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212화 (212/350)

제212화

4.

서예린의 제안, 나로선 나쁠 게 없기에 곧바로 찬성했다.

담보로 받은 반지를 돌려주면서 ‘들어갈 때 검문·검색에서 걸릴 게 뻔하니 딴 데다가 보관하고 오셈.’이라 했지만, 난 싸장님의 ‘비밀병기’-‘마력 파동 억제 약물’을 이용해 간단히 통과했다. 바르면 한 시간 정도 물체의 마력 파동을 흡수하는 건데 비매품이다.

어쨌든 난 서예린의 집에서 서바이벌에 관한 단기 속성 강의를 받았다.

‘유령의 반지’의 사용법, 포위당할 때의 대처법, 먹어선 안 되는 것, 기척을 죽이는 법, 배설물 처리법…… 아, 참고로 서예린이 보여 준 물품들은 그냥저냥이었다. 종결급 반지랑 교환할 만한 건 없었어. 부정적 반응을 보이자 되게 시무룩해 하길래 하나는 바꿔주기로 약속했다.

그렇게 밤새도록 강의를 받고 금요일 아침이 밝았다.

“좋은 아침이죠?”

미르의 아침 등교 시간, 난 수업을 들으러 가는 대신에 동아리실 문을 열고 입장했다. 원래대로라면 아무도 없어야 할 시각, 하지만 혼혈 애들이 원탁에 앉아 있었다. 내가 들어서며 인사하자 다리를 달달 떨고 있던 지아라는 벌떡 일어서서 성큼성큼 다가와-.

-콱!

“혜영이를 찾을 수 있단 게 뭐야?!”

내 멱살을 틀어쥐고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며 추궁한다.

애들이 수업도 빠진 채 이곳에 있는 건 다른 게 아니다. 오늘 아침에 이종족 애들에게만 ‘혜영이를 찾을 방법을 찾았다. 자세한 건 동아리 부실에서 만나서!’라고 문자 보냈거든. 그렇게 눈가가 충혈된 지아라를 향해 난 진정하라는 제스처를 취하며-.

“큼큼, 제가 우그 타람에 연줄이 있는 거 아시죠?”

“그래.”

“그, 제가 좀 친분이 있는 기사 오크분이 있거든요? 테러가 터졌을 때, 목숨을 구해주면서 친해졌어요.”

미리 생각해놨던 썰을 천천히 풀어놨다.

“싸장님 상점에서 유통기한 얼마 남지 않은 포션으로 뇌물 좀 찔러줬더니, 비번 때 혜영이를 좀 찾아줄 수도 있다는데…… 혹시 혜영이가 갈법한 곳을 말해 줄 수 있나요?”

“진짜!?”

“네, 그러니까 탁자에 앉아서 이야기하죠. 저 오후 되면 우그 타람에 들어가야 해요. 일이 밀려서. 그 전에 들으러 온 거고요.”

반색하는 지아라, 두 반귀쟁이들도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무작정 지하에 들어가서 혜영이를 찾을 수가 없으니 들어가기 전에 정보도 수집해야지! 그 대꾸에 지아라가 다급하게 멱살을 풀고, 난 원탁에 앉을 수 있었다.

“일단, 혜영이가 갈만한 곳이 하층에 있는 한 마을이야. 하프 오크들이 모인 곳이라고 했거든? 내려갈 때마다 종종 그곳을 방문하는 거로 알고 있어!”

“쓰레기? 쓰레기 더미가 많다고도 했었어요! 쓰레기 청소하다가 왔다고!”

“장비도 사 갔음.”

그러자 애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단서가 될 만한 말을 쏟아냈다. 그렇게 한 시간 동안 이어진 애들의 말을 메모장에 빼곡하게 적은 후, 난 정리한 자료들을 애들에게 보여 주며 고갤 끄덕였다.

“더 없죠? 그럼 이렇게 전할게요.”

“부탁한다. 꼭 전해줘.”

