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8화
“저…… 저게 뭐요?”
“그, 글쎄요?”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나는 물론이고 오크 영감도 넋이 나갔다.
새…… 생각해 보니 <과거>에 이런 장면도 있긴 했었는데, 가볍게 지나가서 이런 콘서트 분위기인 줄 몰랐어. 우리가 넋 놓고 바라보자, 은근슬쩍 보고 싶어 하던 눈치였던 주술사 트롤도 다른 트롤들처럼 헤벌쭉 웃으며 영상을 주시했다.
-그르르러럭! 그럭!
-그르르!
-우우우!
3D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색색의 트롤 4마리와 실사 오크가 몇 명 나와서 트롤어로 뭐라 떠드는데, 영상이라서 그런지 <게임 시스템>의 번역이 작동하지 않는다. 그래도 보아하니 대충 유아용 놀이·교육 방송 같구만. 그렇게 넋 놓고 보고 있는데-.
“잠깐만, 저 새끼……?”
나오는 오크 중 하나를 보며 오크 영감님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뜬다.
“아는 사람이에요?”
“……이름은 모르겠지만 뉴 송파구 방송국에 속한 딴따라요. 전사도 아닌데, 명예와 부를 얻은 녀석이라서 유명해. 젠장, 계집애들은 얼굴만 뻔드르르한 저런 놈이 뭐가 좋다고 난리인지.”
좀 추하게 대꾸하는 영감님. 음, 뉴 송파구에 독자적인 방송국이 있구나. 그렇게 30분가량 이어진 그 정체불명의 방송이 끝나고, 다른 방송(어린 오크가 주인공인 유아용 놀이·교육 프로그램)이 시작되고 나서야 주술사는 정신을 차렸다.
“어, 가자! 늦었다!”
“네. 근데, 조금 전 그 영상은 뭔가요?”
“텔레트롤이다! 선택받은 트롤들이 거대한 불덩이인 우쥴 할아버지의 계시를 받아…….”
뭔가 싶어서 물어봤는데, 관심사에 대해 질문받은 어린애처럼 눈을 반짝이며 신나게 떠드는 트롤 주술사. ……이거, 왠지 잘못 질문한 것 같은데? 그래도 지루하단 티를 낼 순 없기에 대충 맞장구치면서 따랐다. 그렇게 거미줄처럼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통로를 지나-.
“……거기서 친절한 오크들의 도움으로 수정 지팡이를 받고 주술사가 된 거지!”
“오호? 그래서요?”
“그리고, 바위의 시련이…… 아, 다 왔다. 기다려라. 말하고 온다.”
1층 통로 앞까지 도착했다.
아파트의 지하 주차장 경사로를 연상케 했던 이전 층계와는 다르게 1층은 그 입구를 커다란 돌문이 막고 있다. 주술사 트롤은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혼자 문 안쪽으로 들어가고, 난 그 앞에서 <눈>으로 1층의 벽을 한 번 훑었다.
벽 전체에서 흘러나오는 마법적인 아우라.
속을 살펴보니 암반 속에 팔뚝만 한 녹색 수정 결정체들이 빼곡하게 박혀 있었다. <눈>에 포착되는 마력은 거기서 흘러나오고 있었고. 좀 신기해서 자세히 살펴보려는데…… 오크 영감탱이가 심각한 표정으로 내 옆구리를 찌른다.
“……아무리 봐도 여기 뉴 송파구 정부가 지어준 것 같소.”
“당연히 그렇겠죠.”
8층에서부터 1층 앞까지. 내려오면서 많은 걸 봤지. 영상을 쏘아내는 빔프로젝터, 간단한 놀이 시설이 깔린 운동장, 벽 속에 지어진 건물…… 내가 수긍하자 이 영감탱이는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역시, 근처의 오크 마을 습격 배후에는 뉴 송파구 정부…….”
“아니에요.”
엉뚱한 추리를 하는 영감님을 제지하며 난 차분하게 <과거>를 보며 파악한 내용을 내뱉었다.
“여긴 일종의…… 사육장이에요. 트롤 사육장.”
“트롤 사육장?”
“트롤의 혈액은 ‘굉장히 비싼 연금술 재료’ 중 하나예요. 우리가 봤던 영상 있죠? 거기에서 피 뽑고 커다란 돌덩이 동전을 받는 부분이 있는데, 거기에 나오는 헌혈 건물이 5층에 실제로 있더군요.”
“허?”
“대화를 해 보니까 주기적으로 피를 넘겨주는 대가로 오크들에게서 식량과 각종 서비스를 받고 있는데 그게 어쩌다 끊긴 것 같아요. 습격은 먹을 식량이 부족해져서 그런 것 같고.”
