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190화 (190/350)

제190화

승천의 비약 (Elixir of Ascendant)

유기체의 시신에서 배양된 ‘심연의 살점’으로 만들어진 비약, 생체-연금술로 추출한 심연의 정수가 들어가 있다. 심연의 신도가 섭취 시, 빠르게 영혼이 심연에 물들어 타락하는 동시에 그 영혼의 잔재를 심연의 살점에 주입해 폭발적인 활기를 불어넣는다. 정신은 일시적으로 피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차게 되고 그 근육량은 초현실적인 수준으로 증가한다.

불신자가 복용할 경우, 영혼이 문드러져 내리는 듯한 끔찍한 고통을 유발한다.

평범한 참기름병 안에 있는 보랏빛 액체, 하지만 그 내용물은 전혀 평범하지 않았다.

스쳐 지나가는 <과거>를 통해 파악한 저 액체는…… 마시는 순간, 복용자의 영혼에 영향을 끼쳤다. 영혼에 영향을 끼치는 물질이라니? 불완전한 내 영혼을 수복할 단서나 다름없다! 나도 모르게 진열장에 가까이 달라붙자 옆에서 함께 걷던 차장님이 날 제지한다.

“떨어져 인마! 왜 그러는 거야?!”

“그, 저거 되게…… 되게 특이해요. 영혼을 홀리는 듯한 느낌? 저거, 제가 가지면 안 돼요?”

“너 미쳤니!?”

차장님의 노호성에 작게 한탄했다.

하긴, 당연한 반응이긴 하지. 다시 한 번, 물품의 <과거>를 진지하게 살펴보며 그 제작 과정을 필사적으로 머릿속에 담았다. 젠장, 저걸 가져가서 계속해서 <과거>를 살펴보면 좋을 텐데……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다음 진열장 앞에 섰을 때-.

“응?”

난 다시 한 번 발걸음을 멈췄다.

유리 진열장 안에 있는 건, 타락체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양장본 책. 내가 멈춰 서서 관심을 보이자 차장님은 불쾌하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니가 발견했던 USB에 있는 내용이 담긴 책이란다. 좀 특별한 마력이 깃들긴 했어도 내용은 똑같아.”

딱 봐도 그래 보인다. 하지만, USB 안의 내용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 그 USB의 사진들은 봐도 뭐가 뭔지 딱히 몰랐지만…… 저 책은 <게임 시스템>의 보정이 들어가기 시작했다는 거다.

[Play The World!]

당신의 영혼과 자아 일부분은 르피너스에 의해 뜯겨 게임 속 캐릭터의 능력을 ‘흉내 내도록’ 바뀌었습니다. 뜯겨 나간 당신의 자아와 영혼의 조각이 특정 조건에서 주문 습득이나 기술 습득을 용이하게 하도록 돕습니다.

‘설명서&마법서’로 보이는 물품 감지 – 지식 습득을 시도해보시겠습니까? Y/N

내용을 습득하겠냐는 메시지가 뜨는 책.

잠깐 고민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어차피 습득한다고 해도 책이 사라지지 않잖아? 그리고 내용을 습득하면서 보여주는 발작? 차장님에게 발작하는 모습을 숨기기 위해 이런 기회를 놓친다는 건 너무 아까워! 곧바로 Y를 누른다고 생각하는 순간…….

“으윽, 으기기기기긱?!”

“흰둥아!?”

머릿속 신경 한 올 한 올이 불타오르는 감각, 이전처럼 시야가 사라지는 것과 함께 나는 이 책과 연관된 ‘과거의 한 장면’을 보고 있었다.

8.

늙수그레한 중년 남성이 벗겨낸 타락체의 가죽 위에 글을 쓴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뉴스에서도, 그리고 방금전에 봤었던 ‘승천의 비약’의 <과거>에서 봤던 사람이니까. ‘최성진’, 그는 날카로운 조각칼로 열심히 심연 문자를 한 글자 또 한 글자 적어나가면서-.

“Z̸̢̰̙͌͡ą̸̲̥̲͆̏͠ḷ̷̡͙̟́̕-҉̢̬҇̓͌̈́R̶͎̗̝̄͜͝o̷̳͔̱͑͜͝.̷̢̠̙̎̿̄͡.̴͖̭͛͢͞.҉̢͎҇̈́͂͊ͅ”

때때로 인간의 성대로는 불가능한 음역의 소음을 내뱉는다.

