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9화
5.
황톳빛에 가까운 황금빛이 가득한 공간, 순식간에 바뀐 풍경에 반사적으로 <눈>을 두리번거리려고 할 때-
“오랜만이군.”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왠지 익숙한 그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해 고갤 돌리니…… 황금빛 군장 차림의 전쟁 군주가 황톳빛 옥좌에 앉아 날 내려다보고 있다.
“하, 하하하…… 안녕하세요? 오랜만…… 이죠?”
오무혁, 이미 죽은 전쟁 군주가 그곳에 있었다. 이게 도대체 뭔 일이지? 곧바로 <눈>을 사용해 상대를 응시하자 그 실체가 드러났다. 지금 저 앞에 있는 것은…….
“당신은…… 파편이군요. 오무혁의 영혼 파편.”
“흐, 빨리 눈치채는군. 그 특별한 눈으로 파악한 건가?”
옥좌의 팔걸이에 올린 손으로 턱을 괴며 대꾸하는 오무혁. 아니, ‘오무혁의 파편’. 그는 고갤 까닥였다.
“그래, 이미 난 죽었다. 여기 남아서 대화하는 건, 나의 조각이지.”
“흐음, 신기해라…… 그 결손감 같은 건 느끼지 않나요?”
“결손감?”
“지금의 당신과 저는 비슷한 처지거든요.”
뭐라 하건 말건, 난 ‘나와 비슷한 처지’의 오무혁의 영혼을 훔쳐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불완전한 상태의 조각난 영혼임에도…… 그는 나완 다르게 대단히 평온해 보였다. ‘도대체 뭔 소릴 하냐?’는 듯이 바라보는 시선에 난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제 영혼은 르피너스에게 한 번 박살 났거든요. 함부로 자길 훔쳐다 봤다는 죄목으로요. 그 뒤에 제 영혼을 제멋대로 조립했어요.”
“후, 후후후…… 하긴, 그럴 능력이 있다고는 해도 함부로 신의 행사를 쳐다보는 건 안 좋은 것이겠지.”
“예,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답니다. 당신을 부추겨서 세로쉬를 불러낸다는 미친 짓을 하긴 했지만.”
왜 날 이곳에 불러낸 건지는 제쳐놓은 채, 난 그를 향해 질문을 쏟아냈다. ‘기억은 온전하냐’, ‘자신의 상태에 공허함이나 살의를 느끼진 않느냐’, ‘특이한 감각 같은 건 없느냐’…… 그리고 오무혁은 순순히 대답해줬다.
“난, 기억은 물론이고 영혼의 ‘공허함’이나 ‘결손감’ 따윈 느껴지지 않아. 온전한 존재에 대한 ‘질투나 살의’ 또한 전혀 없고. 오직 충만한 세로쉬님의 축복이 함께한다네.”
“……진심으로 부럽네요. 르피너스는 영혼을 부순 대가로 쓸모없는 것만 던져줬는데.”
“미쳐 날뛰는 혼돈께서는 그런 것이겠지.”
내 푸념에 쓰게 웃는 오무혁 씨, 그렇게 어느 정도 궁금증을 쏟아낸 뒤에서야 난데없이 저 양반이 왜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났는지 좀 궁금해졌다.
“그나저나 왜 나타나셨나요?”
“약속을 지키게 하기 위해서지.”
“……약속이요?”
“그쪽이 약속하지 않았나? 대한민국 정부에게 장비를 빼앗기게 생겼으니 도와달라고. 그 대신에 그 메달을 준다고 했었지.”
“아, 그렇긴 했죠.”
음, ‘필요 없어서 되돌려 준 건가?’ 했는데 기색을 보아하니 아닌 것 같았다. 황톳빛 옥좌에서 오무혁은 늘어지게 등을 기대며 입을 열었다.
“이 목걸이를 내 자식에게 전해줬으면 하네.”
“제가요?”
“어려운 건 아니야, 미르에 다니는 하프 오크니까.”
……미르에 다니는 하프 오크? 그 사람 딱 한 명밖에 없는데?
“혜영이요?”
“알고 있나 보군?”
“네, 같은 동아리거든요. 이번 여름 방학 때, 같이 제주도에 놀러 가기도 했고요.”
“호오? 같이 놀러 가?”
“네, 제주도를 돌았죠. 낚시도 하고, 노래방도 가고, 럭셔리 호텔도 가고. 해변에서 물놀이도…….”
