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0화
4.
다행스럽게도 타락체들은 도망치는 우릴 추격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영내 장악이 끝나지 않았으니 포기한 듯싶었다. 그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다면 계속 무리하면서 도망쳤지만, 상공 30m-대략 13층 건물 높이에서 <눈>으로 조망할 수 있었기에 얼마 안 가 그 사실을 파악하고 산 중턱 평평한 바위 위에 양 씨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약간 무리해서 <무한의 눈>으로 양 씨를 살펴본 결과…….
“하아…….”
한 마디로 엉망이었다.
<부패 구름>에 노출된 폐는 엉망으로 물집이 잡혀 고름이 솟구치고 있었고, 목뼈는 ㄱ자로 한 번 꺾어져서 신경이 일부 끊겼다. 크레모아 구슬에 한쪽 얼굴이 쓸린 건 덤. 게다가 양 씨를 둘러업고 도망치면서 상의와 하의가 살짝 벌어졌는데 그 틈으로 총알이 뚫고 들어가면서 내장이 헤집어지고 뜯겼다. 내용물이 줄줄 새.
그럼에도 양 씨가 살아있는 건, 조금이라도 마신 ‘포션’ 덕분이었다.
영체(靈體)가 있는 ‘마력 각성자’는 일반인에 비해 월등한 기본 회복력과 포션빨을 받는 신인류다. 1/4 정도의 수제 포션의 회복력이 양 씨의 몸을 살려두고 있었다. 그거 먹지 못했다면 이미 뒤졌다.
어쨌든 상태를 확인하고 난 곧바로 조치를 시작했다.
“흐읍!”
-뚜둑!
ㄱ자가 된 양 씨의 목을 잡고 반대방향으로 꺾었다. 말 그대로 무식한 골절치료, 하지만 <눈>으로 그 안쪽 상황을 보고 판단했기에 정확하게 끼워 맞췄다. 이어서-.
“MA-LUN!”
심호흡을 하며 <액체 질소 대포> 주문의 일부분을 외웠다. 주위의 기체를 조종해 닥치는 대로 끌어모으고 질소를 모아 발사하는 마법, 그 ‘기체를 조종하는 부분’만 따로 좀 더 섬세하게 가다듬었다. 그렇게 실처럼 가다듬은 바람의 흐름을-.
-스으으으으!
“우웁, 우웨에에에엑!”
양 씨의 식도 쪽으로 밀어 넣고 폐 속에 있는 고름과 핏물을 빨아들여 바깥에 뱉게 만들었다. 몸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눈>이 없다면 불가능한 작업, 그렇게 폐에 쌓인 노폐물들을 걷어내자 숨넘어갈 듯한 양 씨의 숨소리가 좀 가신다.
이제 남은 건, 복부의 상처인데…… 이건 어쩔 수 없네.
뱃속을 내가 어떻게 조치할 순 없다. 총알 파편이라도 떼어내고 싶지만 손가락으로 빼내기엔 무리가 있어. 게다가 세균 감염도 있고. 사실, 싸장님에게 배운 <연금술>을 사용하면 남의 살로 단백질 밴드 같은 걸 만들 수 있지만…… 날 제외하면 독극물이라서 어떻게 하기 힘들다.
-찌이이이익!
양 씨의 상의 군복을 벗긴 후, 있는 힘껏 길게 찢었다.
그걸 붕대 삼아서 총상이 있는 복부와 등을 둘둘 싸맸다. 어떻게 버텨주길 바릴 수밖에 없네. 그렇게 내가 상처를 조치하는 사이, 양 씨가 깨어났다. 힘겹게 눈을 뜬 양 씨는 날 보더니 거의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연다.
“새…… 벽?”
“네, 저예요.”
“크르륵…… 도망쳤……?”
“네. 어째 도망치긴 했어요. 막판에 크레모아에 당했지만요. 그나저나 버틸 만해요?”
“흐, 흐흐. 해골 불꽃보다 덜…….”
덜덜 떨리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양 씨, 양의 낙원에서 한 번 맞았던 고문 속성의 공격보다 약하다고 하는 것 같았다. 그게 그렇게 아팠나 보네. 다만, 그때는 그냥 감각으로만 아픈 거고 지금은 진짜 반X신이 됐지만.
“휘유.”