난, 그 모든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가죽에 새겨지는 문자 하나하나, 그리고 기괴한 소음의 음절 하나하나를. 이전에 타락체의 목소리를 해석했을 때 느꼈지만 매우 고도로 압축된 뜻이 밀려왔다. 글이나 말로는 묘사가 불가능한…… 사진과도 같은 정보다.

이 책의 지식은…… 심연 기생체-타락체에 관한 총체적인 연구였다.

네쉬라의 신도들은 축복이라고 주장하는 ‘심연 기생체’, 그러나 진실은 더 비극적이고 공포스럽다. 기생체들은 숙주를 변질시켜 네쉬라의 의지에 맹목적으로 흠모하는 노예들로 만들고, 그들은 육신과 영혼을 서서히 야금야금 먹어치운다.

신도들의 목숨을 바쳐가며 섬겼던 ‘경이로운 신의 선물’의 진실이다.

참으로 어리석고 비참한 최후, 하지만 저자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 이 끔찍한 저주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더 퍼트리기 위해 연구했다. 서서히 영혼이 먹히는 자신과 동료들을 관찰하면서 그 근원적인 원리에 관해 탐구했고 심장에 박힌 심연 기생체는 동조했다.

최성진이 한 수많은 실험의 장면의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동시에 초월적인 영감이 솟구치며 그 내용들을 강제로 머릿속에 욱여넣는다. 일종의 영혼을 다루는 고도의 ‘생체 연금술’, 이전에 봤었던 승천의 비약 또한 그 연구의 부산물 중 하나다. 배움을 통해 인간이 성장하는 것처럼 그 방대하면서도 끔찍한 지식의 세례에-.

내 인격이 실시간으로 뒤틀리며 다른 존재로 변하는 것이 느껴진다.

이전에 마법서 지식을 습득했던 때-지식을 얻어 한순간에 계몽한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르피너스를 목도했던 때의 충격에 비하면 약하지만 영혼 자체가 뒤틀리는 느낌, 이미 르피너스에게 당해 X됐기에 난 막 나가는 경향이 있지만…….

이건, 한 발짝 더 X되는 거란 걸 직감했다.

그저 아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타락하고 오염되는 지식, 머릿속에 떠도는 기괴한 ‘심연 문자’ 하나하나에서 실지렁이 같은 촉수들이 뻗어 나와 내 영혼을 옭아매는 것이 느껴졌다.

“……!!”

다급하게 멈춰보려고 했지만, <게임 시스템>은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결코 이해하고 싶지 않은 몇몇 지식들을 뇌리에 강제로 쑤셔 박는다. 그리고 점점 내 의식과 영혼이 심연에 잠식되는 것이 느껴진다. 그게 절정에 달한 순간-

<눈>에 엉뚱한 게 보였다.

끊임없이 ‘부패로 부풀어 오르는’ 동시에 ‘무한한 생기로 가득한’ 보랏빛.

무너져 내리는 동시에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위대한 것은 웃고 속삭이며 가장 완벽하고 자유로운 형태의 생명체를 창조하고 있었다. 그 부패와 생명의 메아리가 한 번 울려 퍼질 때마다 수많은 생명의 파편들이 차원을 뚫고 흘러넘쳐 필멸자들의 문명을 물들인다.

‘형상 없는 자’의 의지에 의해 만들어진 온갖 피조물들이 창조주의 자애로움을 찬양한다.

그 비명과도 같은 난잡한 찬가에 현실은 엔트로피가 차오르며 붕괴하고, 불결한 죽음이 만개한다. 그리고, 그 죽음이 지나간 곳에 ‘형상 없는 자’의 완벽한 피조물이 차오른다. 동시에 그 모든 광경을 보는 내 영혼은 삐걱거렸다.

다른 ‘미궁의 신’을 봤을 때처럼.

내가 얻은 지식은 ‘귀납적 탐구’와 ‘과학적 연구’ 같은 현실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지만 그 본질은 저 거대한 현상에 관한 탐구였다. 불가해한 무한한 광기에 대한 티끌만 한 고찰, 심연 기생체의 도움으로 최성진은 미약하게나마 원류에 접촉했다.

무질서한 심연의 악신.

형성되지 않은 자.

……?

문득, ‘그것’ 안에 있는 이질적인 존재가 보인다.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고 동시에 끊임없이 창조되는 ‘역동적인 순환’ 속에서 불변(不變)하고 있는 것. 흑색으로 뒤덮인 방에 백색인 물체가 있는 것처럼 그것은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 인지하는 순간,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했다.

