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218화 (218/350)

제218화

45화. 사채업자 뒤앙밍크

1.

주위 시선을 피해, 난 근처의 건물에 숨었다.

다행히, 숨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내 미숙한 <투명화>도 어둠 속에서라면 그리 티가 나지 않았으니까. 벽을 타며 천천히 건물 지붕까지 올라간 후, 다음 활동 준비를 하며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아침이 밝았다.

-데엥~ 데엥~ 데에엥~

“흐음.”

아침 종이 울리는 새벽 6시, 활동하기 전에 분장한 내 모습을 제삼자의 시선으로 다시 한 번 체크했다. 지하 시설의 폭발에 어수선해진 상황, 칙칙한 로브와 해골 투구를 쓰고 다니기엔 분위기가 안 좋았기에 챙겨온 분장을 입었는데…….

“X발.”

내 꼬라지를 보며 자괴감에 이마를 짚었다.

염색한 흑색 단발 머리칼에 알이 커다란 선글라스, 로브 안에 입었던 여성스런 굴곡이 살짝 드러나는 흑색의 가죽 방어구 차림. 허리에 커다란 금색 벨트가 걸려있고, 양 귓바퀴는 거의 10cm가량으로 길쭉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슴팍이 봉긋하다.

그래, 반귀쟁이 여장이다.

각진 몸의 굴곡은 안쪽에 보정 속옷처럼 틀을 집어넣어서 잡거나 좀 헐렁한 가죽 방어구로 가렸고, <연금술>을 내 몸속에 적용해서 귀 연골을 녹이고 최대한 잡아당긴 뒤에 굳혀버렸다. 억지로 몸을 비튼 거라서 귀가 살짝 얼얼해. 가슴? 뽕으로 채웠어.

……사실, 여장까진 안 하려고 했다.

근데, 내 체구가 문제였다. 150cm의 여자로도 작은 체형. 아무리 봐도 남자는 안 어울리더라. 150cm 성인 여성은 가끔씩 있지만 150cm 성인 남성은 거의 없잖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여장을 택했다. 다행히, 잘 어울린다. 내가 아는 두 반귀쟁이들-이영과 이경 사이에 있어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로.

“어차피 아무도 모르니까…… 큼! 큼큼! 아아아!”

마지막으로 성대를 만지면서 안쪽의 근육을 <연금술>로 녹이고 접합해 목소리를 더 뾰족하게 바꾼 후, 난 용감하게 바닥을 향해 뛰어내렸다.

2.

대로(大路)로 나가서 본 이종족 지구의 분위기는 흉흉했다.

생각지도 못한 ‘어젯밤의 사고’도 그 흉흉한 분위기에 한몫했겠지만, 사고가 없었더라도 분위기는 비슷했을 거다. 한참 전에 폐업한 것으로 보이는 가게가 대부분, 곳곳에 퀭한 얼굴에 꾀죄죄한 드워프들이 쪼그려 앉아있었다. 아마 지하의 약탈을 피해서 온 피난민이겠지.

그나저나 지금 눈치챈 건데…… 죄다 드워프 새끼들밖에 없네?

“귀쟁이?”

“X발, 귀가 반 토막이잖아. 반 귀쟁이야.”

“망할 창X 새끼들, 저년도 상층 프리패스겠지?”

“당연하겠지. 한번 임신시키면 우리도 보내주지 않을까? 서방님이라고 하면서?”

“미친놈, 넌 비리비리한 귀쟁이 보고 그게 서냐? 여자란 자고로 굵고 단단한 허리…….”

게다가 밖의 오크들처럼 대놓고 시비는 안 걸었지만 날 보며 ‘되게 부러움과 질시+아니꼬워하는 눈치’가 강했다. 돌아다니는 경비병도 포함해서 말이다.

“하아.”

밖에서도 인종차별, 안에서도 인종차별이라니…… 아주 X같은 곳이네. 당장에라도 때려치우고 싶지만, 목에 걸린 흑색 사슬-‘폭탄 목걸이’의 서늘한 감촉을 생각하면 그럴 수가 없다.

양 뺨을 ‘찰싹! 찰싹!’ 치며 전의를 다진 후에 거리를 거닐며 노숙자 드워프들을 훑었다.

날 보는 눈빛이 흉흉하지만 그래도 아예 말을 못 걸만한 수준은 아니다. 어찌 됐든 간에 정보를 모아야 하니 밥하고 술 사주면서 ‘하프 오크 마을’에 대한 것과 어제 만난 오크 아저씨가 알려준 ‘뒤앙밍크’라는 드워프에 관해서 물어봐야지.

그렇게 적당한 노숙자들을 물색하던 도중에…….

“음?”

드문드문 특이한 노숙자들이 보였다.

코드 108의 아우라-양의 낙원에서 본 ‘모라티온’의 것을 흘리는 드워프들, 굳이 <눈>으로 보지 않더라도 다른 노숙자 드워프들과 차이가 났다. 주변 드워프들이 슬슬 피하는 낌새였고 무엇보다 하나 같이 마약 중독자마냥 눈깔이…….

