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5화
“그것에 대해선 드릴 말이 없습니다. 저도 이렇게까지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으니까요.”
골치 아프다는 듯이 고갤 저으며 한숨을 내뱉는 제롬 시장, 그에 싸장님도 고갤 끄덕인다.
“솔직히, 나도 예상외긴 해. 그쪽이 오크들에게 하라고 하면 거의 99%는 지키잖아? 그러고 보니 테러리스트들 중 하나가 외쳤던 구호 중에서 ‘모르칸쉬’의 이름이 나왔는데…… 그쪽이 개입한 거 아냐?”
싸장님의 추측에 전쟁 군주는 얼굴을 찡그린 채로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긴다.
아니, 근데 내가 왜 이런 곳에 있냐? 아무리 봐도 내가 낄 자리가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지금 빠지기엔 타이밍이 묘했다. 그렇게 오크들에게 둘러싸인 채, ‘나는 공기다.’ 하며 쭈굴거리고 있는데 전쟁 군주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한다?
그에 싸장님이 내 어깨를 탁 친다.
“이 녀석도 관련자니까 들려줘. 보고받았겠지만 이 녀석이 우리 계획을 대폭 앞당겨 줄 거거든.”
“……들었습니다. 전통적인 방식의 ‘마법 전수’를 대단히 잘한다고요.”
“맞아, 이 녀석만 있으면 사업에 필요한 <연금술> 파트는 빠르게 전수할 수 있어.”
싸장님의 호언장담에 제롬 시장은 날 묘한 눈으로 바라본다. 그나저나 저 양반, 처음에 이곳으로 다가왔을 때부터 왠지 날 경계하는 것 같은데…… 아니, 그냥 내 착각일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어쨌든 전쟁 군주는 싸장님을 향해 조용히 고갤 젓는다.
“모르칸쉬가 벌인 일은 아닐 겁니다.”
“확신할 수 있어? 경쟁자인데?”
“예, 녀석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연금술사님을 모셔오기 전에 놈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호오? 사이가 꽤 나쁘다고 알고 있는데?”
흥미롭다는 듯이 대꾸하는 싸장님, 그에 전쟁 군주는 작게 고갤 끄덕인다.
“그렇긴 합니다만…… 무작정 싸울 수는 없지요. 그랬다간 엄청난 피가 흐를 테니까요. 중재역을 하던 무르굴이 사라지면서 좀 험악해지긴 했지만 최소한의 대화는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하긴, 아예 대화를 안 할 수는 없지.”
“놈은 강경파긴 하지만 오크들의 생활 개선에 꽤나 진지하게 신경 쓰고 있습니다. 이번 사업에도 반대하지 않았고요. 그리고, 연금술사님을 ‘인간 치곤 의리가 있다.’고 괘나 괜찮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놈이 반대했다면 모셔올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제롬의 평가에 생각에 잠기는 싸장님, 하지만 얼마 안 가 어깰 으쓱인다.
“너무 상대방을 믿는 거 아니야? 원래 권력 싸움 같은 건, 거짓말과 배신이 난무해. 측근도 배신하는 경우가 있는데, 경쟁자가 말을 바꿔서 뒤통수치는 건 당연한 일이야.”
“그렇긴 합니다만…….”
말끝을 흐리는 제롬 시장은 이내 한숨을 내뱉었다.
“일단, 침입자들을 사로잡았으니 직접 심문하고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일단 증거부터 취합하도록 하지. 아무튼, 그쪽은 아직 이번 사업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거지?”
싸장님의 떠보는 말에 제롬은 윗어금니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는다.
“당연합니다. 이런 식으로 제 일에 태클 거는 놈에게 굴복할 순 없죠.”
“나도 마찬가지야.”
제롬 시장을 향해 똑같이 활짝 웃는 싸장님, 전쟁 군주의 웃음이 난폭한 폭군의 느낌이 들었다면…… 우리 싸장님은 그 배트맨의 조커처럼 싸이코스런 느낌이 든다. 거, 슈퍼 빌런들끼리 만나서 사악한 계획을 논의하며 웃는 모습 같구만.
그렇게 두 괴물의 살기 어린 웃음 사이에 낀 내가 어깰 움츠리며 쪼그라든 사이, 싸장님은 킬킬거리듯이 중얼거린다.
