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목장 체험 학습 >
그 모습에 젤랴는 정신을 차렸다. 새카만 머리칼은 아예 하얗게 변했고 감고 있던 충혈된 두 눈은 자줏빛 홍채가 번들거렸지만... 분명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귀신이 아니다.
“너...너! 누구야!”
“쉬잇! 다른 사람들 깨잖아요! 아오, 진짜... 코피도 터졌네. 어떻게 사람이 다짜고짜 주먹부터 날려요?!”
왼손으로 코를 감싸며 진정하라는 듯이 오른손을 뻗는 신참, 실제로 양털반 쪽 내무반에서 부스스한 얼굴 하나가 스윽 나오기에 젤랴는 미안하다는 듯이 손을 들었다. 그 뒤, 나뒹굴었던 신참은 코피가 흐르는 코를 감싸 쥔 채로 일어서며 입을 열었다.
“자기소개 시간에도 말했다시피 한새벽이랍니다.”
“그 머리칼하고 눈동자는 뭐야?! 그리고 도대체 뭐하고 있기에 손을 들고 있었어!?”
“일단, 이게 제 원래 머리칼이에요. 검은색 머리카락은 염색한 거고요.”
“염색?”
“네, 눈동자도 아까 전엔 검은색은 서클렌즈 낀 거였고. 웬만하면 계속 끼겠는데 너무 뻑뻑해서...”
오른쪽 호주머니에서 플라스틱 렌즈통을 보여주는 소년, 그에 그녀는 좀 진정할 수 있었다. 확실히, 자기가 아는 신참이 맞았다. 물론, 복도 한복판에서 난데없이 손바닥을 쫙 펼친 채 위로 뻗은 건 이상하지만 말이다.
괜히 오해했다는 머쓱함에 그녀는 건방진 신참의 머리통에 꿀밤을 강타했다.
“켁! 아니, 왜 또...”
“아이씨, 깜짝 놀랐잖아! 쬐끄만게 그냥...”
억울하단 표정으로 왼손으론 코피가 흘러나오는 코를, 오른손으론 방금 꿀밤을 때린 머리통을 붙잡는 신참. 조장의 권위를 살려 그녀가 다시 손을 들어 올리자 신참은 건방지게도 발끈한다.
“아니, 누군 쬐끄맣고 싶어서 쬐그만 줄 아나요? 그리고, 저 당신보다 나이 많아요!”
“뭐? 나보다 나이가 많다고?”
“네! 16살, 당신보다 2살이나 더 많죠! 고 1이라고요? 끄으응.”
그 모습에 젤랴는 피식 웃었다.
2살이나 많다고? 웃기는 소리였다. 못 먹어서 발육이 잘 안 됐다고 보기엔 신참의 모습은 너무 보송보송하다. 어쨌든 자신감을 회복한 젤랴는 팔짱을 낀 채, 소매로 코피를 쓱 닦고 있는 신참을 내려다보았다.
“도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던 거야? 그리고 왜 모습은 숨겼던 거고?”
“백발에 자안은 너무 튀니까 위장을 한 거죠. 그리고, 여기서 하고 있던 건... 으으음.”
살짝 말할까말까 고민하는 듯한 신참. 그 건방진 모습에 젤랴가 주먹을 다시 들어 올리자 신참은 한숨을 내쉰 후, 보란 듯이 오른손바닥을 펼치고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곤-.
“푸후우우!”
“?!”
질척질척한 타르 같은 새카만 연기를 오른손 안에 내뱉었다. 손바닥 위에서 사라지지 않고 뭉클거리는 검은색 연기,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젤랴는 순간 움찔했지만 이내 저게 뭔지 깨달았다.
“그... 마법?”
“네, 마법이죠.”
마력 각성자, 그들 중에서도 극소수만 사용할 수 있다는 ‘마법’이었다. 남쪽 Tv방송에서나 볼 수 있는 것. 그에 젤랴가 두 눈을 끔뻑이는 가운데, 가볍게 손을 휘저어 뭉클거리는 연기를 흐트러트린 신참... 아니, 알 수 없는 소년은 어깰 으쓱였다.
“환풍구에 손바닥을 들고 있었던 건, 아래쪽에 있는 사무실과 숙소에 이 <독숨결>을 던지고 있어서 그랬어요. 지금은 보여주려고 색깔을 남겨놨지만 투명하게도 만들 수 있거든요.”
