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141화 (141/350)

< 29화. 목장 체험 학습 >

1.

통일되고 난 뒤, 남쪽은 최소한의 지원만 해주면서 북쪽을 거의 방치하다시피 했지만 그래도 ‘식량문제’ 만큼은 진지하게 지원했다.

미국 동부를 초토화시킨 룬 수호자들의 등장으로 인해 국가의 목표가 번영이 아닌 ‘생존’이 된 상황, 식량은 이젠 돈을 주고도 구하기 힘든 자원이었다. 그렇기에 손해를 무릅쓰고라도 반드시 자급자족을 해내야 했고 북쪽에도 식량 증산을 위한 계획과 투자가 시작됐다.

그리고, 그 계획은 꽤 성공적이었다.

무능한 김씨 정권에 의해 반쯤 방치된 북쪽의 주요 9대 농경지-재령평야, 연백평야, 평양평야, 안주평야, 용천평야, 함흥평야, 강동평야, 박천평야, 안변평야는 남쪽 정부가 작정하고 나선지 2년 만에 정상화되었고 육류 소비를 위한 목장까지 몇 곳에 지어졌다.

통일 3년 만에 북쪽의 식량사정은 자급자족 수준으로 돌아섰다.

다만, 그렇게 생산된 식량이 제대로 분배가 되지 않았을 뿐. 그런 부정부패와 여러 사정까지 일일이 신경 쓰기엔 남쪽의 행정력은 이미 한계에 달해있었다. 그렇기에 정부는 북쪽 군벌이 알아서 해결하도록 반쯤 방임했고, 그 결과 북쪽의 식량사정은 북한이었을 때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남쪽 정부가 만들어낸 이런 농장들은 북쪽 인민들 사이에서 ‘꿈의 직장’으로 통했다.

아무리 가혹하게 착취를 하는 군벌과 조폭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그 밑에서 노동하는 이들의 식사만큼은 넉넉하게 챙겨준다. 그래야만 제대로 힘을 쓸 수 있고 딴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

개성 외곽에 위치한 대덕산의 작은 고원에 지어진 목장, ‘양의 낙원’도 그러한 꿈의 직장 중 하나였다.

“날래! 내리라우! 한 줄! 한 줄로!”

산 전체가 통제구역인 대덕산 자락, 가늘게 이어진 아스팔트길을 따라 오른 고원 위에 지어진 한 목장에 중형 버스가 멈춰 섰다. 험악하게 생긴 운전수의 재촉에 타고 있던 아이들은 버스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하나 같이 좀 꾀죄죄한 아이들 8명

대부분 두려움에 질린 표정이었지만 동시에 하나 같이 휘둥그레 두 눈을 뜨며 주위를 둘러보기 바빴다. 푸른 하늘 아래 펼쳐진 초록빛의 융단, 그리고 그 위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양떼. 땔감을 위한 벌채(伐採) 때문에 붉은 민둥산이 널린 북쪽에선 보기 힘든 풍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목장 축사 쪽에서 작은 사람의 형체가 밖으로 나온다.

파란 고무장화에 노란색 일체형 점프슈트를 입은 소녀, 햇빛에 건강하게 그을린 얼굴에 머리엔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동양인이 아니라 빨간 머리의 서양인이었다. 난데없는 외국인의 등장에 애들이 수군거리는 가운데-

“자! 자! ‘양의 낙원’에 온 걸 환영해! 난 ‘예브게니아 젤랴예바’라고 해. 그냥 ‘젤랴’라고 불리지. 이곳에서 일하고 있는 너희들의 선배가 될 사람이야!”

주근깨가 가득한 빨간 머리칼의 소녀는 웃는 얼굴로 박수를 치며 입을 열었다.

원어민과 다를 바 없는 유창한 한국말에 아이들의 두 눈이 휘둥그레 커지고, 소녀는 소개하듯이 양떼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목초지를 향해 한 손을 벌렸다.

“여긴 남쪽에서 지어준 대형 양 목장이야! 양을 방목하고 양고기와 양젖 치즈를 공급하지! 빼어난 풍광 덕분에 소수지만 외국인 관광객도 온다고? 그리고 너희들은 지금 막 이곳의 수습사원으로 뽑히게 된 거야.”

그 설명에 대다수의 아이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서로를 바라본다. 척박한 환경 때문에 잘 배우진 못했지만, 그래도 어른들에게서 남쪽에서 지어준 농장에서 일하면 팔자 핀다는 것 정도는 들어본 아이들이었다.

그런 아이들의 반응에 빨간 머리 소녀-젤랴는 쓰고 있는 밀짚모자를 고쳐 쓰며 또한 빙긋 웃었다.

“믿기지 않겠지. 대부분 여기에 팔려오거나 혹은 뽑혀왔을 테니까! 하지만, 사실이야! 물론, 순수한 호의는 아니야. 우리 같은 수습사원에겐 봉급이 전혀 없거든! 가족들에게 보낼 수 있는 것도 없고!”

“...”

“하지만, 양고기와 치즈 그리고 쌀밥은 넉넉하게 먹을 수 있지! 일을 하려면 제대로 먹어야 하니까!”

