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3화
44화. 어디로 가야 하오?
1.
현대 문명의 이기는 그냥 ‘뿅!’하고 제공되는 것이 아니다.
‘화장실’만 하더라도 그 이면엔 보이지 않는 막대한 노력이 들어가 있다. 버튼을 누르면 켜지는 전등은 발전소에서 생산한 전기를 전선으로 끌어와야 하며, 찬물과 뜨거운 물이 콸콸 나오는 수도꼭지는 상수도 시설과 물을 끌어올리는 펌프, 중앙난방 보일러가 필요하다. 변기? 하수도 시설과 정화조가 없으면 안 된다.
당연히, 문명의 이기가 닿는 뉴 송파구 또한 이러한 ‘기반시설’이 있었다.
33.89km²의 넓이에 7km에 달하는 높이를 가진 이 거대한 공간의 숨겨진 이면에는 막대한 기반시설들이 곳곳에 깔려 있었고 서로 거미줄처럼 연결되었다. 그리고, 이종족들은 아직까지 그러한 기반시설을 완전히 다룰 만한 기술이 없기에 그러한 공간의 유지·보수는 인간들에 의해 이뤄지고 있었다.
내가 뛰어든 엘리베이터 통로도 그런 뉴 송파구의 숨겨진 기반시설 중 하나였다.
-끼이이익!
엘리베이터 통로의 바닥, <눈>으로 엘리베이터 문밖을 정찰한 뒤에 문을 열고 들어가자 거대한 공장을 연상케 하는 광경이 펼쳐졌다. 거대한 파이프와 전선들, ‘웅웅!’ 거리는 소음을 토해내는 열수관의 열기 때문에 살짝 후덥지근…….
“끙.”
하다고 생각하던 도중, 미미한 악취(惡臭)가 코를 찔렀다.
뭔가 썩는 ‘부패의 냄새’, 코를 틀어막을 정도는 아니다만…… 그래도 또렷한 존재감을 드러내 미묘하게 신경을 긁는다. ‘쓰레기를 치운 쓰레기장’의 느낌? 미간을 찡그리며 주위를 훑어보니 벽면과 바닥에 완전히 지우지 못한 핏자국과 부패의 흔적이 있다. 가볍게 <과거>를 한 번 훑으니…….
“아, 이런 게 있단 건 못 들었는데…….”
이곳에 ‘괴물’이 서식하고 있었다.
그것도 상대하기 까다로운 유령(ghost) 종류가. 숨어든 하층민 오크 가족이 그 유령들에 의해 찢겨 죽었는데, 나중에 순찰하던 오크 경비병들이 시체들을 발견하고 떠드는 말을 들어 보니 꽤나 자주 발생하는 일인 것 같았다.
“흐음.”
<메모장>을 켜고 찍어뒀던 뉴 송파구의 기반시설 지도를 다시 한 번 훑었다.
현 지점은 지상으로부터 2km 부근, 뉴 송파구의 상류층들이 거주하는 ‘상층’ 끝이다. 인간이 제공하는 문명의 이기가 닿는 말단 지역, 더 아래는 이런 정교한 기반시설이 없다. 내려가기 위해선 통로를 타야 하는데…… 경비병들의 중얼거림을 보니 그쪽에 유령이 많다고 했다.
그렇다고 다른 통로로 가는 건 너무 머네.
“아니, 차라리 잘 됐어요.”
어깨에 걸친 황금빛 봉을 고쳐 잡고 가볍게 돌려봤다. 오무혁의 경험을 전승받기 전이라면 고민 좀 했겠지만 이젠 다르지. 안 그래도 내가 신체적으로 얼마나 강해졌는지 테스트해보고 싶었는데 잘 됐다. 싸장님과의 치고받고 만으론 좀 부족했는데 실전에서 한번 써봐야지.
가볍게 휘파람을 불며 난 예정된 경로를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2.
‘유령’은 매우 까다로운 유형의 괴물이다.
생명체가 죽은 뒤, 마력에 의한 ‘미지의 반응’이 발생하며 나타나는 존재. 이것들은 공통적으로 ‘물리력’에 대해 대단한 내성을 지녔기에 현대화기로도 토벌이 힘들다. 마력 각성자라도 마법 장비나 마법을 구사할 줄 모르면 매우 까다롭고.
희미한 광채를 가진 환영, 생전의 기억과 형체조차 잃어버리고 희미해진 이것들은 자신이 죽은 장소 일대에 속박되어 배회한다. 그저 멍하니 주위를 배회하는 존재지만, 살아있는 자를 발견하면 언데드 특유의 생자(生者)에 대한 갈망과 질투로 지독하게 달려든다.