내 손을 꼬옥 잡으며 말하는 지아라, 들어올 때부터 붉은 기가 있던 안경 너머의 두 눈에서는 어느새 숨길 수 없을 정도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옆에서 반귀쟁이들이 그녀의 등을 토닥이는 가운데, 아라는 울분에 차서 중얼거렸다.

“흐윽. 진짜, 이렇게 분한 거 처음이야. 내가 이렇게 무력하다니…… 말로는 베프라면서 흐으윽…… 아무것도 못 해…… 허어엉…….”

“……나중에 혜영이 만나면 ‘말도 없이 어딜 가냐?’고 싸다구를 후려쳐 주세요.”

“그렇게야…… 흐윽, 이 나쁜 년! 꼭 살아있어라!”

안경을 벗고 눈을 닦으며 주먹을 ‘꽈악!’ 쥐는 지아라. ‘이만 출근하러 가 보겠다.’고 말한 뒤, 난 동아리실 밖으로 나와 뉴 송파구 쪽을 향해 움직이며 <메모장>을 정리했다. 이제 우그 타람 내의 하프 오크들을 조사하고, 토·일요일간 수면을 취한 뒤에 월요일에 진입하면…….

“후우. 제발, 잘 동안에 죽지만 마세요…….”

목도리 안쪽의 낙인을 쓰다듬으며 난 출입국 터널에 들어섰다.

5.

우그 타람에 출근한 뒤, 난 하프 오크 생도들을 대상으로 은근히 혜영이에 관해 물어봤다.

폐쇄된 기숙사라서 애들은 혜영이가 실종됐다는 소식도 모르고 있었다. 다행히, 많은 하프 오크 애들로부터 양질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몇몇 애들에게선 <과거>를 훑어서 위치 정보를 캐내기도 했지. 그렇게 알뜰살뜰하게 정보를 수집한 뒤, 싸장님네 쉘터에서 잠들었다.

그리고, 악몽을 꿨다.

혜영이가 죽고 내가 오크들의 황금 고블린이 된 개꿈을. 두 눈을 번뜩이며 날 죽이러 달려드는 오크들을 간신히 뿌리치고, 우그 타람까지 왔는데 싸장님이 제롬의 팔 위에 앉아서 ‘우리 사귀게 되었어! 도비야, 미안하다! 그리고 고마워!’하며 그 오크 양반 뺨따귀에 뽀뽀하셨지.

그렇게 허우적거리다가 깨니 이틀이 지난 월요일 아침, 몸을 씻고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한 뒤 본격적으로 장비를 걸쳤다.

“옛다. 염색은 잘 됐더라. 냄새도 잘 지웠고.”

싸장님이 건네주는 비늘이 달린 거무죽죽한 로브, 한때 싸장님이 애용했던 <부양> 마법이 걸린 로브다. 원래는 청색 비늘이 달렸지만 휴일 동안에 특수 염색약에 담가둬서 디지털 군복처럼 색이 칙칙하게 바뀌었다.

그 거적때기 같은 로브를 걸친 후, 난 로브의 <부양>을 사용해봤다.

“음, 풍선에 매달린 느낌이네요.”

“맞아, 오히려 급박한 움직임에는 안 어울린단다.”

둥둥 떠 있는 날 보면서 어깰 으쓱이는 싸장님, 어쨌든 없는 것보단 낫기에 가볍게 고갤 끄덕이며 곧바로 옆에 둔 장갑을 집어 들었다.

+0 미친 장군의 주먹 (Mad General's Maulers)

불명예스럽게 처형된 장군의 손뼈로 만들어진 장갑, 한때 유능했었던 그 장군은 살의(殺意)에 완전히 머리가 돌아버리면서 지휘를 할 최소한의 이성조차 사라졌다고 한다. 당연히, 전투는 개판이 되어 아군에 막대한 피해를 줬고 그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그의 뼈로 만들어진 이 장갑에는 아직도 그의 의지가 느껴진다.