“...뭐?!”
“아니, 제발 조용히 좀...”
이어지는 말에 젤랴는 기겁했다. 독숨결을 뿜어서 아래에 던져 넣었다고? 그에 소년은 다시 한 번 조용히 하라는 제스쳐를 한 뒤, 옷으로 얼굴에 묻은 코피를 스윽 닦곤 피범벅이 된 얼굴로 한숨을 내뱉었다.
“다 이유가 있어서 그래요! 낮이면 다 끝나있을 테니까 그냥 들어가서 다시 자... 아니, 저와 함께 뭐 좀 보러 가실래요?”
“...”
“나름, 이곳에 대해 잘 아신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제가 보기엔 전혀 모르는 것 같아서요. 제가 이런 짓을 한 이유를 보여드릴게요.”
그 말에 젤랴는 입을 꾹 다물었다.
현대판 귀족이나 다름없는 마력 각성자, 그것도 마법을 구사하는 마력 각성자의 제안. 게다가 독숨결을 뱉어대고 있다고 했으니 나쁜 마음을 먹고 이곳에 온 게 확실한 사람이었다. 당연히, 거부하는 게 정상이었지만....
그랬다간 죽이려고 할지도 모른다.
방금 전엔 자기가 주먹을 휘둘러서 쌍코피를 터트리게 해줬지만 상대는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 진지하게 나오면 어떻게 될 지는 뻔하다. 지금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자기에게 조곤조곤 말하고 있지만 수틀리면 죽이려고 할 수도 있다. 그냥 다른 애들을 불러서-.
“시이이이잇...”
그런 그녀의 고민이 이어지고 있을 때, 소년은 갑자기 도마뱀이 쉿쉿 거리는 듯한 소음을 내뱉고 그 오른손 검지에서 보기에도 독살스런 ‘흑자색의 송곳’이 떠오른다. 그리고 검지를 튕겨 환풍구 사이로 쏘아보낸다. 딱 봐도, 그녀를 향한 협박이었다.
...그에 젤랴는 작게 고갤 끄덕였다.
4.
양의 낙원은 여의도 면적 3배 정도 되는 750ha의 거대 목장이다.
그 크기에 걸맞게 8,000마리가 넘어가는 양을 키우고 있으며 지어진 시설 또한 하나가 아니다. 양떼 축사, 양젖 살균실, 치즈 숙성실, 양털 보관소, 풍력 발전소, 관리 사무실, 쉼터용 움막, 유럽식 통나무 별장, 급식실...
그곳에서 일하는 인원만 100명
도심 외곽의 고산지대에 있는 목장인 만큼, 출퇴근이 힘들기에 그 일하는 인원들은 대부분은 평일에 목장 내의 숙소에서 지낸다. 아이들 또한 그곳에서 지낸다.
“~♬”
“...”
휘파람을 불면서 계단을 내려가는 백발 소년, 그 뒤를 따르며 젤랴는 익숙한 곳에서 낯설음을 느꼈다. 저 정체불명의 괴한이랑 같이 움직여서 그런 걸까 생각했지만... 영리한 그녀는 이내 그 낯섦의 이유를 깨달았다.
너무 조용하다.
호스텔 형식의 5층 숙소, 아이들이 머무는 숙소는 맨 꼭대기인 5층이고 나머지 2, 3, 4층은 어른들이 지내는 개인실이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시설인 만큼, 가만히 있으면 어른들이 밤중에 술 마시고 떠드는 것과 Tv소리 같은 것도 들린다.
하지만, 지금은 들리지 않는다.
그 소름끼치는 침묵에 그녀는 방금 전에 들었던 소년의 말-환풍구에 <독숨결>을 밀어 넣고 있었다-을 떠올렸다. 지나가듯이 말했지만... 역시 진짜인 걸까? 그렇게 그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가운데, 어느새 그들은 1층까지 내려와 통제실 쪽으로 향했고-.
“...흐읍!”
그 안을 보는 순간 젤랴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밤에도 어른들 4~5명이 상주하고 있던 통제실, 그곳엔 피를 토한 시신들이 너부러져있었다. 죽기 전에 고통이 심했던 듯, 시신의 두 눈은 튀어나올 것처럼 툭 불거져 있었고 주위의 집기는 난장판으로 어질러졌다.
