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4화
3.
이어지는 유령 무리를 뚫어내며 난 무사히 ‘중간 부분’에 도착했다.
-우우우우우웅!
“2분 뒤에 내려오는 물품이 바뀐다! 지금까지 쌓아놓은 것들은 다 빼!”
“쓰읍! 어떤 새끼가 파손 낸 거야! 들어오는 거 병조림이니까 함부로 던지지 말라고 했잖아!”
“일단 깨진 것부터 치워!”
거대한 기계가 내는 소음과 오크들의 성난 고함.
올림픽 경기장도 들어갈 것 같은 거대한 석굴(石窟)의 중심에 빠르게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가 있고 그곳에서 수많은 오크가 일하고 있다.
‘중간 부분’ 최상층에 위치한 물류 허브.
위쪽에서 내려오는 물자가 선적되는 ‘집하장’이다. 그렇게 모든 이들이 쏟아지는 물류에 집중되어있단 걸 확인하자마자 난 <투명화>를 사용하며 조용히 천장 파이프에 안착했다.
그렇게 <눈>을 통해 제삼자의 시선으로 본 내 모습은…….
“……끙.”
완벽하게 투명하지 않았다.
주위의 배경에 어느 정도 동화되었지만 아지랑이처럼 미묘한 일그러짐이 보이고 살짝 움직이면 그림이 뭉개지는 것처럼 너무 티가 났다. 서예린에게서 받은 ‘유령의 반지’의 사용 요령을 아직 다 터득하지 못했기에 벌어진 일이다.
뭐, 그나마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천장에 있어서 다행이네.
주위를 훑어본 후, 출구를 찾기 위해 느릿느릿 기어가듯이 파이프를 옮겨가며 외곽 쪽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느릿하게 한 시간가량을 이동한 끝에 트럭이 대기하고 있는 장소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오라이! 오라이! 출발해! 1열 트럭! 출발!”
“고기칼! 주방용 고기칼 3박스가 부족하다! 어떤 멍청이가 가져간 거야!”
“병X아! 물품을 잘못 실었잖아! 이건 훈련장으로 가야 할 거라고!”
짐이 실리는 트럭 쪽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침을 삼켰다.
열심히 일하는 인부들과는 달리 서로 담배를 피우거나 하면서 노가리를 까는 운전기사들, 방탄 효과가 있는 가죽점퍼 차림에 등에는 AK소총을 허리춤엔 한손 도끼를 달고 있는 그들은…… 놀랍게도 전원 전사 계급-‘마력 각성자’였다.
당연히, 보통 사람보다 훨씬 민감하다.
“스읍, 하아…….”
더 천천히 구석진 모서리까지 기어간 후, 난 로브의 <부양>을 활성화하고 서서히 벽을 쓸어내리며 떨어졌다. 도중에 담배를 피우면서 고개가 이쪽으로 돌아간 걸 봤을 땐 심장이 철렁했지만 다행히 들키지 않았다.
그리고, 지면에 착지하자마자-.
-사사삭!
바퀴벌레처럼 바닥을 기어 가까운 트럭의 아래쪽에 숨어들었다. 그렇게 얼마 가지 않아 시동이 걸리고, 난 로브의 <부양> 마법을 활성화시키며 트럭 밑바닥에 달라붙었다. 밖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하는 트럭, 차단선에 있는 거대한 철문이 올라가고 터널을 지나 밖으로 나온 순간-.
“와…….”
거대한 도시가 눈앞에 펼쳐졌다.
폐쇄감 따윈 전혀 들지 않는 수백m가 훌쩍 넘는 높은 천장, 지상의 송파구 하나 정도는 가뿐히 들어갈 만한 거대한 육각형 공간……! 천장과 지면을 잇는 ‘거대한 탑’- 내가 나온 ‘물류 센터’와 똑같은 구조물이 중앙에 하나, 육각형의 꼭짓점 부근마다 하나씩 총 7개가 우뚝 솟아있고 나머진 3~4층 흑색 벽돌 건물들이 공간에 꽉 들어차 있다!
2-1-0 거주 지역, 속칭 ‘단절의 도시’.
지면에서 ‘2.1km 아래’에 지어진 거주지란 뜻이다. 참고로 세 번째에 붙는 1~26까지의 숫자는 위치 정보로 지상 송파구의 동(洞) 단위와 대응되는데, 이곳에 0이 붙은 이유는 이곳이 송파구 전체와 비견될 정도로 커서 그렇다.