장갑

기본 AC 1, 방해 수치 0

·힘+3, Slay+3, *광폭화(50%) *광폭화 탈진 페널티의 지속시간이 2/3 감소, *매혹 당함(적이 보일 시, 후퇴할 수 없음.)

대환이를 잡고 이번에 돌려받은 장비. 손에 끼고 장비와 내 영체를 ‘동기화’ 시키자, 내 몸의 근섬유들이 한층 더 질겨지고 주위의 물리 법칙들이 육체적 힘을 사용하기 좋도록 미묘하게나마 바뀌는 것이 느껴진다.

“음, 좋아요~”

‘쩍! 쩍!’ 달라붙는 것 같은 기분 좋은 타이트함에 가볍게 손을 쥐었다 폈다. 하지만, 좋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장갑 안에서 들끓는 ‘유혈의 광기’가 손의 신경을 따라 올라와 내 머릿속을 헤집었고…….

난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내가 가진 돌연변이-‘신을 목도한’은 정신공격에 ‘면역’에 가까운 효과를 제공한다. 이미 미친놈인데 미치게 하는 효과가 안 통한다는 거지. 수요일에 싸장님과 대련하면서 장갑을 끼고 한 번 테스트해봤는데, 내겐 <광폭화>는 물론이고 ‘매혹당함’도 통하지 않더라.

하지만, 이 힘을 굳이 거부하지 않으면 <광폭화>에도 돌입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이 장갑은 내겐 힘+3, Slay+3이라는 꿀 스탯에 원하는 시기에 <광폭화>까지 가능하게 해주는 개꿀 장비란 거지. 몸풀기로 가볍게 복싱하듯 허공에 ‘슉! 슉~!’ 잽을 날려준 뒤, 곧바로 다음 장비를 집어 들었다.

+3 식인귀의 탐욕 (Greed of Cannibal)

오래전에 목이 잘린 게걸스러운 식인괴물의 해골, 신화 속 괴물인 시팍틀리(Cipactli)의 자손으로 알려진 그 식인괴물은 죽었음에도 그 영(靈)이 살아있으며 착용자의 귓가에 식인에 대한 유혹을 속삭인다. 그에 착용자는 식인에 대한 ‘강렬한 충동’을 느끼게 되며 1인 분량의 인육을 먹기 전까지 벗을 수 없다.

투구에 깃든 힘으로 인육(人肉)에 한해서 비정상적인 포식이 가능해지며, 그렇게 포식한 인육은 투구 속의 영적 공간에서 서서히 소화되어 착용자에게 각종 활력을 불어넣는다.

투구

·부식 저항+, 음에너지 저항+, 마법 저항+, 투명 감지 (SInv), *조건부 저주

·사용 기술 : 식인귀의 포식 (인육을 ‘매우 빠른 속도(0.1턴)’로 섭취, 소화 시간 동안 만복도 증가와 재생++)

해골만 남은 악귀 투구, 투구의 흉흉한 모습에 싸장님이 얼굴을 찡그린다.

“……그거 꼭 사용해야겠냐?”

“들켜도 인간인 건 숨겨야 하잖아요? 최소한 투구는 써야죠!”

“저주받았다면서? 인육 먹고 싶은 충동도 들 거라고 하고.”

“걱정 마세요! 아마 이것도 괜찮을 거예요!”

“아니라면?”

“싸장님에게 개처럼 두들겨 맞겠죠.”

곧바로 투구를 착용했다. 투구 속의 어둠이 살아있는 것처럼 뻗어 와서 내 머리를 감싸는 게 느껴진다. 그리고 귓가에 뭔가를 속삭이는데…….

“좀 앵앵대긴 하는데 괜찮네요.”

역시나, 그리 강한 충동은 아니다. 하긴, 고작 이런 거로 미쳐버릴 것이었으면 예전에 미쳐버렸겠지. 뭐라 지껄여대는 속삭임을 쿨하게 무시하며 전투 배낭을 멨다. 안에 든 건, 서예린이 말한 각종 서바이벌 도구들과 비상식량, 그리고 포션과 돈이다.