어느 순간부터 묘하게 꿈틀거리는 오무혁의 얼굴. ……잠시만, 나 지금 딸 아이 아빠 앞에서 함께 놀러 갔다고 깝치는 건가?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파악하자마자 재빨리 진정하라는 뜻으로 양손을 펼치며-.
“걱정 마세요, 신께 맹세코! 이상한 일은 없었습니다!”
“…….”
“다른 부원 애들이랑 같이 간 거예요! 그나저나 혜영이의 아버지일 줄은 몰랐어요! 그, 오크들 사이에서 하프 오크의 취급이 좀 안 좋다고 알고 있는데. 설마 하프 오크 자식을 가지셨을 줄이야.”
재빠르게 말 돌리기를 시전했다. 다행히 그런 내 말 돌리기가 통한 것인지 오무혁의 영혼은 한숨을 푹 내뱉곤 고갤 끄덕인다.
“그래서 이렇게 널 통해 전달하려고 했지. 목걸이를 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해도 제대로 전달이 될지 알 수 없었으니까. 설령, 그게 알려졌다간 순수 혈통의 내 아이들이 강력하게 반발했을 거고.”
“하하하…… 손수 유산을 남겨주실 정도면 혜영이를 많이 아끼시나 봐요?”
“후후, 내 기질을 꼭 물려받았어. 그리고, 그녀를 닮기도 했고.”
회상에 잠긴 듯, 오무혁의 영혼은 살짝 아련한 눈으로 허공의 한 곳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아주 당찬 여자였지. 항상 무리의 순종적인 여자들만 보던 내겐 아주 신선했어. 전사와 기사들을 뚫어내면서 날 죽이기 위해 칼을 쥔 채로 달려들던 그 모습은…… 아름다웠지. 동시에 유린하고 싶었고.”
“하, 하하.”
“그래서 취했지. 처음엔 그저 유린하고 싶었던 거지만, 힘들게 쟁취한 것이라서 그런지 점점 애착이 가더군. 그런 나완 달리 그녀는 내가 어지간히 싫었는지 기회가 나면 날 죽이려고 했지만 말이지. 그러다가 임신한 도중에 자살했고.”
“…….”
“설마, 다른 여자들이 자살을 돕도록 무기를 건네줄 줄은 몰랐어. 정말 여자들의 질투란…….”
거, 러브 스토리 한 번 더럽게 살벌하네.
그 뒤로도 오무혁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죽은 시신에서 기어 나온 아이, 지상과의 접촉, 인간과의 관계를 고려한 하프를 살려둔 것, 그 뒤로 신경을 껐지만 뉴 송파구 한구석에서 살아남아 하프들의 우두머리가 된 것, 그 모습을 보며 그녀를 떠올린 것…….
그렇게 한참 동안 추억에 빠져서 썰을 풀어냈던 오무혁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날 바라보았다.
“참 안타까운 일이지. 세로쉬님의 ‘순수한 사랑’은 반쪽이라고 해도 전혀 희석되지 않는 것인데, 미궁의 척박한 생활 관습에 익숙해진 대다수의 동족들은 아직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있어. 그 때문에 수많은 하프 오크들이 핍박받으며 죽어 나가고 있지.”
“그, 장비를 회수하러 온 걸 보면 유언을 남기시지 않았나요? 하프 오크에 대해 말 좀 해주시지…….”
내 말에 오무혁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갤 저었다.
“그땐, 내 육신이 거의 바스러져서 시간이 없었다. 대충 뭉뚱그려서 고작 한 명에게만 속삭이듯이 말할 수 있었지. 지금 생각하면 정말 안타까워. 그분의 ‘무한한 사랑’을 제대로 알리지 못했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싸우면서 내가 깨달은 것들을 쩌렁쩌렁 외치는 건데 말이지.”
진짜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던 전쟁 군주는 손을 들어 내 손에 쥔 메달을 가리켰다.
“어쨌든 그래서 자네를 택했네. 그 물건의 전달자로 말이야. 혜영이에게 이 목걸이를 전달해주게. 이게 아비로서의 선물이라고 말도 해주면 고맙겠고. 아마 외형도 바뀔 거야. 누가 봐도 잘 모르겠지.”
“음, 저도 기꺼이 그렇고 싶은데…… 솔직히 혜영이가 지금 살아있는지 모르겠는데요?”
“……살아있는지 모르겠다고?”
