부드럽게 그 커다란 바늘을 움직이며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이번 미르 사태 때, 사람을 죽여 봤어. 물론, 야만인이 아니고 진짜 사람. 도중에 미쳐버려가지고 발광했거든. 위험하기에 결딴 했지.”
“어맛, 싸이코패슨가요? 그래도 무고한 사람을 죽이다니? 실망이네요! 전 일일이 다 살렸다구요!”
“...야, 독마법으로 사람을 부패시켜 죽여 버린 놈이 그런 말 할 자격 있냐?”
뎃? 그렇게 말하니 솔직히 할 말이 없긴 하네.
그냥 PC게임의 필드에서 나오는 몬스터를 죽인 감각이라서 내가 뭔 짓을 벌였는지 잘 실감을 하지 못했다. 어쨌든 양씨는 충분히 전투원으로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정 뭣하면 집 지킴이로 써도 되고.
“어쨌든 합격?”
악수하자는 듯이 손을 내미는 양우영, 그에-
“헤헤, 그럼 우리 잘 해보죠!”
나도 빙긋 웃으며 그 손을 마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