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1화
“음, 심연이라는 곳이 너무나도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속단을 내릴 수 없다만…… 내가 겪었던 곳은 중력이란 개념이 굉장히 난잡하게 되어 있었다.”
“중력?”
“그래, 이렇게 지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입체적인 공간이었지. 거대한 살점들이 뒤엉킨 채 둥둥 떠다녔고, 중력이 그 살점 하나하나에 작용했어. 그러고 보니 여기엔 괴물들도 없군? 거긴 괴물들이 널렸지. 끝없이 몰려왔었다.”
과한 긴장을 풀 겸, 김가트는 주위를 경계하면서도 본격적으로 자신의 심연으로 들어갔던 썰을 풀었다. 그에 다들 경청하고 또 툭툭 대꾸하는 가운데-.
“그러고 보니 다들 이곳에 왜 온 거지?”
“……뭔 소리죠?”
“아니, 심연 교단 토벌이잖아? 마주치기만 해도 불쾌해지는. 웬만해선 이런 일을 맡기 싫어할 텐데? 정부에서 각자 뭔가 제시했을 거 아니야?”
왜 이곳에 오게 됐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자모란의 말에 대답하며 김가트는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어깰 으쓱였다.
“참고로 난 3달 전 미르의 일 때문에 왔다. 정황상, 닥터 크림슨이 유혈의 신을 배신한 나를 노리고 유혈 사태를 벌인 것이라고 하더군. 솔직히, 나도 일방적인 피해자긴 한데 사건이 사건인 만큼 이 작전을 받아들이면 별다른 문제를 안 삼겠다기에 왔지. 일종의 사법 거래야.”
김가트가 이곳에 끌려온 이유는 ‘미르의 유혈 사태’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 때문이었다. 파악된 몇 가지 증언들을 통해 국정원은 닥터 크림슨이 김가트를 타깃으로 노리고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파악했고, 김가트에게 회유와 동시에 은근히 추궁했다.
그런 김가트의 말에 다른 이들 또한 가볍게 대꾸했다.
“전 심연 공간에 대한 조사를 위해서 왔어요. 물론, 위험을 무릅쓴 만큼 연구비 지원과 지상에서의 자유로운 무장, 추가로 공간 계열 마법 장비와 마법서를 약속받았죠.”
“하하, 난 국정원 출신인 만큼…… 그냥 국가가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네. 물론, 돈은 좀 받기로 했지. 골디안 금화로 말이야.”
-전 위에서 시키는 대로 왔습니다. 국가에 대한 헌신, 그게 제 목적입니다.
차례대로 자모란, 정의율, 인 중사의 답변. 마지막 남은 서예린은 짧게 대답했다.
“1급 마법 장비 1개.”
“오, 어떤 거지?”
“이 스카프.”
목에 두른 연기 같은 회색의 스카프를 가리키는 서예린, 마음에 든다는 듯이 그녀는 단검을 쥔 손을 뻗어 스카프를 만지작거렸다. 그런 서예린의 반응에 김가트는 쓰게 웃었다.
“1급 마법 장비면…… 비싼 값이긴 하군. 하지만, 아무리 좋은 장비라곤 해도 목숨을 걸 만큼 소중한 건 아닌데 말이지.”
“……?”
“지상에선 그렇게 좋은 장비에 목숨을 걸 필요 없다는 거다. 그런 장비 같은 게 없어도 목숨의 위협 없이 잘 살 수 있으니까.”
이해할 수 없다는 서예린의 표정에 조언하는 김가트, 그에 서예린은 알겠다는 표정 대신 특유의 ‘뚱한 표정’으로 김가트의 위아래를 훑는다. 그 시선에 섞인 ‘아니꼽다.’는 감정에 김가트는 멈칫했다가 이내 자기의 모습을 생각하곤 피식 웃었다.
“하긴, 내가 할 말은 아니긴 하지.”
그 크기를 특정할 수 없는 광대한 미궁에서 이름을 떨쳤던 광전사-김가트, 그가 걸친 무구들이 평범한 것일 리가 없었다. 몇 가지는 ‘유혈의 신’이 직접 선물한 것들이고, 또 몇 가지는 강적들을 상대로 빼앗은 것. 어디에 내놔도 최하 1급 마법 장비 취급을 받을 보물들이었다.
