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9화
5.
내 말에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기는 늙은 트롤.
그사이에 난 왼손에 낀 반지에 마력을 집어넣었다. 내 무모한 자신감의 근원인 ‘순간이동의 반지’, 두 번 남아서 아깝지만 이걸 또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디에 떨어질지 몰라도 이곳보다는 낫겠지. 도망치면 이 무례한 트롤 새끼들은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복수를…….
[‘-Tele’, 공간이동이 불가능한 지역입니다.]
“뎃……?”
공간이동을 하려고 마음먹는 순간, 플레이버 텍스트가 떠오른다.
동시에 왜 불가능한 지도 ‘인지’했다. 공동 곳곳에 솟구친 팔뚝만 한 에메랄드 수정들, 저것들이 계속 미미하게 공명하고 있었는데 그게 공간의 일그러짐을 막고 있다. 믿고 있던 최후의 보루가 박살 난 상황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한 가운데-.
“그래, 트롤을 해할 생각이 없다고?”
생각을 끝낸 늙은 트롤이 날 바라본다.
어, 어떡하지?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이미 생각해 놓은 것들이지 있지만, 진짜 잘못 말 꺼내면 뒤지는 상황인데…… 곧바로 대답을 못 하자 얼굴을 찡그려지는 늙은 트롤, 그에 난 가까스로 입을 뗐다.
“네! 르피너스에 맹세코 해할 생각은 없습니다. 물론, 계속 목숨이 위협하면 달라지겠지만요.”
“흠, 내가 왜 널 살려둬야 할까?”
해할 생각이 없다고 해도 삐딱하게 나오는 늙은이, 당혹스러웠지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내가 읽은 <과거>의 장면들을 보면서 저 미친 늙은이의 성향을 대충 파악했다.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도 이미 생각해뒀고. 그래, 그것대로만 가면 된다!
크게 숨을 들이쉰 후-.
“그쪽은 ‘왜’ 절 죽이지 못해서 안달이실까요?”
감고 있던 두 육안(肉眼)을 뜨고 눈동자를 드러내며 되물었다.
당당하고 여유로운 음성, 그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에메랄드 결정체들이 ‘까드드득!’ 소리를 내며 쏘아질 것처럼 움직이지만 그리 동요하지 않았다. 예상외의 상황에 당황하긴 했지만 애초에 난 잠자는 걸 제외하면 ‘공포’를 느끼지 않으니까. 늙은 트롤도 그걸 눈치챈 듯, 이내 작게 혀를 차곤 말을 이어 나간다.
“넌, 심상찮은 존재니까.”
“심상찮은 존재라고요?”
“그래, 난 이미 네 다리를 바스러트리며 원한을 사버렸지. 나중에 원한을 품고 우리에게 보복하면 피해가 클 거야. 그러니 죽이는 게 이득이지.”
……확실히, 다짜고짜 허벅지를 박살 내놓은 사람에게 ‘원한을 잊겠다.’라고 하는 건 가식이긴 한데, ‘이미 건드렸으니 확실하게 보복하지 못하게 죽이겠다.’라는 것도 정상은 아니지 않나? 당당하게 하는 그 미친 소리에 한숨을 내쉬며 난 고갤 끄덕였다.
“물론, 제 몸에 상처가 난 게 조금 ‘유감’이긴 합니다만 회복 수단을 사용하면 금방 회복할 수준입니다. ‘약간의 보상’을 받으면 이 정도 원한은 금방 잊죠. 그리고 전, 이미 신의 이름으로 맹세도 했는걸요?”
“확실히, 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말은 무겁지. 하지만, ‘절대적’이지는 않잖나? 자비로운 신께서는 우리의 험담을 일일이 트집 잡지 않으시니……”
여전히 못 믿겠다는 반응의 트롤 새끼를 보며 살짝 고민했다. 과연, 내가 추론한 이 ‘대응’이 맞는 것인지. <과거시>를 하느라 머리가 혹사해서 엉뚱한 결론을 내린 것은 아닌지. 반지를 믿고 너무 안일하게 세운 계획이 아닌지……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하, 진짜. 이런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정말, 갑갑하시네요.”
-콰직! 쾅!
말하기가 무섭게 에메랄드 결정체 하나가 폭발한다.