-!!
-!!!
인간과 비슷한 흐릿한 형상, 뭐라 말할 수 없는 흐느끼는 소리를 내지르며 달려드는 그것들을 향해 봉을 휘둘렀다. 황금빛 봉에 닿는 순간, 연기처럼 흩어지는 환영들, 하지만, 완전히 흩어지진 않은 채 더 희미해진 상태로 무기를 뚫고 달려든다.
하지만, 이미 예상한 바다.
-타닥! 탁!
-퍽!
백스텝으로 빠지면서 봉을 휘둘러 밀려드는 환영들을 연거푸 걷어내는 척하다가 하반신과 허릴 튕겨서 번개처럼 뒤쪽에 드리운 내 그림자에 내리꽂았다. 어느 순간부터 부글거리며 물결치던 내 그림자, 후려친 느낌은 석재 바닥이 아닌 살덩이에 가까웠다.
살아있지 않은 그림자 정령. 던전의 어둠과 죽은 지성체의 원한이 뭉쳐 태어난 이 존재는 다른 존재의 그림자 사이를 신속하고 조용하게 오가며 상대방의 시야 뒤를 정확하게 찌른다. 다만, 그런 공격은 다른 이들이 보고 있으면 하지 못한다.
발을 꿰뚫기 위해 송곳 같은 그림자 말뚝이 솟구치지만, 난 이미 봉을 내리찍는 것과 함께 가볍게 위로 도약해 굵직한 파이프 관에 올라서고 출구 쪽을 향해 가볍게 내달리고 있었다.
경비병 오크들이 오기를 꺼렸던 장소.
직접 경험해 보니까 괜히 꺼린 게 아니었다. ‘환영’이라는 약하지만 물리력 내성이 뛰어난 괴물 수십 마리, 숨어서 등짝을 노리는 ‘그림자 꿰미’라는 암살자 정령…… 객관적으로 위험이 넘쳐나는 곳이야.
“~♬”
하지만, 지금의 내겐 너무나도 여유로웠다.
흥에 취해 콧노래가 나올 정도로. 싸장님과 하루 동안 치고받고 싸우면서 오무혁이 전달해준 경험들을 내 신체 조건에 맞게 바꾸긴 했다. 하지만, 그래도 미진한 부분이 엄청 많았다.
-딱!
그리고 지금, 그 미진한 부분들이 실시간으로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벽에서 기습적으로 튀어나오는 칙칙한 검붉은 빛의 반투명한 도끼, 이미 <눈>을 통해 파악했기에 수월하게 봉으로 막으면서 물리력을 발휘하는 그 무기를 부드럽게 얽히게 만들어 벽 안에 숨어 있는 놈을 뽑아냈다.
흉측하고 음산한 붉은빛에 휩싸인 영혼 전사, ‘유혈의 신’을 섬기던 광전사를 처형한 뒤에 부정한 주술로 되살려냈다. 죽기 직전의 질척한 분노에 잠식된 채,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살육을 행하려 한다.
반투명한 붉은 형상, ‘유혈의 망령’이라는 특이한 몬스터였다.
흐릿한 다른 유령들과는 달리 이 녀석은 형상이 아주 또렷했다. 2m가 넘는 근육질의 체격과 그 얼굴과 장비가 완전히 보일 정도로. 그렇게 벽에 숨어 있던 뽑아낸 녀석을 ‘환영’들이 가득한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동시에-.
“병X.”
놈이 꼴 받으라고 그 안면을 발로 가볍게 짓밟으며 오크어(놈이 오크였다)로 비아냥거려줬다.
-커허어엉!
그런 내 모욕을 알아들었는지 벽 속에 파고들어서 암습하는 대신에 짐승 같은 소리를 내뱉으며 양손 도끼를 들고 폭발적으로 달려드는 ‘유혈의 망령’, 그런 놈에게서 흘러나오는 <광폭화>의 기운을 느끼며 난 황금빛 봉을 휘둘렀다.
……오무혁의 경험은 마치 결과가 정해져 있는 ‘단순한 미연시 게임’ 같았다.
비유가 좀 거시기하긴 한데, 내가 느끼기엔 그래. 선택지는 2~3개 정도로 소수, 하지만 뛰어난 근력과 반사 신경을 바탕으로 어떤 선택지를 골라도 결국엔 ‘승리한다.’라는 결과에 도달한다. 도중에 약간의 판단 미스와 변수로 악수(惡手)를 택해도 나중에 다 커버가 된다.