그런 보물들을 마법 장비 착용이 가능한 ‘모든 부위’에 걸쳤다.
서예린 또한 나름 뛰어난 실력에 좋은 장비를 모았지만 모든 부위를 다 감쌀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 모든 걸 갖춘 김가트가 뛰어난 장비에 그렇게 집착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니 좀 아니꼽게 느껴졌을 거다.
“잡담은 이제 그만! 중심에 가까워졌어요!”
작은 지구본 같은 장치를 보던 자모란의 외침. 그에 킬 팀 인원들이 무기를 쥐며 한층 감각을 더 끌어올리는 가운데, 좀 더 농밀한 악취가 진동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서 통로가 끝나며 목적지가 드러난다.
축구장 2~3개는 들어갈 것 같은 널찍한 원형의 터.
그 중심에 3m가 넘어가는 거대한 비석이 서 있었다. 흑자색으로 요요하게 빛나는 오벨리스크 같은 비석이.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 형상이 ‘착시 그림’처럼 3차원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형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찾았군.”
무질서한 심연의 악신, 형성되지 않은 자. ‘네쉬라’의 제단. 그것도 유별나게 강력한 저주가 깃든 제단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심연화 된 그 강력한 제단 주위엔 심연의 괴물들이 없었다. 그 대신에-.
“……?”
성인 남성의 종아리 정도 되는 낮은 깊이의 수조가 펼쳐져 있었다.
심연의 살점과 콘크리트가 뒤엉킨…… 격자형으로 된 수조들. 꼭 염전(鹽田)의 모양과 비슷했다. 그 수조 안에 있는 끈적끈적해 보이는 연보랏빛 점액질 액체가 찰랑거렸고 ‘실지렁이 같은 조그마한 회색 생명체’들이 끝도 없이 뭉쳐서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수조 근처에 ‘살아있는 사람들’ 수십 명이 있었다.
삐쩍 마른 알몸의 인간들, 딱 보기에도 정상이 아니다. 입가와 온몸에 붉은 피를 묻힌 채, 염전 사이에서 쪼그려 앉아서…….
“하악! 하아아악!”
“맛있다. 어이구 맛있다! 우리 대식이가 만든 수육이 아주 실하네!”
-푸드드득! 푸드드드득!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살점을 뜯어먹고 있거나. 혹은 행복한 표정으로 실실 웃으며 얕은 수조 쪽에 쪼그려 앉아서 요란하게 보랏빛 설사를 싸 갈기고 있었다.
“헤, 헤헤헤…… 나도 수육.”
그렇게 설사를 싸던 인간들 중 하나가 비틀거리며 일어서다가 기력이 다했는지 ‘픽!’하고 수조 안에 쓰러지자. 주위에서 설사를 싸고 있던 다른 인간이 실실 웃으며 수조에서 엎어진 인간을 꺼내-.
-뿌드득!
“쩝, 쩝쩝쩝…….”
-푸다다닥! 푸다다다닥! 뿌우우우웅!
그대로 머리를 뜯어내 척추가 달린 머리통을 쩝쩝거리며 먹기 시작한다. 평범한 인간의 치악력으론 불가능한 일, 그리고 평범한 인간의 위장으론 불가능한 섭취량. 동시에 그런 그의 엉덩이에서 요란한 방귀와 함께 보라색 설사가 물처럼 쏟아져서 수조 안으로 들어간다.
“……이런 건, 심연에도 없었는데.”
기괴하고 끔찍한 광경. 다들 말을 못하는 가운데 김가트만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중얼거리고, 정의율은 허릴 숙여 그 끈적끈적한 점액질이 가득한 수조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
그가 손을 넣는 순간, 실지렁이들이 밀려들어 오며 버둥거린다. 정의율은 미세하게나마 놈들이 살을 뜯어 먹고 있다는 것을, 동시에 살 안쪽으로 파고들려고 한다는 것을 파악했다. 그에 그는 손을 빼고 주먹을 쥐어 실지렁이들을 터트리며 입을 열었다.
