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7화
“찌이이익……!”
그 악몽 같은 모습에 클랜의 주인, ‘소리 없는 죽음’-스미릭은 작게 신음했다. 부하-제자들과 함께 의뢰받은 암살 임무를 떠나던 도중에 들어온 ‘습격 소식’, 그에 급하게 되돌아가 보니 이런 지옥 같은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찍! 어떻게 합니까? 주-주인님?”
“……죽인다.”
부대장의 질문에 스미릭은 잠시 고민하다가 나지막이 대꾸했다.
그에 암살행을 나섰던 부하들이 코를 움찔거렸다. 목숨을 건 투쟁 속에서 수많은 동족들을 잡아먹으며 거르고 걸러진 최정예들, 하지만 그렇다고 겁이 없는 건 아니었다. 지금, 저 괴물의 손아귀 안에서 씹어 먹히고 있는 쥐쟁이만 해도 평범한 훈련생이 아니다.
암살행을 나갈 동안에 거점을 지키며 수련생들을 훈련하는 책임자.
그들과 같이 테네브라의 선택을 받은 ‘그림자 전사’였다. 그것도 스미릭 다음의 실력자로 인정받는 이, 수많은 오크 기사와 고위 마법사들을 죽인 실력자였지만 지금은 시체가 되어 저렇게 씹어 먹히고 있는데 겁이 안 날 리가 없었다.
그런 부하들의 모습에 스미릭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얕보일 순 없다! 이대로 보내면 수치-망신! 다른 클랜에게 얕보인다!”
“…….”
“어둠 속에서 노린다! 챙겨둔 물건들! 다! 사용! 한다!”
배낭에 있는 물건들을 꺼내는 제자들, 안대를 한 고블린의 머리통, 조잡한 부적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쇠말뚝, 그리고 유리처럼 투명한 심장까지. 부하들이 모두 준비물을 꺼낸 걸 확인한 뒤 스미릭은 품 안에서 자그마한 붉은색 핸드벨을 꺼냈고-.
-딸랑딸랑딸랑!
-딸랑딸랑딸랑!
-딸랑딸랑딸랑!
있는 힘껏 핸드벨을 울렸다.
4.
뭔가 심각하게 잘못된 것 같았다.
성벽 아래쪽에 있는 이종족 지구 지하, <눈>의 범위 한계 때문에 안쪽은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이곳은 쥐쟁이들이 미친 듯이 많았다. 가면 갈수록 점점 쥐쟁이들이 많아지더니, 나중엔 독 발린 단검을 던져대고 쇠손톱 클로를 휘두르는 마력 각성자 쥐쟁이들까지 나타났다.
그때부터 미친 듯이 싸워야 했다.
<눈>을 활용한 근접전 방식으로 싸웠다간 정신력 소모로 탈진할 것 같았기에 그때부터 마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죽인 쥐쟁이 시체에 <시체 부패>를 난사하며 <부패 구름>을 만들어 흩뿌렸고 영혼을 수집해서 <검은 독기의 망령>을 만들어서 풀었지.
나중엔 코드 108을 섬기는 쥐쟁이까지 나타났다.
반깜귀-이영이 내뿜는 ‘코드 108의 아우라’와 똑같은 아우라를 품은 쥐쟁이, 다행히 미르가 유혈에 잠겼을 때 이영이 어떤 권능을 쓰는지 봐둔 덕분에 몰래 그림자를 타고 이동하는 암살자 녀석을 파악해 단숨에 <염기성 무기>를 부여한 무기로 찔러 격살할 수 있었다.
그렇게 대장으로 보이는 쥐쟁이를 죽이자 끈질긴 쥐 떼는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기 시작했는데…….
-딸랑딸랑딸랑!
-딸랑딸랑딸랑!
-딸랑딸랑딸랑!
아무래도 내가 죽인 놈으로 끝이 아닌 것 같다.
기묘한 핸드벨 소리가 지하에 울려 퍼지고, 미친 듯이 도망치던 쥐쟁이들이 멈칫하고 두 눈이 돌아간다. 쥐쟁이들의 몸 군데군데에 새겨져 있던 붉은색의 손바닥 문신이 타오르며 가쁜 숨을 내뱉는다. 털이 푸석하게 변하는 걸 보니 <광폭화>는 아닌데…… 비슷한 것 같네.
