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3화
46화. 처음부터 꼬이는 일
1.
피로에 전 몸으로 호텔로 복귀한 후, 난 방 하나를 빌려 그대로 수면제를 먹고 침대에 엎어졌고…….
“끄으으으윽……!”
자연스럽게 눈을 뜨자마자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쫘악 폈다. 아주 개운한 느낌, 가볍게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며 몸을 이리저리 풀었다. 몸이 유연하다. 그저 느낌뿐만 아니라 자면서 경험치 정산을 받아 레벨이 올랐다.
그래, 이제 레벨 18이다.
꼴랑 레벨 ‘하나’ 올랐지. 수백 마리의 쥐쟁이를 불태우고, 유령 계열 몬스터까지 학살에 가깝게 죽였는데도 좀 간당간당했다. 대충, 돌죽과 비슷하다면 만렙이 27로 알고 있는데 얼마나 학살을 해야 할지 모르겠…….
“……X발!?”
침대 옆에 널브러진 스마트폰, 나 알람을 맞춰놓고 잤지?!
재빠르게 손을 뻗어 시간을 확인하니 목요일 오후 7시, 분명 하루만 자고 일어나려고 알람을 맞춰놨는데 이틀이나 지났다. 알람 목록을 보니 정상적으로 울렸는데 내가 못 일어난 거네. 으윽, 역시 한번 잠들면 못 일어나는 건가?
“하, 제발…….”
자는 동안에 뒤앙밍크의 ‘지하 원정대’가 출발하지 않았기를 기도하며 난 지각한 직장인처럼 움직였다.
2.
한 사람의 <과거>를 읽는다고 해서 그 사람에 대해 ‘모든 걸’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살인적으로 긴 영화를 ‘되감기’로 대략적으로 훑고 그때그때 중요해 보이는 부분에 멈춰서 재생해 결과를 정리하는 것과 비슷하지. 정확히 상대의 생각을 읽는 게 아니라 대충 추론하는 거에 가까워.
그렇기에 내가 얻은 정보는 불완전했다.
어떤 ‘방법’으로 지하에 가려는 것인지는 확인했지만 ‘왜’ 가려는지, ‘언제’ 가는지 같은 거는 몰라. 그래서 최소한의 피로만 없애고 ‘일찍’ 일어나기로 했는데…… 개같이 실패했지.
이종족 지구 바깥, 도시 외곽에 위치한 차량 보관소.
<투명화>의 도움을 받아 조심스럽게 보관소 경계를 뚫고 안쪽으로 잠입한 후, 뒤앙밍크의 과거 기억 속에 있던 장소로 가자…….
“휴.”
커다란 탱크로리 트럭이 그대로 있는 걸 보곤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뒤앙밍크가 구매한 트럭, ‘곧 쓸 수도 있으니 확실히 정비해라.’라고 부하에게 지시했었지. 다행히, 원정대는 아직 출발하지 않은 것 같았다. 곧바로 트럭 밑바닥에 기어들어 가서 드러누웠다. 기름 자국에 냄새도 찝찝하지만 언제 출발할지 모르니 죽치고 앉아…….
“킁킁, 어휴.”
있어야 하는데, 차량에서 풍기는 냄새가 좀 많이 안 좋았다.
구리구리한 냄새라고 해야 하나? 석유 냄새도 아니고…… 그래, 푸세식 화장실 냄새가 나는 것 같아! 밑바닥에 기어들어 가니 살짝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다. 이곳에서 무작정 기다릴 생각을 하니 눈앞이 좀 깜깜하네.
-저벅저벅…….
다행히, 그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몇 시간밖에 안 지났는데 일단의 무리가 접근했다. 뒤앙밍크가 끌고 다녔던 오우거 좀비들처럼 위압적인 흑색의 갑주와 붉은 렌즈의 방독면 투구로 감싼 이들, 팔뚝 쪽에선 역시나 뒤앙밍크의 낙인으로 보이는 기운이 느껴진다. 선두에 있는 놈은 무려 마력 각성자네.
곧바로 <투명화>를 활성화하며 숨을 죽였고…….
“하아, 이거 엄청 답답합니다. 방독면이란 게 이런 걸 줄은…… 멋있어 보였는데 직접 써보니 쓸 게 못 됩니다.”
한 인영이 투덜거리면서 방독면을 벗는다. 체형을 봤을 때부터 짐작했지만 오크, 방독면을 썼을 때와는 달리 아둔해 보이는 맨얼굴을 보니…… 위압감이라곤 전혀 들지 않는다. 진짜 수트빨이 중요하긴 하네. 그에 선두에 있던 마력 각성자가 좀 늙수그레한 음성으로 대꾸한다.
“어쩔 수 없지. 하지만, 그래도 계속 착용하게. 위압감에 웬만한 떨거지는 못 건들 거야.”
“예, 어르신.”