“난, ‘내게 X같이 군 새끼들’은 남김없이 엿을 처먹여줬지. 같잖은 납치범은 가족과 함께 염산에 담가버렸고, 되지도 않은 갑질하려고 한 기업은 경쟁업체에 물량을 밀어줘서 아예 사업을 접게 만들었어. 이것도 똑같아.”
“…….”
“난, 이 X랄을 한 놈을 엿 먹이고 싶어. 손해 따윈 상관없이 말이야.”
그 찐한 광기에 오크 기사들이 살짝 움찔하는 가운데, 싸장님은 제롬 시장을 향해 속삭였다.
“만약, 그 모르칸쉬가 이번 일에 관여했다면…….”
“그건, 걱정 마시길. 오크는 피를 흘려야 할 곳에서 피를 아끼지 않습니다.”
대꾸하는 전쟁 군주, 그에 싸장님도 활짝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좋아, 그럼 나도 이번 사업에 최대한 지장이 없도록 노력해볼게. 그럼…….”
“제롬 시장님!”
싸장님과의 대화 도중에 소리치며 이쪽으로 헐레벌떡 달려오는 오크 기사, 그 소란에 전쟁 군주가 얼굴을 살짝 찌푸렸지만 달려오는 그 얼굴을 보곤 가까이 온 기사에게 되묻는다.
“무슨 일이지?”
“그, 사로잡힌 침입자들이 전부 죽었습니다!”
7.
그 대꾸에 전쟁 군주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가운데, 싸장님이 ‘한번 가서 보자.’고 말하며 일어선다.
전쟁 군주와 싸장님이 기사의 안내에 따라가고 나도 싸장님의 손짓에 엉겁결에 함께 움직였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한쪽에 늘어진 시신들과 그걸 보며 웅성대는 오크들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들어서자 오크들이 비켜서는 가운데, 전쟁 군주가 한 경비병을 응시했다.
“죽기 전에 누가 건든 적이 있나?”
전쟁 군주의 질문, 지키던 경비병 오크는 살짝 당황했다가 재빨리 대답했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충분히 버틸만해 보였기에 제압한 후로 치료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꾸에 싸장님이 날 바라보고 난 나지막이 고갤 저었다. 내 <독침>이 강하긴 하지만 체력 좋은 ‘마력 각성자 오크’를 한 방에 죽일 정도는 아니지. 그에 싸장님은 시신 앞에 쪼그리고 앉아 동공이나 여러 상태를 확인한다.
“하, 워낙 두들겨 맞아서 겉으론 사인 찾기도 힘드네.”
찐빵처럼 부풀어 오른 시신의 얼굴, 딱 봐도 뼈가 부러진 걸 알 수 있는 팔다리……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미 죽었어도 한참 전에 죽었을 부상이었다. 싸장님의 중얼거림에 전쟁 군주가 진중한 표정으로 고갤 젓는다.
“이 정도 부상에 죽은 건 아닐 겁니다.”
“확실히, 내가 봐도 그래…… 어쩌면 진입하기 전에 미리 독약을 먹은 걸 수도 있겠어.”
“독약 말입니까?”
“그래. 딱히, 이상한 건 아니지. 이미 죽기를 각오한 놈들이니까. 진짜 폭탄을 둘둘 매고 자폭하기도 했고…….”
턱을 쓰다듬던 싸장님은 이내 아니라는 듯이 고갤 휘휘 젓는다.
“하지만, 이것도 좀 말이 안 돼! 독약을 먹고 투입? 언제 약효가 돌아 죽을지 몰라! 싸우다가 어처구니없이 ‘픽!’ 죽을지 모르는데? 아씨, 도끼 좀 빌려줄래? 위장 좀 한번 갈라봐야겠다.”
태연하게 한 오크에게서 손도끼를 빌린 후, 싸장님은 거침없이 시체의 배때기를 가른다. 그렇게 싸장님의 해체 쇼에 기사들과 전쟁 군주의 이목이 쏠린 가운데-.
“흐음.”
난 <과거>를 보고 이미 뭔 일이 벌어졌는지 파악했다.