내 옆을 지나쳐서 반대편 벽에 박히는 에메랄드 창, 암석이 터지는 굉음과 함께 공동이 진동하며 진짜 포탄이 떨어진 것처럼 맞은 부위가 터져나갔다. 수류탄 파편처럼 튀어 오르는 돌조각이 따가웠지만…… 이번 포탄은 스치지도 않았다.
피식 웃으며 난 무력 시위를 하는 늙은 트롤을 향해 어깰 으쓱였다.
“협박하시는 거라면 잘못 짚으셨습니다. 이미, 신의 장난에 의해 영혼이 박살 난 경험을 가진 사람이라 육체의 결손이나 죽음의 공포에는 좀 무덤덤하거든요.”
죽는 것? 두렵긴 하다. 음…… 굉장히 공들여 키운 캐릭터가 박살 나기 일보 직전인 절망감 정도? 하지만, 여전히 자는 것보단 덜해. 내 대꾸에 인상을 쓰는 늙은 트롤을 난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저에 대해 꽤나 높게 평가해주셨지만 따지고 보면 전 그저 ‘하수인’일 뿐입니다. 제 뒤에는 지상의 인간들과 오크들이 있죠. 절 죽이시면 꽤나 고달파지실 겁니다.”
“그럼, 더더욱 널 죽여야겠군.”
흉흉한 기세를 풍기며 진짜 포탄을 발사하려는 트롤, 나도 모르게 ‘그만!’이라고 외칠 뻔했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으며 ‘담담함’을 가장한 채 웃으며 대꾸했다.
“죄송하지만 이미 어디를 지나쳐서 움직일지 말해뒀거든요. 아마, 일주일 뒤엔 어디에서 사라졌는지 추측할 거예요. 죽이셔도 소용없어요.”
“…….”
“그리고 무엇보다, 다짜고짜 다리 박살 내놓고 ‘원한을 가질 것 같으니 그냥 죽어라?’ 거리니까 트롤이 이 꼴인 겁니다. 최소한의 대화도 안 하려고 해요. 저기 오크는 인간과 교섭까지 하면서 번영하는데 말이에요. 무르굴 그 양반은 달랐는데 말이죠.”
“무르굴…….”
역시나, 잠깐이지만 늙은 트롤의 얼굴에 두려움이 스친다.
이 늙은 트롤은 함정에 빠진 날 상대론 여포처럼 날뛰고 있지만…… <과거>를 훑어본바, 무르굴을 트라우마 수준으로 두려워하는 동시에 열등감을 가졌다. 이 공간을 지을 때도 ‘오크들이 와도 여기라면 괜찮다.’, ‘무르굴이 와도 죽일 수 있다.’라고 중얼거렸지.
‘보복할 수 있으니 일단 죽인다.’라는 미친놈에게 자비를 구걸하는 것은 답이 아니다.
놈이 두려워하는 걸로 협박하는 동시에 살살 심기를 긁으며 구슬리는 것이 그나마 가능성이 있지. 그렇게 대놓고 트라우마를 찌르는 내 말에 늙은 트롤은 죽어가는 개처럼 헐떡이며 누런 이를 드러낸 채 으르렁거린다.
“여…… 역시, 넌 그놈이 보낸 거구나!”
“어떻게 보면 그렇다고도 볼 수 있긴…….”
“그래, 역시 무르굴이었어! 이곳을 침략하는 거야! 첨병을 보낸 거지. 그때처럼 우리를…….”
덜덜 떨면서도 횡설수설하는 늙은 트롤, 예상을 한참 뛰어넘는 과격한 반응에 침을 꿀꺽 삼켰다. 내 머리에 총 겨눈 놈이 공황에 빠져 지랄하는 모습이 심장이 벌렁벌렁하네. 근데, 이 늙은이. 중얼거리는 걸 들어보니 꼭 오무혁이 살아있는 것처럼 말하네.
……아니, 잠깐만?
<과거>의 장면에서 이 늙은 트롤은 이 ‘트롤의 낙원’이라고 불릴만한 곳에서 단 한 번도 나가지 않았다. 가끔 방문하는 오크 마법사와 이야기하는 것을 제외하면 대화 또한 없었고. ……그럼 설마?
“저기요, 어르신. 뭘 모르시는 것 같은데…….”
“모른다고? 모르는 건 너희다! 내가 어떤 준비를 해왔는지 모를 거야! 무르굴? 올 테면 와봐라! 오는 순간, 너희는 다 죽는다! 자아……!”
금방이라도 발작한 것 같은 그 모습에 고민했지만-.
