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219화 (219/350)

제219화

3.

내 제안에 폐인이 된 납치범은 순순히 승낙했다.

이종족 지구에 있는 2번 대기둥의 근처, 다른 건물들과 비교되는 20층짜리 높은 건물로 안내했는데…… 무려 호텔이더라? 지상의 비즈니스호텔 수준이긴 했지만. 하긴, 아무리 도시가 후지다고 해도 호텔이 없을 리가 없었다. 밥 먹여준다고 하니 곧바로 호텔로 온 그 심성에 좀 배알 꼴렸지만…….

그래도 순순히 호텔 방값과 응급처치 서비스값, 아침 식사 뷔페까지 대접해드렸다.

“좀 정신이 드시나요?

호텔 로비의 카페, 내 질문에 노숙자 납치범은 커피잔을 들어 기울이며 고갤 끄덕였다.

“예, 좀 씻고 먹으니 정신이 듭니다. 난 ‘베일렌’이라고 합니다. 당신에게 끼쳤던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충혈된 눈을 번들거리던 정신병자 같은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질 않는다. 두 눈에 있는 초조함은 여전하지만, 몸단장을 하고 저렇게 정중하게 나오니 진짜 이종족 부유층이라는 느낌이 드네. 이어서 그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조심스런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그나저나 왜 이곳에 있습니까? 반 귀쟁…… 아니, 하프 엘프라고 하더라도 위에 올라갔을 텐데?”

“일단, 전 이곳 출신이 아니에요. 미국에서 의뢰를 받아서 온 용병이죠. 상층에 있다가 아래로 내려온 겁니다.”

“용병? 하긴…….”

납득하는 눈치로 두들겨 맞았던 얼굴을 쓰다듬은 납치범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납치하려던 제가 이런 말 하기 뭣하지만, 지금 여기는 하프 엘프가 돌아다니기엔 좀 좋지 않을 겁니다.”

“하긴, 그런 느낌을 좀 받긴 했죠. 죄다 드워프밖에 없더군요.”

내 말에 드워프는 살짝 고갤 끄덕이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말을 이어 나갔다.

“여기 남은 이들은 재산이 부족해서 상층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한 ‘떨거지’들입니다. 돈이 있건 없건 무조건 올라간 엘프들과는 다르죠. 그래서 엘프들에게 꽤 많은 반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세히 좀 설명해주실래요?”

내 말에 이곳 상황에 대해 대략적으로 말해주는 드워프, 오크 아저씨들에게 들은 대로 유입 오크들 때문에 사태가 흉흉해지면서 중층 곳곳에서 머무르고 있던 이종족들은 다급하게 도망쳤는데…… 모든 이를 안전한 상층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했다고 한다.

반면에 귀쟁이들은 죄다 상층으로 받아들였다고.

“그 염병할 귀쟁…… 아니, 미안합니다. 말실수를…….”

“그냥 귀쟁이라고 하세요. 하프들도 순혈은 싫어하거든요. 좀 재수가 없어서.”

반 귀쟁이들 곁에서 지내봤기에 잘 안다. 이경과 이영, 두 사람 모두 대놓고 드러내진 않았지만 업신여기는 반쪽짜리 동족에게 꽤나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게 눈에 보였거든. 그에 망한 드워프 사업가는 크게 숨을 내뱉곤 이를 간다.

“그 염병할 귀쟁이 새끼들, 인간 정치인들에게 열심히 가랑이를 벌렸는지 제대로 지상으로 이주할 권한까지 얻었다고 하오. 우리로선 어처구니가 없지. 솔직히, 그 귀쟁이들보다 우리가 인간들에게 기여한 게 더 많은데 말이지!”

“하하.”

원색적인 모욕에 쓰게 웃었다.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귀쟁이 인성’이 더럽다는 게 밝혀졌지만 그런 것도 빛나는 외모 앞에선 소용없다. 늙지 않는 신비한 미녀? 이걸 어케 참음! 하면서 말이다. 이전의 백인 금발 미녀처럼, 유럽과 미국·중국의 인간 부호는 엘프 애인이 패시브야.