시간도 공간도 의미를 잃어버리고.

얼어붙어 있는 것들.

명백하게 심연의 것이 아닌 거대한 전장, 그 위에 심연의 피조물들과 악마들이 한 방향을 향해 밀려드는 상태로 시간이 멈춰 있었다. 모든 것이 전시용 오브제처럼 굳어버린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똑똑하게 느낄 수 있었다.

몸이 타오르는 것 같은 하나의 강렬한 존재감을.

자연스럽게 내 시야는 심연의 피조물들과 악마들이 향하는 방향 쪽으로 움직였다.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점점 밀려드는 파도처럼 그 존재감이 강렬해지고, 그 방향으로 밀려드는 악마와 심연 피조물들의 대열 또한 변화가 일어났다.

몇몇 악마와 심연의 존재들이…… 대열을 이탈하려는 채로 굳어있었다.

믿기 힘든 광경이지만 진짜였다. 어떤 악마는 공포에 질려있었고, 어떤 심연의 피조물은 광기에 휩싸여 동족을 포식하려고 하며, 또 어떤 것들은 그 형체가 녹아내려 소멸하고 있다. 좀 더 가까이 가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밀려드는 황금빛 불길이 악마와 심연의 피조물들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내가 경험했던 ‘진주용 이빨 단검’과 비슷하지만 훨씬 더 강렬한 힘, 그 앞에 모든 삿된 것이 찢겨 타오르는 채로 굳어있다. 점점 다가갈수록 그 황금빛 불길의 궤적이 더 강해지고 수천의 악마와 심연 피조물이 녹아내리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

‘황금빛 불길에 휩싸인 은빛 대검’을 쥔 존재가 있었다.

악마와 심연의 존재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것들이 그 존재와 격돌한 채로 굳어있다. 그 광경은 ‘미동도 없는 정적인 형상’이었지만, 동시에 내가 봐온 ‘그 어떤 역동적인 형상’보다 더 강렬했고 나는 홀린 듯이 그 형상을 멍하니 응시했다.

내가 빙의한 소설의 주인공이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부상을 입고 있는 주인공, 얼굴의 왼쪽 뇌와 두개골의 반 이상이 날아가서 생물학적으로는…… 죽은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 정지가 풀린다고 해서 주인공이 죽을 것 같진 않았다.

꼭 신의 분노라는 것을 형상화한 듯한 모습.

멈춰져 있음에도 그 뒤에선 분노로 이뤄진 천둥과 분노가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고, 찬란한 칼의 궤적에 남아있는 이글거리는 황금빛의 불길은 금방이라도 파도가 되어 주위를 휩쓸 것만 같다. 말 그대로 지상에 떨어진 태양과도 같은 존재감이다.

주인공에 맞서는 존재들도 만만치 않았다.

불길한 지옥불이 이글거리는 붉은 망토를 두른 황동색 갑주의 거인, 부서진 투구의 눈구멍 안쪽의 충혈된 두 눈으로 주인공을 응시하며 뒤틀린 거검을 내리꽂고 있다. 저 존재를 보는 순간, 난 미르에 강림했던 유혈의 거인에 못지않은 힘을 가졌다고 직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몸 안에는 내 눈으로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보석이 있었다.

룬 수호자, 그리고 룬 수호자보다는 약해 보이지만 황금의 악마 못지않은 강대한 악마 군주들이 극심한 부상을 입은 주위에 3명이나 살아서 포진해 있었다. 악마 군주들 못지않게 강력한 심연의 존재도 있었던 것 같지만 이미 죽은 채로 주인공의 발밑에 짓밟혀있었다.

……그러고 보니, 르피너스가 ‘심연에 주인공이 시간이 얼어붙은 채로 처박혀 있다.’고 했었지?

여기는 그럼 심연인가? 나는 ‘네쉬라’를 보고 있었는데? 여긴 네쉬라의 안쪽이고? 아니, 어쩌면 심연이라는 개념이 네쉬라와 똑같은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생각지도 못한 그 광경을 보고 있을 때-.

날 응시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벌써 세 번이나 경험해본, 하지만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신의 시선이 날 주시하는 감각. 그에 이전에 겪었던 것처럼 내 영혼이 끝없이 부풀어 오른다. 게다가 한술 더 떠서 심연의 힘이 내 안을 관통하며 그 형상 없는 축복이 깃들려고 했지만-

-히히! 이건, 내 거야!