“네, 지금 어떤 상황이냐면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전쟁 군주에게 난 내가 파악한 ‘뉴 송파구’의 현 상황에 대해 말했다. 심각한 표정으로 내 설명을 듣던 오무혁은 잠시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날 내려다보았다.
“그래, 그 ‘우그 타람’이라는 곳에서 일하고 있다고?”
“넵, 어쩌다 보니 일하게 됐죠.”
“그걸로 확실해졌군. 누군가가 외부에서 ‘뉴 송파구’를 분열시키려고 하고 있어.”
“……네?”
난데없는 논리의 비약에 되묻자 오무혁은 담담히 말을 이어나갔다.
“이 물건이 전해졌다는 건, 내 유언이 다른 두 ‘전쟁 군주’들에게 정상적으로 전해졌다는 거다. 그리고 난, 너에 대한 것도 유언으로 남겼지.”
“저에 대한 걸요?”
“신의 행사까지 훔쳐볼 능력을 지닌…… 어찌 보면 내가 끝장낸 유혈의 거인보다 더 위험한 존재라고 말이야.”
“…….”
“내가 없는 사이, 두 사람이 극적인 일로 사이가 나빠져서 싸움에 들어갔다고 해도 내 경고는 무시하지 않을 거다. 네가 일하고 있는 곳을 노렸다는 게 오히려 외부세력이 간섭했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다. 두 사람도 눈치를 챘을 거야.”
하, 하긴. 생각해보면 이런 물품을 주니 마니 결정하는 것도 웬만한 기사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닐 거다. 당연히, 이곳 지배자들의 허락이 있었겠지? 아, 이런 쉬운 인과관계도 떠올리지 못하다니…… 생각보다 내 능력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많네? 쓰읍, 더 들키면 안 되는데.
그렇게 점점 퍼져나간 내 능력에 대해 걱정하는 동안, 오무혁도 팔걸이에 걸친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작게 한숨을 뱉는다.
“하아, 내가 관여할 수 없다는 게 너무 아쉽군.”
“뭐, 그래도 다행이네요. 두 사람이 서로가 한 짓이 아니라는 것을 아니까 전쟁까진 안 가겠죠.”
“……모르지. 전쟁 군주의 ‘카리스마’도 한계가 있으니까 말이야. 미궁에서의 작은 무리라면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지만, 지상에 올라온 우린 정치인과 비슷하다. 하기 싫더라도 지지자들의 이끌림에 따라야 할 때도 생기거든.”
어깰 으쓱인 후, 오무혁은 내 손에 있는 목걸이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부탁하지.”
“어, 근데 혜영이가 살았는지…….”
“아직 살아있어.”
내 말을 도중에 끊는 오무혁은 두 눈을 감고 뭔가를 느끼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간다.
“지금의 난, 대략적이지만 모든 오크의 운명을 느낄 수 있다네. 그 아이는 아직 살아있어.”
“…….”
“그럼 부탁하지. 죽더라도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 그 아이도 세로쉬 님의 낙원에 도달할 것을 아니까.”
씁쓸한 얼굴로 말을 이어나가는 전쟁 군주, 이거 아무리 봐도 그냥 지상에서 멍하니 혜영이가 올라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뉘앙스가 아닌데…….
“음, 준다고만 했지 이런 배송 약속은 하지 않았는데…….”
“…….”
“아니, 그냥 그렇다구요. 네. 네.”
꿈틀거리는 전쟁 군주의 시선에 찔끔하며 변명을 덧붙였다. 물론, 혜영이를 위해 지하로 기어들어갈 순 있지만! 인간인 내가 지하로 기어들어가는 게 골치 아픈 건 사실이잖아? 좀 항의할 수도 있는 거지! 그런 내 항의에 전쟁 군주는 앉아있는 옥좌에서 일어선다. 어어……!
“아니, 안 하겠다는 게 아니…….”
“좋아. 추가적인 보상을 주지.”
“네?”
“추가 보상을 주겠다고 했다.”
추가 보상을 주겠다는 그 말에 난 활짝 웃었다.
그래! 이래야지! 일을 시키면 보상이 따라와야지! 공짜로 일을 시키려고 하면 쓰나! 그나저나 보상이 뭘까? 뉴 송파구의 시장이니까…… 비자금 같은 거 있지 않으려나? 기대감에 손바닥을 비비며 난 오무혁을 바라보았다.
“헤, 헤헤헤. 그럼…….”
“의견 전달을 위해서 여력을 많이 남겨놓아서 다행이야.”
