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230화 (230/350)

제230화

막간. 트롤링

1.

늙은 트롤에게 원했던 화해 선물은 ‘영혼에 관한 지식’이었다.

먼저 밝히지 않았음에도 내가 ‘불완전한 영혼’을 가졌다는 걸 파악한 첫 인물, 영혼에 관해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뭘 원하냐는 듯이 물어보는 늙은이에게 난 내가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 말하며 선물로 영혼에 관한 지식을 나눴으면 한다고 말했고…….

안타깝게도 수확은 없었다.

수정을 이용한 ‘공명’을 통해 세상을 느끼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두루뭉술하게 영혼까지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늙은 트롤의 설명. 내가 불완전한 걸 파악한 이유는 그렇게 너무 ‘이질적이라서’ 알아차렸다고. 거짓말을 하는 건가 싶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결국, 내가 원하던 것 대신에 다른 걸 받게 되었다.

진동의 에메랄드 (Emerald of tremor)

주먹만 한 크기의 에메랄드, 커다랗지만 색이 혼탁하고 내포물도 많아서 보석으로서의 가치는 떨어지지만 특별한 공능을 지녔다. 마력을 주입할 시, 독특한 빛이 뿜어져 나오며 이 광채는 주위의 암석들을 공진(共振)시켜 스스로 자갈로 쪼개지게 만든다.

·사용 시, 주위의 돌벽을 파괴합니다.

“하아.”

손에 쥔 주먹만 한 에메랄드 수정을 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화해의 선물로 받은 아이템, 마력을 불어넣으면 초록빛 광채가 흘러나오는데 그 광채에 노출된 암석들은 덜덜 떨리면서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 일종의 영구적인 ‘굴착 마법봉’이지. 보상으로 나쁘지 않지만…….

그래도 심히 기분이 엿 같다.

올렸다 내리기라고 해야 하나? 영혼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도 있다는 기대를 하고 있다가 못 얻으니 짜증 난다. 거기에 또 ‘수면’을 취해야 한다는 사실이 겹치니 진짜 부글부글 속에서 끓어올라. 이렇게 짜증 나는데-.

“망할. 망할. 망할. 망할.”

“……좀 딴 데 가서 그러시면 안 돼요?”

내 방까지 와서 X랄하는 오크 영감까지 있었다. 내 핀잔에 석굴 안을 빙빙 돌던 영감이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소리친다.

“아니, 진짜 잘 거요? 이 트롤 소굴에서?”

“괜찮다니까요? 정 뭣하면 토굴에서 안 나가시면 되잖아요. 비상식량도 드렸고.”

<과거시>를 남발한 덕분에 방전된 머리통. 적당히 트롤 냄새가 덜 나는 2층 구석의 토굴들을 빌려서 자기로 했는데, 그거 가지고 이 엄살쟁이 오크는 내 토굴까지 와서 항의하고 있었다.

“그냥 올라가서 자면 되잖소!”

“귀찮게 왜요?”

“위험하니까! 트롤이오! 트롤!”

“거, 종족 차별이 심하시네. 순박한 친구들이라니까요?”

그런 내 친절한 답변에도 옆에서 왱알왱알거리기에 <독침>을 만들어내면서 ‘독침 맛 좀 보고 싶어요?’라고 정중하게 물어보니 그제야 ‘X발…….’거리면서 꺼지는 영감님, 진짜 조별과제 하기 너무 힘들다.

“하아, 나야말로 진짜 X발인데 말이죠…… 투구 때문에 수면제도 못 먹고 자야 한다니.”

손에 쥔 에메랄드를 내려놓은 후, 난 바닥에 드러누운 채 억지로 잠을 청했다.

2.

뉴 송파구 트롤들의 우상이자 ‘위대한 영도자’인 우쥴 할아버지.

그런 우쥴 할아버지가 있는 거주지의 1층은 함부로 방문할 수 없는 곳이었다. 오직 주술사만이 ‘중요한 일’이라고 판단할 때만 조심스럽게 방문할 수 있는 거처지만-.

“우-슈, 그 비밀통로를 되도록 쓰면 안 된다고 했지 않느냐!”

“죄송합니다, 스승님.”