싸장님의 예상대로 이놈들은 ‘약’을 먹고 돌입했다. 일종의 ‘도핑제’로 알고 말이다. 그건 ‘특정 마력’에 노출될 시 독으로 변하는 일종의 <연금술> 약물이었고, 이 녀석들이 자결에 실패하자 내부자가 대신 숨통을 끊어줬다.
문제는 이걸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포장하는 건데…….
“싸장님?”
“왜? 뭐 걸리는 거 있냐?”
위를 갈라 내용물을 확인하는 모습에 적당한 변명거리를 생각해냈다. 내가 입을 열자 싸장님이 바라보고, 난 조심스럽게 위의 내용물을 보며 입을 열었다.
“네. 근데, 좀…… 긴가민가하네요?”
“뭔데?”
“이 내용물에서 익숙한 마력의 파장이 느껴져요.”
“마력의 파장?”
전쟁 군주의 질문에 난 고갤 끄덕였다.
“같은 마력이라도 개인마다 그 느낌이 조금씩 다르잖아요? 같은 마법이 발현되어도 나오는 마력광은 개인마다 다르고…… 전, 그런 걸 느끼는 감각이 매우 민감해요. 그냥 만들어진 연금술 용액에 담긴 마력의 흔적을 보고, 누가 만들었는지 대략 추적이 가능할 정도로.”
“…….”
“아주 희미하지만…… 위액에서 ‘칼드록’ 화학 선생님의 마력 느낌이 나요.”
““칼드록?””
싸장님과 전쟁 군주, 모두 당혹스런 얼굴을 한다.
칼드록, 우그 타람에서 교수진으로 일하고 있는 오크다. 미국에서 화학 관련 석사 학위를 땄고, 나도 안면을 익혔지. 미국에서 오신 분답게 한국어를 잘 못 하셔서 대화는 많이 나누지 않았지만.
“……잠시만, 혹시 모르니까 다른 놈도 째 보자.”
곧바로 싸장님이 다른 오크의 배를 갈라 위 내용물을 보여줬고, 난 기계적으로 고갤 끄덕였다. 사실, 이미 소화되어 마력흔은 보이지 않지만…… 사실이니까! 놈이 마법 실패로 위장해 특정 마력 파장을 이들에게 방출했고 그에 위의 약물은 맹독이 되었다.
그러고도 두 놈을 더 해체한 뒤, 싸장님은 제롬 시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믿기 힘들겠지만…… 이 녀석 말은 믿어도 좋아. 나보다 감각은 더 뛰어나니까.”
“흠, 확실히 뭔가 관여된 건 분명해 보입니다만…….”
턱을 매만지면서 말끝을 흘리는 제롬 시장, 그에 호위병들이 살짝 몸을 푼다. 아마 체포할 걸 예상한 듯하지만 전쟁 군주는 고갤 저었다.
“그냥 잡는 것보다는 그 뒤를 몰래 추적하는 게 나을 것 같군요.”
“동감이야. 맨정신으로 폭탄을 두르고 자폭하는 놈들이니 대놓고 잡으러 갔다간 터질지도 모르겠네.”
“모두들 들었겠지? 티 내지 말도록.”
전쟁 군주의 말에 고갤 끄덕이는 오크 기사들, 그 뒤 전쟁 군주는 싸장님과 사업과 관련된 몇 가지 의견을 나누고 기사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8.
테러 현장의 시찰이 끝난 후, 제롬은 곧바로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차량에 탑승했다.
“시장실로 가지.”
“알겠습니다.”
전차를 방불케 하는 육중한 방탄 차량이 움직이고 제롬은 조용히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 생각지도 못한 테러, 새로운 골치 아픈 일거리가 쌓였지만…… 그런 고민은 잠시 내려놓고 그는 조금 전에 봤었던 백발의 인간 소년을 떠올렸다.
한새벽.
우그 타람에 파견되면서 대한민국 정부는 정식으로 그와 관련된 정보를 이쪽에 건넸다. 대한민국 정부의 ‘특급 경계 대상’ 중 하나. 코드명 ‘웃는 악마’, 공격성-오렌지, 건드리지 않으면 얌전함. 강수영 연금술사의 수제자…….
하지만, 인간들이 알린 것 이상으로 제롬은 알고 있다.