“무르굴, 그 양반 이미 죽었어요.”
난 주사위를 던졌다.
6.
“……뭐?”
“무르굴, 뉴 송파구의 시장이던 ‘오크 전쟁 군주’가 이미 죽었다고요. 거의 6개월 전에.”
잠깐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다가 경악한 표정으로 서서히 입이 벌어지는 늙은 트롤. 아마, 눈이 있었다면 두 눈을 부릅떴을 거다. 혹시나 해서 찔러본 건데, 진짜 오무혁이 죽은 줄도 모르고 있었다.
“일단, 대화 좀 합시다. 이 엿 같은 것도 좀 풀어주시고요.”
그 궁금증을 무기로 난 벗어날 수 있었다. 날 겨눈 에메랄드 덩어리는 여전했지만 발목까지 빠져든 녹색 아교 비슷한 마법에선 풀려났다. 그 구릿한 냄새가 짜증 난다고 하니까 마법으로 지면을 가볍게 뒤집어서 밑의 흙으로 깔아주더라.
바닥에 앉아 상처를 지혈하고 약탈자들로 만든 ‘식사 대용 물질’을 먹으며 늙은 트롤에게 바깥세상에서 벌어졌던 썰을 풀었다.
“……유혈의 화신!? 진짜 신이 내린 화신이었나? 인간들이 착각한 게 아니라?”
“네, 신이 간섭해서 만들어낸 분노의 거인. 거의 ‘룬 수호자’에 비견되는 존재였죠. 인간의 막강한 무기로 한 번 박살 냈는데도 시간을 되돌려 부활했어요. 참고로 이 평가는 룬 수호자를 봤던 이들과 미궁 출신들이 공통적으로 내린 겁니다.”
“허, 허허허. 룬 수호자라니…….”
믿기 힘들다는 헛웃음을 흘리는 늙은 트롤, 그에 난 은근슬쩍 생각해뒀던 말을 꺼냈다.
“뭐, 이전부터 무르굴 씨는 비범한 양반이었잖아요? 세계 최초로 인간과 교섭해서 ‘뉴 송파구’ 같은 걸 세울 생각도 하고. 다른 오크 전쟁 군주들에 비해서도 굉장히 뛰어났던 거죠.”
“암, 비범했지. 그럼. 내가 미궁에서 오크 전쟁 군주들을 몇 번 봤지만, 그만큼 뛰어난 이는 없었어!”
고갤 끄덕거리며 오무혁을 추켜세우는 늙은 트롤의 모습에 난 씨익 웃었다. 이 트롤은 패배자다. 하지만, 패배자라고 해서 전부 똑같은 게 아니지. ‘누구에게 패배했느냐.’도 은근히 중요하거든.
일종의 ‘졌잘싸’라고 해야 하나?
축구 같은 경우도 브라질에 졌다고 하면 ‘어휴, 어쩔 수 없네.’ 하잖아. 자기가 못나서가 패배한 게 아니라 상대가 너무 뛰어나서 패배했다고 ‘정신 승리’하기에 좋고. 그렇게 살기 위해 미친 트롤 늙은이의 콤플렉스를 살며시 어루만지며 열심히 혓바닥을 놀렸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무르굴 씨가 장렬하게 전사하고…… 그 여파가 이곳 뉴 송파구에 덮친 거죠. 저도 그것 때문에 온 거고.”
“여파?”
“네. 큼큼! 말을 많이 해서 그런지 목이 마르는데, 물 좀 마셔도 될까요?”
“저기에 있으니 마시게나.”
벽 한쪽에 있는 졸졸 물이 흘러내리는 미니 폭포 방향을 가리키며 말하는 늙은 트롤, 그에 난 잘 안 움직이는 다리로 쩔뚝거리며 일어나 밑에 고인 깨끗한 연못물을 한 모금 마셨다. 사실, 목이 마르지는 않았지만 경계심 테스트 겸해서 물어본 거야. 다행히 반응이 괜찮다.
그래도 아직 ‘-Tele’ 상태니 조심해야지.
“휴우, 궁금한 거 있으시면 더 물어보세요.”
“음, 무르굴의 죽음으로 인한 여파가 어떤지 묻고 싶군.”
“……음, 인간 쪽에서 분석한 거라서 좀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리고, 자세히 말하면 좀 길어질 텐데 괜찮으신가요?”
