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0화
43화. 진상 손님의 악성 의뢰
1.
목에서 느껴지는 싸늘한 감각에 난 재빨리 손을 더듬었다.
의식 세계 속에서처럼 내 목에는 어느새 칙칙한 흑색 쇠사슬이 걸려 있었고 허공엔 <게임 시스템>의 창이 여러 개가 떠 있었다.
[Play The World!]
당신의 영혼과 자아 일부분은 르피너스에 의해 뜯겨 게임 속 캐릭터의 능력을 ‘흉내 내도록’ 바뀌었습니다. 뜯겨 나간 당신의 자아와 영혼의 조각이 특정 조건에서 현상이 게임에 맞게 해석합니다.
‘강제 퀘스트’로 보이는 상황 감지 – 퀘스트를 수락했습니다.
Quest-[아버지의 유산]
당신은 의식 세계 속에서 오무혁과의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자신의 유산을 전달하는 대가로 그는 당신에게 전쟁 군주의 무시무시한 ‘전투 기술(Fighting)’과 ‘장병기(Polearm)에 관련된 전반적인 경험’을 물려줬습니다. 일정 수준에 도달하게 될 때까지 당신은 두 가지 분야에서 엄청난 성장 속도를 보일 것입니다.
이제, 당신이 약속을 지킬 차례입니다.
·퀘스트 실패 페널티-‘마력 돌연변이’ <세로쉬의 낙인> 획득.
[세로쉬의 낙인]
오크신의 신성으로 찍힌 낙인입니다.
오크들은 본능적으로 당신에게서 강렬한 부정적인 감정들을 느끼게 되며, 당신을 향한 오크들의 모든 공격이 세로쉬의 신성에 의해 ‘대폭 강화’됩니다. 또한 당신을 죽인 오크는 낙인에 깃든 신성을 계승 받아 강력한 성장을 할 수 있습니다.
“X됐어요.”
튤팁을 다 읽자마자 나도 모르게 얼굴을 감싸 쥐었다. 한 마디로 실패하면 오크들의 ‘황금 고블린’이 된다는 소리. X팔, 그냥 곱게 알겠다고 받을 걸…… 그런 내 좌절한 모습에 맞은편에 앉아있던 싸장님이 소리친다.
“아니, X발! 그러니까 왜 멍청하게 장비를 함부로 손대서…… 너 괜찮아?!”
“네, 아직까지는 말이죠.”
손으로 금빛 문신을 만지며 <눈>으로 그 실체를 응시했다.
싸장님의 영체에 박혀있던 것과 비슷하다만…… 차원이 다를 정도로 깊게 내 영체에 박힌 신성. 지금 내 마법으로 떼어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 내 덤덤한 반응에 싸장님도 좀 진정하시고 내 목을 바라본다.
“그 목에 나타난 칙칙한 목걸이는 뭐냐?”
“일종의 낙인이에요.”
“낙인?”
“저, 조금 전에 메달에 깃들었던 오무혁 씨 영혼을 만났어요.”
“뭐?!”
싸장님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하는 가운데, 난 한숨을 내쉬며 의식 세계 속에서 있었던 일을 요약해서 말했다. 그런 내 말을 듣고 난 뒤, 싸장님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날 응시한다.
“그, 혜영이란 아이가 사실 전쟁 군주의 딸이라고?”
“네.”
“그리고, 걔에게 지금 니 목에 걸린 메달을 전달하라고 했다?”
“네…….”
“끄응, 진짜 그 양반도 참. 도대체 왜 널 전달책으로 쓰냐.”
내 말을 듣고 허탈하단 듯이 소파에 등을 기대며 중얼거리는 싸장님, 그에 나도 한숨을 내뱉었다.
“하프 오크에게 유산을 남겨줬다는 정보가 흘러나가면 골치 아파질 수도 있으니 저를 통해 전달한 거라네요.”
“……하긴, 성자의 유품을 하프 오크에게 넘겨줬다고 하면 내막이 어쨌든 간에 몇몇 또라이 새끼는 눈이 돌아갈 만도 하지.”
품 안에서 전자 담배를 꺼낸 싸장님은 떨떠름한 얼굴로 연무를 빨아들이다가…… 내 목의 낙인을 보곤 생각났다는 듯이 얼굴을 꿈틀거린다.
“근데, 너도 좀 조심해야겠다. 혹여 네게 성자가 쓰던 목걸이가 전달됐다는 소식이 흘러나가면 많이 귀찮아질 거야.”
“어쩔 수 없죠. 하지만, 웬만해선 흘러나가지 않을 거예요.”
‘뭔 근거로 그렇게 확신하냐?’는 듯이 바라보는 싸장님을 향해 난 어깰 으쓱였다.
“오무혁 씨가 각성했을 때, 제 감각으로 그의 주위에 있던 코드 108의 흔적을 흐릿하게나마 관측했는데…… 그걸 눈치채고 저를 ‘엄청나게 강력한 존재’로 착각한 것 같더라고요. 다른 전쟁 군주들에게 ‘유혈의 거인’ 수준으로 경계해야 할 존재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하네요.”