첫 번째 제자인 ‘우슈’에게는 예외였다.

비밀통로를 통해 나타난 우슈, 스승의 지적에 죄송하단 듯이 고갤 한 번 까닥인 그는 손에 쥔 물건들을 들어 올렸다.

“그래도, 이런 시기에 이런 걸 정문으로 들고 왔다간 좀 눈치가 보여서…….”

“킁, 킁. 돼지고기 냄새에다가…… 술이구나!?”

독한 공업용 알콜 냄새에 우쥴은 입가에 흐르는 침을 닦았다. 미궁에서는 맛볼 수 없는 진미, 지난 십수 년 동안 꼬박꼬박 마시고 살았는데, 근래에 오크와의 교역이 끊기면서 강제로 참아야 했다.

반색하는 스승의 앞에 앉으며 우슈는 가져온 20L짜리 술통을 넘겼다.

“오크 마을 놈들의 저장고에 있더군요. 그리고, 돼지도 함께 구했습니다. 같이 드시죠.”

“그래.”

곧바로 마개를 열고 그 안에 담긴 공업용 주정을 벌컥벌컥 들이키는 우쥴, 그런 스승의 모습을 보며 우슈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우둔이 데려온 이방인들과 대화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쬐그만 해골 대가리 놈이 우리말을 해서 좀 놀랐는데…… 어땠습니까?”

“아, 그놈? 위에서 내려온 인간이더구나.”

“인간…… 말입니까?”

고갤 갸웃하는 제자의 모습에 우쥴은 쓰게 웃으며 뽑아낸 돼지 앞다리를 씹었다.

“대충 오크와 비슷한 종족이라고 보면 된단다.”

그가 이곳에 정착한 후에 태어난 아이,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서만 보냈으니 인간에 대해 모르는 게 당연했다. 대충 얼버무리면서 우쥴은 술을 한 모금 마시곤 말을 이어 나갔다.

“오크들과 연락할 수 있다고 하기에 적당히 이번 일에 대해선 미안하다고 전언을 보내달라고 했다.”

“흐음,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원정은 어땠느냐? 술을 되찾은 걸 보면 이번엔 성과가 좀 있었을 것 같은데.”

그 질문에 우슈는 한숨을 내뱉었다.

“있긴 한데, 턱없이 부족해요. 이번에도 죽은 오크들을 ‘식량’으로 써야겠습니다.”

“……어쩔 수 없지.”

제자의 대답에 우쥴은 입맛을 다셨다. 그리곤, 당부하듯이 손가락을 까닥였다.

“오크의 고기라는 것을 눈치채면 그간 노력이 물거품이 될 수 있으니 잘 갈아야 한다!”

수틀리면 동족도 먹어치우는 흉포한 포식자인 트롤, 하지만 이곳의 트롤들은 학습·교육을 통해 그 흉포함을 어느 정도 순화시켰다. 무려, 오크를 봐도 ‘먹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먹는 게 오크 고기라는 걸 알아챈다면 그동안 교육한 게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다.

우쥴은 당연히 ‘알겠습니다.’라고 말할 거라 생각했지만-.

“스승님, 언제까지 우리는 참아야 합니까?”

정작 제자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뭘 말이냐?”

“언제까지 오크들에게 끌려가야 하는지 물어본 겁니다.”

진지한 목소리로 묻는 제자의 모습에 우쥴은 마시던 술을 내려놓고 감각을 깨웠다. 동시에 굴속에 박힌 에메랄드가 공명하면서 그의 머릿속에 제자의 모습을 그려낸다. 머릿속에 떠오른 우슈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있었다.

“오크 놈들이 약속을 어겼습니다. 피를 주면 그 대가를 준다고 한 놈들이요.”

“그건 사정이…….”

“뭐라 말 한마디도 해주지도 않았잖습니까!”

언성을 높이며 하늘 같은 스승의 말을 끊는 우슈, 그 무례한 모습에 우쥴은 잠시 멈칫했지만 한숨을 내뱉었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냐?”

“오크에게서 우리의 몫을 쟁취해야 합니다.”

연이은 과격한 주장에 우쥴이 할 말을 잃은 동안, 우슈는 손을 꽈악 움켜쥐며 말을 이어 나간다.

