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174화 (174/350)

제174화

9.

천둥소리와 함께 살덩어리 천장이 거칠게 뜯겨나가고 푸른 하늘이 드러난다.

쏟아지는 고위 타락체의 촉수들을 피하며 타이밍을 재고 있던 서예린은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거대한 힘의 격류를 느꼈다. 그 찰나의 순간, 서예린은 몸의 무게를 0에 수렴하게 만든 뒤에 튕기듯이 물러서면서 전방에 <유령의 무기>를 배치했다.

“……!”

한없이 가속된 인지력 속에서, 서예린은 내리꽂히는 여성을 보았다.

나세영 차장, 백업 요원으로 킬 팀에 배치된 그녀가 무형의 ‘어마어마한 힘’에 휩싸인 채 오른쪽 칼날 의족을 쭉 뻗으며 고위 타락체의 머리통 위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보였다.

그 차장의 쭉 뻗은 의족이 고위 타락체를 ‘살포시 지르밟는’ 것이. 그 모든 과정은 꽃잎을 사뿐히 밟는 것처럼 가볍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꽃잎을 밟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기둥 같은 뾰족한 쇠꼬챙이가 그 비정상적인 탄력으로 보호받는 피부를 뚫고 들어가고 이어서 발바닥 역할을 하는 칼날 철판의 면이 그 머리통을 짓누른다.

그에 서서히 타락체의 몸뚱이가 머리부터 찰흙처럼 뭉그러진다.

다리가 꺾이며, 몸뚱이 속의 골격이 부스러지고, 찌그러지다 못해 옆구리가 터진다. 그 속의 내용물-뼛조각과 살점이 꽃잎처럼 흩날리는 가운데, 타락체는 완전히 으스러지기 전에 간신히 자신의 발밑 공간을 가까스로 구부린다.

그렇게 간신히 밀려나면서 도망치는 가운데, 나세영 차장의 발이 지면을 짓밟는다.

-콰-ㅇ!! 콰르르르르!!!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착지한 곳을 중심으로 바닥이 쩌적쩌적 갈라지며 굉음의 충격파가 뻗어 나간다. 거대한 살점 구조물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고, 서예린과 <유령의 무기>들 또한 그 충격파에 붕 떠오르며 뒤로 퉁겨졌다.

하지만, 차장은 멈추지 않았다.

-투-쾅!

낙하의 충격을 오른쪽 의족의 철판이 휘어질 듯이 구부러지며 흡수하고, 이어서 공기 찢어지는 소음과 함께 그녀는 전방으로 튀어나간다. 그리곤 정의율과 자모란을 습격하려고 하는 심연의 괴물들을 스쳐 지나가며 오른쪽으로 꺾었다.

-콰과과과콱!

음속의 전투기가 지나간 것 같은 굉음, 이어지는 충격파에 튕겨 나가는 심연의 존재들은 전부 몸뚱이 한쪽이 잘려나가 있었다. 어떻게 대처해보기도 전에 홀 안 대부분의 괴물들을 박살 낸 나세영은 <공간 구부리기>로 도주한 고위 타락체를 포착했다.

“……!!”

-쾅!

그리고, 달리던 힘을 살려 왼손의 거대한 철권을 정면으로 내리꽂았다.

순수한 힘의 폭류, 어떻게 고위 타락체가 촉수로 막아보려고 했지만 철권은 그 모든 걸 뚫어내고 그 몸통을 타격했다. 이미 한 번 찢어졌던 타락체의 육신은 그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등짝이 터져나가면서 그 내장과 속의 살점들을 흩어버렸다.

-퍼억!

그리고, 그 육신은 뒤늦게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그렇게 타락체를 벽에 처박아 버린 뒤, 나세영 차장은 입에 물고 있던 막대 사탕의 막대를 ‘퉷!’하고 뱉곤 품 안에서 새로운 막대사탕을 꺼내 물었다. 그리곤 남아있는 킬 팀 일행들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다들, 괜찮냐?”

“커흑, 죽는…… 줄…….”

쓰러졌던 정의율이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하는 가운데, 뒤로 물러났던 서예린은 살짝 멍청한 표정으로 나세영을 응시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진짜 무지막지한 괴물이었다.