내 대답에 팔짱을 낀 채로 생각에 잠기는 영감님, 그렇게 귀찮은 방해꾼을 떼어내고 수정을 감정해 보려는데 안쪽으로 들어갔던 트롤 주술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그에 곧바로 안쪽으로 들어서려고 하는데-.
“잠깐!”
“?”
“우쥴 할아버지 있는 곳. 누구도 무기 들고 가선 안 돼. 저기, 통로 구석에 가방과 무기를 두고 와라.”
주술사가 우리가 멘 짐과 가방을 가리키며 제지한다. 괜히 트럭에 짐을 놓고 왔다가 사라지면 낭패기에 장비들을 바리바리 싸 들고 왔거든. 그에 난 순순히 구석에 등에 메고 있던 가방과 양손 도끼, 대방패를 구석에 내려놓았다.
“뭐 하는 거요?”
“안쪽으로 들어가려면 무기와 짐을 놓고 가라고 하네요. 그쪽도 내려놓으세요.”
“……그렇게 놨다가 누군가 가져가면 어떡하오?! 난 못하오! 어차피 난 들어가 봤자 별 역할도 못 하니 그쪽의 짐을 들고 여기 있겠소!”
내 말에 완강하게 고갤 저으며 한쪽 옆구리에 낀 더플백을 소중하게 껴안는 오크 영감님, 그냥 억지로 끌고 갈까 생각했지만…….
“예. 그럼, 제 짐들 잘 지키고 계세요.”
그만두기로 했다. 과제 탈주범을 여기까지 끌고 온 것만 해도 장한 거지. 더플백 안의 것들이 자기 목숨 줄이나 다름없으니 저렇게 나오는 것도 이해가 되고. 그렇게 영감님은 내버려 두고 나만 트롤 주술사와 함께 안쪽으로 들어섰다.
농구 코트 정도의 작은 잔디정원.
그 중앙에는 사과나무가 한 그루가 심겨 있고, 벽 쪽엔 트롤 하나가 간신히 들어갈 만한 작은 동굴이 하나가 있다. 밖에서 한번 훑어보긴 했지만 이건 그냥 지하실에 가깝네. 주술사의 안내를 받아 동굴 쪽으로 걸어가면서 <눈>으로 그 안을 훑었다.
안대로 두 눈을 가린 늙은 트롤이 앉아 있었다.
이곳의 뚱뚱한 트롤들과는 달리 유튜브에서 봤던 것처럼 유인원처럼 길쭉길쭉한 놈, 주술사의 복장이었지만 통짜 에메랄드로 만들어진 지팡이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매우 초라해 보였다. 그나저나 저 얼굴, 텔레트롤 영상에서 나오는 태양에 박힌 얼굴과 똑같…….
“……?”
다고 생각하던 도중, 공간 전체가 흔들렸다.
<눈>이 없었다면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미약한 흔들림, 그 진원지는 늙은 트롤이 쥐고 있는 에메랄드 지팡이였다. 그 지팡이의 파동이 지면에 파고들고 공간 곳곳에 박힌 에메랄드가 진동하며 독특한 마력의 파동이 뿜어져 나와 이 동공 안에 메아리친다.
……이 파동, 원리는 모르겠다만 단순히 육체적인 영역을 넘어서 영체까지 파고드네.
“우쥴 할아버지. 여기, 손님 왔다!”
“수고했다. 우-둔!”
그 사이, 우린 동굴 앞까지 도착했다. 트롤 주술사의 외침에 힘없는 그르렁거림으로 대꾸하는 늙은 트롤. 하지만, 무력한 겉모습과는 달리 마력을 끌어올려 바닥을 통해 주위의 암석에 퍼트리는 게 보인다. 그 양이 심상치 않기에 나도 심호흡을 하며 몸을 움직일 준비를 했다.
“그럼 밖으로 나가 보거라.”
“어, 나가?”
“그래.”
가보라는 듯이 손짓하는 늙은 트롤에 머리를 긁적이며 천천히 밖으로 나가는 트롤 주술사, 그렇게 석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넌, 누구냐!?”
우쥴이라 불린 늙은 주술사 트롤은 아주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날 추궁한다. 뭔지 모르겠지만 ‘적의’가 있는 게 분명한 목소리, 그에 최대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 위에서 내려온…….”
“거짓말!”
-콰-쾅!