-적-먹이…… 적-먹이! 적-먹이! 죽여라-먹어라! 죽여서 먹어!
마력이 뒤섞여 메아리치는 어떤 쥐쟁이의 음성, 그와 함께 내가 흩뿌린 <부패 구름> 속으로 허기에 눈이 돌아간 쥐쟁이들이 달려든다. 이성 따윈 찾아볼 수 없는 물결, 몸이 썩어가 쓰러져도 그런 동료를 밟으며 돌진하는 모습에 난 창을 움켜쥐었다.
-콰득! 콰득! 콰득!
<부패 구름> 속, 다행히 쥐쟁이들 대부분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그저 무작정 돌격, 그 물량에 깔리기 전에 어서 빨리 위로 향하는 통로가 어디 있는지 확인해서 나가야겠다고 이를 갈고 있는데-.
-스윽!
마비의 심장(Paralyzed Heart).
주술적으로 가공된 고블린 심장, 마력을 주입하고 난 뒤에 얼마 지나지 않아 바스러지며 그 투명한 마력적 에너지를 흩뿌린다. 은밀하기에 눈치채기 힘들며, 흡입 시에 미약한 마비 효과와 신체 기능 이상을 일으킨다.
희박한 확률로 굉음을 유발한다.
잡동사니
·발동 효과 : 피격자에게 디버프 <약화>와 <마비> 효과 발동.
은근슬쩍 나타난 알 수 없는 코드 108의 신도 쥐쟁이가 달려드는 일반 쥐쟁이의 등에 물품 하나를 달고 사라진다. 그와 내 근처에 와서 조용히 바스러지며 무색무취의 에너지가 퍼져나간다. 그에 반사적으로 그 물품을 <감정>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전문적인 암살자.
돌죽에서도 암살자들은 이렇게 강제로 암습각을 만들어내곤 했지. 곧바로 호흡을 멈추며, 혹시 몰라서 코 점막을 <연금술>로 응고시켜 코팅해 흡입을 완전 방지했다. 그러면서-.
-움찔.
마비된 것처럼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눈치채기 힘들지만 내가 죽였던 암살자 수준이라면 충분히 눈치챌 거라고 생각했고-.
“!!”
“찍!!”
내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그림자 속에서 ‘펑!’하며 터지는 검은 연기와 함께 쥐쟁이들이 뛰쳐나온다. 주둥이를 가리는 복면에 스키 고글까지 착용한 녀석들, <부패 구름>의 독기 속에서도 용케 버티는 놈들을 향해 난 준비해뒀던 환영인사를 건넸다.
-파아아앗!
내 몸 주위에 무자비한 자색의 광배가 떠올랐다.
<맹독성 휘광>, 어둠 속에서 갑작스럽게 터진 섬광에 암살자들의 눈이 감겼다. 몸 전체가 타오르는 끔찍한 감각일 텐데도 암살자들은 인내하며 내가 있는 방향을 찌르지만…… 시야와 촉각이 흐트러진 상황에서 제대로 된 칼질이 될 리가 없지.
그 사이, 장갑에서 꿈틀거리는 <광폭화>의 흐름을 받아들였다.
머리에 도달한 유혈의 격류가 척추를 타고 전신으로 쇄도한다. 근섬유를 더 빠르게 수축·이완시키고 주위의 물리 법칙을 뒤틀리게 한다. 외부로 마력을 투사해 룬문자를 만드는 게 힘들어지지만…… 그 대신에 강렬한 물리적인 힘을 얻었다.
-스칵! 스칵! 스각! 촤학!
이전에 암살자를 조졌을 때처럼 폭발적인 속도와 힘으로 황금색 쌍날 창을 번개처럼 회전시켰다. 암살자들의 칼날을 쳐내면서 힘으로 찍어 눌러 베어 가른다. 회전하는 칼날의 궤적에 휩쓸린 암살자들 머리통이 날아간다. 실력에 비하면 참으로 허무한 최후인데…….
“!?”
왠지 대단히 ‘싸~’한 느낌이 들었다.
놈들이 착용한 방탄복 같은 현대적인 검은색 조끼, 딱히 마법적인 효과는 없지만…… 생각의 속도에 따라서 <눈>의 시야가 이동하고 그 안쪽에 있는 기다란 폭약이 인지된다.
무식할 정도로 많은 양.