근데, 모라티온의 신도는 아닌데?

하나 같이 오른손 팔뚝 쪽에 손바닥 모양의 검은 문신을 새겼는데, 거기서 모라티온의 신성이 은은하게 흘러나온다. 도대체 뭘까? 낌새를 보아하니 좋은 건 아닌 것 같은데 말이지. 한 번 호기심에 <감정>을 해본 순간-.

“끄응…….”

내 앞의 드워프에 대한 <과거>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고, 동시에 내 영혼의 일부가 저 낙인이 뿜어내는 힘에 대해 최대한 분석한다. 이어서 빈 창이 떠오르며 누군가 타이핑 치듯 플레이버 텍스트가 한 글자씩 작성된다.

사신의 빚-‘죽음까지’

쌍방의 동의하에 새겨진 ‘죽음의 낙인’, 이 낙인 새겨진 존재는 ‘모라티온’에게 진상된 희생양이다. 낙인이 새겨진 이는 은연중에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인해 이성적인 판단 능력이 떨어지게 되며 낙인을 새긴 자에게 위축된다. 이러한 효과로 인해 발생한 심적인 ‘고통과 절망’은 모라티온에게 진상된다.

일정 시간이 지날 시, 낙인이 활성화되면 극심한 <고문> 효과와 함께 대상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낙인의 발동까지 앞으로 18시간 17분 4초

역시, 좋은 게 아니구만. 스쳐 지나간 단편적인 과거는 어떤 칙칙한 잿빛 피부의 드워프가 저 드워프랑 이야기하고 뭔갈 주더니 팔뚝을 붙잡고 악수한 거였다.

“후.”

호기심을 해결한 뒤, 난 얼음송곳이 찌르는 것 같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면서 거리를 걸었다.

최소한의 설명만 있는 감정 결과, 좀 더 <과거>를 깊게 파헤치면 플레이버 텍스트가 자세해지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까지 느끼진 못했다. 솔직히, 방금 한 <감정>도 좀 후회돼. 들어온 지 고작 하루도 안 지난 시간이지만, 머릴 너무 혹사시켰는지 벌써부터 목~금요일 수준의 피곤함이 느껴진다.

어서 빨리 적당한 드워프 노숙자를 찾…….

-휙!

“……!?”

아서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골목 쪽에서 빠른 속도로 뭔가가 튀어나와 날 덮쳐온다.

충혈된 눈을 번들거리는 한 드워프, 노숙자들처럼 꾀죄죄하지만 옷차림 자체는 훨씬 잘 차려입었고 무려 ‘마력 각성자’다. 게다가 그 오른손 팔뚝엔 검은 손바닥 문신이…… 아니, <감정>은 안 했지만 다른 문신보다 더 지독한 거다. 아우라가 더 강해.

찰나의 순간, 나는-.

“꺄~아……!”

-덥썩!

저항을 포기했다.

내 입을 틀어막고 마력 각성자 특유의 괴력으로 건물의 골목 쪽으로 날 끌고 가는 드워프, 다른 노숙자 드워프들은 얼굴을 찡그리며 납치범의 모습을 외면하고, 멀찍이 있던 경비병 드워프는 얼굴을 구기며 허겁지겁 짧은 다리로 달려온다. 납치당하는 순간이지만 그리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재미있다.

이전이라면 몰라도 오무혁의 경험을 이어받은 지금은 전혀 위험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애초에 고통으로 협박하는 신체적인 위협 같은 건 죄다 너무 하찮게 느껴지는걸? ‘너의 직박구리 폴더의 내용물을 까발리겠다!’ 같은 위협은 여전히 식은땀이 흐르지만.

“큭!”

적당히 으슥한 곳에 도착하자마자 내 몸을 낚아챈 드워프의 팔 한 부분을 꾸욱 눌러줬다. 날카롭게 찌르는 그 자극에 드워프의 팔 근육이 움찔하는 사이, 재빠르게 붙잡혔던 몸을 빼냈다. 저릿저릿한 손목, 아무래도 나중에 멍들 것 같네. 장갑은 껴둘 걸 그랬나?

“거, 대로 한복판에서 납치라니. 너무 과감한 거 아닌가요? 생각지도 못했어요.”

“……가만히 있어라. 죽기 싫으면.”

내 대꾸에 마력 각성자 특유의 기세를 뿜어내는 노숙자 납치범, 그에 나도 빙긋 웃어줬다.

“Come on, baby.”

손가락을 까닥이는 내 도발에 달려드는 마력 각성자, 드워프 노숙자, 보아하니 확실히 전투 경험이 있다. 웬만한 전사급 이상? 하지만, 나 정도는 아니지. 그 근육의 물결과 마력의 흐름을 다각도에서 읽어 들이고 차분하게 대응했다.

뻗어오는 손은 피하고, 얼굴에 정타·정타·정타.

“허억! 허억! 허어어억…….”

“꽤 끈질기시네.”