어느 정도 급한 조치도 끝났겠다, 그대로 방탄모를 벗으며 헐떡이고 있는 양 씨 옆에 앉아 숨을 돌렸다. 긴장이 풀리니 온몸이 삐걱거리며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프다. 양 씨처럼 치명상은 입지 않았지만 나도 많이 맞았지. 하지만, 엄살 부리기엔 상황이 너무 안 좋다.
대충, 급한 불은 껐지만…… 계속 두기엔 양 씨의 상처가 심각하다.
특히, 뱃가죽을 뚫어버린 총상. 그 총알에 소장과 대장이 비비 꼬이고 찢어져서 그 안의 배설물이 뱃속을 적시고 있다. <고문> 속성의 공격보다 아프지 않다고 의기양양하게 말했지만 무지 아플 거다. 최소한 치료 받을 때까지 살려놔야 해. 하지만, 어떻게 살려두지?
포션?
상공 30m에 떠 있는 <눈>의 시선을 기지 쪽으로 향했다. 규모가 큰 만큼, 터미널 기지엔 의무실과 군의관도 있을 거다. 분명 포션도 있겠지. 억 단위의 수제 포션은 아니고 부스팅 형태의 공산품 포션이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양 씨가 마신다면 며칠은 버틸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저길 다시 가서 포션을 꺼낼 수 있을까?
불길에 휩싸인 훼리선이 둥둥 떠 있는 선박 터미널, 하지만 혼란은 벌써 거의 사그라졌다. 저기에 침입하는 것부터가 힘들고, 어떻게 침입해서 포션을 빼돌린 뒤 탈출하는 것은 더더욱 힘들어. 그렇게 내가 고뇌에 빠져있을 때-.
“……야.”
양 씨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날 부른다. 내가 바라보자 양 씨는 가래 끓는 목소리로 작게 말을 이어나갔다.
“탈출…… 해야 해.”
“네, 해야죠. 근데, 당신 몸 상태부터 걱정하세요.”
“커흐, 커흐흑. 케흑.”
내 대꾸에 폐에 고인 피에 살짝 기침한 양 씨는 이내 숨을 고른 후, 좀 선명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소란이 일어난 건 알려졌을 거야. 그리고, 군인들이 심연 기생체에 감염됐다는 것도.”
“…….”
“정체불명의 감염전파, 예방 차원에서 섬을 폭격할 수도 있어.”
부정적인 양 씨의 예상에 입술을 깨물었다. 확실히, 그 말을 들어보니 그럴 것도 같지만…….
“그래도 우릴 구해주러 오지 않을까요? 차장님이 저희 나름 귀중한 인재라고 했잖아요.”
“흐, 흐흫. 그래 봤자 공무원이야. 하아, 하아아악! 퉷!”
양 씨는 기침을 하며 피를 뱉어내곤 중얼거렸다.
“위에서 하라고 하면 할 수밖에 없는 공무원. 설령, 우릴 구하려고 해도 인간 수준의 지능을 가진 타락체들이 있어. 우리에게만 정보를 알릴 수단도 없는데 결과는 뻔하지…… 콜록! 콜록!”
“…….”
“자력으로 탈출…… 해야 해.”
“어떻게요? 양 씨 버리고 튈까요? 근데, 배도 없는데 어떻게 튀죠?”
답답한 마음에 좀 날카롭게 대꾸하자, 양 씨는 헛웃음을 짓는다.
“난 버리지 말고…… 해안가에서 모터보드…….”
“아니, 찾기 전에 그쪽이 죽게 생겼는데 뭔…….”
“버틸 수 있어. 흐.”
대꾸한 뒤, 특유의 조용한 주문을 외우는 양 씨. 그와 함께 마력을 실처럼 뿜어내 룬어를 만들어낸다. 많이 힘든 듯, 진땀을 뻘뻘 흘리고 평소보다 느렸지만 어떻게 마법을 완성하긴 했다. 그리고 <게임 시스템>이 마법의 정체를 분석해 텍스트로 띄운다.