지금까지 힘겹게 목숨 걸고 싸운 게 허무하기 짝이 없을 정도로. 살짝 억울함에 여러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돌았다. 그냥 처음부터 함께 했으면…… 아니, 그냥 저 여자만 파견했어도 끝났을 텐데, 도대체 왜 이렇게 나중에 합류하게 한 걸까? 쓸데없이 사상자까지 생기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런 생각은 끝까지 이어지질 않았다.

“나, 나는 포기 안 해…… 이 개 같은 새끼들아!!”

몸뚱이가 거의 작살난 고위 타락체, 혹 같은 인면 얼굴이 울분에 발악하듯이 소리를 지른다. 그에 막대사탕을 물고 있던 나세영 차장은 시큰둥한 얼굴로 고갤 돌려 그 고위 타락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뒤지기 싫으면 가만히 있으렴. 뭐, 이미 죽기 일보 직전인 것 같다만.”

“주, 쥬거!”

반쯤 무너졌던 타락체의 몸이 빠르게 쪼그라든다. 그러면서 왼손에 검보랏빛의 타락이 점멸한다. 무리한 권능의 사용으로 인한 반동, 근처의 김가트가 돌격했지만 그 왼손 촉수는 이미 바닥을 내려쳤다. 그리고-.

-챙그랑!

세상이 한 번 더 찢어지며 타락이 밀려 나온다.

이미, 제단과 이전에 사용한 심연화에 의해 타락한 대지. 한 번 더 심연화가 중첩되면서 그 땅은 이전보다 더 강한 반응이 발생한다. 그 역겨운 힘의 물결에 김가트가 얼굴을 찡그리며 물러서는 가운데, 닿은 타락에 심연화된 지면은 또다시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그에 나세영 차장은 한숨을 내뱉었다.

“……하, 이것까지 써야 되나.”

위에서 보이지 않는 실이 잡아당기는 것처럼 ‘휙!’ 허공에 떠오르는 차장, 그다음 벌어진 일에 서예린은 왜 한새벽이 저걸 균열이라고 표현했는지 알 것 같았다.

-!

세상을 붕괴시킬 것 같은 거대한 힘의 격류가 그녀를 중심으로 터져 나왔다.

그 무형의 힘에 공간을 뚫고 나타나던 심연의 괴물들이 갈기갈기 찢기고, 심연의 타락에 물든 대지 또한 뜯겨나갔다. 이미 한 번 등장할 때 흔들렸던 돔형의 거대한 살덩이 또한 다시 한번 터져 나오는 힘의 격류에 흔들려 우수수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그 격류는 절묘하게 킬 팀 인원들을 빗겨나갔다.

“언제 봐도 무지막지하구만.”

“……허.”

힘을 방출한 뒤, 옷 하나 구겨지지 않은 채 그대로 지면에 착지한 나세영 차장. 힘의 격류가 쏟아진 뒤 남아있는 심연의 괴물은 극소수였다. 김가트가 감탄하는 가운데, 서예린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한새벽은 저런 괴물을 보고 왜 연약하다고…….

“……?”

그 순간, 서예린은 눈치챘다.

서서 느긋하게 막대 사탕을 빨고 있는 그녀가 사실은 말도 못할 정도로 ‘지쳤다.’는걸. 겉으론 드러나지 않게 잘 숨기고 있지만, 그녀의 육감이 ‘더 이상 저 여자는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을 속삭였다. 그에 억울한 감정은 사라지고 여러 정보가 떠오른다.

신의 권능, 묘하게 결손된 부위가 많은 육신, 한새벽이 말한 묘사…….

“……리브라소, <대격변>?”

그 말에 김가트가 대검을 어깨에 걸치며 웃는다.

“그래, 맞아. 전설로만 전해지던 권능이지. 과연 명불허전이지?”

“커, 커허허헙! 콜록콜록콜록……! 김가트 씨, 그거! 크으읍! 1급 기밀입니다!”

서예린의 중얼거림에 김가트가 씨익 웃으며 대꾸하고, 포션을 마시며 폐 안의 노란 고름과 가래를 뱉어내던 정의율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끼어든다. 그러건 말건 서예린은 놀란 얼굴로 나세영을 바라보았다.

대격변(Cataclysm).

