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참 잘했어요! 그러니까... >
3.
내가 입원해 있는 병원은 서울 쪽의 대학 병원이었다.
양우영의 말로는 원래 강원도 쪽 병원에 입원했는데, 아가씨가 힘을 써서 서울로 병원을 옮겼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내 옷을 분실한 거지. 어쨌든 병원 밖으로 나가면서 스마트폰으로 식당을 검색하던 양우영이 아가씨에게 전화를 걸고 택시를 타고 한 15분 정도를 움직였다.
그렇게 택시 타고 이동한 그 집은...
“거참, 짠돌이시네요. 고작 이런데 올 거면서 밥 산다고 생색낸 거예요?”
“뭐 임마? 아침을 뭘 기대한 거야?”
순댓국집이었다. 나름 유명한 집인 것 같긴 한데 좀 깨네. 그런 내 대꾸에 양씨가 성을 내는 가운데, 주차장에 검정색 벤츠가 멈춰 섰다. 그리곤 뒤쪽 문이 열리며 아가씨가 내린다. 10일 만에 보는 우리 아가씨는... 여전히 이마가 맨들맨들한 마빡이었다. 음, 평범하군.
“몸은 괜찮냐?”
아침에 약간 저혈압이 있는 듯, 평소보다 힘없는 얼굴로 묻는 아가씨. 그에 난 씨익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네, 피로가 쌓여서 쓰러진 거지 멀쩡해요. 쌩쌩하답니다!”
그런 내 모습에 고갤 끄덕이다가... 아가씨는 내 복장을 보곤 얼굴을 꿈틀거린다.
“왜 환자복 입고 나왔어?”
“옷이 없어서 그냥 나왔거든요. 이전 병원에 세탁 맡겼다가 잃어버린 듯?”
내 대답에 골치 아프다는 듯이 주먹을 이마에 대고 한숨을 내뱉는 아가씨, 그리곤 아가씨는 지갑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더니 운전석의 기사에게 건네줬다.
“일훈씨, 미안한데 근처 백화점 가서 저 녀석 옷 좀 사다주세요. 체형은... 대충 보니까 내꺼 보다 한 치수 작게 하면 되겠네요. 한 30~40분 있다가 나올 테니 부탁드릴게요.”
“알겠습니다. 아가씨.”
그 지시에 기사가 끄덕이고 차를 움직여 사라진다. 근데...
“지금 백화점 문 안 열지 않나요? 아직 8시도 안 됐는데.”
“백화점 VIP카드야. 좀 일찍 가도 카드 보여주면 양해해 줄 거야. 일단, 배고프니 밥부터 먹자...”
거참, 백화점 열기도 전에 쇼핑이라니... 재벌집 아가씨 답구만?! 순댓국 먹으러 온 건 재벌집 아가씨답지 않지만 말이지. 어쨌든 안으로 들어가자 식당은 아침인데도 꽤나 북적북적했다. 순댓국을 3개를 시키고 한 구석에 앉자 얼마 지나지 않아 식사가 나온다.
“그나저나 개성에서 아주 미친 듯이 날뛰었다면서? 폭력 조직 5곳을 박살내버리고 순수 사망자만 400명이 넘어간다고.”
“에, 뭐... 그렇죠?”
“이 호구 같은 게 수백 명을 몰살시키다니.”
자기 몫의 순댓국에 고추 다데기를 한 스푼 넣고 휘저으며 날 부스스한 눈으로 흘겨보는 아가씨, 우리 아가씨가 좀 정의로운 편인데... 그것 때문에 불편하신가? 그에 내가 어색하게 헤헤 웃자 아가씨는 한숨을 내뱉는다.
“스너프 비디오 보니까 죽인 놈들이 X같은 새끼들이라는 건 알겠는데... 좀 작작해라. 너무 사람을 죽이면 거부감이나 경계심도 얻게 되니까.”
“넵.”
“아, 그리고 강수영 사장님께 전화 걸어서 감사하다고 해. 선물도 하나 보내고.”
...난데없이 싸장님이 왜 나오냐? 생각지도 못한 언급에 눈썹을 동그랗게 올리자 아가씨는 순댓국 국물을 수저로 한 모금 먹고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기습으로 수백 명을 죽인 이능력자인데 경계 대상이 아니겠어? 상식적으로?”
“에... 경계할 만하겠죠?”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래서 혹시 몰라서 강수영 사장님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했지. 마음 같아선 재벌가 쪽의 인맥을 사용하고 싶지만... 다른 형제자매들에게서 태클이 들어올 수도 있거든. 우리 집안 내 사정이 좀 지저분해서 나한테 견제가 많이 들어와.”