내가 아무리 성장했다고 한들, 한 줌의 고깃덩이로 바꿔버릴 만한 양이다. 이래서 <눈>을 맹신하면 안 돼. 마력이 아니라도 위험한 게 넘치니까. 한없이 가속된 인지력 속에서 어떻게 하면 이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을지 고민했고-.
-파앗!
-콰-아아아아아앙!
굉음이 울려 퍼졌다.
5.
폭음에 도시 전체가 낮게 진동했다.
무지막지한 폭약의 위력, 근처에 있던 스미릭 또한 폭발의 위력을 해소하지 못하고 휘말려 튕겨 나갔다가 바닥에 착지한 후 폭발의 현장을 응시했다. 충격파에 뭉클거리던 <부패 구름>은 전부 흩어진 지 오래, 후드 차림의 괴물이 있던 곳엔 이미 핏물밖에 없었다.
“죽음?! 죽음!!”
“그래-그래!”
반색한 수하들의 중얼거림, 하지만 상황은 다 끝난 게 아니다. 막대한 희생을 치러 가장 위험한 괴물은 격살했지만 자안을 번뜩이는 망령 같은 놈들은 여전히 살아서 날뛰고 있었다.
“가서! 정리해! 남은 것들을 죽여!!”
“찍!”
“찌직!”
그 명령에 휘하의 남은 그림자 전사들이 어둠 속에 스며들어 흩어졌다. 일반 쥐쟁이로는 절대 상대 불가능한 괴물, 하지만 그림자 전사들은 그런 망령들의 배후에 솟아나 그 머리통에 단검을 내리긋는다.
그런 그림자 전사들의 단검에 찢긴 망령들은 쉽게 회복되지 못했다.
-이 쥐쥐쥐쥐쥐! 쥐새끼가!!
-쥬겨! 주우우겨어어얽!
광분하며 그림자 전사들을 후려치려고 하지만, 그림자 전사들은 특유의 날렵함과 신에게 하사받은 권능으로 공격을 피한다. 그렇게 어느 정도 수습되는 모습을 보며 스미릭은 나지막이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수습했지만 이미 피해는 괴멸적.
훈련생들이 죽은 건 별것 아니다. 어차피 반쯤 버리는 패, 암컷이 숨풍숨풍 낳으니 식량만 많다면 금방 채운다. 문제는 마력 각성한 ‘전사들’과 신의 선택을 받은 ‘그림자 전사들’이다. 암살자 훈련을 받던 백여 명의 전사들도 괴멸했고, 신의 축복을 받은 그림자 전사도 5명이나 죽었다.
……무엇보다 소란이 너무 컸다.
뭔가 벌어졌다는 걸 알아차리고 오크들이 쑤셔보려고 할 거다. 위에 있는 건방진 떨거지들도 그런 오크들의 행사에 관여 안 할 확률이 높았다.
아쉽지만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
여기만큼 좋은 거점이 없지만 이 상태라면 오크들을 막기 힘들다. 다행히,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새로운 거점 또한 알아 놨다. 이곳에 비하면 위치는 안 좋지만 어쩔 수 없지. 새끼를 칠 암컷과 직속 제자들, 그리고 테네브라의 신상을 가지고 이틀 정도만 움직이…….
“찍? 근데, 왜? 한국어?”
그렇게 잠깐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다가 문득 망령이 내뱉는 목소리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도대체 저 망령은 뭐길래 한국어를 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찌이이익!
-부불! 불이야아악!
-살려-구해줘!
<부패 구름>들이 돌연 불길에 휩싸이기 시작한다. ‘허기의 종’의 효과에 의해 반쯤 미쳐서 죽은 동족의 고기를 씹어 먹던 훈련병이 비명을 지르며 노릇노릇 불타오르고, 자안의 망령 또한 주황빛으로 위험하게 불타오른다.
-캬캬캬캬!
-키킥! 병X! 쥐쟁이!
“찌익-! 후퇴-역돌!”
뭔가 심상찮은 낌새를 느낀 수하들이 다급하게 몸을 빼려고 했지만 그보다도 먼저 망령들이 폭발한다. 그들이 했던 자살 폭탄 공격 못지않은 폭발력, 스미릭은 다급하게 근처 그림자 속에 이동해 충격을 최대한 줄였지만…… 다른 그림자 전사들은 그만큼 능숙하지 못했다.
-쿠르르르릉!