하지만, 난 오무혁과는 다르다.
힘과 속도, 체력. 피지컬 전반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허약해서 조금이라도 실수했다간 끔살난다. 그러나…… 전장 자체를 여러 각도에서 입체적으로 파악하는 덕분에 난 오무혁보다 상황을 훨씬 더 자세하게 파악한다.
그러니 ‘부족한 힘과 속도’를 ‘완벽한 판단과 기교’로 때운다.
나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상대방의 공격을 한 끗 차이로 피하고, 1mm도 빗나가지 않도록 정확하게 움직여 상대의 기세를 역이용한다. 그렇게 난 ‘유혈의 망령’과 가까이 달라붙어서 함께 춤추듯이 움직였다.
그런 우릴 향해 주위의 환영과 그림자 꿰미들이 달라붙는다.
-딱! 챙! 챙! 챙! 챙!
-!!
-!!!
하지만, 유령들의 합공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수십 마리 ‘환영’들은 반투명한 붉은 도끼에 찢기거나, 붉은 도끼와 부딪치면서 가속한 내 황금봉에 터져나간다. 상대방이 우악스럽게 달려드는 걸 피하고 살짝 밀어서 내 뒤에서 달려들던 적과 부딪치게 하며-.
-콰직!
-쾅! 쾅! 쾅!
‘그림자 꿰미’가 내 발목을 노리는 걸 유도해서 역으로 상대방이 밟게 했다. 그 모든 과정에서 난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 망령들의 합공이 그냥 무작정 달려드는 거라서 아슬아슬하게 맞지 않고 대처할 만했거든. 그래 다행이긴 한데…….
이거, 무지 피곤하네.
싸장님과 싸우면서 이런 방식의 싸움에 대해 감을 잡긴 했는데, 진짜 실전에서 여러 명을 대상으로 써보니 심력의 소모가 진짜 장난이 아니다! <무한의 눈> 정도는 아니지만…… 고작 30초 남짓인데 <게임 시스템>의 보조 없이 어떤 물체의 <과거>를 볼 때 수준의 피곤함이 몰려든다.
“후욱! 후욱! 후우우욱!”
……게다가 뽕에 취해서 몰랐는데 어느새 숨은 턱 끝까지 차올라서 신진대사 일부를 마력으로 대체하고 있었네? 더 흥에 차서 놀다간 X될 것 같기에 곧바로 승부수를 띄웠다.
“샤아아아아아앗!”
뱀이 ‘쉿쉿!’ 거리는 것은 주문과 함께, 내 몸을 감싸는 자색의 광배(光背)가 떠올랐다.
-끼아아아아아!
-끼이이익!
-캬아아아악!
<맹독성 휘광>에 노출된 망자들이 일제히 고통스런 비명을 지른다. 언데드에겐 통하지도 않는 ‘독마법’, 하지만 내 건 특별하지. 그렇게 ‘환영’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고, ‘그림자 꿰미’들도 고통에 바들바들 떨며, ‘유혈의 망령’은 순간 멈칫했을 때-.
-콰직!
내리찍는 상대방의 도끼를 팽이처럼 빙글빙글 돌며 받아 내며 가속, 도약해서 손에 쥔 황금빛 창을 쭉 뻗었다. 정통으로 ‘유혈의 망령’의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꿰뚫는 창, 그에 망령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터져 나간다.
그 기세를 살려 난 닥치는 대로 약화된 나머지 괴물들을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후웅!
영혼까지 괴롭히는 독마법에 당한 환영은 이젠 그냥 한 번 스치면 터져 나간다. 그림자 꿰미들은 살기 위해서 숨어 보지만 따라가서 창으로 푹푹 찔러줬다. 다 경험치인데 놓치면 안 되지! 그렇게 주위에 있는 모든 적을 정리한 뒤-.
“후우우. 쓰읍, 하아아아…….”
난 한쪽 무릎을 꿇고 숨을 골랐다.
비 오듯이 흐르는 땀, 이겼다는 상쾌함보다는 머리를 혹사한 피곤함이 더 강하다. 머릿속에서 당분을 호소하는 느낌에 바지 호주머니에서 <연금술>로 가공한 고열량 사탕을 하나 털어 넣으려고 했는데…….
“……어?!”
입에 들어가질 않는다.