쓰게 웃으며 국에 공기밥을 말곤, 아가씨는 한 입 호쾌하게 떠서 먹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나름 개인적인 인맥을 만들어두고 있긴 하지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별로 없고. 그래서, 정말 죄송하지만 도와달라고 사정 설명하면서 도움 요청했지. 뭐, 이럴 줄 알았으면 연발치료?를 더 할 걸 하면서 투덜대시곤 전화를 끊었는데... 그 늬앙스를 보니까, 아마 도와주셨을 걸?”
“하, 하하...”
연발치료를 보니 진짜네. 따흐흑, 정말 강수영 싸장님, 아니 강수영이 아니라 ‘빛빛빛’이시구나. 감읍할 따름이다. 나중에 한 번 전화해야지. 할 수 있으면 방탄복 입고 지하 상점도 방문해보고. 그나저나 어떤 걸 선물로 들고 가야하나? 좀 난감하네.
그렇게 싸장님에게 뭘 선물해야할지 고민하며 순댓국을 퍼먹고 있는데 양씨가 깍두기를 우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참, 아가씨. 그나저나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뭐가 궁금해요?”
“우리 사정을 듣자마자 국정원에게 하청으로 들어가라고 제안했잖아? 코드 108의 신도를 발견한 걸 국정원이 꾸민 걸로 하고.”
“네, 그랬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어? 지금 생각해보니 국정원이 그런 제안을 받을 거란 걸 알고 있던 것 같던데.”
양씨의 질문, 그에 아가씨는 멈칫하더니 티슈로 입가를 닦고 입을 열었다.
“이번에 정부에서 북쪽에 투자하는 게 미쳤다고 말한 거 알죠?”
“그래, 도저히 수지타산 안 나오는 시도라고 했었지. 내가 보기에도 그랬어.”
“그것에 대해서 알아봤죠. 할아버지에게 직접 물어도 봤고요. 그리고, 그 이유를 알아냈어요. 그거랑 관계된 이야기에요. 야, 너도 들어. 북쪽이랑 연관된 이야기니까.”
“넵.”
아가씨의 말에 내가 밥 퍼먹던 걸 멈추고 부동자세를 취하자, 아가씨는 주위를 한 번 살펴본 후 목소리를 낮춘 채 속삭였다.
“일단, 지금 북쪽을 개발하고 흡수 시도를 한다는 게 미쳤단 걸 정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억지로 하고 있는 거예요.”
“어째서?”
“오크들 때문에. 정확히 말하면 오무혁의 약속 때문이죠.”
4.
생각지도 못한 오무혁이란 이름
난데없이 이미 죽은 양반의 이름이 왜 나오나 싶었는데, 양씨는 ‘아하!’하며 뭔가 눈치를 챈 기색이다. 그렇게 나만 이해를 못하고 있는 모습에 아가씨는 깍두기를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설명하듯 말을 이어나간다.
“오무혁이 기적을 일으켰어요. 죽은 수백 명의 오크들을 되살렸고, 룬 수호자와 비견될 만한 엄청난 괴물 또한 혼자서 쓰러트리곤 장렬하게 쓰러졌죠. 전 세계에 그 영상이 방영되면서 그는 오크들의 성자가 되어버렸어요.”
“하긴, 요즘엔 전쟁 군주가 없는 몇몇 아프리카의 군벌 오크들이 오무혁의 사진을 깃발에 프린트해서 휘두르고 다니기도 하니까.”
동의하듯 고갤 끄덕이는 양우영, 그에 난 실소했다. 거참 오무혁이 성자가 되다니? 어처구니가 없...
아니, 생각해보니 성자가 맞네.
실제로도 세로쉬를 만나서 직접 세례까지 받았으니까. 잠시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데, 마빡 아가씨가 양우영의 대답에 고갤 끄덕이며 작게 한숨을 내뱉는다.
“예. 당연히, 그와 한 약속의 무게가 달라졌죠.”
그에 양우영이 밥을 먹던 걸 멈추고 생각에 잠긴 가운데, 아가씨는 젓가락으로 바닥을 가리키며 얼굴을 구겼다.
“이번에 새로 취임한 뉴 송파구의 시장, ‘제롬’이 한국 정부에 은밀하게 메시지를 보냈어요. 지하 오크들의 준동이 심상치 않다고. 그냥 어물쩡 넘어가기엔... 터질 것 같다고.”
“터질 것 같다...”
양우영이 말끝을 흐리자 그녀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갤 끄덕인다.
“미국에서 오크들의 세력이 엄청난 거 아시죠? 그들의 지원과 자본이 대규모로 밀려오고 있어요. 게다가 아프리카에 있는 수많은 전사와 기사급 오크들이 대한민국으로, 정확히 말하면 미궁을 통해 오고 있다고 하더군요.”
“...미궁을 통해서?”
“네, 지하에 가라앉은 도시. 거기에 뚫린 미궁은 전 세계가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미궁 1층으로 내려갔다가 위로 올라가는 통로가 나오면 올라가길 반복하는 거죠. 대한민국이면 정착하는 거고.”