말을 도중에 끊으며 가볍게 에메랄드 지팡이를 지면에 찍는 늙은 트롤, 그와 함께 동굴의 입구 바닥에서 커다란 초록색 에메랄드 덩어리가 폭발하듯 솟구쳐 입구를 막는다. 날 노린 건 아니지만 그 흉흉함에 허겁지겁 뒤로 물러난 사이-.
“크르르륵!”
늙은 트롤의 주위에서 마력이 흔들리며 연이어 룬 문자가 만들어졌다.
우-치의 수렁 (U-chi's slough)
레벨 4 대지/독
시전 소음 : 5
주문 소음 : 5
최대 SP : 200
사거리 : 반경 50m
최소 소모 재화 : 마력 3P, 트롤 혈액 1L
효과 : 트롤 대지술사, 우-치가 만들어낸 주문. 시전자 주위에 있는 ‘트롤의 피가 스며든 땅’을 빠르게 뒤흔들어 늪지처럼 액화시킨다. 마법에 적용된 땅은 질척한 녹색으로 변하며 아교처럼 물체의 움직임을 제약한다.
변화된 점액질은 트롤에겐 끈적할 뿐 별 영향을 끼치지 않지만, 다른 생명체들에겐 미약한 독성과 함께 매우 지독한 악취를 느끼게 한다.
-드드드드드!
공사장 아저씨들이 콘크리트를 부술 때 쓰는 공구로 땅을 팔 때처럼 흙바닥이 소음과 함께 떨린다. 동시에 잔디가 깔린 지면이 질척하게 녹아드는데, 반사적으로 지면을 박차 나무쪽으로 뛰려고 했으나-.
“?!”
발바닥이 ‘푹!’하고 박히는 것도 모자라 엿처럼 들러붙는다. 이어서-.
-콰드드드득!
-쩌적! 저저저적!
우지-챠의 에메랄드 창 (Uzi-cha's Emerald spear)
레벨 8 대지
시전 소음 : 15
주문 소음 : 15
대미지 공식 : 10d(2.3+SP/10)
최대 사거리 : 300m
최대 SP : 200
최소 소모 마력 : 8
설명 : 전설적인 트롤 대지술사, 우지-챠가 만들어낸 대지 마법. 대지의 깊은 곳에서 흐르는 힘의 격류를 받아들여, 치명적인 마력의 커다란 에메랄드 덩어리를 만들어내 폭발하듯이 발사한다. 막강한 힘과 마력적인 정수를 품었기에 영체 또한 찢어버릴 수 있다.
현재 발동하고 있는 주문은 술자의 수준이 부족해 ‘불완전’한 것으로 보인다.
바위가 쪼개지는 굉음과 함께 반구형 천장에서 돌조각이 비산하며 흉악한 에메랄드 덩어리들이 삐쭉 빼쭉 튀어나온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도 봤던 것들, 자연스럽게 떠오른 플레이버 텍스트는 저것들이 ‘불완전한 것’이라고 폄하하지만…….
-콰직!
“끄으으윽!”
허벅지를 스친 팔뚝만 한 에메랄드 결정체 하나에 뼈가 보일 정도로 살이 터져나가면 그런 소린 절대 못 할 거다. 고작 하나, 하지만 남은 건 아직 수백 개는 넘는다.
지금 보니까 이 공간 자체가 그냥 함정이다.
안일했다…… 고 보기엔 나도 억울하다! 이렇게 다짜고짜 선빵을 날리는 게 어디 있냐고! 아무리 봐도 무력으로 뚫고 나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기에 난 허벅지를 붙잡고 이 미친 늙은 트롤에게 호소했다.
“왜…… 왜 그러시는 건가요! 아무런 짓도 안 했는데!”
“아무런 짓도 안 했겠지. ‘아직’은.”
어떻게 시간을 끌기 위해 말을 걸자 늙은 트롤은 ‘쉿! 쉿!’거리는 듯한 쉰 목소리로 이죽거렸다.
“난, 눈이 멀었지. 하지만, 좀 더 본질적인 걸 느낄 수 있다.”
“이 에메랄드들이 뿜어내는 파동 말씀하시는 거죠? 지금도 제 영체까지 닿네요.”
“……눈치가 빠르구나.”
재빨리 대꾸하자 살짝 흠칫하고 고갤 끄덕인 트롤은 금방이라도 에메랄드 탄환을 발사할 것처럼 조정하며 속삭였다.
“네가 처음 들어올 때부터 뭔가 꺼림칙함을 느꼈다. 그래서 ‘자세히’ 느꼈지. 네 영혼이 보이더군. 넌…… 내가 지금껏 봐온 그 무엇과도 달라. 평범한 생명체도, 심연의 괴물도, 악마도 아닌…… 아니, 정정하겠다. 영혼이 아니라, 영혼을 흉내 내는 ‘어떤 것’에 가까워.”