아무리 ‘특별한 물리 법칙’이 적용되는 뉴 송파구의 지반이라고 한들, 일정 수준 이상의 충격은 버티질 못한다. 폭약의 폭발에 한 번 박살 난 기반시설과 윗지반이 그대로 무너져 내린다. 제대로 기반도 다지지 않은 덕분에 위층의 건물 또한 그대로 아래로 처박힌다.
“…….”
멀찍이 탈출한 스미릭은 멍한 눈으로 그 모든 걸 응시했다.
불길에 휩싸여 박살 난 거점, 동족을 늘려줄 암컷과 무엇보다 소중하게 길러왔던 그의 수하들이 독기에 범벅이 되었거나 불길에 휩싸여 모조리 죽었다. 그래, 뉴 송파구의 오크들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던 공포로 군림한 그의 암살단 클랜이 전멸했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벌어진 참사에 그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찍?!”
그의 민감한 귀가 불길에 타오르는 소음 속에서 어떤 이질적인 소음을 포착한다. 그에 그의 눈이 그쪽으로 향하자-.
황금빛 창을 든 괴인-원수가 그곳에 서 있었다.
“찌이이익! 죽여-찢어! 버리겠다!”
은근슬쩍 한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모습, 그에 스미릭의 두 눈이 돌아가고 괴인은 아가리에서 시커먼 연기를 토해낸다. 그와 함께 그 시커먼 연기들이 꿈틀거리는 망령의 형상으로 변해 스미릭을 향해 달려든다.
“찌-찌지지직!”
그런 망령들을 무시한 채, 스미릭은 그림자 사이를 오가며 곧바로 괴인을 요격하려 했지만, 망령들은 놀랍게도 그런 스미릭의 움직임을 알고 있다는 듯이 따라붙는다.
그에 어쩔 수 없이 스미릭은 망령부터 처리해야 했다.
“죽여-찢어 주마!”
“주마!”
고련에 고련을 거듭한 끝에 완성한 그의 절기들, 양손과 꼬리까지 움직이는 삼도류(三刀流)의 칼날 폭풍이 달려드는 망령들을 가뿐하게 찢었다. 그의 그림자 또한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며 일어나 그의 절기를 똑같이 따라 했다.
완벽한 합공.
조금 전처럼 망령이 폭발할 수도 있기에 스미릭은 찢어내면서도 빠르게 그림자 사이를 이동하며 폭발의 충격에 대비했다. 그렇게 완벽하게 10마리의 망령들을 순식간에 찢어냈지만-.
“찌이이이이이익! X발-고양이와 붙어먹을 새끼야!!”
그 사이에 그의 클랜을 몰살시킨 괴인은 어딘가로 사라졌다.
6.
힘겹게 쥐쟁이들을 뿌리치고 난 뒤, 이종족 지구의 하수도를 빠져나왔다.
“하아, 미친…….”
미친 쥐쟁이 새끼들이 아주 X랄 맞았다. 그냥 지나치는 건데도 마력 각성자-심지어 코드 108과 계약한 놈들이 자살 폭탄 테러까지 하다니…….
“끄응.”
왼손 약지에 착용한 공간이동 반지, 박혀있는 3개의 다이아몬드 중 하나가 칙칙하게 변했다. 3번의 기회 중 하나를 사용한 꼴, 가격이 90억이라고 했으니 30억을 쓴 건가? 그래도 후회는 없었다.
아니었으면 뒤졌을 테니까.
괜히, 상층의 이종족들이 유령을 푼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게다가 그 막판의 허리가 꾸부정한 체격인데도 180cm 가까이 되던 거대 쥐쟁이는…….
어휴, 진짜 다시는 지하로 움직일 생각을 하지 말아야지.
-불이야! 불!
-물 가져와! 아니 사람부터 구해!
간신히 나온 지상도 그리 상태가 좋지 않았다.
폭탄 테러의 여파와 추가로 <독의 연소>로 내가 남긴 부산물들을 불태운 덕분에 이종족 지구의 건물 한쪽이 무너져 내렸다. 불구덩이에 처박힌 건물들과 소란스럽게 움직이는 드워프들의 고함이 들려온다. 이런 상황에 이런 차림으로 함부로 움직이다간…… 추궁받겠지?
영체와 왼손 중지에 낀 ‘유령의 반지’를 동기화한 후, 난 조용히 어둠 속에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