그 광경에 젤랴는 이를 악물었다.
무뚝뚝하긴 해도 얼굴을 맞대고 보던 사람이 죽었다. 소년이 하도 가볍고 장난스럽게 말해서 넘어갔지만... 이렇게 태연하게 따라갈 것이 아니었다. 내려가면서 본 2~4층도 너무 조용했다. 분명, 사무실처럼 다 죽은 것이겠지. 당장이라도 이걸 다른 이들에게 알려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컴퓨터는 한 번도 만져보지 못했고 기껏해야 전화기 정도 만져봤다. 근데, 여기 전화기는 내부망 전화기이기에 어떻게 외부망으로 연락하는지 몰랐다. 2년 동안 여기서 지냈고 애들 중에선 나름 힘이 있는 조장 계급이었지만...
지금 보니, 자신은 정말 놀랍도록 아는 게 없었다.
치즈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곰팡이가 피면 안 되는 것인지는 알았지만 말이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그나마 능동적인 행동은 따라다니며 기회를 엿보는 것뿐. 그렇게 그녀가 무기력함을 느끼고 있는 사이-
“어디~ 비밀번호가 뭘까요~”
정체불명의 소년은 ‘이곳을 아주 잘 알고 있다.’는 듯이 아주 자연스럽게 컴퓨터를 다룬다. 자판을 몇 번 두들기자 CCTV화면이 나오고 있던 모니터가 꺼지고, 이어서 소년이 전화기를 들고 어떤 번호를 누르자-.
“아아, 여기는 검은 양.”
-어, 그래. 거긴 어떻냐?
전화가 연결되었다.
2년 동안 이곳에서 지낸 그녀도 모르는 일을 순식간에 해낸 그 모습에 살짝 허탈했지만 그래도 젤랴는 귀를 쫑긋하며 혹시 뭐라도 걸릴까 집중했다.
“안쪽 보안 시설을 꺼놨어요. 이 전화를 끝으로 밖에 있는 통신 기지국 장비도 망가트릴 테니까, 외부에 알려지는 거는 걱정 안 해도 되요.”
-오케이~ 그럼 5분 뒤에 우리가 입구 쪽의 경비들을 처리할게.
“아, 근데 일이 좀 꼬인 것 같아요.”
-엥? 꼬여?
“이전 조직들처럼 여기 두목도 마력 각성자인데 평범한 놈이 아니에요. 놈의 근처에서 시체와 고통의 냄새가 풀풀 풍겨요.”
-....
“이번 미르에서 겪었던 기운과 비슷한 걸보면... 코드 108을 숭배하는 것 같은데요?”
코드 108? 미르? 그리고 두목이 마력 각성자? 도대체 뭔 소리인지 감을 못 잡을 때, 기겁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들려왔다.
-아니, 진짜야?
“제 감각 아시잖아요?”
-시발, 돌았네. 뭔 폭력 조직 하나에 마력 각성자 하나씩은 있냐고?! 그것도 모자라서 이번엔 악신 숭배자? 이건, 우리가 할 게 아니네. 야, 이건 그냥 째자. 증거만 모은 뒤에...
“근데, 이미 저질렀는데요? 놈이 자릴 비운 사이에 자고 있는 부하들을 몰살시켰어요.”
-아...
“어차피 경험 쌓으러 온 거잖아요. 당신하고 저 정도면 충분히 조질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빨리 오세요. 이놈과 상장의 연결고리 찾으면 100% 약점이니까.”
-...
“설마, 용병 사업하겠다는 사람이 좀 위험하다고 도망치는 건 아니겠죠?”
-에효, 그래. 간다! 가!
그렇게 누군가와 통화를 마치고 태연하게 전화를 끊는 소년, 이어서 사무실 탁자 위에 있던 곽 티슈를 뽑아 얼굴에 묻은 코피를 닦는다. 그 동안에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스른 젤랴는 각오를 다지며 말을 꺼냈다.
“...너, 뭐하려는 거야.”
“네?”
“왜 여기 와서 사람들을 죽이려는 거냐고. 그것도 마법까지 쓰는 마력 각성자가.”