“이곳은 잘 꾸며진 축사입니다! 우리의 피를 빠는 오크들이 만들어낸 축사! 그 안에서 우린 피 빨리는 가축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멍청한 동족들은 오크들이 만든 선전물을 보며 ‘오크는 친구!’ 거리고 있고요!”

“…….”

“이렇게 살기엔 비참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더 강한데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합니까? 우린 강합니다! 스승님, 저 웃기지도 않는 오크 놈들을 다 박살 내줄 수 있습니다!”

자신만만한 젊은 트롤의 말에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하던 늙은 트롤은 이내 쓰게 웃었다.

“가축, 축사…… 내가 가르쳐주지 않은 ‘개념’과 ‘단어’도 잘 말하는구나. 오크 단어인데, 방문한 오크 놈이 말해 주더냐?”

“…….”

“아니, 아니지. 오크가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지. 쥐쟁이들이 속삭이더냐?”

여전히 말이 없는 제자의 모습, 거기서 느껴지는 긍정에 우쥴은 속입술을 질겅댔다. 굴을 파던 쥐쟁이들과의 접촉은 예전에 알았다. 경험 쌓기를 겸해서 제자들에게 맡겼는데, 그 교활한 쥐쟁이들이 이 순진한 애를 구슬린 것 같았다.

“설마, 말이 통하는 쥐쟁이가 있을 줄이야…… 우리말을 알 리가 없으니 아마 오크 말을 할 줄 아는 놈이겠지.”

“…….”

“그놈들의 말을 모두 믿지 마라. 쥐쟁이는 믿을 게 못 돼.”

“압니다, 그 족속들이 믿기 힘들다는걸. 하지만, 도움이 될 때도 있습니다.”

쥐쟁이의 간섭을 시인하면서도 주장은 꺾지 않는 제자의 모습에 스승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우-슈.”

“네, 스승님.”

“넌, 대단히 뛰어나다. 젊을 때의 나보다 더. 하지만, 아직 밖에 대해선 잘 몰라.”

술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후, 늙은 트롤은 씁쓸한 얼굴로 과거를 떠올렸다.

그가 살아있는 건, 그나마 ‘주제’를 파악해서였다. 그보다 영리한 녀석, 강한 녀석, 야심 찬 녀석은 다 무르굴이 쳐 죽였다. 전쟁 군주의 호령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오크들…… 목덜미를 쓸어내려 식은땀을 닦으며 우쥴은 입을 열었다.

“오크 마을 몇 개 턴 것 가지고 의기양양해지지 마라. 그건, 마력조차 못 다루는 하층민 오크들이야. 진짜들은 비교할 수도 없이 강하다.”

“전사들도 많이 박살 냈습니다. 평범한 트롤이 너덧 명을…….”

“다르단다. 정말 달라. 오크에 비하면 우린 아직 약하단다.”

고갤 젓던 우쥴이 말을 이어가려고 했지만, 우슈가 먼저 선수를 쳤다.

“그래서 생각해 둔 게 있습니다!”

“……생각해 둔 거?”

“스승님, 신을 아십니까? 아니, 당연히 아시겠지요! 안 그래도 강력한 우리가 신을 섬기고 그 권능을 받으면 확실하게 오크를 압도할 수 있습니다! 장담해요!”

그 폭탄선언에 우쥴은 들고 있던 술통을 내팽개치고 제자의 어깨를 붙잡았다.

“시…… 신?! 설마 입교하였느냐!”

“예.”

“그, 쥐쟁이 새끼들이 네게…… 아니, 도대체 어떤 분을 믿느냐?”

“나리카님입니다. 스승님도 믿어보시면 경악하실 겁니다. 머릿속에 있던 희뿌옇던 안개가 사라진 것 같은 느낌! 주술사가 아닌 ‘우둔한 동족’들이라도 나리카님을 섬긴다면 ‘텔레트롤’ 같은 건 필요 없을 겁니다!”

‘나리카’, 우쥴도 아주 잘 아는 신이었다. 한때, 그와 주술사 트롤들이 믿던 신이기도 했으니까.