미궁의 전설 중 하나였다. 리브라소에게 모든 걸 바친 이가 넣을 수 있는 ‘궁극의 파멸’, 고룡을 찢어발기고 악마 군주를 무릎 꿇린다는 강력한 힘의 권능. 그걸 달성한 이가 있다니…… 놀랍기 그지없었다. 실제로 보니 왜 그런 표현이 붙었는지 이해가 됐다.

하지만, 부럽진 않았다.

천칭의 신, ‘리브라소’는 신도의 희생에 걸맞은 대가-힘을 지불한다. 말로는 희생할 수 있다고 해도 ‘진정으로 마음속 깊이 동의’하지 않는 이상, 그는 희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저런 엄청난 힘의 대가로 얼마나 많은 유형·무형의 것을 스스로 바쳤는지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분명, 지금 기진맥진한 것도 여러 희생 중 하나의 여파일 거다.

“네가 그쪽 정리해라.”

김가트의 외침에 서예린은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확실히, 살덩이 돔까지 거의 다 박살 나서 밖이 훤히 보였지만 살아남아 빈사 상태로 휘청이는 괴물들이 있었다. 그에 서예린도 <유령의 무기>들을 움직여 남은 잔당들을 처리했다.

“후, 어찌 잘 정리됐군요.”

어느 정도 회복된 정의율이 걸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서고, 그에 나세영 차장은 작게 어깰 으쓱였다.

이어서 정의율은 천천히 한쪽으로 움직였다. 거대한 힘의 격류에 휩쓸린 ‘타락체’, 안 그래도 휘청이던 그녀는 이제 전신이 완전히 박살 난 채 그나마 인간을 닳은 부분이었던 얼굴 가죽 쪼가리만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 얼굴 앞에 선 정의율은 그 얼굴을 내려다보며 명복을 빌듯 입을 열었다.

“참으로 경탄할 노릇이구나. 심연, 네쉬라의 속삭임에 넘어가다니…….”

“……흐. 흐히히…….”

그런 정의율을 향해 여자의 무너진 얼굴이 비웃는다. 그에 정의율은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설교하듯 입을 열었다.

“웃는 걸 보니 이해를 못 한 모양이군. 그냥 기생체가 심어진 다른 이들과는 달리…… 넌 스스로 영혼을 심연에 바쳤다. 그에 네 영혼의 ‘깊숙한 부분’까지 심연에 물들었어. 넌, 구원받지 못한다. 죽어서도 네 영혼은 심연이라는 지옥에 끌려갈 거다.”

웃는 여자의 얼굴을 향해 말하는 정의율, 그에 여자는 뒤틀린 얼굴로 작게 대꾸한다.

“알고 있어.”

“…….”

“그래, 알고 있고 기꺼이 대가를 바쳤다.”

생각할 뇌도 없이, 숨을 내뱉을 폐도 없이, 그저 안면부의 거죽만 남았음에도 어떻게 꿈틀거리며 대꾸하는 여자의 얼굴. 이전과는 다른 선명한 목소리에 멈칫한 정의율은 이내 냉담하게 중얼거렸다.

“지옥에 떨어질 어리석은 거래군.”

“아니, 현명한 거래였어.”

“현명한 거래?”

“이곳에 팔려 와서 이미 현세의 지옥을 살아가는데, 그 힘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 대꾸에 침묵하는 정의율, 그에 여자는 얼굴만 남은 채 이죽거렸다.

“이곳 섬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알아?”

“…….”

“남쪽행이라고, 밥을 준다고 팔려온 여자애들이, 그리고 남자들이? 관심 없었겠지. 하긴, 말해도 소용없으니까. 경찰에 말해도 무연고 시체가 하나 늘어난 정도고.”

천천히 찡그려진다. 그런 정의율의 얼굴을 보며 죽어가는 여자는 이죽댔다.

“그래, 너희들을 끌어내리고 싶었어.”

“…….”

“우릴 괴롭히고 노예로 다루는 남쪽의 개자식들을 모두 다 괴물로 만들고. 남쪽 새끼들끼리만 잘 먹고 잘사는 이 세상을…….”

“이 개잡X아!!”