그 질문에 소년은 한손으로 머릴 긁적이며 난처한 표정을 짓고 젤랴는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아, 처음 봤을 때부터 뭔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말투를 들어보니 알겠어. 너, 아예 북쪽 말투가 없네. Tv를 많이 봤다고 해도 그럴 순 없지. 너, 남쪽 사람이지?”
“음, 날카롭네요.”
한 방 먹었다는 듯이 웃는 소년, 그 대답에 젤랴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남쪽에서도 귀족 취급을 받은 사람이 왜 여기 와서 이런 난리를 치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를 뿌득 갈며 그녀는 얼굴을 감싼 손을 내리고 소년을 응시했다.
“여긴 평범한 곳이 아니야. 이런 큰 사업체를 두고 폭력조직들이 가만히 둘 것 같아? 분명 여기는...”
“폭력조직, 그것도 군벌과 직접 연관이 있는 곳이죠.”
그 대꾸에 젤랴는 움찔했다. 설마 군벌? 군벌이 이곳 배후에 있을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고갤 끄덕였다.
“...그래.”
“마법을 쓰는 각성자라고 해도 잘못 건드렸다고 말하고 싶은 것 같던데... 전 다 알고 건드린 거예요. 아, 걱정 마세요. 애들은 안 건드려요.”
태연한 그 대꾸에 젤랴는 순간적으로 ‘욱’하며 자기의 처지를 잊고 언성을 높였다.
“안 건드린다고? 아니, 주인이 바뀌게 생겼는데 애들이 멀쩡히 있겠...”
“이곳이 마음에 드나 봐요?”
도중에 말을 끊는 소년, 그리 크지 않고 나지막했지만 그 음성은 그녀의 고성을 도중에 덮어버렸다. 그 상식을 무시하는 현상에 젤랴는 다시 상대가 ‘마력 각성자’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입을 다무는 가운데 소년은 생글생글 웃는다.
“그래도 어느 정도 진실에 접근한 것 같지만, 역시 이곳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진 않군요! 폐쇄된 환경의 폐해라고 해야 할까요? 양의 낙원? 이곳이 진짜 양에게 낙원일까요? 양의 입장에선 그저 양털이 깎이다가 도살장에 끌려가기만 하는데도?”
“...”
“아직 다 보여준 게 아니니까 따라오세요. 후회하지 않을 거니까.”
태연하게 사무실 서랍장을 열고 열쇠 하나를 꺼내 밖으로 나가는 소년, 그에 젤랴도 살짝 망설이다가 결국 그 뒤 따랐다.
5.
대답을 끝으로 백발 소년은 바쁘게 움직였다.
꺼낸 열쇠로 옥상까지 올라가서 어떤 안테나를 콘센트를 뽑아버리고, 이어서 밖에 주차장에 내려와 대기 중인 1톤 트럭에 시동을 걸고 탑승했다. 그리고, 젤랴 또한 자신의 무력함을 실감하며 그 옆에 올라탔다.
“...입구로 가는 거지?”
“넵, 제 동료들이 올 거거든요.”
그에 젤랴는 조심스럽게 침을 꿀꺽 삼켰다. 몰래 양을 훔치러 오는 빈민들을 막아야 하기에 목장은 외곽엔 곰덫을 깔아놓았고 그 입구에는 소총을 든 어른들이 경비를 선다. 만약, 자기가 소리를 지른다면 잘 하면 이걸 막을 수...
“이곳 경비 수준을 보니 벌써 정리했을 거예요. 제 동료들도 만만치 않거든요.”
그런 그녀의 생각을 알고 있다는 듯이 나지막하게 말하는 백발 소년, 그에 젤랴가 굳어졌지만 소년은 아는지 모르는지 휘파람을 불며 태연하게 입구로 운전했다. 저 멀리 보이는 입구 초소, 하지만 굳게 닫혀 있어야 할 정면의 철문은 왜 인지 활짝 열려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
너부러진 어른들이 보였다.
하나 같이 소총을 쥔 채로 쓰러진 시신들, 총은 쏘지도 못한 것 같았고 얼굴이 하나 같이 고통에 일그러져 있었다. 그에 젤랴가 창백한 얼굴로 침을 꿀꺽 삼키는 가운데-.
-오, 왔냐?
대문 옆, 3층 초소에서 윗 창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상체를 내밀며 손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