“자모란 씨, 여기 공간 좌표는 어떻습니까?”
“들어오자마자 구하고 있어요. 넉넉잡아 5분 정도면…… 외부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좋습니다. 일단, 그때까지 적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 경계하며 대기하도록 하죠.”
자모란의 대답, 그에 정의율은 고갤 끄덕이며 법전을 꽉 쥐었다.
당장에라도 이곳을 몽땅 불태워버리고 싶지만…… 혹시 모르니 ‘외부의 지원’을 받아 확실하게 가는 게 좋다. 어차피 이곳을 만든 자는 자신들이 온 걸 모르는 눈치니 확실하게 가자는 판단이었지만-.
-탕!
-타탕!
날카로운 총성이 울려 퍼졌다.
5.
“큭!”
날아든 총탄이 노린 것은 얼굴을 드러낸 정의율이었다. 총탄이 날아드는 순간, 그의 주위에서 푸른 섬광이 번쩍거렸고 이내 그는 얼굴을 붙잡으며 한쪽 무릎을 꿇고 휘청였다. 그 습격에 가장 빠르게 반응한 건, 배틀 슈트를 입은 인 중사였다.
-위이이이잉!
-기가가가가각!
전기톱 돌아가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지며 총성이 들린 곳을 향해 발칸포의 포탄이 쏟아진다. 하지만, 표적에 맞질 않았다. 정확하게 조준했지만 표적의 주위에 탄환이 들어서는 순간, 탄환이 보일 수 없는 ‘불가능한 각도’로 꺾이며 다른 곳에 도탄된다.
-공간 왜곡 기술에 의한 투사체 방어. 고위 타락체로 의심됨.
그 사이, 다른 킬 팀 일행들은 정의율을 호위하듯 중심에 둔 채 각자 전투태세를 갖췄다. 저격을 당한 정의율 또한 정신을 차렸다. 살갗이 찢어져 피를 흘리고 있긴 하지만 머리를 관통하지 못했다. 그런 정의율의 목에 걸린 ‘기묘한 도형의 금빛 묵주’에선 푸른빛이 점멸했다.
초인이 나타난 시대지만 총은 여전히 흉악한 무기다.
아무리 움직임이 빠르다고 한들, 총탄을 보고 막는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고 철갑탄은 초인의 피부도 쉬이 뚫는다. 당연히, 섬에 총기가 흘러들어 갔다는 게 확인된 후에 킬 팀 인원들은 단단히 대비를 해뒀다.
곧바로 정의율은 법전 같은 책을 꽉 움켜쥐며 성서를 소환하려 했으나-.
“으음, 크흑.”
입을 잘 움직이질 못했다.
그런 정의율의 얼굴엔 연보랏빛 핏줄이 울긋불긋 떠올라 있었다. 곧바로 <신의 권능 : 활기>를 사용해서 황급히 전신에 있는 독과 부패를 몰아냈지만, 그 사이에 괴물들의 공격이 시작됐다.
“쭊이ᄅᆞ우!”
“꽑!아아아!”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없었던 괴인들이 곳곳에서 일행들을 향해 돌격해왔다. 폐섬유로 만들어진 누더기 같은 모포를 뒤덮어 쓴 너덧 명의 인간들, 인간의 형상이긴 했지만 유별나게 뚱뚱해서 공의 형상에 가까웠다.
「▒̛̉̋̐█̓̄̅̐̚͠▒͋͑̌̚͞」
「▒̛̉̋̐█̓̄̅̐̚͠▒͋͑̌̚͞」
달려들던 괴인들 중 일부가 기괴한 소음을 내지르자 공간이 ‘구부러지고’, 동시에 그들은 몸뚱이를 접힌 공간 내부로 던져 넣으며 순간 이동한다. 심연의 신도가 받는 권능 중 하나인 <공간 구부리기>, 몰랐으면 당했겠지만 킬 팀 일행들은 전부 숙지하고 있었다.
“……!”