“...와!”

그 말에 탄성을 지르며 두 눈을 번쩍거리는 아이들, 봉급이 없지만 쌀밥에 고기를 넉넉히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북쪽에선 어느 정도 먹어주는 직업이다. 그 반응에 소녀도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갤 주억이며 말을 이어나간다.

“이곳에서 3년 간, 목장의 사원들은 너희들을 태도를 보고 정식 사원으로 삼을지 아닐지 결정할 거야. 도중에 탈락하면 밖으로 나가야 될 거고.”

“...”

“혹시 나가고 싶은 애들은 지금 말해. 강제성은 없어. 보육원이나 집으로 보내줄 테니까. 나가고 싶은 아이 있니?”

도리도리 젓는 아이들, 그 모습에 험악하게 생긴 운전기사가 버스에서 내리며 빙긋 웃는다.

“젤랴. 너무 애들 기강 잡는 것 아니냐?”

“저도 이제 조장이니 기강 잡을 만하죠! 그리고 제 역할인데요! 자, 그럼 한 번 목장에 대해 안내해 줄게. 아니, 그 전에 한 번 씻고 작업복을 입어야겠지?”

주근깨 가득한 얼굴로 활짝 웃으며 빨간머리의 소녀는 따라오라는 듯이 손짓하며 저 멀리에 있는 건물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2.

숙소의 샤워장에서 몸을 씻고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뒤, 아이들은 다시 버스를 타고 내리며 목장 곳곳의 시설들을 견학했다.

목장의 일은 아이들의 생각보다 훨씬 전문적이었다. 축사 관리, 양젖 짜기, 양털 깎기, 목초지 관리, 풍력 발전기 관리, 양목견 관리, 치즈 공장과 분뇨 처리 작업장... 그 작업들은 대부분 어른들 1명이 관리감독하고 나머지 인원들은 10대 초중반의 아이들 7~8명이 보조하고 있었다.

그렇게 저녁 시간까지 목장의 주요 시설들을 돌아다니며 둘러본 뒤, 젤랴는 마지막으로 ‘식당’이란 목재 현판이 걸린 작은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

“...꿀꺽.”

식당에 들어서지는 않았지만 아이들은 벌써부터 안쪽에서 풍겨오는 요리 냄새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실제로 양젖 발효 공장에서 양젖유와 요구르트, 치즈를 시식용으로 ‘좀 많이’ 먹은 것 빼면 아이들을 쫄쫄 굶었다.

뒤에서 들려오는 침 넘어가는 소리에 젤랴는 쓰게 웃곤 몸을 돌려 입을 열었다.

“자, 이 시간 이후로 너희들은 각자 조를 배정 받고 흩어져서 선배들에게서 일을 배우게 될 거야. 한 조마다 7~8명의 조원이 있고. 이번에 온 너희들 10명까지 총 80명가량이 있지.”

“...”

“앞으로 3년 동안, 이곳에서 지내게 될 거야. 태도가 불량하거나 너무 일을 못하면 그전에 해고될 수도 있겠지! 실제로 매년 10명 정도가 해고돼. 지금 이 중에서도 몇 명은 해고될 수도 있고.”

해고된다는 말에 마냥 신나서 들떴던 아이들의 분위기가 살짝 가라앉는다. 그에 붉은 머리의 소녀는 쓰고 있던 밀짚모자를 벗으며 빙긋 웃는다.

“그래도 입사하는 날에 해고 걱정을 하는 건 좀 그렇지? 일단 오늘은 이곳에 온 걸 축하하자고! 냄새를 맡고 있어서 예상했겠지만 오늘 신참들이 온다고 해서 특식이 준비됐거든!”

이번도 앞장서서 식당에 들어서는 젤랴, 그에 나머지 아이들도 서둘러 따라 들어갔다.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보이는 것은 1자로 쭉 뻗은 테이블 몇 개와 거기에 앉아있는 수십 명의 아이들과...

“우, 우와아아...!”

각 테이블마다 오른 커다란 양이 통째로 구워진 바비큐와 각양각색의 요리들.

생전 처음 보는 호화로운 식사 풍경에 아이들이 넋이 나간 채로 바라보는 가운데, 식당에서 유일하게 어른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 자연스럽게 아이들의 시선이 쏠린다.

깡마른 체격의 남성

푹 꺼진 양 볼이 만들어내는 짙은 음영은 언 듯 보면 북한의 전형적인 못 먹은 빈민 같았지만, 포마드 스타일의 깔끔한 머리칼과 고급스런 안경 뒤의 반짝이는 두 눈은 그를 빈민이 아닌 지적인 엘리트 관료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신입 수습생 여러분 반갑습니다! 전, 이곳에서 일을 총괄하고 있는 대표 김명섭이라고 합니다!”