“괜찮아.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이거든.”
그에 난 클라이언트에게 아부하던 30대 직장인의 노하우를 총동원해 나름 흥미진진하게 썰을 풀었다.
오무혁이 지상의 인간들과 맺은 ‘지상 진출 약속’, 성자가 강림한 땅을 밟기 위해 미궁을 통해 진입하는 수많은 ‘유입 오크들’, 유입 오크들로 인한 ‘이종족들과의 분쟁’, 그리고 남아 있는 ‘두 전쟁 군주 간의 갈등’…… 대화가 길어질수록 늙은 트롤의 경계심은 점점 더 무뎌져 간다.
“요즘, 우-수가 교역이 끊겼다고 하던데 그놈들 때문이겠군…….”
“아마, 그렇겠죠? 아무튼, 이게 현재 뉴 송파구의 정세입니다. 개판이죠.”
그렇게 거의 2시간가량 이어진 이야기를 듣고 팔짱을 낀 채 고갤 숙이며 생각에 잠기는 트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갤 들어 날 바라본다.
“그쪽은 해야 할 일이 뭐길래 이런 위험한 시기에 왔나? 좀 궁금하구만.”
“말했다시피 일종의 조사에요. 아래가 이 꼴이니까 인간들도 시선이 갈 수밖에 없죠. ‘오크들과 이종족들이 말하는 게 진짜 사실인가?’, ‘얼마나 심각한가?’ 확인하는 작업입니다. 뭐, 이런 곳에 이렇게 발목을 붙잡힐 줄은 몰랐지만.”
“……미안하군. 내가 착각했어.”
작게 불만을 표하자 늙은 트롤은 쓰게 웃으며 손을 까닥인다. 그와 함께 곳곳에 튀어나왔던 에메랄드 결정체들이 ‘스스슥.’하며 벽속으로 다시 들어가고, 그 공명 또한 멈추면서 ‘-Tele’ 상태도 사라진다.
“하, 하하. 내가 이곳에 처박혀 있는 동안 이런 일들이 벌어졌을 줄이야. 무르굴, 그가 죽었다니…….”
내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 사이, 시원섭섭하다는 듯이 혼자 웃던 트롤은 다시 날 바라보며 은근슬쩍 질문한다.
“인간들은 두 전쟁 군주들 사이에서 어느 쪽을 응원하는가?”
“당연히, 현 뉴 송파구 시장 쪽이죠. 하지만, 무력적으로 관여하는 건 조심스러워요. 성자가 강림했던 곳인 만큼 뭐가 벌어질지 모른다는 거죠.”
“그렇긴 하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혹시 인간들과 교역할 수 있겠나? 피 같은 걸로 말이야. 우리도 오크처럼 인간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은데.”
이곳에 박혀서 몇 년 동안 한 번도 안 나간 주제에 이젠 교역 같은 걸 해보자고 말씀하시네.
“……말씀드렸다시피 전 말단직원이에요. 그것에 대해 정확히 말씀드릴 수가 없죠. 근데, 힘들 거예요. 애초에 지하 송파구는 오크들의 영역이라서.”
“흠, 그럼 됐다.”
생각보다 쿨하게 납득한 미친 늙은이는 날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여신다.
“그럼, 오크 쪽에 내 전언을 전해줘라. 근래의 오크 마을을 향한 침략은 미안하다고. 식량이 끊겨서 어쩔 수 없이 식량을 도중에 빼돌린 놈들을 처리한 거라고. 다시 식량이 공급된다면 거래는 계속할 테니 이전처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좋겠다고.”
“넵.”
날 보내줄 것을 전제로 한 말, 그에 한시름 놓았다. 좀 안심해도 되겠네. 그럼…….
“근데, 다짜고짜 마법을 날리시다니 너무하셨어요! 어휴, 아직도 다리가 이 꼴이네요. 전 트롤이 아니라구요!”
“음, 미안하군.”
내 왼쪽 허벅지, 투구에서 만들어진 ‘식사 대용 물질’을 먹어서 어느 정도 아물었지만 진짜 과장이 아니라 아직도 500mL 생수병이 들어갈 정도로 움푹 파였어. <과거시>도 빡세게 써서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할 정도고. 그런 내 투정에 미안하다는 표정을 하는 늙은 트롤에게-.
“그런 의미에서…… ‘화해의 선물’ 같은 거 없나요?”
난 ‘최소한의 보상’을 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