불과 3m 앞에 나타난 뚱뚱한 타락체. 달려들던 속도를 유지한 채, 필사적으로 뛰어드는 모습에 김가트는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곤 대검을 옆에 내던지며 튀어나갔다. 그리곤 그 양손을 뻗었다.
“흡!”
그렇게 한 놈의 팔과 가슴팍을 낚아채곤 엎어 치듯이 다른 방향을 향해 내던졌다.
흉악한 괴력과 극에 달한 기술, 그리고 물리법칙-관성을 일부 초월하는 마력의 효과. 그 삼박자 조합에 무시무시한 속도로 내던져진 뚱뚱한 타락체는 어떻게 대처하기도 전에 옆의 다른 뚱뚱한 타락체와 부딪친다.
-뻐-ㅇ!
둘이 부딪치는 순간, 두 뚱뚱한 타락체는 풍선 터지는 것처럼 터져나갔다. 황색의 가스와 함께 비산하는 역겨운 보랏빛 체액과 날카롭게 변질된 뼛조각. 인간의 육신 정도는 박살 내버릴 충격이었으나 김가트는 멀쩡했다.
-콰직!
-뻥!
오히려 그 폭발을 뚫고 돌진, 선두의 뚱뚱한 타락체들의 폭발에 휘말려 휘청이는 나머지 한 놈도 마저 터트려버렸다. 그 뒤, 김가트는 던져놨던 대검에 손을 뻗어 쥔 후 주위를 경계했다. 수월하게 적을 박살 냈지만 투구 안의 찡그려진 얼굴은 펴지질 않았다.
황색의 가스에서 느껴지는 ‘지독한 악취’, 평범한 자극을 능가하는 자극이 코와 눈, 피부에서 올라왔다.
<악취 구름>, 독에 저항력이 있지 않다면 단숨에 생명체를 무력화해버리는 최루탄. 달려들던 놈들은 애초부터 자살 공격대였다. 재빨리 눈치채고 최대한 멀리 던져버렸지만 서예린과 인 중사 쪽에서도 달려들었던 놈들은 그대로 찢겨 터졌다.
그들 또한 어느 정도 내성이 있었다만-.
“망할…….”
정의율은 아니었다.
라트마의 사제, 일그러진 존재들에게 치명적인 신성 진언을 외우던 정의율은 벌레 씹은 표정으로 옷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다행히, 잠시 저항력을 올려주는 물약을 섭취한 덕분에 발광하진 않았다만 백색의 옷소매로 가린 얼굴에선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진언 가능해요?”
“……불가능합니다.”
자모란의 질문에 정의율은 작게 고갤 저었다.
공기를 마력으로 대체해서 숨을 오랫동안 참거나, 평범하게 아주 조금 들이마시는 정도는 괜찮았지만 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에 소리치는 <설교>는 이 상태로는 불가능했다. 했다간 폐가 경련하며 오히려 무력화될 거다.
“기래, 고 ‘특제 산소’ 맛이 어떻디?! 흐음~ 아주 향긋하지 않네?”
그렇게 습격이 벌어지고 난 뒤, 유별나게 뚱뚱했던 괴인들이 터지면서 남긴 ‘황색의 가스’를 뚫고 사람들이 나타났다.
킬 팀 일행에서 40~50m 떨어진 채 둘러싼 사람들, 한 명은 청색 어부복에 고무장화를 낀 늙수그레한 중장년의 남성이었고 나머지 오십여 명은 이전의 뚱뚱한 괴인들처럼 폐섬유로 만들어진 누더기 같은 모포를 뒤덮어 쓰고 있었다.
어부 같은 왜소한 중장년 남성은 평범해 보였지만, 나머지의 모습은 심상치 않았다.
인간의 형상이긴 했지만 하나같이 그 좌우대칭이 극심하게 깨져있었다. 얼굴 혹은 어깨나 팔 부분이 커다랗게 부풀어 올랐다. 다만, 처음에 달려들었던 공 같았던 뚱뚱한 괴인들과는 달리 황소 같은 ‘육중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그 선두에 있는 어부복의 남자를 보며 정의율은 굳은 표정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최성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