그에 고갤 끄덕이며 방독면을 착용하는 오크, 이어서 대장으로 보이는 늙은 오크는 신중하게 트럭을 살폈다. 가볍게 타이어를 차면서 공기압을 측정하고 운전석 안쪽의 의자를 젖히더니 엔진룸을 보기도 한다.
“좋아, 별 이상 없군. 난 조수석에 앉겠네. 스툴라, 자네가 뒤에 서고 양 측면엔…….”
나머지 4명의 위치를 정해준 뒤에 탑승하는 오크들, 그에 나도 챙겨 입은 로브의 <부양> 기능을 활성화하며 트럭의 단단한 부위에 달라붙었고-.
-부르릉!
트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3.
트럭은 곧바로 도시에서 나가는 터미널 중 하나로 향했다.
새벽 5시인데도 장애물과 차단선이 쫙 깔려있고 오크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있었는데…… 무려 고사포가 박혀있었다. 그 터널 벽면에 사용 흔적(탄흔과 핏자국)이 있고. 이거, 걸렸다간 북쪽 새끼돼지의 ‘고모부’ 꼴이 되는 거 아냐?
침을 삼켰지만…… 우려와는 달리 아주 쉽게 빠져나갈 수 있었다.
조수석에 앉아있는 무리의 대장인 늙은 오크-다른 오크들이 ‘쥬라카’ 라고 했다.-가 검문하는 오크 기사에게 쪽지를 하나 건네주자, 그걸 받은 오크 기사는 얼굴을 찡그리며 옆으로 가래침을 뱉곤 간단히 통과시켰다.
“하아, 뭔 기사와 마법사들이 직접 나와서 터미널을 지키다니…… 상상을 초월하네요.”
“자경단 수준으론 유입 오크를 완전히 막을 수 없으니 말이야. 그만큼, 정부도 신경 쓴다는 거겠지.”
터널에 진입하자마자 운전하고 있는 오크가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중얼거리고, 조수석에 앉은 대장 오크는 쓴웃음과 함께 대꾸하며 사이드미러를 응시했다.
“그래도 ‘고사포’까지 박고 경계하고 있을 줄은 몰랐군. 이런 적은 단절의 도시 건립 초창기를 제외하면 처음인데 말이지.”
“go.sa.po요?”
“터미널에 배치된 그 거대한 총을 말하는 거네. 지상의 인간들이 사용하는 병기지. 보통의 소총보다 수십 배 더 강력해. 굉음과 함께 거대한 불줄기 같은 탄환을 내뱉는데, 이런 트럭도 휩쓸리면 1초 만에 고철 더미가 되지. 기사도 전용 방어구가 없으면 갈려 나가고.”
“와…….”
“지상의 인간들이 운용하는 병기 중에선 그나마 약한 거야. 더 끔찍한 것도 많다더군.”
어깰 으쓱인 대장 오크는 옆의 배낭에서 낡은 공책을 하나 꺼내 펼친다.
빈 송파구 지도, 그다음 장도 빈 송파구의 지도가 있는데…… 몇 개의 동(洞) 부분에 동그랗게 색칠되어 있다. 다음 장에도, 그 사람 다음 장에도…… 이거 보아하니 ‘중층의 지도’ 같은데? 자연스럽게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는 가운데, 대장 오크는 표지를 넘기며 고갤 주억인다.
“일단, 2-1-16에서 출발해서 17, 19, 22로 이동해 2-2-23에 도착. 거기서부터…… 아, 안 되겠군. 여기, 망했다고 했지.”
“저, 어르신. 들어보니 좀 삥 둘러서 가는 것 같은데요?”
운전석의 오크가 의문을 표하자 대장 오크는 어깰 으쓱인다.
“이런 커다란 트럭은 도로의 너비와 경사를 신경 써야 하네. 잘못하면 엔진이 퍼지거든. 소형 트럭과는 달라.”
“아, 그렇군요. 역시, 전문 트럭 기사는 다르네요.”
<메모장>에 그 공책 내용을 복사하면서 나도 고갤 끄덕였다. 확실히, 차량을 움직이는 데 경사도 신경 써야겠지. 그 사이, 터널을 지난 지 몇 분 만에 다음번 마을에 도착했다.
“정지! 정지!”
허술한 방책과 장애물, 전사급 마력 각성자 오크가 몇몇 있지만 대부분 일반 오크로 이루어진 경비 오크들, 무장한 이쪽의 오크들을 보자마자 경비병들이 경계하는 가운데 가장 높은 직책으로 보이는 전사가 다가와 질문한다.
“어디로 가시오.”
“어디로 가긴, 일하러 가지. 오랜만이다. 올라그.”
조수석에 앉은 대장 오크가 방독면을 벗으면서 말하고, 그 늙수그레한 얼굴을 본 오크 전사의 표정이 살짝 안도하듯 풀어진다.