“흡!”
도시의 외곽에 있는 도로를 돌고 있는 트럭, 괜찮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트럭 밑바닥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아스팔트에 내동댕이쳐졌지만 숙련된 움직임으로 피해를 최소화한 뒤-.
-샤사삭!
뒤쪽에서 따라붙고 있던 트럭 운전사의 경악을 뒤로한 채, 난 도시 쪽을 향해 전력 질주했다.
4.
뉴 송파구에 대한 정보는 밖에서 구하기 꽤 힘들다.
내가 있던 세계의 북한과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폐쇄적인 사회라서 그런지 인터넷 같은데 검색해도 잘 안 나온다. 기껏해야 TV 방송에서 나온 피상적인 정보들 정도. 그렇기에 정확히 어떤 곳인지 일반인은 잘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난 <눈>을 지녔다.
<눈>을 남발하며 하프 오크 생도들의 <과거>를 읽어 들이고(힘들어서 죽는 줄 알았다), 싸장님이 여기로 오기 전에 받았다던 국정원의 자료(주로 이종족 지구가 얼마나 막장인지 설명하는 보고서)를 읽은 덕분에 대충 어떤 곳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뉴 송파구는 크게 상층(上層), 중층(中層), 하층(下層) 3개의 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지상에서부터 2km까지의 부근을 뜻하는 상층(上層)은 ‘지상에 알려진 뉴 송파구’다. 이종족들의 파라다이스, 미궁이 뚫린 지반의 특징을 이용해서 계획적으로 굴착해 세워졌으며 기반시설들이 촘촘히 깔려 있다. 쇼핑센터와 휴양시설, 학교…… 지상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문명의 이기를 누릴 수 있는 곳이다. 뉴 송파구 프로젝트의 ‘청사진’이라 볼 수 있지.
그 상층 아래, 중층(中層)은 제대로 건립되지 못한 지역이다.
사태 초창기, ‘뉴 송파구’ 프로젝트는 한국이 최초로 시도한 도박이었고 그 소문을 듣고 각종 이종족들이 통제 불가능한 범위로 밀어닥쳤다. 그에 오무혁을 필두로 한 ‘이종족 연합’은 원활한 사업 진행을 위해 본격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공사 지역에 함부로 접근할 수 없도록 아래층과 물리적 단절(斷切)을 계획했다.
그것이 내가 도착한 중층의 최상층 ‘단절의 도시’ 탄생 비화다.
송파구와 거의 같은 면적을 지닌 ‘지하 도시’, 상층으로 가기 위해선 400m에 달하는 7개의 대기둥 속 승강기를 통해 가야 한다. 자격 심사에 통과한 이들과 상층 주민으로 등록되어 있는 이들만이 갈 수 있으며, 이종족 최정예가 지키기에 힘으로 뚫고 가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뭐, 나야 기반시설 지도가 있어서 몰래 내려왔지만.
“으음…….”
도심으로 진입한 뒤, 난 차분하게 거닐며 주위를 훑어보았다.
흑색 벽돌로 지어진 이질적인 디자인의 건물들, 상점도 있고, 음식점도 있고…… 내가 모르는 해외의 한 곳에 와있는 것 같다. 다른 점이라면 돌아다니는 이들은 인간이 아니라 이종족(99% 오크)이라는 것과 다들 묘하게 긴장하며 최소 손도끼로 무장하고 있다는 거?
“자, 전투 식량! 지상에서 내려온 특제 전투 식량이 하나에 3천 원!”
“고기칼! 호신용으로도 좋은 고기칼이 고작 5천 원!”
“미트바! 지상의 가축으로 갈아 만든 ‘고급 미트바’!”
팔고 있는 물품들은 대부분 서바이벌 제품들, 지상의 공장제보다 질이 조악해 보여서 딱히 살 생각은 들지 않았다. 파는 길거리 음식들은…… 난 도저히 못 먹을 것 같아. 바닥엔 오물이 있고, 요리하는 이들도 잘 못 씻어서 땟국물이 줄줄 흐르고, 오크 특유의 암내도 쩔고…….
한마디로 표현하면 ‘전쟁통 중에 열린 시장’ 같았다.
“하아, 정신 차려야죠.”
작게 심호흡했다. 난 이곳에 놀러 온 게 아니다. 죽기 싫으면 빨리 혜영이 만나서 이 폭탄 목걸이를 풀어야 해. 작게 심호흡을 한 후, 지금까지 수집한 정보들을 적어둔 <메모장>을 띄웠다.