그렇게 살짝 가학적인 쾌감을 휘두른 지 3~4분가량, 손에 묻은 코피를 털며 난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날 바라보는 드워프를 응시했다. 양 주먹과 무릎으로 집요하게 얼굴만 때려서 그런지 코뼈가 깨지고 얼굴은 퉁퉁 부풀어 올랐다. 이빨도 몇 개 튀어나왔다.

이미, 알아차렸을 거다.

그와 나 사이에 아득한 수준 차이가 있다는 걸. 어딜 때릴지 알아도 못 막고, 어떻게 역습해보려고 해도 막힌다. 아직 전쟁 군주의 경험을 다 소화시키지 못했지만, 그 일부분과 <눈>의 조합만으로도 이렇게 웬만한 전사는 가지고 논다.

하지만, 이 마력 각성자 노숙자는 포기하지 않는다.

“으아아아아!”

아니 포기하지 ‘못’한다.

그의 충혈된 두 눈엔 공포와 두려움이 가득했다. 나의 것이 아닌 공포와 두려움이. 아마 저 낙인과 관련된 거겠지? 좀 호기심이 드네. 슬슬 두들겨 패는 것도 질렸고, 드워프 경비병들이 기웃기웃 이쪽을 향해 오기에-.

“장난은 이제 그만하죠.”

심호흡을 하면서 드워프를 향해 ‘내 살의에 감응한 마력’을 한 번 강하게 내뿜었다. 전쟁 군주의 것과 비교될만한, 내가 봐도 소름끼치는 기세. 그제야 드워프의 두 눈에 ‘나의 것인 공포와 두려움’이 차오른다.

“으, 으으으으……!”

-철그럭! 철그럭! 철그럭!

풍 맞은 환자처럼 벌벌 떨며 ‘털썩’하며 무릎을 꿇는 드워프, 곧바로 살기를 거두자마자 드워프 경비병들이 갑옷 소리를 내며 짧은 다리로 달려오는 게 보인다. 이쪽 골목에 들어서자 나와 드워프를 발견하곤 3명 정도 되는 경비병들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뜬다.

“괜찮으셨군? 이거, 생각지도 못했어.”

“하, 하하.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가장 고참으로 보이는 마력 각성자 경비병의 질문, 다행히 내게 적대적인 것 같지는 않았다. 웃으며 하는 내 대꾸에 살짝 미간을 찡그린 고참 경비병은 무릎을 꿇고 벌벌 떠는 드워프의 와이셔츠 소매 사이의 팔뚝 문신을 힐끗 본 후, 가래침을 옆에 한 번 뱉곤 입을 열었다.

“죽이지는 마쇼. 어차피 시체인 것 같으니까. 가자, 얘들아.”

동족이 구타당했는데도 쿨하게 뒤돌아서 움직이는 드워프 경비병들. 내가 봐도 좀 어이가 없는 광경이었다. 뭐, 어찌 됐든 간에 나로선 나쁘지 않지. 그렇게 경비병들이 사라진 후, 난 공포에 질려 무력화된 드워프 납치범에게 다가가서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러니 상대를 잘 골랐어야죠.”

“…….”

“그나저나 실력의 차이를 느끼셨을 텐데도 이렇게 무모하게 달려들다니…… 그렇게 급하신 건가요? 혹시, 팔뚝의 낙인과 관련된 일인가?”

“그, 그래! 도…… 돈을 갚아야 해! 최소한의 이자라도 갚아야 해!”

내 질문에 그의 두 눈에 다시 한 번 ‘나의 것이 아닌 두려움’이 치밀어 오르는 드워프. 돈을 갚는다? ……설마, 돈을 빌려서 저런 낙인이 찍힌 건가? 확실히, <감정>기능으로 과거를 대충 훑었을 때, 어떤 봉투를 받으며 악수하는 걸 보긴 했지.

그렇게 내가 상념에 잡혀 있을 때, 드워프는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발작한다.

“죽…… 죽기 싫어! 아니, 주…… 죽지도 못해. 그 뒤앙밍크의 좀비가…….”

“뒤앙밍크?”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되묻자 필사적으로 고갤 끄덕이는 드워프. 흐음, 도대체 뭣 때문에 저렇게 공포에 질렸는지 호기심만 푼 뒤에 다른 드워프 노숙자들을 알아보려고 했는데…….

이거 계획을 변경해야겠다.

날 어떻게 해보려고 했단 게 매우 괘씸하지만 뒤앙밍크에 대해 아는 인간이다. 게다가 마력 각성자에 옷차림을 보아하니 꽤나 높았던 사람, 알고 있는 정보 자체는 이 노숙자가 다른 노숙자들에 비해 많을 거야.

그에 결심을 내리고 난 품 안에서 지폐 2장을 꺼내 내밀었다.

“자, 10만 원을 드리죠. 그리고 잘 대답해 주면 90만 원을 더 드릴게요.”

“…….”

“제가 살 테니까, 일단 몸 좀 씻고 밥부터 드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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