“허, 그런 방식으로 이동할 줄은... 어디로 올라갈지 모르는 복불복일 텐데 말이야. 저층이라고 해도 미궁인 만큼 위험할 텐데?”
“그렇게 해서라도 메시아가 강림했던 땅을 밟아보고 싶다는 게 오크들의 심리겠죠.”
할 말이 없었다.
지하 7km 아래에 가라앉은 이전 송파구, 그곳에 있는 미궁의 입구를 통해 오크들이 몰려오다니... 그런데도 뉴스엔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았지? 양씨가 생각에 잠긴 가운데, 아가씨는 국밥을 연거푸 퍼먹고 트림 같은 한숨을 내뱉는다.
“아무튼, 지하에 가라앉은 송파구 지대에는 이미 오크들이 빠르게 증가하기 시작했어요. 안 그래도 미궁과 연결된 지하 송파구는 무법지대라 전투가 잦았지만 이젠 다른 종족들이 쨉도 못쓰고 있다는 군요. 정부는 이 사실을 비밀로 하고 있고.”
“음...”
“그 여파로 모르칸쉬의 세력이 엄청나게 강해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당신은 지하 이종족과 교류가 있으니 대충 알고 있겠죠?”
이어진 아가씨의 말에 양우영의 얼굴이 더 심각해진다. 모르칸쉬? 그게 누군데? 아니, 왜 자꾸 나만 모르는 것 같냐? 그런 내 기색에 아가씨는 다시 한 번 더 설명을 해주신다.
“원래 뉴 송파구에선 3명의 오크 전쟁 군주들이 있었어요. 오무혁, 제롬, 모르칸쉬. 제롬은 이번에 새로운 뉴 송파구의 시장이 됐고, 모르칸쉬는... 세로쉬 교단을 업은 강경파 오크들의 수장이에요. 그가 이끄는 세력은 한 마디로... 나치에 가깝죠.”
“나치요?”
“네, ‘오크가 최고, 나머지는 열등종이다.’라고 주장하는 놈들이랍니다.”
“그럼 대충 오크식 히틀러네요?”
“뭐, 그렇게 이해해도 되겠죠.”
내 대답에 고갤 끄덕이는 아가씨. 거참, 오크식 히틀러라니... 세상 참 말세구만! 그런 놈이 점점 득세하고 있다니 한국정부가 피가 마를 만하네. 지하에 살인마들이 득시글거리는 느낌이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뉴 송파구의 오크들을 함부로 제지하는 것도 힘들 거다.
미궁에서 나오는 각종 진귀한 부산물들은 거의 대부분 오크들의 하청을 줘서 구하는 거니까. 이건, 싸장님의 물약 상점에서 알바해서 나도 잘 알고 있다. 뉴 송파구의 오크들을 배척하면 안 그래도 미르가 망가져서 휘청거리는 마력 관련 산업에 종지부를 찍는 결정일 거야.
...진짜 정부 입장에서 생각하니 진퇴양난이네.
토벌하자니 마력 산업이 고사하고, 그렇다고 내버려두자니 위험이 크고. 그렇게 나도 좀 심각성에 대해 인지하고 있을 때, 아가씨는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쉰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대한민국 정부가 선택한 거죠. 그 쌓이는 힘을 북쪽을 통해 방출하도록, 그리고 지상에서 소모하도록 말이에요. 겸사겸사해서 그 오크들의 힘을 이용해서 북쪽을 개척해보기로.”
“흠, 그럼 언제 지상으로 진출할 것 같아?”
심각한 얼굴로 질문하는 양우영, 그에 아가씨는 잠시 미간을 찡그리며 고민하더니 국밥 그릇을 들고 남은 걸 완샷하곤 어깨를 으쓱인다.
“글쎄요. 1~2년 이내? 지하에 모인 오크들을 훈련시키고 있다고 해요.”
“하아, 엄청 빠르네. 나도 더 빨리 준비를 해야겠구만. 아오...”
신경질적으로 순댓국을 퍼먹는 양우영, 그 사이 아가씨는 냉수를 컵에 따르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이런 배경을 알고 있으니까 국정원에게 그런 딜을 걸 수 있었던 거죠.”
“...네? 무슨 딜이요?”
“국정원이 이번 일에 나서서 코드 108의 신도를 제압한 걸로 하자고 한 거요.”
아가씨의 말에 난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몰라서 멀뚱멀뚱하게 바라봤다.
아니, 이거랑 국정원에 건 딜이랑 뭔 연관 관계가 있는 거지? 연이은 모르겠다는 반응에 아가씨는 좀... 짜증이 나신 것인지-.
“하아.”
훤히 드러난 이마를 오른손바닥으로 탁 치며 깊은 한숨을 내뱉는다. 그리곤 손을 떼 냉수가 든 컵을 들고 유치원 선생처럼 차근차근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