먼저 심장을 차지하고 있던 ‘르피너스의 장난’이 펄떡거리며 움직였다.

심연의 타락이 내 영혼을 물들이려고 했지만 영혼이 거의 없었기에 아무렇지도 않았다. 내 심장을 대체하려고 하던 심연의 축복은 ‘숙주의 영혼’이라는 먹이를 먹지 못하자 빠르게 말라비틀어진다.

동시에 <게임 시스템>-쪼개진 내 영혼 또한 움직였다.

습득한 ‘광기 어린 지식’을 억지로 의식 한구석에 가둬버린다. 잊어버린 건 아니지만, 철저하게 나와 유리(遊離)시켜 보호한다. 타락한 지식 자체가 반항해보려고 하지만 그래 봤자 인간의 지성과 심연 창조물이 빚어낸 모조품, ‘진짜’가 심어둔 광기에 비하면 한없이 미약했다.

그와 함께 내 정신은 다시 현실로 퉁겨져 날아갔다.

9.

방대한 양의 지식을 주입당한 뇌가 욱신거린다.

오버플로우가 일어난 컴퓨터처럼 의식이 드문드문 스파크 튀는 것처럼 끊어졌다가 이어지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의식이 있을 때마다 시간이 쭉쭉 흘러간다. 날 보며 기겁하는 차장님, 어떤 의료 기기 위, 정한솔 선생의 얼굴…….

“우으으읍, 웨에에에엑…….”

두 눈은 물론이고 얼굴의 구멍이란 구멍에선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심장에 기생하지 못한 심연의 힘이 역류해 질척한 보랏빛 액체가 되어 입 밖으로 흘러나온다.

그렇게 병원 침상 위에 누워서 발광하는 날 보며 심각한 얼굴로 말하는 정한솔 선생과 그걸 듣는 차장님, 그에 난 힘겹게 손을 들어 내가 깨어있다는 신호를 보냈고 정한솔 선생과 차장님 두 분 모두 반색한다.

“깨어났니?!”

“네…….”

“도대체 뭔 일이 있었던 거니? 아니, 뇌파 반응이 뭔…… 너무 혹사당해서 거의 죽은 것처럼 나오던데. 그리고, 심연의 힘이 느껴지는 에너지를 토하던데!?”

대꾸를 못 하고 헐떡대자 차장님이 음료를 하나 건네고 난 한 모금 마시곤 숨을 가다듬었다. 뭔가 그럴싸한 변명을 해야 하는데…… 머리가 띵하다. 몇 주 동안 자지 않은 것처럼 어떤 생각을 계속 이어나가기 힘들어. 자꾸, 끊긴다.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생각하다가-.

그냥 떠오른 생각을 입에 담았다.

“얼마나 지났어요?”

“8시간 정도 기절해 있었다.”

“다행이네요.”

내 대답에 뭔지 모르겠다는 두 사람을 향해 난 멋대로 떠오른 생각을 내뱉었다.

“월요일에 제주도 가요.”

“……?”

“일 끝나고 부원 애들이랑 모여서 제주도 가기로 했어요. 양 씨가 자기 제주도 출신이라고 안내해 주겠다고 하고.”

“아니, 얀마. 도대체 뭔…….”

“여자애들이랑 놀러 가야지.”

“…….”

“히힣, 젖탱이.”

의식의 흐름대로 중얼거리는 날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바라보는 차장님과 의사 양반, 이내 의사 양반은 차장님을 보며 의견을 묻는다.

“어떻게 할까요, 언니?”

“뭐, 헛소리하는 걸 보니 됐어. 뇌가 혹사당한 흔적을 빼면 몸에 이상은 없다니까. 정밀 검사를 해봐도 심연 기생체에 잠식당한 흔적도 없고…… 어차피 슬슬 잘 시간이니 이틀 동안 재운 뒤에 월요일 아침에 조사…….”

“자기 싫어!”

잔다고? 싫다. 싫어. 그것들이 떠오른다. 죽음마저도 초월해버리는 기묘한 공포의 존재들이, 왜? 난? 그런 내 대꾸에 차장님은 싱긋 웃으며 그대로 의수를 들어 내 머리통을 후려쳤다.

그리고, 내 의식은 완전히 어둠 속에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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