대충 동의해주면서 난 살짝 생수를 한 모금 마시며 한 손을 들었다.

“잡담은 거기까지 하죠. 일단, 제가 그쪽에게 호의를 베푼 건 궁금한 게 있어섭니다. 다른 노숙자와는 달리 ‘마력 각성자’에 복장을 보아하니 한때, 부유하셨던 것 같았거든요.”

“맞소. 이 빌어먹을 오크 새끼들 때문에 망했지만…… 장담하건대, 난 다른 밑바닥 놈들보다 아는 게 훨씬 많소. 내가 모르면 다른 놈들도 모를 거야.”

나름 자신 있게 대답하는 사업가, 그에 난 본론을 꺼냈다.

“제가 이곳에 온 목적은 한 ‘하프 오크’를 구하는 겁니다.”

“하프 오크를 구하러 왔다고?”

“네, 돈을 받았으니 일해야죠.”

“참나, 세상 참 이상…… 아니, 아니지. 이해했어. 하지만, 그래도 그런 개인적인 건 모르오.”

“저도 하프 오크 한 명이 어디 있는지 알 거라고 기대하진 않아요. 그, ‘하프 오크 마을’의 위치에 대한 것 정도만 구해도 OK죠.”

내 질문에 턱을 쓰다듬는 드워프, 잠시 생각하던 그는 이내 천천히 고갤 끄덕인다.

“하프 오크 마을…… 그래, 신문에서 본 적이 있어. 인종들의 권리 향상을 위해 미르에 반편이들을 보낸다고 했는데, 하층의 오크 반편이들 집단 대표랑 쇼부 쳤다고 했었지. 그래서 마을을 만들어주겠다고 했었나?”

“그 위치를 아시나요?”

“아니, 그런 건 모르오. 설령 안다고 해도 거기까지 갈 방법이 있겠소? 지금 같은 시기에?”

말이 되냐는 듯한 뉘앙스로 되묻는 드워프. 역시나, 알 리가 없지. 직접 5~6km 지점까지 내려가서 뒤져보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 작게 한숨을 내쉰 후, 난 다음 질문을 꺼냈다.

“그럼 다음 질문, 이곳을 빠져나가서 지하로 가는 방법을 아십니까?”

“흐음. 그건…….”

“절 고용한 이는 ‘뒤앙밍크’라는 드워프가 오크들에게 들키지 않고 지하로 내려갈 일을 꾸미고 있다고 하던데요.”

4.

내 입에서 나온 뒤앙밍크라는 이름에 드워프의 얼굴이 굳는다.

그리고, 다시 그 눈에 초조함과 공포가 차오르기 시작한다. 왠지 그대로 두면 한 번 더 발작할 것 같은 느낌에-.

“자, 이거 받아두시고 진정하세요.”

-탁!

끝나고 주기로 했던 90만 원을 꺼내 내밀었다.

왠지 말보다는 돈을 주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돈을 보여주자마자 빼앗듯이 낚아채 꽈악 움켜쥐고 고갤 숙인 채 숨을 헐떡이던 드워프는 이내 한결 나은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고맙소. 잠시 추태를 보였군.”

“별말씀을. 그나저나 그 ‘뒤앙밍크’라는 놈이 누구기에 그렇게 긴장하는 건가요? 대충 사채업자라고만 알고 있는데.”

“……맞소, 속칭 ‘사신의 사채업자’라고 하지. 난 되도록 그자와 얽힐 생각을 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싶소. 진심으로 말이요.”

참담한 표정으로 드워프는 떨리는 왼손으로 오른손의 양복과 와이셔츠 소매를 올렸다. 그런 그의 오른손 팔뚝에 있는 불길해 보이는 ‘시커먼 손자국 문신’, 처음 드워프를 봤을 때 느꼈던 모라티온의 신성이 그 안에서 빛나고 있다.

“이게 뭔지 아시오?”

“아뇨, 그 낙인이 찍힌 이들의 표정이 안 좋다는 건 알지만.”