신입들을 향해 반 존대로 인사를 건네는 남자, 남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에 앉은 아이들은 우레같이 박수를 친다. 새로 온 아이들이 살짝 긴장하는 가운데, 그는 5분 남짓 짧은 연설을 한 뒤에 고갤 돌려 자기 옆에 앉아있었던 소년소녀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자, 그럼 다들 맛있게 먹고 내일 보도록 하죠! 환영파티가 끝난 뒤, 각 조장들은 자기가 맡을 아이들을 인솔해서 가도록 하세요! 알겠습니까?”

“네! 대표님!”

조장으로 보이는 한 청년의 씩씩한 대답에 그는 입구 쪽으로 가서 새로 온 아이들과 악수하고 어깨를 한 번씩 두드렸다. 그렇게 한 명씩 악수를 나누다가...

“...음? 이번 친구는 되게 수줍음이 많나보네요? 이름이 뭔가요?”

한 아이 앞에서 멈춰 섰다. 유달리 바짝 굳어있는 아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잘 구분이 가질 않았다. 그의 질문에 아이는 당혹스런 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하... 한새벽이요.”

“그래요. 새벽군, 긴장 풀어도 되요. 이곳 애들이 잘 대해 줄 거니까.”

가볍게 어깨를 두드린 후, 그는 남아있는 아이들과도 인사를 나눈 후 식당 밖으로 나갔다. 아이들의 시선이 신참들에게 쏠리고, 테이블에 앉아있는 또래보다 큰 소년소녀들이 하나씩 나와서 새로 온 아이들을 하나씩 각자 테이블로 데려간다.

“넌, 날 따라와.”

그렇게 마지막까지 선택 받지 못한 아이를 향해 젤랴는 따라오라는 듯이 한 쪽 테이블로 움직였다. 젤랴가 테이블 앞으로 다가오자마자 환대하는 아이들, 그렇게 자기 옆에 신참을 앉힌 뒤 붉은 머리의 소녀는 바로 그 옆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자, 우리 치즈조의 신참이다! 새로운 동료에게 박수!”

-짝짝짝짝!

“너무 비실비실한 것 같은데...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이사님도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던데.”

그에 아이들이 건성으로 박수를 치는 가운데, 한 여자아이가 불만스럽게 말하자 젤랴는 쓰게 웃었다.

“김주애, 너도 처음 올 땐 이랬어.”

“아니, 언니도...”

“불평하지마. 이제 우리 조원이니까. 그나저나 신참? 자기소개 한 번 해야지?”

고갤 돌려 젤랴는 막내 조장인 자기에게 떠넘겨진 신참을 바라보았다. 목덜미까지 내려오는 단발머리칼의 아이, 신입들은 다들 꾀죄죄했지만 이 아이만큼은 달랐다. 부잣집 자제의 티가 난다고 해야 하나?

좀 초췌해보이긴 했어도, 반짝이는 검은 머릿결에 보드라운 살결은 잘 자란 티가 났다.

게다가 행동 또한 특이했다. 목장을 보며 감탄하기 바빴던 다른 신참과는 달리, 이 아이는 왠지 좀 시큰둥하고 무덤덤해 보였다. 물론, 얼굴은 항상 은은한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런 젤랴의 재촉에 신참은 살짝 난처하단 웃음을 흘리며 나지막이 대꾸했다.

“아하하, 네. 반가워요. 한새벽이라고 해요.”

그 목소리에 젤랴와 주애라는 소녀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외형으로 봤을 땐 남자인 여자인지 잘 구분이 가질 않았는데, 살짝 허스키한 목소리를 들어보니 확실히 소년 같았다.

“새벽아, 넌 몇 살이야?”

“에, 중1이니까 만 13살 정도 되겠죠?”

“내가 1살 더 많네?”

빙긋 웃으며 말하는 젤랴, 그렇게 대화가 이어지는 가운데 다른 테이블들은 식사가 시작된다. 그에 아이들이 살짝 눈치를 보자, 붉은 머리칼의 소녀는 먹어도 좋다는 듯이 손짓한다. 그 허락에 음식 앞에서 테이블에 앉은 아이들이 전투적으로 요리에 포크를 뻗기 시작한다.

다른 애들과는 달리 어쩔 줄 몰라하는 신참 대신에 젤라는 포크와 접시를 들었다.

“자자! 이것도 먹어! 선지와 치즈로 채운 양 내장 순대야! 여기서 나오는 치즈와 선지로 가공해서 만드는 거지. 이것도 맛있어. 양 치즈 스프!”

접시 위에 차곡차곡 쌓이는 요리들, 젤랴가 가득 담아준 요리에 신참은 난감하다는 듯이 웃으며 몇 점을 깨작이다 몇 분도 안 돼서 포크를 살포시 내려놓는다. 먹는데 정신이 팔린 다른 아이들은 몰랐지만 신참을 주시하고 있던 젤라는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왜 그래? 맛없어?”

“하하, 아뇨. 맛이 있는데, 속이 좀 더부룩해서요. 천천히 먹으려고요.”

컵에 탄산음료를 따르고 홀짝이는 신참의 모습에 젤랴는 포크에 있는 양순대를 양 볼에 가득 쑤셔 넣으며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좀 잘 살았던 것 같네.”

“...제가요?”

“응, 이런 음식들 앞에서 반응을 보면 뻔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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