“그나마 다행이구나! 네 반응을 보건대, 끊기도 쉽겠어! 당장, 그분의 선물을 거부하려무나!”

“스…… 스승님? 왜 그러십니까! 모르시나 본데, 그 축복은 엄청납니다!”

“그분의 축복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리카, 마법과 신비로운 지식의 신.

나리카는 세례받는 신도에게 ‘한 조각의 신의 지식’을 선물한다. 머릿속에 박힌 그 지식에 관해 탐구할수록 신도는 세상을 움직이게 하는 인과율에 대해 깊이 이해하게 되며 그 과정에서 ‘뛰어난 지능’과 ‘마력의 흐름을 꿰뚫는 감각’, ‘마법 주문’들을 자연스레 깨우친다.

하지만, 그 선물은 애초부터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필멸자는 이해할 수 없는 ‘역설적인 신의 지혜’, 신도들은 머릿속에 박힌 그걸 이해해보려는 욕망에 점점 잠식된다. 지식을 얻기 위해 점점 더 무자비하고 교활해지며, 심성은 기괴하게 뒤틀린다. 무엇보다, 지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스스로는 물론이고 다른 이들까지 파멸시킨다.

제자의 양어깨를 꽉 붙잡으며 우쥴은 절박하게 외쳤다.

“나도 한때 그분을 섬겼다! 그분의 축복 또한 받았었지! 하지만, 그분의 크나큰 선물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크단다! 파멸을 불러올 뿐이야!”

“…….”

“날 믿으려무나! 그분의 선물이 없더라도 차근차근 배워나가면 된다!”

“…….”

“그분의 진노가 무서우냐? 괜찮단다! 그분은 자비롭지! 배교하더라도 자기가 내렸던 ‘신의 지혜’만 거둬갈 뿐, 아무런 징벌을 내리지 않아! 나도 처음엔 머릿속에 빠져나간 그 빈자리에서 느껴지는 공허함에 절망했지만…….”

-콰직!

돌연 가슴팍에서 올라오는 소름 끼치는 고통, 전신이 불타오르는 감각에 우쥴은 비틀거렸다. 그런 그의 가슴팍에는 붉은색의 말뚝이 박혀있었다. 스파크가 튀기는 듯한 눈을 번들거리며 우슈는 허릴 숙여 우쥴의 귓가에 속삭였다.

“정말, 실망입니다. 스승님.”

“너…… 너어…….”

“당신을 믿으라고요? 오크들의 가축으로 동족을 팔아넘긴 배신자의 말을?”

스승이 저항하지 못하도록 이어서 또 다른 말뚝을 꺼내 몸통에 박아 넣으며 제자는 계속 속삭였다.

“저도 이젠 압니다. 스승님이 이곳에서 추방했던 동족들이 사실은 오크에게 저항하려고 했던 이들이란 걸. 이제 이곳에는 순한 돼지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

“이렇게 배신당했는데도, 스승님은 무작정 오크에게 저항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군요. 오크와의 격차를 줄여줄 신의 은총마저도 거부하라고 말하고. 그래도 스승이기에 한번 믿어보고 싶었는데…….”

“…….”

“전 빼앗기는 가축이 되기보단, 빼앗는 자가 될 겁니다. 동족을 위해서.”

늙은 트롤의 심장이 완전히 멎은 후, 젊은 트롤은 시신을 밀쳐내곤 피식 웃었다. 이 ‘위대한 지식’을 포기하라고? 웃기지도 않는다. 아마, 자신의 수준을 금방 따라잡을까 걱정해서였겠지. 지금 생각하니 참 비겁한 놈이다.

이로써 동족의 배신자는 죽었다.

하지만, 죽였다고 끝은 아니다. 동족을 팔아먹는 비열한 놈이었지만 그 인기와 인망은 진짜니까. 다짜고짜 죽으면 아무리 아둔한 트롤이라고 해도 의심하기 마련, 그걸 알기에 지금까지 참아왔지만…….

지금은 죄를 뒤집어씌울 최적의 희생양이 근처에 있었다.

“후우.”

주위를 정리하고 몸에 묻은 피를 닦은 후, 젊은 트롤은 들어왔던 비밀통로로 조용히 다시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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