트롤의 대답에 이를 악물었다.
내게 붙은 [꺼림칙한 존재]라는 돌연변이, 지상의 사람들에겐 ‘왠지 재수 없네.’ 정도로 넘어가서 거의 잊고 있었는데 가끔 발작하는 이들이 있었다. 서예린도 ‘너, 고위 악마인 줄 알음.’이라고 말했었지.
“그것 때문에 절 경계하는 건가요. 그건 오해예요! 저는…….”
“마력은 의지력의 감응이다! 개개인의 생각과 의지를 말해주는 일종의 체취지! 난 마력으로 상대방의 성향 또한 잘 읽는다! 너의 마력을 통해 느껴지는 악의는…… 끔찍하다! 생명체의 고통과 절망만을 원하는 악마? 생명체의 재탄생을 원하는 심연의 괴물?”
“아니, 오해…….”
“그런 것들보다 더해. 모든 것을 살인적으로 질투하는 증오 덩어리.”
변명 따윈 듣지 않겠다는 듯이 지 말만 쏟아내는 트롤. 긴장감에 머리가 빠르게 돌아간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면 되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무력으로 위기를 모면하는 건 불가능하다. 어떻게든 저 미친 트롤을 설득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자! 누가 널 보냈냐! 아니, 왜 이곳에 왔냐! 말해라!”
“르피너스에 맹세코! 전, 여기의 트롤이나 당신을 해하려는 의도나 생각이 없습니다! 지금도요! 계속 위협하시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필사적으로 머릴 굴리다가 떠오른 생각, 미궁 출신들은 ‘신의 이름을 함부로 걸지 않는다.’라는 걸 떠올리고 ‘르피너스’의 이름을 꺼내 들었다. 국정원 차장님이 말해 준 타락체 감염 사례를 떠올리면 진짜 함부로 걸지 않아야 하는 것이기도 하고.
“……?!”
다행히, 통했다. 늙은 트롤이 멈칫하고 난 속사포처럼 내 변호를 쏟아냈다.
“전, 르피너스에 의해 영혼이 박살 나고 제멋대로 조립됐습니다! 그리고, 온전한 영혼을 가진 것들에 대해 살인적인 충동을 가진 거 맞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참을 수 있어요. 모두 르피너스의 설계대로!”
내 변호에 미심쩍은 표정으로 생각에 잠기는 트롤, 그사이에 난 늙은 트롤을 향해 <과거시>를 시도했다. 다행히 <눈>의 범위 안쪽이었고 정상적으로 작동한다.
밀려오는 방대한 정보들.
한 트롤의 일생을 일순간에 훑어보는 만큼, 오늘 했던 2번의 <과거시>와는 차원이 다른 부하가 걸렸다. 순식간에 쌓이는 피로감, 중요한 거라고 생각되는 부분만 빠르게 체크한다. 미궁에서 나와 오크 무리와 싸우고, 패배해서…… 오무혁에게 두 눈이 뽑힌다?
“그럼 왜 이곳에 온 거냐?”
귓가에서 울리는 늙은 트롤의 음성에 과거를 훑다가 정신을 차렸다. 코피가 줄줄 흐르고 머리가 쪼개질 것같이 아프지만…… 다행히, 생각을 못 할 정도는 아니다.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내려가려는데, 조금 전에 나갔던 트롤을 만났더니 우쥴 할아버지를 만나고 가라고 그러더군요. 위에 말할 게 있다고.”
“해야 할 일이 있다고? 그럼 조사는 거짓말이겠구나?”
날 추궁하는 늙은 트롤, 혹시 모르니 오크와의 인맥만 언급하는 건 위험하다.
“일종의 조사는 맞습니다. 전, 위에서. 그러니까 뉴 송파구 정부가 아니라 ‘지상’에서 왔습니다. 뉴 송파구 정부와 연줄도 있고요. 한 다리 건너서 전쟁 군주에게 연락할 수도 있죠. 안 그러면 제가 어떻게 이곳에 왔겠습니까?”
투구를 만져봤다. 다행히, 위쪽에서 약탈자들 시신을 넉넉히 먹인 덕분인지 투구는 별다른 저항이 없다. 저 눈먼 트롤이 날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난 뒤집어쓴 로브의 후드를 걷고 투구를 벗으며-.
“전 인간입니다. 영혼은 아니라고 느끼셨을지 모르겠지만요.”
분장도 하지 않은 내 ‘맨얼굴’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