“뭐야, 쥬라카 영감님이었습니까?”
“그래, 인마.”
“트럭 기사 그만두고 사업한다더니 다시 시작하나 보네요?”
지인인 듯, 한층 편하게 말하는 오크 전사. 그에 쥬라카라 불린 오크 영감은 한숨을 푹 내뱉으며 대꾸한다.
“유입된 오크들 때문에 사업도 쫄딱 망하고 이렇게 개인 의뢰 받아서 일하고 있다. 근데, 여기도 엄청 험악하네? 단절의 도시에서 내려오는 통로인데도 말이야. 그냥 내버려둬도 되지 않나?”
“어휴, 말도 마십쇼. 도로 말고 개구멍도 팠는지 이곳으로도 슬금슬금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흠, 심각하구만.”
“아마 내려가는 다른 마을들도 똑같이 좀 빡세게 검문·검색할 겁니다. 유입된 놈들에게 먹힌 중간까지 가면 그런 것도 없을 테지만요.”
뒤쪽에서 대기하는 차량을 무시한 채, 투덜거리며 쥬라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오크 전사. 들어보니 중하층에 있는 이들은 은근슬쩍 올라와서 합류한 유입 오크들에게 집하고 가재도구를 다 뺏겼다는 이야기다. 질서 유지관이라는 경찰도 포기했다고.
“도시도 비슷해. 이종족 지구라고 2개월 전에 생긴 곳이 있는데, 3일 전에 그곳에 테러가 일어났어. 좀 심상치 않…….”
-빠앙!
“아, 내 정신 좀 봐. 그럼 이만 가보십쇼.”
그렇게 몇 분간 한탄을 늘어놓던 오크 전사는 뒤쪽에 밀려있는 트럭의 경적에 정신을 차리곤 장애물을 치우라고 손짓한다. 그에 경비병들이 장애물을 치우고 트럭은 그대로 마을 안쪽으로 진입했다.
마을의 형태는 단절의 도시와 비슷했다.
외곽에 도로가 깔려있고 그 안쪽엔 사람들이 사는 구조, 다만 규모가 동(洞) 수준으로 작고 천장의 높이도 20m가량밖에 안 되네. 그렇게 마을에 들르지도 않고 둥그런 트랙을 따라 회전하고 다시 잠깐의 검문·검색 후 내려간다.
그다음 마을도, 그 다다음 마을도…….
그 과정에서 트럭 밑바닥을 살펴보려는 경비병들도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쥬라카가 아는 척을 하자 대부분 부드럽게 넘어갔다. 억지로 나 혼자서 몰래 잠입하려고 했으면 또 얼마나 많이 싸워야 했을지 상상하기 싫구만.
20~30km의 속도로 트럭은 2시간 동안 느릿하게 순항했다.
그렇게 방문한 마을만 열댓 개, 지하로 내려갈수록 검문·검색하는 오크 경비병들의 분위기는 점점 험악해지고 마을 외곽에는 피난민들로 보이는 천막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에 지도를 살피던 쥬라카는 시계를 힐끗 쳐다보곤 고갤 끄덕였다.
“슬슬 3km군, 마침 7시니까 다음 마을에서 좀 쉬었다 가지. 운전은 교대로 바꾸고.”
“예.”
코너를 돌아서 마을 외곽의 주차장 쪽으로 향하는 트럭. 그 주차장 쪽에는 픽업트럭 몇 대와 대형트럭 한 대가 서 있고 무장한 오크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는데…….
“차 돌려.”
“네?”
그걸 본 쥬라카가 정색하며 운전석의 오크를 제지한다. 운전석 오크가 의아한 듯 바라보자 그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간다.
“저 대형 트럭, 중층에 배송 갔다가 실종된 내 동료의 것이야. 페인트칠을 새로 했지만 내 눈은 못 속이지. 약탈자일 거다.”
“…….”
“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혹시 모르니까 그냥 지나치도록 하지.”
운전석의 오크가 곧바로 핸들을 꺾어 그대로 주차장 입구에서 나오려고 했지만, 픽업트럭 한 대가 돌연 우리 쪽을 향해 급가속하며 다가온다. 그냥 빠져나가려는 것이라고 보기엔 너무 빠른 속도, 부딪칠 것 같기에 우리 트럭은 멈춰 섰고-.
-끼익!
픽업트럭은 그대로 도로 밖으로 빠져나와 우리 앞 도로를 막는다. 그에 대장 오크는 한숨을 내쉰 후, 살기를 흘리며 양손 도끼를 손에 쥔 채 조수석에서 내린다. 말이 없는 흉흉한 모습이었지만…….
“워! 워! 진정하라고! 친구! 그쪽 트럭이 좀 이상해서 그런 거야.”
막아선 트럭의 뒤쪽 화물칸에서 커다란 방패를 등에 멘 오크가 나와서 진정하라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