“뒤앙밍크가 찍는 채무자의 낙인이요. 이곳에선 통칭 ‘사신의 빚’이라고 하지.”

다시 소매를 내리며 그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문다.

“빌린 돈을 갚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는 족쇄요. 기간 내에 돈을 이자라도 갚지 않으면 극심한 고통을 가해 죽음에 이르게 하지. 더 끔찍한 건, 빌리는 돈이 크거나 더 저렴한 이자율을 고른 사람은 ‘죽음’으로도 안 끝난다는 거요.”

“……죽음으로 안 끝난다?”

“죽은 뒤에 되살아나 영혼이 속박된 채 뒤앙밍크의 좀비가 되오.”

떨리는 손으로 낙인이 새겨진 팔을 쓰다듬는 드워프, 죽지도 못하고 좀비가 된다? 내 목의 폭탄 목걸이는 그나마 나은 거구나. 저렇게 패닉에 빠진 것도 이해가 되네. 양의 낙원에서 본 모라티온의 신도가 영혼도 괴롭혔던 걸 보면 아마 죽지도 못하고 계속 고통받…….

아니, 생각해보니 좀 이상하네?

“근데, 사채업자인데, 하는 짓이 골디안의 신도가 아니라 모라티온의 신도 같군요? 찍힌 낙인의 효과도 모라티온의 것 같고.”

코드 108중에서는 ‘황금과 재물’을 관장하는 ‘골디안’이라는 신이 있다.

지상에선-미궁 출신 상인들이 세운 회사로 알려졌다. 이곳 세계에서 악명 높은 헤지펀드지. 신이 직접 발행한-대중들에겐 마법 주화로 알려진 골디안 코인이 유명해. 사채업자라면 분명 돈과 관련된 직종인데, 왜 모라티온의 신성이 느껴지는 거지?

그런 내 의문에 드워프 양반은 쓰게 웃는다.

“맞소, 그자는 모라티온의 신도요.”

“돈과 관련된 일을 하는데 골디안의 신도가 아니라고요?”

“골디안의 신도는 이런 조그만 시장에서 돈 빌려주면서 놀지 않지. 놈은 사채업자지만 돈이 목적이 아니오. 그저…… 채무자들의 고통을 바랄 뿐이지.”

할 말을 잃었다.

그 어떤 악질적인 사채업자도 근본적으론 ‘돈 때문에’ 사람을 괴롭히지, ‘괴롭히기 위해서’ 돈을 빌려주지는 않는다. 근데, 괴롭히려고 돈을 빌려주는 놈이 있다고? 진짜 상상을 초월하네. 아니, 그것보다 모라티온이라는 악신을 섬기는 놈을 살려두는 것 자체가 신기하다.

“그런 짓 하면 이곳 정부가 제지 안 해요? 아니, 솔직히 모라티온을 섬긴다는 것 자체부터 척살감 아닙니까?”

“그쪽이 살던 미국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여기는 다르오. ‘심연의 악신’을 제외한 어떤 신을 섬기건 간에 크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종교는 자유지. 그리고, 내가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그자는 ‘필요악’에 가깝소.”

“필요악이요? 채무자를 괴롭히는 게 목적이라는 사채업자가 필요악?”

어이가 없다는 내 반응에도 드워프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갤 끄덕인다.

“중층에서 돈을 빌리려면 그자의 손밖에 없소. 주민등록이 된 상층민들도 빌린 돈을 갚을락 말락 하는데, 중층 이하에 사는 놈들은 대부분 담보도 없는 거지새끼들이오. 돈 빌리고 도망치면 끝인 놈들.”

“…….”

“그런 놈들에게 돈을 빌려줄 이가 있소?”

드워프의 질문에 침묵했다. 내가 사채업자라고 해도 그런 놈들에겐 안 빌려줄 테니까. 그런 내 반응에 드워프는 쓰게 웃는다.

“섣부르게 돈 빌려주면 떼이는 게 일상이지. 하지만, 뒤앙밍크는 달라. ‘고통과 죽음’이라는 담보를 잡기에 채무자들이 함부로 도망 못 쳐. 게다가 대출 이자 또한 꽤 합리적이고.”