유혈의 화신을 쓰러트린 무르굴이 완전히 ‘승천’하기 전, 그는 몇 가지 당부를 남길 수 있었다. 스러져가면서 남기는 작은 속삭임이었기에 최측근이었던 단 한 명만 들을 수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그대로 그와 모르칸쉬 둘에게 전해졌다.
전쟁 군주의 탄생 비화, 세로쉬의 사랑, 앞으로 오크가 나아가야 할 방향…….
그리고 저 소년에 대해서까지.
세상이 멈추고 세로쉬께서 잠시 지상에 역사(役事)하심을 엿본 괴물, 무르굴은 ‘그건 인간이 아니며 어찌 보면 자신이 죽인 ‘유혈의 화신’보다 더 위험한 존재’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저 소년이 맡겼던 건 반드시 돌려주라고 신신당부했다.
그 믿기 힘든 경고에 얼마나 고민했던가?
혹시 몰라서 지상에서 저 하얀 소년에 대해 은근히 정보까지 모았다. 그 와중에 저 소년이 여기에 보조 인력으로 일하러 들어온다고 했을 땐…… 식겁해서 모르칸쉬와 긴급회의까지 했었지. 나중에 부하들을 통해 들어본 바로는 ‘뛰어난 연금술사’에 ‘매우 뛰어난 마법 교육자’였지만.
그리고, 오늘 직접 만나본 그것은…… ‘애매’했다.
묘하게 그의 육감을 자극하긴 했다. 하지만, ‘어쩌면 유혈의 거인보다 더 위험하다.’는 무르굴의 주장은 솔직히 동의할 수 없었다. 아주 잘 쳐줘 봤자 강수영 연금술사와 비슷한 정도? 그것도 억지로 부풀리고 부풀린 평가에 가깝다.
……그래도 저 존재 덕분에 이거 하나는 확실해졌다.
모르칸쉬가 이번 테러의 배후일 리 없다.
무르굴의 유언을 함께 들었으니까. 핵폭탄보다 위험한 존재가 있는 곳을 테러한다고? 잘못 건드렸다가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아무리 막 나가는 자라도 죽은 수백 명의 오크를 되살린 ‘성자의 경고’를 무시할 리가 없다. 자신을 엿 먹일 거라면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겠지.
“흐음…….”
그럼, 도대체 이번 일을 꾸민 자는 누구인가?
즉흥적인 테러라고 볼 순 없었다. 투입된 마력 각성자 오크, 거침없이 목숨을 버리는 광적인 면모, 폭발을 일으킬 정도의 폭약과 차량을 대절할 정도의 인맥, 자신이 구한 인재를 포섭한 것…… 내막을 모르는 자라면 가장 먼저 모르칸쉬를 떠올릴 테지.
자신도 그랬으니까.
이런 짓을 벌이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면 모르칸쉬를 경계했을 거다. 지금 보니 상대방은 자신과 모르칸쉬를 이간질하려는 것 같았다. 자신은 그 의심을 피했지만…… 문제는 아랫것들이다.
휘하의 오크들은 그를 무조건 따르는 것이 아니다.
전쟁 군주들은 하나같이 오크들을 매혹시키는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지만 그게 만능은 아니다. 그렇기에 수십만 단위로 무리가 거대해진 이 시점에선 오크들은 인간 정치인들의 방식을 모방해서 무리를 통솔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어쩔 땐 역으로 밑의 여론에 휩쓸리기도 한다.
이걸 보고 부하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뻔하다. 나름 정보 공작을 하고 있지만…… 이대로 가다간 자칫 내전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와 모르칸쉬 둘 다 원치 않더라도.
“크응…….”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에 제롬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미궁에서 무리를 이룰 때는 이런 고민 따윈 없었다. 무리의 우두머리로서 조직을 관리하면 됐으니까. 오늘따라 무르굴이 정말 보고 싶었다. 과거엔 이런 건 녀석에게 맡기고, 자신은 행정적인 요소만 신경…….
“다 왔습니다 전쟁군주시여.”
“……음.”
귓가에 울리는 운전기사의 음성, 그에 제롬은 살짝 한 박자 늦게 고갤 끄덕였다. 생각에 잠겨있다 보니 도착한 것도 몰랐다.
차 문을 열고 내린 그는 왠지 지쳐 보이는 발걸음으로 자신의 집무실을 향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