마법의 동면 (Ensorcelled Hibernation)
레벨 2 주술/얼음
시전 소음 : 0
주문 소음 : 0
최대 SP : 50
지속시간 : 18 + 2d(Spell power) min
최소 소모 재화 : 마력 2p
효과 : 일시적으로 타깃의 신진대사 속도를 늦추는 주문, 저체온증으로 인한 동면을 유도한다. 타깃이 잠들 확률은 대상의 의지력과 마법 저항력에 영향을 받으며, 냉기 저항을 갖고 있거나 광폭화 상태인 적에겐 걸리지 않는다.
그렇게 만들어낸 마법을 자기 자신에게 거는 양 씨, 그와 함께 얼굴이 창백해지며 웃는 얼굴로 스르륵 눈을 감는다. 함께 떠오른 텍스트를 읽고 난 한시름 덜었다는 생각에 작게 안도감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하, 진짜. 다시는 안 할 거예요.”
자리에서 일어나 시체처럼 차갑고 뻣뻣한 양 씨를 업었다.
완전히 깜깜하진 않은 걸 보면 아침 해가 떠오른 것 같은데, 구름에 우중충해서 해는 안 보인다. 어쨌든 <눈>을 움직이며 근처 해안가 마을을 확인한 후, 난 한 발짝 내디뎠다.
5.
달콤한 휴가 중에 회사에서 전화가 오는 것만큼 짜증 나는 것도 없다.
나세영 차장 또한 그러했다. 작전이 끝나고 지친 심신을 달래주기 위해 온 온천 휴양지, 힘을 좀 끌어다 썼다고 삐걱거리는 육신을 달래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기분이 잡치게도 전화가 왔다. 보통 그녀가 직접 가야 할 일은 별로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X발, 어떻게 된 거야. 타락체들이 발광했다며? 다 정리한 거 아니었어?”
오후 1시. 임시 지휘통제실에 도착한 후, 나세영 차장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압해도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초연, 그리고 병사들과 주민들 사이에 서린 공포와 불신감. 마치, 전쟁터의 한복판처럼 정신이 없다. 게다가 넘어오면서 본 압해대교 위엔 시신들까지 있었다.
그에 피곤한 얼굴로 쉬고 있던 정의율이 입을 열었다.
“새로운 유형의 심연 기생체입니다.”
“새로운 유형의 심연 기생체?”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전파되는 놈인 것 같습니다.”
피곤한 눈가를 주무르면서 정의율은 담담히 새벽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말했다. 섬을 수색 중인 군인들 사이에서의 수상한 행동, 그에 대한 조사와 드러난 실체, 그리고 눈치챈 타락체들의 준동까지. 대충 요약한 그 말을 듣고 그녀는 골치 아프다는 듯이 이마를 짚었다.
“이젠, 상처 없이 감염시킨다고?!”
“예, 타락체 색출 검사하는 외과의들이 있었기에 그 새로운 타락체들을 부검해봤습니다. 심장을 확인한 결과, 기존 기생체완 달리 완전히 심장을 대체하지 못하고 심장에 종양이 생긴 것처럼 타락체의 살점이 덕지덕지 달려있더군요. 하지만, 숙주를 조종하는 능력은 똑같습니다.”
“하아…….”
“일단, 지금은 병균 같은 전파가 이뤄진다고 추측 중입니다. 어떤 새로운 전파과정을 거치는지 모르지만 오늘 이후로 타락체에 대한 대처방안 매뉴얼을 다시 짜야 할 겁니다.”
막막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뱉는 나세영 차장, 그런 그녀를 향해 웃으며 정의율은 자신 옆에 지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전찬휘의 등짝을 후려쳤다. 그에 전찬휘가 움찔하는 가운데, 그는 자애롭게 웃었다.
“전찬휘 군의 꼼꼼한 성격 덕분에 사전에 포착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최악의 상황은 피했습니다. 하하.”
“최악은 피했다?”
나세영 차장이 의아하다는 듯이 되묻자 정의율은 고갤 끄덕였다.
“예, 놈들의 행동의 우선순위가 그 USB의 내용을 반출하려는 것이었거든요. 심연 문자로 되어 있어서 뭔지 모르겠지만 그 USB 안의 내용이 꽤나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음.”
“흑산도에서 회수한 원본에 대해서 한번 조사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고갤 돌려 전찬휘의 얼굴을 바라보는 나세영, 그에 전찬휘는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 녀석, 덕분입니다.”
“그 녀석? 아, 흰둥이?”
“예, 녀석이 경고했던 사실들을 군인 쪽에서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아 걸렸는데…… 이렇게 걸리더군요.”