“푸흡.”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린 싸장님은 연무를 뱉어내며 고갤 끄덕였다.
“어쩐지, 제롬 그 양반이 너에 대해서 은근슬쩍 많이 물어보는 것 같더라니…… 하긴, 그러면 웬만한 놈은 달라붙지 않겠네.”
“아, 그리고 모? 어쩌구 하는 전쟁 군주가 테러를 저지른 건 아닐 거래요. 자기가 없는 동안에 아무리 사이가 나빠졌어도 자신이 남긴 경고를 무시하진 않을 거라고. 외부에서 이간질하는 세력이 있을 거라고 하던데요?”
“흐음, 이간질하는 세력이라…….”
그 말에 팔짱을 끼며 생각에 잠기는 싸장님, 그 사이에 재빨리 소파에서 일어나 싸장님의 옆에 앉았다. 내가 뭔 짓을 할지 짐작한 듯, 싸장님은 내게서 떨어지려고 하지만 난 그 옆에 찰싹 달라붙어-.
“싸장님, 그런 의미에서 어떻게 안 되나요? 제롬 양반에게 부탁해서 혜영이를 찾아달라고…….”
“아, X랄 마!”
“저 이러다가 진짜 죽어요! 싸장니임~!”
이곳에 떨어졌던 초기, 한창 가난할 때 싸장님에게 밥 사달라고 빌붙었을 때처럼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이러다 내가 죽는다고요! 그런 내 추잡한 애원에 싸장님은 얼굴을 찡그린다.
“……죽는다고?”
“네! 어떻게든 이걸 전달해야 해요! 전달 못 하고 혜영이가 죽으면 저 오크들에게 황금 고블린 돼요!”
“황금 고블린?”
되묻는 싸장님을 향해 난 내 목에 걸린 칙칙한 흑색 사슬을 들어 올리며 고갤 끄덕였다.
“혜영이가 죽으면 이 목의 ‘낙인’이 활성화될 거래요. 그러면…… 오크들에게서 본능적으로 미움을 받고, 오크들의 공격에 더 큰 피해를 받아요.”
“거, X되게 살벌한 낙인이네.”
내 설명에 혀를 내두른 싸장님은 얼굴을 찡그린 채 팔짱을 낀다.
“다급해진 건 이해되네. 뭐, 요청이야 해줄 수 있는데…… 어떤 이유로 혜영이를 찾아내 달라고 해야 하나?”
“뭐, 적당한 구실 없어요? 아니, 일단 그냥 노코멘트하고 찾아달라고 할 수도 있…… 켁!”
내 정수리를 후려치는 싸장님. 어우, 요즘 유별나게 정수리를 맞는 기분이야. 찌리릿 올라오는 통증에 내가 정수리를 붙잡는 가운데, 싸장님은 전자 담배를 입에 문 채 묘한 표정으로 꿀밤을 후려갈긴 오른손과 날 번갈아 보신다.
“이 새끼, 이젠 피하려고 하네?”
“끄으응…… 네?”
뭔 소리지? 내 대답에 눈을 좁히며 날 빤히 바라보던 싸장님은 이내 머릴 휘휘 저으시곤 입을 여셨다.
“뭐, 이유 따지지 말고 혜영이를 찾아달라고 할 수도 있지.”
“그럼…….”
“근데, 그게 과연 옳은 선택인지는 모르겠다.”
아니, 이곳 시장에게 사람 좀 찾아달라고 하면 사실상 끝나는 거 아닌가? 그런 내 반응을 읽은 것인지 싸장님은 연무를 뻑뻑 뱉어내며 고갤 절레절레 젓는다.
“제롬에게 부탁하면 부하들을 시켜 찾긴 할 거야. 평상시였다면 그게 먹혔겠지. 하지만, 지금은 달라. 누군가가 제롬과 모르칸쉬 사이를 이간질하고 있어. 그것도 ‘오크’를 장악해서 말이야.”
“…….”
“하프 오크 혐오 때문에 흉흉한 이 시점에서 전쟁 군주가 하프 오크 하나를 지하에서 찾으라 하면 소문이 날까? 안 날까? 그리고, 그놈들이 그 애에게 관심을 가질까? 안 가질까? 그 관심이 그 혜영이란 애에게 좋을까? 안 좋을까?”
“그 믿을 수 있는 부하들만 움직이면…….”
“비밀리에 움직인다고 해도 정보는 어딘가에서 항상 질질 샌단다. 특히나 이렇게 사람을 풀어서 뭔갈 찾는 경우라면 더더욱.”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반박하면서 싸장님은 얼굴을 찡그린다.
“그리고, 제롬의 부하들도 100% 믿을 수가 없어. 그 자폭했다는 오크 석사 녀석, 제롬이 뽑은 사람이야. 그런 놈이 부하들 사이에 또 있으면 정보는 더 빨리 퍼질 거야.”
“으윽.”
“일단, 해달라고…… 아니, 생각해보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구나? 기다려라. 연락 좀 하고 오마.”