“얼마죠?”

“종류마다 다르오. ‘죽음으로 끝나는’의 이자는 한 달에 15%, ‘죽음으로도 안 끝나는’의 이자는 5%. 제대로 돈을 굴리면 갚기 쉬운 금액이지. 그에게서 돈을 빌리고 사업해서 성공해 상층으로 진입한 이들도 많소. 뭐, 바람잡이로 뒤앙밍크가 성공시켜줬다는 말도 있지만.”

한 달에 15%, 5%라…… 대충 1년에 이자가 500%, 80% 정도네. 지상의 정규 금리에 비하면 무지막지하게 비싸지만, 일주일에 50% 이자를 물리는 동네 조폭들의 일수에 비하면 굉장히 합리적이다. 내가 고갤 주억이자 드워프는 한숨을 내뱉는다.

“게다가 놈은 이익을 위에 상납하고 있소. 대부업 회사 세우고 그 지분을 이종족 고위층들에게 팔아넘겼는데, 40%는 뒤앙밍크의 소유지만 60%는 각 종족의 정부 관계자들 거지. 그렇게 구 정부의 위세까지 업었지.”

“철두철미하네요.”

“그렇지.”

말만 들으면 진짜 치밀한 악당이다. 하지만, 동시에 필요악이라는 말도 와닿고. 그나저나 이 아저씨는…….

“그쪽은 돈을 빌렸다가 사업에 실패한 거군요?”

“아니, 난 패배자가 아니오! 이미 성공한 사람이오! 뒤앙밍크, 그 개자식에게 돈 빌리지도 않고!”

“워워. 진정하세요. 진정.”

‘실패했다’는 말에 발끈하며 탁자를 ‘쾅!’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서서 소리치는 드워프, 주위의 시선이 쏠릴 정도였기에 좀 진정하라는 듯이 손을 펼치자 그는 숨을 ‘쉬익! 쉬익!’ 내뱉으며 자리에 앉고는 엎질러진 커피잔을 다시 세우며 한탄하듯 말을 늘어놓는다.

“외부출신인 그쪽은 모르겠지만 내 이름에서 딴 ‘베일렌 소일’은 이곳에선 모르는 이가 없는 최고의 모래·흙 공장이었소.”

“모래하고 흙 공장이오?”

“그렇소! 알겠지만 이러한 가라앉은 도시와 연결된 굴은 ‘흙’이 없소! 죄다 퇴적암이거나 화강암 덩어리지. 하지만, 흙이란 게 삶에서 꼭 필요한 게 아니겠소?”

대충 고갤 끄덕이자 그는 주먹을 꽉 쥐며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간다.

“난, 일족의 대지 술사들을 고용해서 바위를 갈아 튼튼한 벽돌을 만들고! 귀쟁이들과 협업해서 생활 쓰레기들과 오물을 그런 돌가루를 섞어 발효·풍화시켜서 인위적으로 흙을 만들었소! 지상에서 흙을 들여오는 것보다 더 싸게! 게다가 품질 또한 최고의 농장에도 공급될 만한 양질이었지!”

“그러신 분이 왜…….”

“다시 말하지만 빌어먹을 유입 오크 새끼들 때문이지 뭐겠소? 망할, 그놈들만 없었어도 그 괴물에게서 돈을 빌리지 않았을 텐데…….”

불안감에 손톱을 잘근잘근 뜯는 드워프. 확실히, ‘채무자의 고통’이 목적인 사채업자라면 함부로 엮이는 게 안 좋을 것 같다. 좀 부담스럽더라도 놈의 <과거>를 읽고 샅샅이 훑어서 지하로 내려갈 방법을 알아낸 뒤 무임승차 하는 방법을 알아봐야겠다. 그러면 일단…….

“그래도, 내려가야 하는 만큼 그 뒤앙밍크에게 한번 접촉해 봐야 할 것 같군요.”

“…….”

“어디로 가야 그를 만날 수 있는지 알려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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