마지막으로 싸장님이 구해다 준 창대를 쥐고 고갤 끄덕였다.

“음! 준비 끝!”

오크 기사들이 사용하는 도끼창에서 도끼 부분만 잘라낸 봉, 내가 쓰기엔 좀 무겁긴 하지만…… 그래도 못 쓸 정도는 아니네. 익숙해지기 위해 가볍게 풍차돌리기로 돌려보는데, 그 모습을 보는 싸장님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더니 이내 한숨을 내뱉는다.

“하, 아무리 봐도 그건 너랑 안 어울리는 것 같네.”

“그래도 쓸 만한데요?”

“기다려라.”

고갤 저으며 생활 공간에 마련된 승강기를 타고 어딘가로 향하는 싸장님, 그렇게 한 10분 정도 지나서 싸장님은 어깨에 황금빛 육척봉을 걸치고 나타나셨다.

“아직 미완성작이긴 한데…… 네게 빌려주마. 참고로 X나 비싼 거니까 꼭 가져와라. 안 가져오면 넌 다시 내 노예가 되는 거야.”

으름장을 놓으면서 육척봉을 건네는 싸장님, 로브를 빌려달라고 했을 때도 꽤나 쿨하게 빌려주시던 싸장님이 저렇게 말하다니…… 도대체 뭐기에 저럴까 싶어서 <감정>을 해 보니-.

“와!? <연금술>로 그런 것도 만들 수 있어요?”

“눈치챘냐? 뭐, 약간의 ‘과학적 지식’이 결합되면 가능하지. 사실, 물질의 성질은 그 물체를 구성하는 전자의 상태에 따라 많이 좌우되거든.”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내 손에 쥔 것의 정체를 파악하고 탄성을 지르자 싸장님은 의기양양하게 코를 쓱 닦는다. 하지만, 이건 진짜 그럴 만하다. 싸장님은 돌연 줬던 황금빛 봉을 도로 빼앗더니 양손으로 쥐며 입을 열었다.

“잘 봐! 내가 괜히 이걸 너에게 빌려주겠다는 게 아니야! 다룰 줄 모르는 놈들에게 그냥 가벼운 봉이겠지만, <연금술>을 쓰는 너라면 이걸…….”

그 황금빛 장비를 어떻게 쓰는지 ‘직접’ 보여 주는 싸장님, 그 과정에서 사용되는 <연금술>을 <눈>으로 확인하며 난 그 요령 습득에 열을 올렸다. 그렇게 생각지도 못한 무기에 익숙해진다고 한 시간가량을 투자한 후 난 고갤 끄덕였다.

“이제 진짜 가도 될 듯한데요?”

“그래, 가자.”

말과 함께 싸장님은 옷장을 열었다.

그 안쪽 벽에 숨겨져 있는 문, 싸장님 정도만 서서 통과할 정도로 작은 석굴을 천천히 움직였다. 혹여 이 토굴로 침입하는 놈들이 없도록 살벌하게 함정이 깔려 있었다. 편집증적인 싸장님의 안전에 대한 강박이 돋보이는 곳이구만.

“생각보다 엄청 기네요? 어떻게 만드셨어요?”

“주위의 바위를 녹여서 만들었지. 이거, 들키지 않게 만들려고 힘들었어. 근데, 넌 X나 쉽게 눈치챘네?”

“헤헤헿…….”

그렇게 5분여 정도를 걷자 통로의 끝이 보였다. 그곳에 있는 건…….

“오오…….”

지하 엘리베이터가 지나다니는 통로, 어찌나 바닥이 깊은지 1km는 될 것 같다. 통로 끝을 가려둔 석판을 조심스럽게 옆으로 밀며 싸장님은 입을 열었다.

“지도 숙지해 놨지?”

“넵!”

“그래, 그 ‘미트바’ 꼴은 되지 말렴. 마침 엘리베이터가 위인 것 같은데 내려가.”

싸장님을 향해 경례한 후, 난 곧바로 그 지하 통로를 향해 뛰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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