일단, 혜영이는 ‘하프 오크 마을’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혼혈 애들에게 처음 그 마을에 대해 들었고, 우그 타람 내 하프 오크들에게서 <과거>를 읽어 들여 대략적인 위치도 확인했지. 이곳-단절의 도시보다 훨씬 더 아래인 5~6km 사이에 24구역-장자동 부근이다.
문제라면…… 거기까지 가는 길을 정확히 모른다는 거?
사람도 ‘서울, 부산, 대전’ 같은 도시가 대략 어디 위치인 줄만 알지, ‘가는 길’을 말하라고 하면 정확히 설명 못 하잖아? 하프 애들이 우그 타람까지 오는 <과거>를 더듬어 봤지만 트럭을 타고 터널과 마을 사이를 계속해서 오가는 기억밖에 없다. 싸장님도 이종족 지구의 지도는 상층 이하론 없다면서 못 구했고.
그러니, 여기서부터 가는 길을 찾아야 하는데…….
-퍽!
“커헉!”
골똘히 생각하다가 뒤쪽에서 내 배낭을 노려보며 단검을 들고 접근하는 오크를 포착, 가방끈에 칼을 대려는 걸 보곤 재빠르게 봉으로 그 명치를 찔렀다. 내 반격에 명치를 붙잡으며 나뒹구는 오크, 적당한 세기로 후려쳤으니 꽤나 아프겠지.
경찰도 없으니 그냥 그러려니 하고 움직이려는데…….
“콜록! 콜록콜록! 이 새끼가! 가만히 있는 사람을 쳐?!”
아주 당당하게 소릴 지른다. 하도 황당해서 고갤 돌아보자, 후드 아래의 악귀 형상의 해골을 보곤 흠칫하는 녀석. 하지만 이내 놈은 명치 부근을 붙잡은 채 빠드득 이를 갈며 주위의 이들을 향해 소리친다.
“이 새끼가 먼저 쳤다! 그러니 다들 끼어들지 마쇼!”
뭐라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단검을 던지며 놈이 달려든다. 그런 녀석의 왼손에는 손도끼가 들려있다. 진짜로 날 죽일 기세이기에 재빠르게 움직였다. 뒤에 행인이 있어서 단검은 피하지 않고 몸통에 날아오는 걸 낚아챈 뒤-.
-퍼억!
“끄아…….”
-콰작!
손도끼를 쥔 놈의 왼손을 향해 던지고, 연이어 봉을 잡고 놈의 턱주가리를 정확하게 스쳤다. 놈의 두 눈이 초점을 잃는 걸 확인하면서 난 한 발짝 옆으로 물러섰다.
-촤아아아아…….
왼손에 단검이 꽂힌 채, 달려들던 기세 그대로 오물 진창인 바닥을 쓸며 처박히는 오크. 마음 같아선 깔끔하게 죽여 버리고 그 시체를 투구 속에 넣어 버리고 싶지만…….
“저기…….”
“……오크를?”
그러기엔 주위의 시선이 심상치 않다.
안 그래도 거리에 죄다 오크밖에 없고 뭔가 시선이 따라붙는 것 같아서 꺼림칙했는데, 이젠 힐끗거리면서 손도끼를 만지작거린다. 진짜 이게 인종…… 아니, 종족차별이라는 건가? 좀 억울하네.
“쯧.”
그래도 괜히 소란 일으켜봤자 안 좋으니 참아야지. 작게 한숨을 내뱉은 후, 바닥에 처박혀 꿈틀거리는 소매치기를 버려둔 채 달라붙는 오크들의 시선을 피해 골목에 들어갔다가 반대쪽 길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네놈에게 팔 물건은 없으니 꺼져!”
“……X발?”
2시간 동안 인종 차별을 신나게 겪었다.
5.
원래 내 계획은 이종족들에게서 정보를 구하는 거였다.
나름 합리적인 계획이었다. <게임 시스템> 보정으로 이종족의 언어를 할 수 있다는 걸 확인했고, 이곳 지하에서 지상의 돈이 통용된다는 것을 확인했다. 국내 여행지에 가서 현지 택시를 타면서 택시 아저씨에게 ‘어디 괜찮은 식당 없어요?’ 하는 식으로 물어보려고 한 거지.
하지만, 내 계획은 처음부터 삐꺽거렸다.