악귀 투구의 아가리 부분을 열고 사탕을 넣어도 어딘가로 사라진다. 동시에 투구가 ‘인육 이외에는 거부’하는 느낌을 받았다. 벗지 않고 살짝 턱 부근만 나오게 벗으려고 해도…… 벗겨지질 않네? 심지어 배낭에 챙겨둔 물통을 기울여도 입으로 안 가고 죄다 아래로 흘러나온다.
“하아, 젠장.”
투구에 이런 부작용이 있을 줄은 몰랐네. 그래도 식인은 되도록 자제하려고 비상식량들을 챙겨뒀는데 이러면 고스란히 버리게 됐다. 어쩔 수 없네. 어서 빨리 나가서 시비 거는 한 놈을 족쳐야겠다.
그렇게 숨을 고른 후, 다시 몸을 가다듬으며 움직이려는데…….
“오?!”
‘유혈의 망령’이 사용했던 반투명한 양손 도끼가 사라지지 않고 뒤쪽에 너부러져 있었다.
+6 저주의 혼합체 (Curse Mishmash)
생전에 휘두르던 무기를 떠올리던 망령 전사가 만들어낸…… ‘물질과 비물질’ 사이의 어떠한 것. 물질화된 ‘망령의 체액’과 ‘유혈의 축복’, ‘강령술 저주’, ‘속박 주술’이 뒤죽박죽 섞여 우연히 만들어진 불안정한 혼합물이다. 매우 가벼워서 다른 도끼보다 더 빠르게 휘두를 수 있고, 유혈의 힘이 깃들었기에 꽤나 특이한 성능을 보인다.
불안정한 상태이기에 금방이라도 흩어질 것만 같다.
대형 양손 무기, 배틀 액스
대미지 15, 명중 -4
기본 공격속도 1.1, 최소 공격속도 0.6
·흡수(Drain), 출혈(상대의 재생--), 마법 저항+, 힘+3, Hp –5,
·취급 주의(장착 해제 시 장비 파괴, *흡수)
<감정>이 이뤄지면서 함께 스쳐 지나가는 장비와 관련된 ‘과거’, 그 단편적인 영상이 좀 특이했기에 난 정신력을 더 투자해 집중해서 <과거>를 훑어봤다. 그리고…….
“끙, 진짜 꿈과 로망이라곤 하나도 없어요.”
왜 이렇게 이곳에 유령들이 있는 건지, 그리고 또 왜 이렇게 많은 건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죽인 몬스터들은…… 일종의 ‘장애물’이었다.
상층은 지상과 거의 동일수준의 혜택을 누리는 파라다이스, 하지만 그 혜택을 받을 수 있을 만한 이들은 숫자는 한정됐고 그렇기에 엄격히 올라오는 걸 통제한다.
당연히, 아래쪽에선 위로 올라오려고 했다.
내가 있던 세계의 멕시코 국경에서 미국으로 넘어가려는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것처럼 말이지. 이곳에서 내가 봤었던 흔적들도 그런 밀입국을 시도하던 이들이 남긴 거였다.
그렇기에 일부러 이런 몬스터들-딱히 설비엔 타격이 가지 않도록 유령 종류를 푼 거다.
내가 죽인 오크는 실력은 뛰어나지만 사회에 적응할 수 없는 ‘미친 살인마’였고, 그에 오크들은 놈을 사로잡아서 강령술을 익힌 깜귀쟁이-딥 엘프(Deep elf)들과 주술사 드워프들에게 넘겼다.
그리고, 딥 엘프와 드워프들이 이곳에서 의식을 진행해 살인마를 유령으로 만들어졌다.
일이 끝나고 오크와 엘프, 드워프가 음침하게 웃으며 서로 악수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 어쨌든 이곳에 벗어나지 못하는 유령은 어떻게든 위로 올라가려는 하층민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그렇게 죽은 이들은 유령 몬스터가 되어서 또 이곳에 묶여 떠돌고…….
이종족과 마법이 나타났어도 지배층과 피지배층 간의 갈등-계급 투쟁의 역사는 계속되는구만.
한탄하며 조심스럽게 드랍된 장비를 주웠다. 거대한 양손 도끼지만 한 손 검 수준으로 가벼운 도끼, 제대로 쓰면 부서질 1회용이다만…… 이거 내 영혼을 다루는 방식으로 <연금술> 후가공하면 ‘안정화’ 시킬 수 있을 것 같다. 잘 분석하면 비슷한 것도 만들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좋아요.”
근처 도관을 둘둘 감아 놓은 외장재를 뜯어 전리품을 둘둘 싼 후, 난 등과 가방 사이에 끼워놓고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