피우던 전자 담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벽 한쪽에 설치된 전화기로 향하는 싸장님. 아니, X발?! 이렇게 무기력하게 혜영이가 무사히 나오기만을 기도해야 한다고? 아니, 이래선 안 돼. 뭔가 내 생존을 마냥 운에 맡길 수는 없어. 차라리…….
전화기를 드는 싸장님을 향해 난 다급하게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잠깐! 잠깐만요, 싸장님!!”
“아, 왜.”
“제가 직접 지하에 내려가서 찾아볼 수 있을까요?”
“……네가?”
“네!”
그런 내 외침에 싸장님은 얼굴을 찡그린다.
“마음이 급한 건 이해하는데, 불가능해. 일단, 오크 측이 절대 허락 안 할 거야. 100번 양보해서 허락한다고 해도 가서 어떻게 걔를 찾으려고?”
그 합당한 이의제기에 난 목에 걸린 우중충한 흑색 사슬을 들어 올렸다.
“이 목걸이가 있잖아요. 왠지, 이게 절 안내해 줄 거란 확신이 들어요.”
“흐음.”
사실, 그딴 건 없다.
혜영이가 찾아갔을 법한 곳의 <과거>를 훑어보고 그냥 추적해보는 거지. 어쨌든 그런 내 변명에 싸장님은 천천히 고갤 끄덕이신다.
“좋아, 그렇다고 치자. 그럼 오크들의 허락을…….”
“그냥 몰래 가면 안 돼요?”
“몰래?”
“네.”
대답과 함께 난 싸장님의 주거공간 한쪽의 벽을 바라보았다. 그런 내 시선의 방향에 싸장님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눈치챘냐?”
“헤헤, 돌아다니다 보니 벽 뒤에 빈 공간이 느껴져서…….”
날 째려보는 싸장님, 그에 난 어색하게 웃었다.
교활한 토끼는 굴을 3개 파놓는다는데, 납치에 대해 강박증에 가까운 대비를 하시는 우리 싸장님은 더하지. 싸장님의 지하 생활공간, 그 의상실 벽에 비상 탈출구로 보이는 통로가 있었다. 뭔진 모르겠지만 이종족 지구 방향이야.
그런 내 대답에 싸장님은 한숨을 푸욱 내쉰다.
“X발, 니 감각은 X사기야.”
“죄송해요.”
“쓰읍, 어쩌겠냐. 널 이곳에 받아들인 ‘내 팔자다~’ 해야지. 하지만, 그래도 몰래 지하에 내려가는 건 반대란다. 제롬 양반에게 전화해 줄 테니, 기사들이랑 함께 그 목걸이가 말해주는 감각대로 찾아가.”
“아니, 왜요!?”
왜 반대하시는 거지?! 그런 내 항의에 싸장님은 손을 까닥인다.
“너무 위험해. 네가 마법 좀 깔짝였다고 하지만 진짜 기습적으로 총 맞으면 뒤져. 지금 뉴 송파구 하층은 그런 일이 비일비재할걸? 게다가 여기 있는 애들처럼 한국어를 할 거라고 기대해선 안 된다? 오크들은 오크어, 다른 이종족들은 이종족어로 떠들어서 말도 안 통할…….”
“록, 아르가 버틀 가우.”
내 입에서 튀어나오는 유창한 오크어, 그에 싸장님의 두 눈이 동그랗게 변한다.
배운 건 아니고 <게임 시스템>에 의한 보정이지. 처음엔 몰랐는데, 말하는 것도 되더라고? 그냥 듣는 것보다 훨씬 많은 심력을 소모해서 잘 쓰진 않지만 말이야. 갑작스런 내 오크어에 놀라는 싸장님을 향해 난 입을 뗐다.
“오무혁 씨에게 받은 건, 의뢰만이 아니에요. 앞서 말을 못했는데, 전해주는 대가로 선물도 함께 받았어요.”
“선물?”
“네, 일종의 ‘경험에 가까운 기억’이에요.”
마력을 끌어올리며 난 한 손 주먹을 꽈악 쥐었다.
그 어떤 사선(死線)도 뚫고 갈 수 있다는 자신감과 함께 주위의 물리법칙이 날 위해 일그러진다. 싸장님도 뭔가를 느끼는 듯, 수화기를 든 채로 날 바라보는 가운데 난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저 이제 오크어 할 줄 알아요. 그리고, 장병기와 봉술 전반에 관련된 전투 경험을 받았어요. 단순히 지식이 아닌 몸에 새겨지는 것 같은 기억을.”
“…….”
“이제, 그냥 마법만 쓸 줄 아는 게 아니에요. 초인의 전투 경험도 습득했어요. 사실, 자신이 있으니까 이렇게 아래로 내려가겠다는 거예요.”
그런 내 자신만만한 대꾸에 잠시 날 빤히 바라보시던 싸장님은 이내 천천히 전화기를 내려놓고 고갤 끄덕였다.
“좋아, 그럼 얼마나 대단해졌는지 한번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