다른 이종족은 보이지 않고 죄다 오크 새끼들뿐인데…… 이 오크들이 꽤나 불친절했다. 물건을 사면서 말문을 터보려고 했지만, 대부분 말을 걸어도 무시하며 물건을 팔지 않았고 몇몇은 물건을 팔긴 했지만 어떻게 비벼볼 새도 없이 샀으면 가라고 언성을 높였다.
되도록 나랑 엮이지 않으려는 느낌이었다.
진짜로 날 업신여기는 반응을 보이는 상인들도 있었지만, 배척하는 ‘척’ 언성을 높이면서 주위 오크들이 안 보이게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는 상인도 있었으니까. 뭔지는 모르겠다만 도시에 어떤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난 도시에서 반쯤 고립됐다.
“하아…….”
2시간 동안 거리를 거닐며 말을 걸어도 성과는 1도 없는 상황, 치미는 짜증을 참으며 고갤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뒤집어쓴 로브의 후드 안쪽, 해골 투구 속의 검붉은 안광과 마주치자 오크 강도는 흠칫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친다. 첫 소매치기 이후로 만난 강도의 숫자만 10번이 넘는다. 10분에 한 번꼴이야!
피곤하지만 알 법한 놈들의 <과거>를 훔쳐봐야 하나 생각하고 있을 때-
“……호오?”
상공에 띄워둔 <눈>이 건물 사이 골목 깊숙한 곳에 있는 ‘일단의 오크’들을 발견했다.
정확히 말하면 한 오크를 둘러싼 채로 살벌하게 린치를 가하고 있는 오크 무리를. 두들겨 맞는 당사자는 비명을 지르고 있지만, 거리 자체가 워낙 소란스러운 데다가 가죽점퍼 같은 걸 뒤집어씌우고 두들겨 패서 그런지 비명이 잘 들리진 않네. 간혹 들은 사람도 있는 것 같지만…… 애써 무시하는 것 같았다.
그래, 최소한 두들겨 맞는 걸 구해준 사람을 무시하진 않겠지?
“어이, 거기. 멈추세요.”
곧바로 골목을 파고든 뒤, 린치를 가하고 있는 오크들 앞에 섰다.
내 제지에 움찔하고 내 쪽을 보는 불량배 오크들, 한 달 넘도록 오크들과 지내서 그런가? 처음엔 얼굴도 잘 구분 못 했는데, 이젠 나이까지 어느 정도 짐작되네. 하나같이 젊은 놈들이다. 혈기가 넘쳐서 그런지, 강도와는 다르게 무리의 대장으로 보이는 녀석은 날 보고도 당당하게 호기를 부렸다.
“하, 누군가 했더니만…… 난쟁이? 아니, 난쟁이도 아니네? 넌 뭐야?”
“음, ‘교육자’죠. 네! 그쪽 같은 ‘어린 오크’들을 바른 행실로 이끄는 선생님이에요.”
사실이지. 우그 타람에서 열심히 강사 도비가 되어 구르고 있으니까. 나름 진지하게 생각해서 말한 건데, 삐뚤어진 저 오크에겐 비아냥처럼 들렸나보다.
“이 미친 새…….”
“그만해, 장비가 장난 아니잖아…….”
옆에 있는 오크가 날 힐끗거리며 말린다.
지킬 힘이 없으면 ‘빼앗기는 게 정상’인 미궁, 좋은 장비는 강자만의 특권이다. 그리고 내가 착용한 투구는 딱 봐도 흉흉한 생김새에 ‘범상찮은 마력’을 은은하게 흘린다. 괜히 강도 몇 놈이 접근했다가 내 후드 속 투구를 보고 조용히 지나친 게 아니지.
하지만, 그런 동료의 경고에도 녀석은 버럭 소리 지른다.
“X랄하지마! 여긴 오크의…….”
-퍼억!
폭발적으로 접근, 어떻게 반응하기도 전에 명치에 봉을 꽂고. 고통에 입을 쩍 벌리는 놈의 아래턱을 가볍게 후려쳐줬다. 그에 눈을 까뒤집고 쓰러지는 녀석, 마력 각성자도 아닌데 적당히 힘 조절했다.
그 일련의 과정이 끝난 뒤에야 기겁해서 주춤거리는 다른 오크들을 향해 난 빙긋 웃었다.
“상대가 강한 걸 알면 깝치지 말아야죠. 그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