그 대꾸에 나세영 차장은 입맛을 다시곤 입을 열었다.
“그 녀석, 불러와야겠다. 이미 불렀지?”
“……아뇨.”
어두운 표정으로 대꾸하는 전찬휘,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나세영 차장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지는 가운데 전찬휘는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곧바로 수소문해서 부르려고 했는데…… 섬에 있었습니다.”
“뭐?!”
“돌연변이 후유증 때문에 잠을 한 번 몰아서 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금요일 토벌 이후로 힘이 빠져서 그냥 머물렀답니다. 군인들에게 양해를 얻어 터미널 쪽 건물 하나를 대여받았다고 하더군요.”
“……오크들은? 오크들도 함께 있었던 거 아니야?”
“오크 병력들은 토요일까지 섬 전역을 수색한 후에 토요일 밤에 빠졌습니다. 그래도 혼자 내버려두면 그렇다고 양우영이 함께 남았다고 하는데…….”
전찬휘의 설명에 나세영 차장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이미 검증된 인재, 그리고 가까운 지인인 한솔이가 부탁한 애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어색한 사이지만 개인적으로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수영이의 제자이기도 하다.
“아…… X발. 역시, 그냥 애지중지했어야 했는데…….”
이곳 지휘통제실에 오기 전, 의무실에 들러 만난 한솔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나세영 차장은 정의율을 향해 질문했다.
“걔네들이 있던 섬은 어떻게 됐냐?”
“야밤에 지휘통제실이 점령당해 방송이 나가고 일제히 봉기했습니다. 사실상 타락체에게 넘어갔습니다. 아마도…….”
살짝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리는 정의율, 뒷말을 하지 않았지만 어떤 것인지는 뻔했다.
나세영 차장은 초조한 얼굴로 오른손 엄지손톱을 질겅거렸다. 살아있을 확률은 희박하다. 설령 살아있다고 한들, 얼마 안 있으면 죽을 거다. 전혀 새로운 방식의 타락체 전파, 더 퍼지면 골치 아프니 정부는 그냥 어서 빨리 통째로 지워버리려고 할 게 뻔하다.
“헬기 띄울 수 있겠냐?”
“안 됩니다. 아시잖습니까? 이 날씨에 헬기 띄우면 벼락 맞을 수도 있단 거.”
-쿠르르릉.
동조하는 것마냥 타이밍 좋게 ‘우르릉!’ 천둥소리를 내뱉는 하늘, 그에 그녀는 이를 갈았다. 하긴, 그녀가 이렇게 늦게 온 이유도 기상 상황 때문에 헬기를 타지 못하고 차로 이동한 덕분이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정의율은 눈을 감고 작게 고갤 저었다.
“솔직히, 살아있을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
“개인 화기로 무장한 타락체들 한복판에 있었는데, 그걸 뚫고…….”
“혹시 몰라. 걔네들은 마력 각성자야. 그리고 말했다시피 흰둥이는 특별한 감각을 지녔고. 타락체를 탐지하는 그 능력이라면 뭔가 이상함을 눈치채고 도망쳤을 수도 있겠지.”
신경질적인 나세영의 대꾸에 정의율은 입을 다물었다.
반박하기엔 그녀가 풍기는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리브라소를 신앙하고 육체적&정신적인 것들을 결손하게 되면서, 그녀는 스스로 인정하진 않지만 성격이 매우 극단적으로 변했다. 대부분의 일은 뭘 하건 시큰둥하지만, 몇 안 되는 ‘집착하는 일’은 반드시 해야 한다.
안 그러면 발작한다.
방해하는 동료와 상사도 ‘찢어 죽여 버릴 정도’로. 실제로 8년 전에 그녀는 상사를 맨손으로 찢어버렸다. 그 상사가 사실은 중국 측에 정보를 제공하던 스파이였다는 것이 밝혀지고, 추가로 그녀의 실력이 대체불가능이어서 유야무야 넘어갔지만 말이다.
그가 보건대, 저건 ‘스위치’가 들어갔다.
“해군 고속정 있지?”
“네.”
“그거라도 띄우자. 상륙하는 건 힘들어도 드론으로 정찰이라도 하자고.”
그런 나세영의 말에 정의율은 조용히 고갤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