그런 여자의 얼굴을 싸커킥을 갈기는 정의율, 그에 거죽만 남은 타락체가 퉁겨져 날아가 벽에 ‘철퍽!’ 달라붙는다.

그 급발진에 서예린은 물론이고 김가트와 자모란까지 움찔한 가운데, 정의율은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법전을 진 채 벽에 피떡이 되어 달라붙은 얼굴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렇게 삶에 불만이 많았으면 너희들이 신처럼 떠받들던 전 수령-북쪽 돼지 새끼한테 X랄해야지! XX아! 뭐, 우리가 마냥 편한 줄 아냐!?”

“…….”

“먹고 살기 힘들다고?! 너희만 힘든 줄 알았나!? 우리도 힘들었다! 없던 식량을 쪼개서 북쪽을 지원했고, 간신히 너희들이 자립할 정도로 식량을 나눠줬지! 그저 도의적인 이유 하나로! 그리고, 너희들이 먹고살 정도로 식량을 생산할 수 있게 해준 뒤에 맡겼고!”

“…….”

“그러면서 불평불만?! 그런데 거기서도 밥을 줘도 못 먹어서 너희들 아가리까지 일일이 밥을 쳐넣어 주라고!? 총칼로 억눌렀던 너희들 수령에겐 못하면서?! 너희들 수령이! 중국도 받아주지 않던걸! 우리가 살려놨더니 밥도 줬더니, 그게 불만이라고?!”

법전을 으스러지라 움켜쥐는 정의율, 신의 권능을 사용하고 은빛으로 빛나는 그 두꺼운 법전을 들어 올리며 정의율은 선언했다.

“넌 살 가치가 없다!”

분노한 법전이 여성 타락체의 면상을 완전히 박살 낸다. 그 박살 난 얼굴 조각에서 실지렁이 같은 타락의 기생체들이 줄줄 비산하는 가운데, 정의율은 숨을 헐떡였다. 그에 지금까지 침묵하며 숨을 고르던 나세영 차장이 작게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안타깝네.”

“……예? 안타깝다고요?”

나세영의 혼잣말, 그에 정의율이 법전에 묻은 체액을 털어내며 정색하듯 바라보자 그녀는 어깰 으쓱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저렇게 울분에 차서 말할 만하지 않냐? 이곳에 팔려 와서 노예가 됐다는데. 나름 복수심에 불탈 만하지.”

“아, 그건 저도 동의합니다. 여기서 사람을 노예로 부리던 X새끼들은 죽어 마땅하죠.”

“…….”

“하지만, 이딴 짓도 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진한 혐오의 표정으로 정의율은 짓이겨진 타락체의 흔적을 보며 씹어먹듯이 중얼거렸다.

“도대체 베풀어줘도 끝없이 해달라는 북쪽 거지새끼들, 자기네들을 겁박한 김 씨 일가나 군벌들에겐 꼼짝도 못 하면서 우리에게 X랄하는 이 개 같은 놈들이요.”

“음…….”

“차라리 자기네를 핍박하는 북한 윗대가리 놈들에게 이런 짓을 하면 이해라도 합니다! 근데, 도와준 우리에게 증오를 쏟아 내다니…… 참을 수 없습니다. 이런 새끼들도 쓰레기예요.”

분노를 쏟아내는 정의율의 모습에 나세영은 답이 없다는 듯이 고갤 절레절레 저은 후, 주위를 둘러보며 고갤 끄덕였다.

“다행히 희생자는 없네. 막판에 고생했지만 말이지.”

“……? 한 명 심연 추방당함.”

“아니, 아닙니다. 배틀 슈트는 겉껍데기에 불과하지요.”

서예린의 대꾸에 대답하는 정의율, 그는 한쪽에 떨어진 머리통만 한 황동색의 구체를 향해 다가가 들어 올렸다. 그리곤 서예린을 향해 웃었다.

“이게 인 중사입니다.”

“……?”

“인 중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인공 지능 기술이 접합된 일종의 골렘이죠.”

그에 서예린은 멈칫하더니 고갤 끄덕였다. 확실히, 아무리 전신을 갑옷으로 감쌌다고 한들 너무 반응이 딱딱했다. 내심 인간 같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정답이었나 보다. 이어서 김가트가 정오에 떠오른 태양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집에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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