그가 오른손을 쫙 펴자, 주위의 공간을 이루고 있던 세로쉬의 신성 일부가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렇게 빨려 들어간 신성은 이내 불타오르는 막대로 화한다. 그걸 가볍게 휙휙 휘두르는 오무혁. 아니, X발? 설마 몽둥이찜질을 하려는 건가 싶었는데…….
“그대는 마법사지? 기색을 보아하니, 몸의 사용이 익숙지 않은 것 같은데.”
“음, 마법사에 가깝긴 하죠?”
“그럼 봉을 이용하는 기술이 좋겠군.”
뭐라 말할 사이도 없이 오무혁은 그 불타오르는 신성을 내게 내던졌다. 내 가슴팍을 꿰뚫고 박히는 불길의 막대, 그와 함께…… 내 막대한 양의 정보들이 내 뇌리에 쏟아져 들어온다!
“흐억, 흐어어어억!”
반사적으로 가슴팍을 붙잡고 숨을 헐떡였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몸을 움직이는 기교에 관한 ‘경험적 지식들’, 피상적인 것들이 아닌 <게임 시스템> 습득 보정이 들어간 것처럼 영혼에 새겨지는 것 같았다. 동시에 인격이 살짝 뒤틀리는 것도 느꼈다.
쉴 새 없이 투쟁을 겪은 것처럼 좀 더 ‘저돌적이고’ ‘자신만만하게’.
“어떤가?”
그런 날 향해 물어보는 오무혁, 그를 향해 난 꿰뚫렸던 가슴을 붙잡으며 대꾸했다.
“아니, 요즘 세상에 총으로 해결하지 뭔 병기술을 가르쳐줍니까? 그것도 쓰기 힘든 ‘장병기’류만 콕 집어서.”
“흐음, 그렇긴 하지. 그렇다 하더라도 몸을 움직이는 방식에 대한 지식도 따라왔을 텐데?”
“그렇긴 한데, 이건 저랑 심각하게 안 맞는데요?”
분명 귀중한 경험들이지만……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느낌이 강했다. 굳이 표현하자면 ‘사자의 방식’을 ‘도마뱀’에게 가르친 느낌? 피지컬과 기세를 살려서 움직이는 요령이 너무 많아. 지금 내겐 전혀 적용이 안 되는 반쪽짜리다.
그런 내 항의에 오무혁은 어깰 으쓱인다.
“당연하지. 내 경험이고 철저하게 내 신체조건에 맞춰져 있으니까. 하지만, 너의 것으로 변형시키기 훨씬 쉬울 거다.”
“하긴, 맨땅에서 하는 것보단 낫죠.”
함부로 따라 했다간 오히려 빈틈이 생길 기교들, 하지만 서두르지 않고 서서히 적용하면 완전히 내 것이 될 거다. ‘어떤 의도에서 왜 해야 하는지’를 빠삭하게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몸을 움직이는 근원적인 경험 또한 영혼에 새겨졌고.
근데…….
“지상에서 지팡이를 휘두를 일은 없는데…… 차라리 돈 같은 거 주시지. 비자금 같은 거 없어요? 정치인들은 대부분 딴 주머니 같은 것 차던데.”
“…….”
“아니, 그냥 해본 말이에요! 감사합니다!”
나쁜 건 아니지만, 크리스마스 선물로 기대하던 게 아닌 엉뚱한 걸 받은 느낌. 살짝 불평했는데…… ‘대단히 화가 난 기색’이기에 재빨리 고갤 숙였다. 근데, 솔직히 사실이잖아. 아무리 초월적인 신체능력으로 봉술이나 창을 잘 다뤄봤자 99.99%는 총 앞에서 평등한걸?
다행히 오무혁은 화를 삭이는 표정으로 다시 옥좌에 앉았고…….
“그럼 ‘선금’도 받았으니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의 ‘제약’도 같이 받아야겠지.”
“……뎃?!”
뭐라 하기도 전에 파고든 세로쉬의 신성이 날 옥죄고, 손안에 있던 메달이 몸에 스며들어 가며 목에 낙인과도 같은 형상을 만든다. 아니, X발?!
“이것으로 더 이상 대화를 나누기 힘들 것 같군. 대화를 위한 여력은 방금 다 써서 말이지.”
“아니, 잠시만…….”
“그럼 부탁하지.”
뭐라 하기도 전에 주위를 뒤덮은 황금빛이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야! 너?! 그 목걸이!!”
내 귓가에 울리는 기겁하는 싸장님의 목소리, 난 어느새 다시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